달마이야기·이규행

26. 낙양 영녕사(洛陽 永寧寺)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8:32

 

 

낙양 영녕사(洛陽 永寧寺)

몸과 마음이 자기 것이 아닌 듯 싶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세상을 구하는 일
회피할 수는 없다.



달마는 갈대 위에 몸을 싣고 바람 따라 물결 따라 양자강의 북쪽 기슭까지 떠내려왔다. 멀리서 들리던 함성도 이제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달마는 모래톱에 가볍게 내려섰다. 모래 위를 맨발로 한 걸음씩 천천히 걸었다. 모래의 감촉이 더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남쪽 기슭에서 맞았던 위기일발의 상황과는 정반대의 고요함이 그의 주변을 감쌌다. 지금 달마의 귀에는 오직 모래 위에 밀려와 부서지는 물결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리고 물결에 반사된 햇빛은 그의 눈에 기쁨을 안겨 주었다.

달마는 고개를 들어 건너온 물길을 새삼스럽게 되돌아보았다. 자취를 감추었던 배들이 다시 흰 돛을 올리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잠시 세심한 눈길로 배들의 동태를 살폈다. 혹시 무제가 배를 띄워 잡으러 오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배들이 이쪽으로 건너오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달마는 잠시 동안이지만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아랫배를 움츠리면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리고 한바탕 스스로를 자조(自嘲)하며 껄껄댔다.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다.

휘황찬란한 등불
달마는 모래톱을 지나 강가 언덕에 올랐다. 멀리 낙양으로 가는 길이 뻗어 있을 뿐 인가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달마는 맨발인 상태로 큰길에 접어들었다. 걸어도, 걸어도 사람 하나 마주치지 않았다. 주막도 절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수십 일이나 걸어야 했다. 뭍에서 이런 고행을 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달마의 몰골은 피골(皮骨)이 상접할 정도로 처참하게 바꼈다. 그러나 달마의 마음은 더할 수 없이 맑았고 몸 또한 가벼웠다. 드디어 북위(北魏)의 도읍지인 낙양성에 도착했다. 말로만 듣던 고도(古都)의 풍광은 금릉에 못지않게 화려했다. 낙양은 양자강 북쪽, 이른바 중원의 중심지였다. 정치 경제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불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불찰(佛刹)이 무려 1천3백여 개에다 승려도 1만 명이 넘었다.

달마는 해가 저물어 어둠이 깔릴 무렵 낙양성에 들어섰다. 저잣거리에 휘황 찬란한 등불은 낙양의 풍요와 번영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어 홍등가가 나타났다. 이 곳 지리에 익숙지 못한 달마는 그냥 발길 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기생들이 문밖에 나와 온갖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도 거지꼴을 한 이역의 중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도리어 조롱거리가 되고 내몰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달마는 술과 춤과 노래로 흥청거리는 환락가를 벗어났다. 갑자기 거리가 어두워졌다. 저자도 술집도 보이지 않는 거리의 적막이 어둠과 겹쳐 짙은 무게를 느끼게 했다. 달마는 문득 자기가 혼자라는 인식이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이 곳엔 아는 사람도 하나 없다. 도반이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상태다. 게다가 아직은 언어마저도 자유롭지 못하다. 차가운 밤바람 속에 내맡겨진 스스로의 모습이 삶의 실상을 되새기게 해 주었다.

달마는 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멀리 홍등가의 불빛이 아른거렸다. 달마는 혀를 차며 뇌까렸다.

“혼탁한 세상이로고!”
그는 새삼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기에 이 끝없는 고해에서 널리 중생을 구해야 겠지.”
달마의 굳은 얼굴에 어느덧 밝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두운 길가에 서 있는 달마의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의 빛이요 광체(光體)였다. 그는 이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구하는 일이 비록 선업이라고 할지라도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을 자기가 생각하는 경지에 이르게 하려면 10년, 100년, 아니 100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자기가 생전에 이루지 못하면 제자에게, 또 그 다음의 대(代)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 길은 걸어 나가야 한다.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회피할 수는 없다. 달마의 눈빛은 새로운 결의로 번득였다.

그러나 신념은 신념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어둠에 실려 밤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게다가 소나기까지 휘몰아쳤다. 빗방울이 어찌나 굵은지 정수리가 따가웠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비바람을 맞았는지 모른다. 달마의 낡은 가사는 살갗에 찰싹 달라붙었다. 내공으로 한기를 막아내는 것도 한계에 이른 듯싶었다. 비바람 속을 뚫고 걷는 달마의 발걸음이 뒤뚱거리기 시작했다.

절이 보이면 그곳으로 찾아들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절은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진흙탕으로 범벅이 된 거리에 쓰러졌다. 밤은 깊어가고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오직 대지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만 서글픈 음악인 양했다. 달마의 의식은 그 음악소리에 빨려 들어갔다.

눈을 뜨려고 안간힘
달마는 얼음같이 차가운 세계로 빠져들었다.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떠졌는지조차도 의식할 수 없었다. 오직 몸이 한 덩이 얼음 같다는 생각과 어둠이 파고드는 느낌뿐이었다. 문득 동태사에 있는 통미장로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어서 통미장로가 준 서찰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낙양의 영녕사(永寧寺)가 그 서찰과 중첩되었다. 달마의 얼굴은 미소를 머금은 채 빗방울을 맞고 있었다. 간신히 입술을 움직이며 연신 중얼거렸다.

“영녕(永寧), 영녕….”
달마는 깊은 수렁 속으로 계속 빠져 들어갔다. 이제는 몸과 마음이 자기 것이 아닌 듯싶었다. 죽음과 무의식의 한계가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갑자기 달마의 눈앞에 밝은 빛이 반짝였다. 그는 정신을 그 곳에 집중했다. 한 자루의 촛대에서 불꽃이 영롱하게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달마는 전심전력으로 불빛을 향해 기어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촛대는 잡히지 않았다. 이윽고 촛대의 불꽃이 점점 크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꽃은 드디어 달마를 감싸는가 싶더니 온통 세상을 벌겋게 물들였다. 하늘과 땅, 온 우주가 불이요 빛이었다.

“불광(佛光)! 불광(佛光)!”
달마는 불광을 외치며 온몸으로 불빛을 맞았다. 동시에 그 불꽃 속에 녹아 들어갔다. 달마는 온몸에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곤 불현듯 눈을 떴다.

“보살님의 보살핌에 감사 드립니다. 아미타불!”
달마의 귓가에 한 노인의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비록 작았지만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득 찬 그런 목소리였다. 달마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한 번 떠보았다. 자기는 침대에 누워있고 그 앞에 노승이 손에 염주를 굴리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승의 옆에는 어린 동자승이 약그릇 같은 것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노승은 달마와 눈이 마주치자 두 눈을 반쯤 감고 합장하면서 연신 중얼거렸다.

“보살님의 보살핌이로다. 아미타불!”
달마는 몸을 약간 일으키며 물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여기에 누워있습니까?”
노승에 앞서 동자승이 대답했다.

“어르신께서는 거리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채 신음하고 계셨습니다. 때마침 저희 사부님께서 타지를 심방하시고 돌아오시다가 발견하시곤 이리로 모셔와 응급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동자승은 말을 마치자 들고 있는 약그릇을 달마에게 내밀었다.
“지금까지는 제가 생강차를 입안에 떠 넣어드렸지만 이제는 깨어나셨으니 한 모금씩 천천히 드시고 몸을 훈훈하게 하시지요.”“고맙소. 그런데 여기가 도대체 어디입니까?”
달마는 거듭 물었다.

“영녕사입니다.”
동자승의 대답에 달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영녕사라고요?”
달마는 다시 몸을 일으켜 그때까지도 아무 말 없이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있는 노승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이 분이 바로 자광(慈光)대사가 아니신지요?”
이번엔 노승이 놀랐다. 노승은 몸을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의 외람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노인께서는…?”
달마는 사실대로 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입을 열어 말을 하려는 순간 머리가 갑자기 어지러웠다. 눈도 가물가물했다. 달마는 쓰러지듯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한동안 다시 누워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선 사라졌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고 있었다. 낙양의 거리, 강변에서 쫓기던 장면, 무제와의 대면, 바다에서의 조난 등. 그가 겪었던 갖가지 일들이 비, 눈, 바람, 안개와 겹쳐 명멸(明滅)했다.

달마는 가물가물한 의식의 세계에서 다시 눈을 뜨고 싶었다. 자기를 구한 자광대사를 보고 싶었고, 상상만 했던 영녕사도 둘러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뜨려고 해도 떠지지 않았다. 그만치 피곤이 겹치고 탈진이 심했다.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하면 어쩌지?’
순간 부질없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달마는 속으로 빙긋 웃었다. 그런 부질없는 생각조차 삶의 약동이 아니던가. 그는 이제 막 동토에서 불법을 널리 펴고 선을 확립하려는 초입(初入)에 있었다. 그런 그가 운명의 장난스러움에 유혹 당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그런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죽고 사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거늘 두려워할 것도 없고 그 자체를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해탈도 영원한 삶도 알 수 있는 법이다.

자고(自古)이래로 고승이나 신선이나 황제를 막론하고 삶과 죽음을 에워싼 의문과 신비는 많은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비록 한낱 범인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서는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어떤 사람은 초연한 입장에 서는데 반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혹에 빠져 슬퍼하기 마련이다.

생사는 자연의 이치
달마는 누운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릇 천지는 만물이 잠시 묵었다가 떠나는 여관과 같은 것이 아닌가. 시간이라는 것은 백대(百代)에 걸쳐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닌가….”생각에 생각을 이으며 달마는 코를 골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자광대사는 큰 시름을 던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보살의 가피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얼마 동안 약을 달여 치료하면 곧 원기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광대사는 아직 달마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예사로운 노인이 아니라고 느꼈다. 어쩌면 큰 도인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