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이야기·이규행

42. 좌방(左旁)과 좌방(左膀)

通達無我法者 2008. 9. 22. 18:40

 

 

좌방(左旁)과 좌방(左膀)

신광은 戒刀로 왼쪽 팔뚝을 잘라 버렸다

달마의 마음이 움직였다
신광이 法器임을 확인
자비의 눈길을 보냈다.



신광은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달마의 거처가 웅이산 어느 자락인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일단, 노승이 말해 준대로 웅이산(熊耳山)으로 달마를 찾아 나섰다. 이윽고 웅이산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다. 마침 뱃사공 차림의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신광을 보자 합장하며 예의를 차렸다. 신광도 서둘러 답례하며 물었다.

“노인장께서는 이 고장에 사시는 분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혹시 얼마 전에 천축의 스님같이 생긴 노인이 웅이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신 일이 있으신지요?”“아, 그 노스님이라면 본 일이 있습니다만…. 하지만 지금은 웅이산을 떠났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신광은 달마를 봤다는 말에 한편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달마 대사의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자위했다. 신광이 노인에게 다시 물었다.

“직접 노스님을 보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 좀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강가에서 만나 제가 직접 웅이산 밑자락까지 안내해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무슨 말씀이라도 들은 것은 없으신지요?”
노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그 노스님이 지금은 웅이산에 안 계시고 떠나셨다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떠나시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동네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혹시 어디로 떠나셨는지는 듣지 못하셨는지요?”
노인은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동네사람들이 노스님께 어디로 가시는지 물었다고 합디다. 가시는 곳이 어디라고 하더라…. 나도 사람들한테 듣기는 들었는데, 얼른 머리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 소실산이라든가 소림사라고 하든가 그런 곳으로 간다고 하시더랍니다.”신광의 얼굴엔 금새 밝은 웃음꽃이 피어 올랐다. 비록 노인의 기억이 어렴풋하긴 했지만 그에게는 더 할 수 없이 중요한 정보였다. 신광은 서둘러 노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소실산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며칠 뒤 새벽녘, 신광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소림사의 산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찬바람이 이리저리 안개를 흩날리는 광경이 선경인 듯싶었다. 마침 지인 스님이 산문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신광은 합장의 예를 갖추었다.

“스님,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혹시 달마 대사께서 아직 이 곳에 계신지요?”지인은 신광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스님이 논법하려고 스님이 조사를 찾아 온 것이 아닌가 싶어서 특히 몰골을 자세히 살폈다. 지인은 이전에도 그런 스님을 여럿 안내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사님을 뵈시려구요?”
“예, 그렇습니다.”
신광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간곡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빈승을 조사님께 안내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지인의 대답은 의외로 쌀쌀했다.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사님께서는 어제 하산하시어 설법하시고는 밤중에 다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아마도 지금쯤은 동굴 안에서 면벽참선하고 계실 겁니다. 면벽하시는 동안은 조사께서 아무도 만나주시지 않을 뿐더러 함부로 찾아가서도 안됩니다.”지인의 대답에도 신광은 쉽사리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예를 갖추고 지인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동굴로 가는 길이라도 가르쳐 주실 수 없겠습니까?”지인은 대답 대신 냉소하듯 턱으로 산으로 오르는 길을 가리켰다.

“실례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신광은 그대로 몸을 돌려 산길로 걸음을 옮겼다. 지인은 신광의 행동에 크게 당황했다. 공연한 일로 달마 조사의 면벽좌선을 방해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큰소리로 만류했다. 그러나 신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잰걸음으로 산마루를 넘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신광은 마침내 동굴을 찾아들었다. 때마침 달마는 면벽하여 묵연(默然) 좌선하고 있었다. 신광은 조사의 뒷모습을 향해 하염없이 절을 했다. 신광의 눈에선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땅바닥에까지 흘렀다. 그러나 달마는 목석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달마의 위용은 동굴 안팎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신광은 눈물을 거두고 엎드렸다.

“조사님께 저의 잘못을 비옵니다. 육안범태(肉眼凡胎)인 까닭으로 조사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연유를 미처 몰라 큰 죄를 지었나이다. 그 죄과는 마땅히 벼락을 맞아도 가벼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조사님께 엎드려 비옵나이다. 자비를 베푸시어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달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신광의 읍소는 다만 동굴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신광은 또 다시 애달프게 소원을 말했다.

“소승은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습니다. 조사님, 노여움을 거두시고 마음을 열어 주시옵소서. 제가 육신의 눈을 벗지 못하여 서쪽에서 오신 큰스승님을 몰라뵈었습니다. 조사님, 제발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옵소서.”신광은 사흘 낮 사흘 밤을 빌었다. 그러나 달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때는 12월 9일.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밤이 깊어지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보통 눈발이 아니었다. 이 고장에선 보기 드물게 큰눈이 내렸다. 신광은 온몸에 눈을 뒤집어썼다. 그런데도 동굴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신광은 마음을 굳게 먹고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눈발이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매섭게 찬바람이 몰아쳤다. 허리까지 눈에 파묻힌 신광의 모습은 마치 눈사람 같았다. 신광은 울먹이며 말했다.

“옛사람은 도(道)를 구하기 위해서 골수(骨髓) 바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살을 찔러 피를 뽑아 허기를 덜고, 머리털로 진흙을 닦아 내고, 절벽 밑으로 몸을 던져 호랑이 밥까지 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옛 사례를 따르고자 합니다. 제가 어찌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옵소서.”신광의 눈에선 이미 눈물조차 말라 버렸다. 달마는 비로소 몸을 돌려 신광을 쳐다 보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눈 속에 앉아 도대체 무엇을 더 구하려 하는가? 그대는 이미 훌륭한 절과 삼장(三藏)의 교전(敎典)을 갖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대의 변설(辨說)은 누구보다도 뛰어나지 않은가. 그런 그대가 무엇 때문에 이 곳까지 나를 찾아 왔는지 모르겠구나.”이 말을 들은 신광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신광은 비참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머리를 눈 속에 비벼대며 호소했다.

“조사님,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기왕에 제가 한 말은 모두 잊어 주시옵소서. 진인(眞人)에게서 참을 구하지 않고 어디서 구하라고 하십니까. 비옵나니, 감로(甘露)의 문을 여시고 가르침을 주시옵소서.”“이 세상에 부처님께서 설한 무상(無常)의 묘법(妙法)만큼 광대하고 정교한 것이 또 있을까. 그것을 얻으려면 행하기 어려운 것도 훌륭히 행하고 참을 수 없는 것도 잘 참아 내야 하는 법. 어찌 소덕(小德)과 소지(小智) 그리고 경심(輕心)과 만심(慢心)으로 그것을 얻으려 하는가. 부질없는 짓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도록 하라.”달마의 이 말은 신광에겐 마치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목이 꽉 막혀 할 말을 잊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읊조렸다.

“조사님, 저의 목숨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원하옵건대 생사(生死)의 길에서 저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조사님의 심법(心法)이 아니고선 육도(六道)의 윤회를 해탈하여 삼계(三界)를 초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소서.”달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신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느덧 달마의 얼굴에선 연민의 빛이 감도는 듯싶었다. 달마는 낭랑한 목소리로 게송을 읊기 시작했다.

“마음으로 청정(淸淨)을 구한다고 청정을 얻을 수는 없느니. 마음의 편안함과 한가로움은 원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니, 어리석은 마음으로는 삼계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 삿된 생각을 갖는다면 반드시 깊은 나락에 빠지리라.”게송을 들은 신광은 골똘히 생각한 끝에 말했다.

“조사님, 저는 결코 조사님께서 성취하신 바를 구하고자 어리석게 망상(妄想)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저 자신의 성명(性命)조차 알지 못합니다. 고해(苦海)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지옥으로 이끄는 염군의 손길도 피하지 못합니다. 여태까지 저는 경솔히 조사님의 좌행(坐行)을 방해했습니다. 그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비옵나니. 자비를 베푸시어 가르침을 주시옵소서.”달마는 정색을 하고 신광에게 말했다.

“정도(正道)를 얻고자 한다면 좌방(左旁)을 버려야만 하느니라. 홍설(紅雪)이 허리에 차면 그 때 가서 전수하리라.”신광은 달마의 이 한 마디가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비장한 각오로 계도(戒刀)를 뽑아 들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자기의 좌방(左膀), 곧 왼쪽 팔뚝을 잘라 버렸다. 이것은 달마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착각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달마가 이야기한 ‘좌방’은 결코 왼쪽 팔뚝을 뜻한 것이 아니었다.

신광의 왼쪽 어깨에선 선혈(鮮血)이 뿜어 내렸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주변에 쌓인 눈은 모두 붉게 물들었다. 처절한 광경 앞에서 달마는 할 말을 잊었다. 달마의 마음이 움직였다. 새삼 신광이 법기(法器)임을 확인하면서 자비의 눈길을 보냈다. 서둘러 자신의 옷을 찢어내어 신광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순간 흐르던 피는 멎었다. 신광은 고통스러워 일그러졌던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려 애썼다.

달마는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믿었던 대로 이 곳 동쪽 땅의 중생 가운데 그대처럼 신념을 가진 사람을 찾아 기쁘오. 내가 갖고 있는 진전(眞傳)을 그대 말고 누구에게 전하리.”달마는 그 자리에서 홍세(洪 )의 대원(大願)을 세우라고 신광에게 명했다. 신광은 삼보(三步)를 물러선 다음,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하늘을 향해 우러러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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