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야기·지묵스님

절이나 하고 물러가시게!/지묵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2. 12. 03:45

 

 

절이나 하고 물러가시게!

조주어록 보기 33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반연(攀緣, 칡넝쿨에 얽히듯 여러 인연에 매임)에 끄달리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응당 그래야지?”

학인이 아뢰었다. “큰 스님, 이것이 학인의 본분사가 아닙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허, 아직 반연에 끄달리고 있어, 반-연-에- 끄-달-리-고- 있-어-!”

강설 / 배우려는 의도가 없는 사람의 질문. 오히려 스승을 가르치려는 태도이다. 반연에 끄달리지 않은 사람이 어떻단 말인지. 이런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수련회 때의 일이다. 젊은 학생들의 질문을 받다보면 이런 비슷한 경우를 경험한다. 질문이 5분이고 더 길어진다. 길게 질문을 늘어놓는 사람은 마치 제 지식을 자랑하는 양 청산유수이다.

질문은 잘 정리해서 간단명료하게 해야 한다. 생각을 정리하지 하지 않고 무턱대고 쏟아내는 질문은 그만큼 핵심도 흐려진다. 도대체 무얼 묻는 말인지, 무슨 소리인지 모를 질문을 받아본 적이 많다.

말이 곧 사람이니 말이 바르면 사람도 바르지만 말이 어지러우면 사람도 어지럽다는 옛사람의 말이 생각난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옛사람은 30년만에야 한 활로 화살 두발을 쏘아 겨우 반쪽 성인을 맞췄다고 하네요. 금일 청컨대 큰 스님께서는 모두를 다 맞춰 주소서.”

조주스님이 홀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떠나버렸다.

강설 / 조주스님은 홀연 반쪽 성인도 남기지 않고 휑하니 떠나버렸다.

조주스님이 법상에서 대중에게 이르셨다. “이런 법문이 있지. 도를 이루는 것(혹은 지극한 도)은 어렵지 않나니 다만 간택(揀擇, 이것일까 저것일까 주저주저함)함만을 꺼릴 뿐. 자, 여기에도 말이 있는 한 간택함이 명백하다. 허나 이 늙은 중은 명백한 속에도 들어있지 않아. 이런 까닭에 그대들이 이 늙은 중을 소중히 아끼는 바가 되는가?”

 

“법은 본래 不生이고 不滅이야

말 꺼내면 生滅에 떨어지고

말 꺼내지 않아야만 不生不滅

대중은 여기서 무엇을

불생불멸하는 도리라 생각하나”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큰 스님께서 명백한 속에도 계시지 않는다는데요. 그렇다면 또 무엇을 소중히 아낄 것이 있을까요?”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산승도 알-지- 못-해-!”

학인이 여쭈었다. “큰 스님께서 전혀 알지 못하시는데요. 그런데 어찌하여 명백한 속에도 들어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허, 묻는 건 그런대로 좋네만, 절-이-나- 하-고- 물-러-가-시-게-.”

강설 / 수준이 좀 있어야 대접할 만한데 아직 갓난아이 수준이라 멀었다. 절이나 하고 물러가시게!

명백함과 불분명함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조주스님이시다.

 

 

조주스님이 법상에서 대중에게 이르셨다. “법은 본래부터 불생(不生)이고 이런 까닭에 지금도 불멸(不滅)이야! 이런 말은 꺼낼 필요가 없는데, 말을 꺼냈다 하면 벌써 생멸(生滅)에 떨어지고 말을 꺼내지 않아야만 불생불멸(不生不滅)이기 때문이지! 대중은 여기서 무엇을 불생불멸하는 도리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처음부터 불생불멸(不生不滅)이지 않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하필 이 스님은 죽-은- 말-만- 알-아-먹-네-!”

강설 / 가만히 좀 있게나!

말에 떨어지면 불생불멸(不生不滅) 자체가 허무(虛無)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자나 글자로 이해하다보면 이런 어리석음에 떨어진다.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