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선현기청분/6/텅 빈 본래 자리 한번도 떠난 적 없어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15:49

 

 

[冶父]往往事因叮囑生
종종 벌어지는 일 들이 진지한 부탁(叮囑)으로 인해 생기도다.

{說}只這介事 要因叮囑而現
다만 ‘이 낱’ 일(금강반야바라밀)은 진지한 부탁으로 인해 실현된 것이다.

<보충설명> 叮囑은 웃어른에게 성의를 다하여 간절히 부탁하는 것. 여기서는 수보리의 간청에 의해 금강경이 설해지고 그 때문에 모두가 우주의 진리를 마음에 담게 된 것을 말함.

七手八脚 神頭鬼面 棒打不開 刀割不斷 閻浮踔躑幾千迴 頭頭不離空王殿
손이 일곱 개에 다리가 여덟 개요, 귀신의 머리에 귀신의 얼굴이라. 몽둥이로 쳐도 열리지 않고 칼로 베어도 잘라지지 않도다. 염부에서 얼마나 많이 이리 돌고 저리 돌고 하였는가? 그 때마다 텅 빈 임금의 집을 여의지 않았건만~.

<보충설명1> 七手八脚: 손이 일곱 개 달려 있고 다리가 여덟 개 달린 존재는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야보스님은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서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본분자리를 억지로 표현하려다 보니 칠수팔각이라는 표현을 끌어 온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禪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보충설명2> 頭頭不離空王殿: 사바세계에서 수천 겁을 헤매고 있는 범부중생들이 텅 빈 우리의 본분자리는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보충설명3> 閻浮: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 수미산의 남쪽에 있으며 고통이 많이 따라다니는 곳이지만 여러 부처님이 출현하는 세계.

[說]神用自由 妙體難睹 動彈不得 堅固難壞 生死路 幾度往返 脚跟 元來淸淨如空
신령스런 쓰임은 자유롭고, 묘한 본체는 보기가 어렵도다. 손으로 튕겨도 얻지 못하고, 견고하여 허물기도 어렵도다. 생사의 길에 얼마나 오갔는가? 당처는 원래 청정하여 허공과 같은데.

古典 맛보기

1.「予懷明德 不大聲以色」聲色之於以化民末也
(시경에) ‘나는 밝은 덕을 사모하나니, 소리와 색으로써 정치하는 것을 크게 여기지 않는다.’ 했다.
소리와 색은 백성을 교화함에 있어 지말(枝末)이다.

<보충설명1> 이 것은 詩經에 소개되어 있는 周나라 文王의 말에다가 공자의 말씀을 덧붙인 글입니다. 누구나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明德은, 고요히 앉아서 선정에 든 모습으로 우주의 이치를 깨우쳐주는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소리와 색깔을 드러내지 않고 백성을 교화하는 것입니다. 소리를 크게 내고 갖가지 얼굴색을 드러내며 가르치는 것은 교화의 방법 중에서는 말단에 속하는 방법입니다.

「德輶如毛」毛猶有倫 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시경에) ‘덕은 가볍기가 마치 털과 같다.’했다.
털은 오히려 짝이 있지만, 하늘의 이치는 소리도 냄새도 없어서 지극한 것이다.

<보충설명2> 이 문장도 역시 詩經의 글에 공자님 말씀을 덧붙인 것입니다. 털은 우리가 접촉하는 사물 가운데 가장 부드럽고 가벼운 것입니다. 아무리 가볍고 부드럽다 하더라도 이름과 모양에 걸려 있는 것이어서 짝(상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덕이 아무리 가볍고 푸근하고 훈훈한 멋이지만, ‘덕’이라는 이름을 갖게되면 흔적이 남게 되어 최상의 가르침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이치는 소리도 냄새도 빛깔도 없이 지극하게 만물을 이끌어 줍니다. 이 것이야말로 진정한 최상의 가르침이겠지요.
부처님께서도 소리와 모습을 빌어 진리를 표현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법화경을 설하실 때에는 연꽃을 들어 웃음을 지으셨고 금강경을 설하실 때에는 적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과거의 원력도 있었고, 중하근기를 위한 수보리의 연민어린 간청에 따라 금강경이라는 언설의 바다가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보충설명3>
不大聲以色: 여기서의 ‘大’는 크다는 형용사가 아니고 크게 여긴다는 동사이며, ‘以’는 영어의 'and'처럼 聲과 色을 연결해주는 것입니다.
明德: 최상의 밝은 덕은 진리이며 부처님의 威儀는 명덕의 훈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聲色之於以化民: 여기서의 ‘於’는 전치사이지만 ‘교화하는데 있어서--’라는 목적보어를 수용하고 함축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하늘의 도리는 아무런 조짐도 흔적도 없기 때문에 최상의 교화라는 뜻입니다. 하늘은 자기라는 인식이나 이기심이 절대적으로 없고 (=>無機), 그 공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無功) 최상의 교화가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無相도 無機, 無功을 말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배우는 우리도 비록 無機는 어렵지만 명예에 속박되지 않고(=>忘名,) 이기심에 속박되지 않아야 (=>忘機) 합니다. 그러려면 자기를 철저하게 부정하여 절대적으로 없는 ‘無’에로 자기를 적응시켜야 합니다.


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