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병을 기울이니 달도 비워지네…

通達無我法者 2008. 9. 25. 00:00

 

 

我曹 生于千載之下 得遇難遇之寶 手接目睹 幸莫大焉
설의) 慶遇斯解也
우리는 부처님의 천년 뒤에 태어나 만나기 어려운 보배를 만나고 손으로 만지며 눈으로 보게되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
이 해설을 만남이 매우 경사롭다.

以此 可以揚佛祖之餘輝 以此 可以延君國之洪祚
설의) 당儻因斯解 豁開正眼則法印 在握 化道 在已
이 다섯 스승의 해설로 부처와 조사의 나머지 광명을 드날릴 수 있으며, 또한 임금과 나라의 큰복도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해설을 통해 바른 눈을 활짝 열면 法印이 내 손에 쥐어져 있고 중생교화의 도(道)도 내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然此編集 出於何人之手 而不現其名乎
설의)歎不現夫編者之名也
그러나 이 편집이 누구의 손에서 나왔길래, 그 이름을 나타내지 않는가?
그 편집자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음을 탄식한다.
〈참고〉 金剛經解說로서의 冶父頌 또는 奎峯疏 등은 각각 전해져 오다가 함허스님 시대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누군가에 의해 함께 편집되었다. 따라서 중국이나 일본에는 五家解가 없다.

吾 喜其爲一佛五祖師之心 令一轉而便見也
설의) 一軸之內 佛燈祖焰 交光互映 可一轉而便見佛祖之心矣 此所以爲喜也
(그 누가 편집했건) 나는 부처님과 다섯 조사의 마음을 한번 더 굴려 문득 다 볼 수 있게 해 줌이 매우 기쁠 따름이다.
한 두루마리 안에 부처님의 등불과 조사의 불꽃이 서로 어울려 비추므로, 한번 더 굴려 부처와 조사의 마음을 모두 보게 해주니 이것이 바로 기쁜 까닭이다.
所嗟 雖有彈絃之妙指 未遇賞音之嘉聰 由是 誤聽峨峨 作洋洋者 多矣
설의)三尺古琴 妙音 斯在 雖有妙音 若無妙指 終不能發 縱有妙指 善能彈絃 聞而賞音者 蓋難 賞音者 難故 誤聽峨峨 作洋洋者 多矣 一部靈文 妙理斯在 雖有妙理 若非匠手 孰能抽毫 稱實發揚 雖有稱實發揚 目以善解者 蓋難 善解者 難故 以淺爲深 以深爲淺者 多矣 是可歎也
슬프고 안타깝게 여기는 바는 비록 거문고를 잘 타는 정묘한 손가락은 있으나 그 소리를 감상하는 밝은 귀를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아아의 곡을 듣고 그릇 양양의 곡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다.
석자 길이의 옛 거문고에 묘한 소리가 있으니, 비록 묘한 소리가 있더라도 묘한 손가락이 없으면 끝내 묘음을 낼 수 없고, 또, 묘한 손가락이 있어 현을 잘 튕겨도 소리의 감상이 어려우니, 소리의 음미가 어렵기 때문에 아아의 곡을 듣고 잘못 양양의 곡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一部(오가해)의 신령스런 글에 묘한 이치가 들어 있는데, 비록 묘한 이치가 있으나 만일 훌륭한 장인의 솜씨가 없으면 누가 능히 붓을 들어 실다운 이치에 맞게 그 뜻을 꽃피우고 드날리겠으리오.
비록 실다운 이치에 맞게 꽃피우고 드날려도 그 것을 눈으로 보아 잘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우니, 잘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까닭으로 얕은 뜻을 깊다하고 깊은 뜻을 얕다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하여 이를 가히 탄식한다.
〈참고〉 거문고의 달인 백아에게는 자신의 음악을 정확히 이해하고 음악의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절친한 친구 종자기(種子期)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로 높은 산들을 표현하면 종자기는 “하늘 높이 우뚝 솟는 느낌은 마치 태산처럼 웅장하구나”라고 하고, 큰 강을 나타내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의 흐름이 마치 황허강 같구나”라고 맞장구를 쳐주곤 하였다. 그러다가 종자기가 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백아는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이 더 이상 없음을 알고 너무나도 슬픈 나머지 애지중지하던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리고[伯牙絶絃] 죽을 때까지 거문고를 켜지 않았다.

又於經疏 以僞濫眞 乳非城外者 頗多 豈非以去聖愈遠 歷傳多手而致然歟
설의) 眞僞相雜 水乳 難判 所以舛訛 蓋緣傳寫之誤耳
또한 經疏의 잘못(전하는 과정의 오류)이 참된 원전(元典)에 섞여서 성 밖의 옅은 우유처럼 자못 많으니, 어찌 성인의 직접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많은 손을 거쳐 전해지다보니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진짜와 가짜가 서로 섞이면 물과 젖을 판별하기 어렵듯, 어긋나고 잘못 된 것은 대개 전하고 옮겨 쓰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겨 그런 것이다.

夫聖言之所以傳之於後之世也 唯文不能設 空義不獨傳 文義相資 方成妙唱 作天下古今之龜鑒 開世與出世之眼目 若義有言肴訛 文有錯誤 則非唯不能開人眼目 亦令誤解 碍正知見
설의)文字 現道之具也 導人之方也 須文義相資 而血脈 貫通 精審詳密 備焉 而脫衍倒誤 未嘗雜於其間然後 能使人開解 得爲萬世之龜鑒也 不爾則非唯不能開人眼目 反爲惑人之具也
무릇, 성현의 말씀을 후세에 전하는 이유는, 오로지 문장만으로 능히 施設할 수도 없고 공연한 의리만 단독으로 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문장과 의리가 서로 어울려야 바야흐로 묘한 창화(唱和)가 이루어지고, 천하고금의 귀감이 되어 세간과 출세간의 안목을 열어 줄 것이다. 만약 뜻에 잘못이 있고 문장에 착오가 있으면 사람들의 안목을 열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오해를 일으켜 바른 지견을 가로막을 것이다.
문자는 도를 나타내는 도구며 사람을 인도하는 방책이다. 모름지기 글과 뜻이 서로 어울려 혈맥을 관통하고, 정미로움과 깊이 살핌과 상세함과 밀밀함을 (오가해에) 갖추어져서 글자가 빠지거나 잘못 덧붙여지거나 거꾸로 해석되거나 잘못된 것들이 일찍이 그 사이에 섞이지 않아야만 사람들로 하여금 바른 이해를 열어서 만세의 귀감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렇지않으면, 사람의 안목을 열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사람을 현혹시키는 도구가 될 것이다.

蓋不爲文字 所惑 能體聖人之意者 誠難得也
설의) 若非哲眼 不能不爲言肴訛 所惑也
대개 문자에 현혹되지 않고 성인의 뜻을 능히 체득하는 사람은 진실로 만나기 어렵다.
만일 밝은 눈이 아니면 잘못된 문장에 의해 의혹되지 않기가 어렵다.

然 若心淸慮靜 緣文究義 依義尋文 則文義之舛錯者 不隱微毫 了然昭著 如世病脈 不能逃於善醫之手
설의) 雖非哲眼 若靜心慮 以硏之則文義之舛錯者 可得而詳也
그러나 만약 마음(體)이 청정하고 (사물과 부딪쳐 일어나는 일상적) 생각(用)이 고요해서, 문장을 통해 의리를 궁구하며 의리에 의거하여 문장을 살피면, 곧 문장과 의리의 잘못이 털끝만큼도 숨을 수가 없어서 확연히 밝게 나타날테니, 마치 세상의 병맥이 훌륭한 의사의 손에서 달아나지 못함과 같다.
비록 밝은 눈이 아니라도 마음과 생각을 고요히 다듬어 금강경을 연구하면 문장과 의리의 잘못을 알아채고 자세히 볼 수가 있다.

予 雖非善醫之儔 幸粗識文義 略辨眞僞故 今之經之疏之中之或脫或衍或倒或誤者 簡而出之 參之諸本 質之諸師 以正之 然 他本所據外 未嘗一字一句 妄自加損於其間
설의) 予以不敏 辨眞僞定言肴訛也 然 此 以有據依而然 非爲臆斷

내가 비록 훌륭한 의사의 무리는 아니나 다행히 문장과 뜻을 조금 알고 진위를 대략 판별할 수 있으므로, 이제 경전의 소와, 그 가운데에서 혹 글자가 빠지거나 혹 덧붙여지거나 혹 뒤집어지거나 혹 잘못된 것을 간추려 찾아내어, 여러 판본도 참고하고 여러 스승에게 질문도 해서 바로 잡았다. 그러나 타본에 의거한 것 이외에는 일찍이 한 글자나 한 글귀도 망령되이 나 스스로 그 사이에 더하거나 뺀 것이 없다.
내가 불민한대로 진위를 가리고 잘못 된 부분을 감정했지만 이는 판본에 의거해 그런 것이지 나의 억측으로 한 것은 아니다.

凡有所疑 他本無所據處 據義以決 附之卷尾而已
설의) 若以已意 濫之於部內則或者 爲達者之所非矣 知有闕誤而不寫以傳之則未有今日較正之功也 後世 或聞較正之說 槪以爲全 而不加察焉則佛祖之正意 幾乎墜地矣 故 不獲已書之於卷尾 而傳之也
무릇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타본에 의거할 수 없는 것은, 뜻에 의거하여 결정을 내린 뒤(決疑)를 책 뒤에 덧붙였다.
만약 나의 뜻으로 (결의를 두지 않고) 다섯 스승의 주석 안에 섞어두면 간혹 통달한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을 수 있고, 빠지거나 잘못된 것이 있음을 알면서도 옮겨 적어 전해주지 않는다면 오늘날 내가 교정하는 공도 없을 것이다. 후세에 혹 교정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개 온전하리라 여기고 다시 살피지 않는다면 부처와 조사의 바른 뜻이 거의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못해 그 것을 써서(決疑) 책의 말미에 전한다.

若見盤根錯節之處 而抱拙拱手 不游刃 於其間 則豈爲通人達士之所可乎 是以 不揆不才 解其結通其碍 正未正齊未齊 永貽來學 誰知王含一輪月 萬古光明長不滅 呵呵他日 具眼者 見之 當發大笑矣
설의) 解之舛訛 如盤根錯節 結礙不通 若一向畏人非之 知誤而不決焉則其於報佛恩之義 爲如何哉 後世 必有承訛踵誤 妄生穿鑿 以求其說之必通者矣 夫如是則其不決之弊 至於使佛祖之言 終未免於駁雜之愆也 此 通人達士之所不可也 由是 終不固讓於決焉 寫以傳之也 夫然後 一經之義天 朗曜 當年之慧月 將大明於天下矣 孰知夫如是之理乎 今吾自知其然而大慶于懷也 然 此言此說 如蚊맹之鼓大虛也 達者 當以是 爲笑具也
만일 뿌리가 얽히고 마디가 뒤섞여 뜻이 안 풀리는 곳이 있는데도 옹졸함을 품고 손 놓아 그 사이에 칼날을 놀리지 않으면 어찌 통인달사들이 옳다고 여기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재주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맺힌 곳은 풀어주고 걸린 곳은 통하게 하며 그른 곳은 바로 잡고 어지러운 곳은 가지런히 하여 영원히 장래의 학인들에게 남겨주니, 왕사성의 일륜월(부처님의 진리)이 만고의 광명이 되어 영원히 멸하지 않음을 누가 알겠는가? 하하! 어느 날, 눈 갖춘 사람이 이를 보면 마땅히 껄껄 웃을 것이다.
해석의 잘못이(전하는 과정에서의) 마치 뿌리가 엉기고 마디가 뒤섞인 듯 맺히고 걸려 뜻이 통하지 않는데도 만일 한결같이 사람들이 비방할까 두려워 잘못이 있음을 알고도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어찌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한다 하겠는가? 후세에 반드시 그릇된 부분을 이어받고, 그 잘못을 뒤따라 망령들이 천착하여 기필코 금강경 말씀의 통달을 구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의를 만들지 못한 그 폐단이, 부처와 조사의 말씀을 마침내 뒤죽박죽 섞이게 하는 허물을 면하기 어렵게 할 것이니, 이는 통인달사 들이 옳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마침내 결의 만드는 것을 굳이 사양하지 않고 옮겨 써서 전하노라. 그렇게 한 뒤에는 금강경의 진리(義天)가 밝게 빛나서 그때 그때의 지혜의 달(금강경 학인들)이 장차 천하에 크게 명성을 드날릴 것이니 누가 이런 이치를 알겠는가? 이제 내가 스스로 그런 내용을 알아 마음속의 큰 기쁨으로 여지지만, 이러한 말과 설명들은 마치 모기가 태허공을 두드림과 같으니 통달한 사람은 마땅히 이를 보고 웃음의 도구로 삼을 것이다.

永樂乙未六月日 涵虛堂衲守伊 관手焚香謹序
영락 을미년 유월 함허당 납승 수이가 양치하고 손 씻고 향 사르며 삼가 서하노라.


禪詩 맛보기

1) 李奎報의 井中月
山僧貪月色 幷汲一甁中 到寺始應覺 甁倒月亦空
산승은 달이 좋아, 물과 함께 병속에 담았네.
절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네. 병을 기울이니 달도 비워짐을
〈보충설명〉 달은 우리의 마음이며 지혜입니다. 달빛을 받으면서 찻물을 떠오려고 우물에 갔다가 물속에서 목욕하는 달을 보고 달도 건져 올렸습니다. 그 기뻐하는 모습이 얼마나 천진하고 맑을까요? 병을 기울이면 달도 없어지겠지만 다음날도 물과 달을 건져야 하겠지요.

2) 李奎報의 夏日睡
簾幕深深樹影回 幽人睡熟한成雷 日斜庭園無人到 唯有風扉自闔開
주렴 드리운 깊은 숲에 나무 그림자 돌아오고
幽人의 잠은 깊어 우뢰 같은 코골이
햇살은 정원을 비끼는데 찾아오는 사람 없고
사립문만 바람따라 열리고 닫히네
輕衫小점臥風欞 夢斷啼鶯三兩聲 密葉예花春後在 薄雲漏日雨中明
얇은 홑적삼에 조그만 돗자리로 바람 부는 난간에 누웠다가
꾀꼬리 울음에 꿈이 달아났네
빽빽한 잎사귀에 가리워진 꽃은 봄이 갔는데도 남아있고
엷은 구름 사이로 삐져나온 햇살이 雨中에도 밝구나.
〈보충설명〉 이 시는 나무 그림자가 햇살에 맞추어 돌아가는 시간의 흐름, 시공에 걸림없이 여유로운 코골이, 바람에 맡겨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사립문 등이 리듬 있게 펼쳐져서,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물들이 도리어 더 잘 어울리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3) 徐居正의 自警(東人詩話 中에서)
班白豈非爲老翁 飄飄日用尙孩童 驚人只有疎狂語 輔世曾無細小功
희끗희끗 물든 머리 어찌 늙었다 하지 않으리
가볍게 나부끼는 일상행동 오히려 어린 아이 같은데
사람들 놀라게끔 머트럽고 실없는 말만 남아
세상살이 돕는데는 하찮은 공도 없네.
嗜酒過三杯止渴 題詩無一句全工 乾坤容汝德何厚 汝自加修愼始終
술은 좋아해서 석 잔을 넘기고야 목마름을 달래는데
시를 짓는데는 한 귀절도 온전하게 공들인 것 없구나.
하늘과 땅이 너를 용서하니 그 덕이 어찌 그리 두터운가?
스스로 수행 더해 언제나 삼가라.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