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선현기청분/5/내 마땅히 그대들을 위해 설하노라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15:40

 

 

"내 마땅히 그대들을 위해 설하노라!"
 
曲分爲三 一 印讚所讚 重言善哉 讚美之極 護付能令佛種不斷 是事必然 故 印讚言如汝所說 二 敕聽許說 無以生滅心行 聽實相法 智論偈 云聽者端視如渴飮 一心入於語義中 踊躍聞法心悲喜 如是之人可爲說 三 標勸將陳 我當爲汝 如是如是委細而說
이 대목을 곡진하게 세 부분으로 나누건대, 첫째는, 부처님을 향한 찬탄을 인정하여 그 것을 되돌려 칭찬한 것이니, 거듭 선재라 말한 것은 찬미의 극치이다. 모든 보살을 호념하고 부촉해서 능히 불종자를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필연의 일이므로 인정하고 칭찬하면서 “그대가 말한 바와 같다”라고 말한 것이다. 둘째는, 귀담아 잘 듣기를 명하면서 설해주겠다고 허락하시니, 생멸의 마음과 행동으로써 실상의 법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智論偈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사람은 단정히 우러러 보기를 마치 목마를 때 물 마시기를 생각하는 것 같이 간절한 한마음으로 말씀의 뜻 가운데에 들어가야 한다. 설법 듣는 것이 기뻐서 날아갈 듯 마음으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함이여! 이와 같은 사람을 위해 부처님이 설법하신다“라고 말했다. 셋째는 법을 표하고 권하기를 장차 베풀려고 하는 것이니, ‘내가 마땅히 그대를 위해 이와같이~, 이와같이’ 라고 자세히 설한 것이다.

[圭峰]三 善現 佇聞(선현이 부처님 법문 듣기를 기다렸다)
唯然世尊 願樂欲聞
“예!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기꺼이 듣기를 원합니다.”

{說}當爲汝說 欲說這介事 願樂欲聞 欲聞這介事
‘당위여설’이여! 이 진리의 일을 설하고자 함이요, ‘원요욕문’이여! 이 진리의 일을 듣고자 함이로다.

<보충설명>
唯然: 공경스러움이 깊게 배어있고 몸과 마음이 일치되어 표현되는 원음의 소리.
這介: 本分事, 진리, 반야바라밀 등을 禪的으로 압축시킨 말. 這는 지시대명사, 介는 뒤에 따라오는 말.

唯者 順從之辭 禮對曰唯 野對曰阿 十地經 云如渴思冷水 如飢思美食 如病思良藥 如衆蜂依蜜 我等 亦如是 願聞甘露法
‘유(唯)’는 순종하는 말이니, 예(禮)를 갖추어 대답하는 것이 유(唯)요, 거칠게 대답하는 것은 아(阿)이다. 십지경에 이르길 ‘목마른 사람이 냉수를 생각하는 것 같이, 배고픈 사람이 맛있는 밥을 생각하는 것 같이, 병든 사람이 좋은 약을 생각하는 것 같이, 뭇 벌들이 꿀에 의지하는 것 같이, 이와 같이 감로법을 듣길 원한다’ 하였다.

[六祖]是 佛 讚歎須菩提 善得我心 善知我意也 佛 欲說法 常先戒勅 令諸聽者 一心靜黙 故 云汝今諦聽 吾當爲說 阿之言 無 耨多羅之言 上 三之言 正 藐之言 徧 菩提之言 知 無者 無諸垢染 上者 三界無能比 正者 正見也 徧者 一切智也 知者 知一切有情 皆有佛性 但能修行 盡得成佛 佛者 卽是無上淸淨般若波羅蜜也 是以 一切善男子善女人 若欲修行 應知無上菩提道 應知無上淸淨般若波羅蜜多法 以此 降伏其心 唯然者 應諾之辭 願樂者 願佛 廣說 令中下根機 盡得開悟 樂者 樂聞深法 欲聞者 渴仰慈誨也

이 대목은 부처님께서 ‘수보리가 내 마음을 잘 알고 내 뜻을 잘 헤아린다’고 찬탄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법하려 하실 때는 언제나 먼저 계칙을 세우시는데, 모든 청법자로 하여금 일심으로 고요히 침묵케하려고 ‘그대들은 지금 자세히 들으라, 내가 마땅히 그대들을 위해 설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阿’는 무(無)요, ‘耨多羅’는 상(上)이요, ‘三’은 정(正)이요, ‘藐’은 변(徧)이요, ‘보리’는 지(知)니, 무(無)는 모든 더럽고 물든 것이 없다는 것이요, 상(上)은 삼계에 능히 비교할 바가 없는 것이요, 정(正)은 정견(正見)이요, 변(徧)은 일체의 지혜요, 지(知)는 일체유정이 모두 불성이 있어서 다만 능히 수행하면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불(佛)은 곧 이 위없는 청정 반야바라밀이니, 이로써 일체 선남자 선여인이 만약 수행하고자 한다면 응당 위없는 보리도를 알며, 응당 위없는 청정 반야바라밀다법을 알아서 다시 이로써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 ‘유연(唯然)’은 예~하고 겸손히 대답하는 말이요, ‘원요(願樂)’는 부처님이 널리 설하셔서 중하근기로 하여금 모두 깨닫게 해주길 원하는 것이니, ‘요(樂)’는 기꺼이 깊은 법을 듣는 것이요, ‘욕문(欲聞)’은 자비로운 가르침을 목말라하고 우러르는 것이다.

<보충설명>
1. 문장 처음의 是: ‘선재선재라, 수보리야!’
2. 讚歎須菩提 善得我心 善知我意也: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하는 대목.
3. 藐=>徧: 누구나 두루 갖추었다는 뜻.
4. 삼계: ①육신에 속박되어 탐진치에 물들어 사는 욕계와, ② 육신은 있지만 탐진치는 없는 색계, ③ 육신도 없고 탐진치도 없이 선정에 머물러 있는 정신세계인 무색계
5. 정견: 오염되지 않은 지혜로 현실을 여실하게 파악하고 사물에 걸리지 않고 해탈된 상태.
6. 원요(願樂)의 ‘요(樂)’: ‘~을 줄거워한다’는 동사일 경우에는 ‘낙’으로 읽지만 ‘~이 좋다’는 뜻일 경우에는 ‘요’로 읽는다. (예:樂山樂水-요산요수) 그러나 ‘요’는 어떤 대상에 대해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랑하여 대상과 내가 둘이 아닐 때에 해당되는 것이다.

[傅大士]希有希有佛 妙理極泥洹 云何降伏住 降伏住爲難 二儀 法中妙 三乘 敎喩寬 善哉 今諦聽 六賊 免遮欄
희유하고도 희유한 부처님이여! 묘한 이치가 지극한 열반의 모습이로다. ‘어떻게 항복받고 머물러야 하오리까?’ 물음이여! 항복받고 머무름이 어려운 일이로다. 항복과 머무름 두 가지는 법 가운데 묘(妙)이고, 삼승(三乘)의 가르침은 너그럽도다. ‘선재라! 이제 자세히 들으라.’함이여! 육적(六賊)이 마음 가리움을 면하게 했도다.

<보충설명1> 석굴암의 부처님 모습을 보면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 같다고 보면 아버지 모습도 드러나고, 엄하다고 보면 한없는 부드러움이 배어있고, 거룩한 신처럼 여기려 하면 너무도 우리와 똑 같은 인간미가 스며있고~, 부처님 모습은 이렇게 말로써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희유하다고 한 것입니다.
<보충설명2> 泥洹: 범어 ‘니르바나’ 의 음역인 열반.
<보충설명3> 三乘: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여기서는 부처님의 금강경 가르침이 중하근기를 깨닫게 하기 위한 최상승 법문이라는 의미.
<보충설명4> 六賊: 眼耳鼻舌身意의 여섯가지 도둑. 많은 중생이 청정한 본심을 잃고 육신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므로 도둑이라고 표현 한 것.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