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法語)

간화선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길/월암스님/함양 벽송사 벽송선원장

通達無我法者 2009. 12. 7. 00:07

 

 

간화선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길
[전문] 월암스님/함양 벽송사 벽송선원장

1. 간화선 수증의 이론적 토대
              

   
  혹자는 말하기를 간화선은 중국 선종에서 제시되어진 수행법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수행법과는 무관하며 불교의 정통 수행법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불교가 어찌 부처님께서 친설하신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한정할 수 있겠는가. 석가세존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법을 깨달은 모든 불조사의 가르침을 통칭하여 불교라고 말하는 것이 역사연기에 부합한 인식일 것이다. 초기불교, 상좌부불교, 대승불교, 중국선불교, 한국불교의 정통 교설이 상이한 내용일 수 없다. 

  그러므로 중국 조사선에서 집대성되어 한국에 전래된 간화선 수행법이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과 상좌부의 아비담마, 그리고 대승불교의 수증론과 동일한 지평 위에서 이해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러한 인식의 기초 위에 간화선의 이론적 토대를 초기불교의 교설 및 수행법으로 해석해 봄으로써 남방의 수행전통과 북방의 수행전통 위에 수립된 간화선이 수행과 깨달음의 핵심내용에 있어서 결코 다르지 않음을 살펴보고, 아울러 간화선에 있어서 화두 의심의 방법적 특징을 몇 가지 천착해보기로 하겠다.
 대혜선사는『서장』에서 화두 참구하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만 망상으로 뒤바뀌어진 마음, 사량하여 분별하는 마음,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 알음알이(知見)로 알려는 마음,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마음 등을 한꺼번에 눌러야 합니다. 눌러 내린 그 곳에서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조주스님께서 ‘없다’라고 답했다.”는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화두를 참구해 가다보면 “평소 낯설었던 공부길이 저절로 낯이 익어진다.”고 전제하고, “낯설었던 곳이 낯이 익어지면 그 동안 익어 있던 나쁜 버릇은 저절로 낯설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설은 것은 익게 한다.”는 참선공부의 요체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낯이 익고 설은 곳인가?

  오음(五陰) ‧ 육입(六入) ‧ 십이처(十二處) ‧ 십팔계(十八界) ‧ 이십오유(二十五有) ‧ 무명업식(無明業識) ‧ 사량분별(思量計較)하는 마음들이 밤낮으로 일어나되 길들이지 않은 말처럼 잠시도 쉴 틈이 없는 것이 익어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사에 유랑하게 하고, 좋지 않은 일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낯설어지면 보리열반과 진여불성이 바로 눈앞에 드러납니다. 그러나 눈앞에 들어날 때도 눈앞에 들어났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무명업식과 사량분별 등은 낯익은 것들이고, 보리열반, 진여불성은 낯설은 것이다. 여기서 기본적으로 설해지고 있는 것이 오온, 육입, 십이처, 십팔계 등의 교설임을 알 수 있다.
  대혜선사는 화두 참구를 통해 생사를 요달하는 사건을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주장하고,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인연이 흘러가는 곳에서 활발발(活鱍鱍)한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이와 같은 경계를 얻지 못했거든 세간의 번거로운 마음을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 즉 화두(조주 無字)로 돌이키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이 바로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이란 말이다. 대혜선사는 “오음(五陰) ‧ 육입(六入) ‧ 십이처(十二處) ‧ 십팔계(十八界) ‧ 이십오유(二十五有) ‧ 무명업식(無明業識) ‧ 사량분별(思量計較)하는 마음”, 즉 팔식(八識)이 계속 이어지지 않는 그 곳, 즉 무명으로 인한 번뇌 망념에 휘말리지 않는 그곳에서 무자화두를 참구하라고 지시함으로써, 화두참구의 요체를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오음(五陰) ‧ 육입(六入) ‧ 십이처(十二處) ‧ 십팔계(十八界) 등으로 대변되는 일체 번뇌망념(팔식 작용)을 놓아버린 그곳에서 화두 참구를 통해 번뇌가 바로 공성(空性)임을 요달하여 번뇌가 그대로 보리(菩提)인 진여불성의 중도(中道)를 깨닫게 하는 견성법(見性法)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종에서 주장하는 돈오자성청정(頓悟自性淸淨)이란 자기 성품이 무명번뇌에 오염되지 않는 본래적 진실성(淸淨)을 단박에 깨닫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간화선 수행의 사상적 연원은 혜능의 선법에서 찾을 수 있다. 혜능은『단경』에서 최후 유교설법(遺敎說法)을 통해 선종의 근본종지(根本宗旨)를 잃지 않도록 당부하면서 “삼과법문(三科法門)”과 “삼십육대법(三十六對法)”을 설하고 있다. 혜능이 설한 삼과법문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가리키며, 삼십육대법의 내용은 다름 아닌 중도를 수행하는 견성과 전법의 논리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삼과법문과 삼십육대법은 일념수행(一念修行)과 일념 해탈로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념을 수행하면 자신이 곧 부처이다.
  깨닫지 못한 즉 부처가 중생이요, 일념을 깨달은 즉 중생이 부처이다.

  혜능이 천명한 일념수행이란 중생과 제불의 차이를 단지 일념의 미오(迷悟)에 있다고 보고, 미와 오의 차이는 다만 일념지간(一念之間)에 있으므로 일찰나에 전미개오(轉迷開悟)할 것을 권장한다. 이 말은 중생의 일념은 무명에 오염되어 분별망념으로 생멸윤회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지만, 분별망념에 휘말려들지 않고 망념이 본래 공함을 여실히 깨달으면 본래심이 회복되어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념, 즉 오온이 공함을 보아 해탈을 성취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초기불교『아함』교설에서는 오온이 무상, 고, 공, 무아임을 다음과 같이 관찰하라고 역설하고 있다.

  색은 무상하다는 것을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바른 관찰이다. 바르게 관찰하면 곧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그것을 마음의 해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수상행식 역시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 무상하다고 관찰하는 것과 같이 그것들은 고(苦)요, 공(空)이요, 내가 아니라는 것(無我)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대혜가 주장하는 일대사인연이나 혜능이 설하고 있는 근봉종지와 일념수행 역시 부처님께서 설한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의 교설이 초기불교로부터 중국 선종에 이르기까지 기본 내용으로 설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초기불교는 생멸연기의 입장에서 부정적 언어(무상, 고, 무아, 부정)로 기술하고 있으며, 선종에서는 환멸연기적 입장에서 긍정적 언어(보리, 불성, 청정, 본래면목, 주인공)로 표현하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혜가 말한 보리열반, 진여불성이 번뇌망념 너머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듯이 혜능이 말한 자성(自性) 혹은 본성(本性), 심성(心性) 또한 공, 무아를 내용으로 하는 중도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선종에서 말하는 자성청정(自性淸淨), 본래면목(本來面目), 주인공(主人公), 평상심(平常心), 즉심시불(卽心是佛), 무위진인(無位眞人) 등의 언구는 실체적 진아(眞我: 아트만)의 의미로 설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설하신 공, 무아, 중도를 나타내는 존재의 참모습을 선종용어로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즉 일체의 분별적 사유(망념)가 공하다고 해서 지각하고 인식하는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고 존재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정신세계를 진제(眞諦: 勝義諦)라고 한다면, 이러한 진제(진리)의 입장에서 자성청정, 본래면목, 무위진인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사선에서는 자성, 보리, 불성, 진여 등을 철저한 공사상에 입각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 공(空)하므로 법이 공하며, 마음이 공하므로 성품이 공한 것이다. 몸과 마음 모두 공하므로 성품도 공하다고 한다. 내지 천 갈래의 이설도 모두 너의 본심을 여의지 않는다. 마치 지금 말하는 보리(菩提), 진여(眞如), 불성(佛性), 이승보살(二乘菩薩) 등 모두가 나뭇잎으로 황금이라 하고, 빈주먹 안에 보물이 있다고 말하는 방편설이다. 만약에 손바닥을 폈을 때 하늘이든 사람이든 일체대중은 모두 손바닥 가운데 한 물건도 없음을 본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本來無一物), 어디에 티끌이 있겠는가(何處有塵埃)”라고 하는 것이다. 이미 본래 한 물건이 없다면 과거, 현재, 미래에 본래 소유할 바가 없다. 따라서 수행자는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깨달아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조사선에서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서 제법의 성품이 공(空)함을 설명하고, 또한 제법의 성품이 본래 청정함을 말하고 있다. 선종에서는 제법의 성품, 즉 중생과 제불, 생사와 열반,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세간과 출세간 내지 육도(六道)와 사생(四生), 산하(山下)와 대지(大地), 유성(有性)과 무성(無性) 등 모두가 동일체(同一體)라고 설하고 있다. 그 원인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이름의 모양(名相)이 또한 공하기 때문이다. 유(有)도 공이요, 무(無)도 공이며 항하사 세계 모두가 원래 하나의 공”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선종에서 설하고 있는 자성청정, 본래면목, 주인공, 평상심 등은 초기불교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는 공, 무아, 중도 교설의 중국 선종적 전개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마조의 평상심(平常心)과 임제의 일심(一心)에 대한 법문 또한 이러한 사상적 토대 위에 설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道不用修). 다만 오염시키지 말라.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생사심으로 조작취향(造作趣向)이 있으면 모두 오염이다. 만약 그 도를 바로 깨달으려면 평상심이 도다(平常心是道). 평상심은 조작(造作), 시비(是非), 취사(取捨), 단상(斷常), 범성(凡聖)이 없음이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마음 법(心法)은 형상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꿰뚫어 두루 미치고 있다. 그것이 눈에 있을 때는 본다 하고, 귀에 있을 때는 듣는다 하며, 코에 있을 때는 냄새 맡는다 하고, 입에 있을 때는 이야기 한다 하고, 손에 있을 때는 잡는다 하고, 발에 있을 때는 걷는다고 한다. 본래 밝고 정묘한 한 덩어리(一精明)가 나뉘어서 여섯 가지로 화합(六和合: 六根, 六塵, 六識)하여 작용하는 것이다. 만일 한 마음(一心)에 번뇌 망념이 없으면 이르는 곳마다 해탈의 경지이다.

  무명 번뇌에 의해 오염(왜곡)된 인식이 실체적 자아 관념을 만들어 이분법적인 틀을 조작하여 옳음과 그름(是非), 단견과 상견(斷常), 범부와 성인(범성) 등으로 이원화시켜 버린다. 그러므로 존재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존재실상) 인식하지 못하고 왜곡된 허위의식의 틀 속에 갇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평상심이란 이러한 허구적인 인식의 오염이 없어 더 이상 조작하지 않고 존재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즉 진리를 진리 그대로 보는 마음인 것이다. 허구적인 표상에 오염되지 않는 본래심의 그 자리에서는 밖으로 닦음을 구하는 것이 오히려 망념을 보태는 격이 된다. 따라서 "도는 닦을 필요가 없고, 다만 오염시키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일심이나 평상심은 철저하게 공과 중도의 입장에서 설해진 선법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임제가 설하고 있는 일정명(一精明)의 법문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지만 이 또한 일심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며 일심으로부터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전개된다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공하다는 초기불교의 교설을 벗어나지 않으며, 다만 진리의 입장(眞諦)에서 긍정적인 언어로 일심을 설하고 있을 뿐이다.

  일정명一精明이란 일심인 것이며, 육화합六和合이란 육근六根을 가리킨다. 육근은 육경六境과 상대하고 육식六識을 형성하기 때문에 모두 십팔계十八界가 되는데, 십팔계는 일심一心의 전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능엄경』에서는 일심, 즉 일정명이 쉬어져서 근원으로 돌아가면 저절로 육식이 공한 도리를 깨닫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육근의 작용 또한 이와 같이 원래 일정명(一精明)에 의거해서 나뉘어 여섯 가지로 화합(六和合)을 이룬 것이니, 원래 한 곳만 쉬어져서 근원으로 돌아간다면 여섯 작용 모두 이루어지지 못한다.

  대승불교와 조사선에서 설하고 있는 일심이란 깨달은 승의제(勝義諦)의 입장에서 만법을 긍정적으로 표현(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일심, 법계, 진여 등이 번뇌 망념을 모두 소멸시키고 난 뒤에 나타나는 실체적 자아가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眞諦)와 현실의 세계(俗諦)가 둘이 아닌 중도의 입장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에 혼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를 임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마음의 법(心法)이며, 일체의 모든 이름은 마음의 이름(心名)이다. 이 만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다.”라고 전제하고, 만법을 때에 따라 법계, 진여, 이사(理事) 등의 이름으로 자재하게 사용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어서 아래와 같이 설하고 있다.

  갖가지 법이 성립되는 것은 모두 일심에 의거한 것이다. 건립되는 것이나 소탕되는 것 모두가 묘용이며, 묘용은 모두 자기 자신의 본체이다. 깨달음의 세계(眞諦)를 여의고서 현실적인 삶의 세계(俗諦)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 삶의 세계가 곧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며, 일체 모든 묘용은 자기 자신의 깨달음의 당체가 전개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또 다시 어떤 사람이 존재하겠는가? 일체 법은 모두 불법이다. 모든 법은 해탈이다. 해탈이란 진여이다. 모든 법은 진여를 떠나지 않는다.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行住坐臥) 일상사 모든 것이 부사의한 묘용으로 시절인연을 기다리지 않는다.

  간화선은 조사선사상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조사선에서 설하고 있는 일심, 법계, 평상심 등의 일체법은 자신의 깨달음의 당체가 전개된 것이다. 조사선의 평상심은 혜능의 무념법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선종에서 제시하고 있는 무념, 무심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무념위종(無念爲宗)”의 법문을 올바로 파악함으로 해서 선종의 제사상이 철저하게 부처님께서 설하신 중도법문에 기인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기로 하자.
  무념위종의 무념이란 결코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생각하되 생각하지 않는 것을(念而不念)”이르는 말이다. 즉 “생각하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에서 생각을 여의었다.”는 말이 된다. 즉 일체 사량 분별을 여읜 진여불성 그대로의 생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경계에 오염되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 이름한다. 스스로의 생각에 경계를 떠나서 법에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스스로의 생각(自念)이란 자심(自心), 자성(自性). 즉 일심의 진여본성을 가리킨다. 중생 각자의 진여본성에는 전혀 바깥 경계의 집착상이 없다.

  없다(無)고 하는 것은 어떤 일이 없다는 것이며, 생각한다(念)는 것은 어떤 물건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는 것은 두 가지 상(二相)의 모든 번뇌가 없다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것은 진여본성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혜능이 말하는 무념이란 생멸(生滅), 유무(有無), 진속(眞俗) 등 변견(邊見)의 망념을 없애고, 자심의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념위종의 사상은 하택과 혜해에 계승되어 더욱 발전적으로 정의되어 지고 있다.  

  무념을 종으로 하고(無念爲宗),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을 핵심으로 한다(妄念不起爲旨). 청정으로 체를 삼고, 지혜로써 용을 삼는다. ……무념이란 사념(邪念)이 없다는 것이지 정념(正念)마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있음(有)과 없음(無)을 생각하는 것을 일러 삿된 생각(邪念)이라 하고, 있음과 없음을 생각하지 않음을 일러 바른 생각(正念)이라 한다. 선과 악을 생각함을 삿된 생각이라 하고, 선과 악을 생각하지 않음을 일러 바른 생각이라 한다. 내지 고락(苦樂), 생멸(生滅), 취사(取捨), 원친(怨親), 애증(愛憎) 등을 일러 삿된 생각이라 하고, 고락, 생멸 등을 생각하지 않음을 일러 바른 생각이라 한다.

  무념(無念)이란 진념(眞念)이다. 만약 생각으로 생각을 삼는 것은 사념(邪念)이지 정념(正念)이 아니다. 왜 그러하냐? 경에 말하길, 사람에게 여섯 가지 생각(六念: 眼識 내지 意識)은 생각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여섯 가지 생각이 있으면 사념이라 부른다. 여섯 가지 생각이 없는 것이 진념이다.
  
  혜해선사는 우선 생각(念)에는 정(正)과 사(邪)의 구별이 있다고 분석하고, 연후에 무념(無念)이란 사념(邪念)이 없다는 것이지 정념(正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정념이란 유무(有無), 선악(善惡), 고락(苦樂) 등 이견(二見)의 차별상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사념이란 유무, 선악, 고락 등 양변을 생각(집착)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른바 정념은 유무, 선악, 고락 등의 양변에 집착하지 않음의 초기불교의 중도관(中道觀)이며, 대승불교의 반야중관(般若中觀)이자 제법평등관(諸法平等觀)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념이란 “오직 보리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묻기를, 무엇이 정념인가? 답하기를, 정념이란 오직 보리를 생각하는 것이다. 묻는다. 보리는 얻을 수 있는가, 없는가? 답한다. 보리는 얻을 수 없다. 묻기를, 이미 얻을 수 없다면 어째서 보리를 생각한다고 하는가? 답하기를, 보리라고 하는 것도 단지 가짜로 세운 이름에 불과하니 실로 얻을 수 없다. 또한 전후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얻을 수 없으므로 곧 생각이 없다. 오직 무념만이 진념이다. 보리란 생각하는 바가 없으니, 생각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즉 일체처에 무심함이다. 생각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념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일에 따른 방편에 의해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지만, 전부 하나의 체(體)로서 둘이 아니다. 다만 일체처에 무심함을 알면 즉시 무념이다.

  혜해선사는 정념이란 “오직 보리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보리열반은 본래 얻을 수 없고, 얻을 바가 없기 때문에 “무념은 모두 일에 따른 방편에 의해 가짜로 그 이름을 붙인” 중도정관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조사선에서 주장하고 있는 정념과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의 중요 교설인 정념의 일치를 확인할 수 있다.

  초기불교의 중요한 교설이자 수행법인 정념(正念: Samma-sati)에 대해 박태원 선생은『정념과 화두』에서 “‘무명이 주도하는 세계 왜곡과 오염의 인식 체계와 계열’에 휘말려 들지 않는 국면에 눈떠 그 자리를 ‘지키고 서는’ 멈춤인 동시에, 그 자리에 서서 가공과 왜곡을 일삼던 세계를 더 이상 조작하지 않고 ‘그저 보는’ 혹은 ‘단지 볼 뿐인’ 관찰이다. 그리고 이 멈춤과 관찰의 연장선상에서 지(止)와 관(觀)의 두 국면이 수립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동의한다면, 초기불교의 정념, 즉 sati 수행과 선종이 설하고 있는 정념의 개념은 완전히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무명에 오염된 허망한 분별적 사유인 번뇌망념을 여읜 그 곳이 견성에 눈뜨는 자리이며, 망념이 사라진 순일한 정념의 본래심에 계합한 마음이 즉심(卽心)이기에 "즉심이 부처(卽心是佛)"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즉심이 바로 "'무명이 주도하는 세계 왜곡과 오염의 인식 체계와 계열'에 휘말려 들지 않는" 마음인 sati인 것이다.

  그리고 “멈춤과 관찰의 연장선상에서 지(止)와 관(觀)의 두 국면이 수립된다.”라고 하는 지관겸수(止觀兼修)의 입장 또한 선종의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전통과 간화선에 있어서의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는 화두참구법과 동일 지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남방의 sati(혹은 위빠사나)수행을 통한 해탈열반과 화두 타파로 얻어지는 견성성불이 똑같이 실천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화두에 대한 의심을 매개로 한 화두참구의 구체적 방법론의 특징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 본래성(本來性). 대승불교는 기본적으로 중생본래성불(衆生本來成佛)의 기초 위에 수증론(修證論)을 제시하고 있다. 화두참구 또한 이러한 자성청정(自性淸淨), 즉 본각(本覺)의 토대 위에서 중생의 현실(不覺)을 직시하여 신심과 분심과 의심으로 시각(始覺)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는 시각이 본각에 합쳐지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참구의 대상이 되는 공안(화두) 또한 깨달은 불조사의 깨달음의 영역(기연)에서 설해진 언구이기에, 수선납자가 일단 화두에 의정을 일으킨다는 것은 이미 부처님과 조사의 깨달음의 세계에 발 디딤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생의 본성이 부처와 동일 지평위에 놓여 있음으로 해서 화두참구로 인해 일단 그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연결 고리가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안 화두가 불조사로부터 제시되었다 하더라도 수행자가 그 공안을 참구함으로 해서 그 공안은 전적으로 수행자 자신의 몫이 되어 그 본래성에 한 발짝 들여놓음의 국면을 이루어 구경에는 공안의 세계(깨달음)에 계합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전일성(全一性). sati 수행에 있어서 “'무명이 주도하는 세계 왜곡과 오염의 인식 체계와 계열'에 휘말려 들지 않는 국면에 눈떠 그 자리를 '지켜보기'"가 전일적으로 이루어지듯이, 화두 참구에 있어서도 일체의 오염된 망념이 차단된 무념의 상태에서 전면적으로 온전하게 이루어져야만 의단(疑團)을 이루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이다.

간화선에서는 화두와 사활을 건 한판 승부에서 건곤일척의 자세로 목숨을 던진다는 의미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현애살수(懸崖撒手)”라는 말로 전일성을 표현하고 있다.

  화두 의심 이 외에는 일체 망념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전무하여 오로지 강화된 의심이 형성됨으로 해서 번뇌는 그쳐 고요한 상태가 되고(寂寂) 의심은 더욱 또렷하게(惺惺) 되어 저절로 정혜쌍수가 이루어져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셋째 무규정성(無規定性). 간화선이 요구하는 화두 상의 의심은 '불확실성으로 인한 마음의 혼란이나 답답함, 궁금증'의 측면이 아니라, '그 어떤 개념적 판단도 서지 못하는 무규정적 심리상태'를 지목하는 것이다. 화두 참구는 일체의 분별적 ‧ 개념적 규정을 배제한다. 이것은 분별적 ‧ 개념적 망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말임과 동시에 화두에 대해 분별적 ‧ 개념적으로 규정하여 이해하려 들지 말아야 됨을 말하는 것이다.

  분별과 개념이라는 망념 속에서 화두를 들게 되면 화두 의심 역시 “분별 망념의 참구”에 지나지 않기에 전면적 참구가 이루어 질 수 없게 된다. 또한 총명이나 박식, 혹은 교학적 지식(알음알이)으로 분별하여 개념적으로 규정하지 말고 “오직 모를 뿐”이라는 의심 하나로 참구할 뿐이다. 의심만이 오롯이 드러나는 상태를 순일무잡(純一無雜)이라 한다. 의심이 순일하여 망념이 없는 심리 상태가 지속되면 시절인연을 맞이하여 견성 체험이 이루어지게 된다. 

  넷째 향상성(向上性: 持續性). 선은 직관(直觀)이요, 통찰(洞察)이다. 즉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로 봄이요, 전면적으로 온전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직관이나 통찰은 고도의 집중(화두삼매)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취향성이 없이는 중생을 바꾸어 부처로 전의(轉依)될 수 없다. 중생의 업력에서도 의심은 의심을 더하게 하는 심리 작용이 있듯이, 화두 의심에 있어서도 의심이 의심을 강화하는(疑團) 작용이 있어 의정이 스스로 타파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화두 참구에 있어서 가장 요긴한 것은 간절함(切)이다. 일대사를 반드시 해결해야 되겠다는 발심(發心)이 전제되었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의정이 끊어지지 않는 심리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틈이 없는 마음, 즉 무간단(無簡單)이 되어야 한다. 간단없는 의심을 이어가되 간절하고 철저하게 사무치는 의심이 일념만년(一念萬年)되게 하여야 깨달음의 단계로 향상할 수 있다.

2. 간화선 수증의 방편

(1) 발심(發心)
  부처님의 가르침은 삼계윤회를 벗어나서 해탈 열반을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 수행방법에 대해 『법화경』에 설하기를 부처님은 일대사 인연에 의해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다. 일대사 인연이란 불지견을 개시오입(開示悟入)하는 것이다. 옛 조사가 말하기를 ‘생사대사(生死大事) 무상신속(無常迅速)’이라고 하였다. 태어나도 그 태어난 곳을 모르니 태어남의 일이 크고(生大) 죽어도 그 죽어 가는 곳을 모르니 죽음의 일이 크다(死大). 중생의 목숨이 찰나지간에 달려 있어 무상(無常)이 신속(迅速)하여 초로(草露)와 같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신심납자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깨달아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기 위하여 발심, 수행하여야 한다. 발심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요, 견성성불의 토대가 된다. 생사의 장야(長夜)에서 무상대도를 깨우치기 위하여 출가위승(出家爲僧)하였으니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하루 속히 직지견성하고 광도중생할 것을 발원하여야 한다.

(2) 출가(出家)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는 모두 출가한 장부였다.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열반을 구하고자 욕망의 집을 여의고 무위의 경계를 깨달았다. 출가는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죽창수필』에 의하면 출가에는 사료간이 있다. 첫째는 출가의 출가요, 둘째는 재가의 출가요, 셋째는 출가의 재가요, 넷째는 재가의 재가다. 출가의 출가란 오욕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출가사문이 되어 생사대사를 해탈하고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요, 재가의 출가는 비록 세속에 머물러 있지만,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보리심에 머물러 생사와 해탈이 둘이 아님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출가의 재가는 비록 몸은 출가하였으나 세속을 그리워하고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유위의 업을 쌓아가는 것이다. 재가의 재가는 불법승 삼보를 알지 못하고 영원히 생사 가운데 머물러 생사해탈의 무위법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모름지기 간화행자는 출가의 출가자요, 재가의 출가자로서 정법안장, 열반묘심을 성취하여야 한다. 

(3) 정견(正見)
  발심출가한 수행자는 먼저 연기적 중도정관(中道正觀)을 확립하여야 한다. 즉 부처님께서 설하신 연기(緣起), 무아(無我)의 도리에 대한 진정견해(眞正見解: 正見)가 필요하다. 대승불교에서 설한 진공묘유의 중도사상에 기초한 연기적 인생관과 세계관의 정립을 통하여 올바르게 수증방편을 시설하여야 한다.

  선종에서도 연기중도를 수행하고 깨닫는 것을 종지로 삼고 있다. 조계대사도 『단경』에서 마지막으로 법을 유촉하면서 본종의 종지를 유실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는데, 그 종지로 “삼과법문(三科法門)”과 “삼십육대법(三十六對法)”을 내용으로 하는 중도정관의 수증(修證)을 강조하였다.

(4) 참문(參問)
  정견을 수립한 납자는 선지식을 참문하여야 한다. 선지식에는 외호(外護)선지식, 동행(同行)선지식, 교수(敎授)선지식이 있다.

  외호선지식과 동행선지식의 외호와 탁마에 의하여 반드시 교수선지식인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참방하여 법을 물어야 한다. 선지식이란 안목과 덕행을 갖추고 정도(正道)로 인도하여 정법을 깨닫게 해주는 스승을 말한다. 선지식은 납자에게 수증방편을 제시하고, 참문납자의 수행이력과 발심상태를 관찰하여 오도개안(悟道開眼)에 이르게 한다.
  근대선문의 선지식이신 만공선사도 참선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도량(道場), 도반(道伴), 도사(導師)의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수행에 가장 적합한 도량은 외호선지식이며, 함께 탁마해가는 도반은 동행선지식이며, 수증의 정도(正道)를 인도해주는 스승은 교수선지식을 말한다. 이 가운데에 납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스승의 역할이 가장 요긴하다. 선지식의 가르침 없이 도를 성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선지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 없이 무상대도를 이룬 경우도 없다.

(5) 결택(決擇)
  수행납자가 선지식을 참문하면 선지식은 순역(順逆)방편으로 접인하고 근기를 파악하여 지도한다. 참문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생사해탈에 대한 길을 물어야 한다. 조사선의 진면목에서 보면, 상근납자는 한 구절의 말 아래 바로 깨달아 백억 법문을 뛰어넘을 수 있으며, 한 번 뛰어넘어 바로 여래의 지위에 들어가야 한다(一超直入如來地). 그러나 중하근기의 사람은 근기와 인연에 따라 하나의 공안을 결택 받아 참구해야 한다.

  이때 선지식은 납자의 수행기연과 이력을 세밀히 관찰하여 화두를 결택해 주어야 한다. 화두는 우주와 인생에 대한 간절한 문제의식에 입각한 현성공안(現成公案)으로 간택하여야 한다. 납자 자신의 현실인식에 바탕에 둔, 즉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체절명의 생사화두여야만 현성공안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옛 조사의 깨달음에 바탕을 둔 1700공안이라 할지라도 수행납자에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의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사구(死句)가 되어 현성공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선지식은 수행자 자신이 철두철미하게 의심이 될 수 있는 자연(自然)화두를 결택해 주어야 한다.

(6) 참구(參究)
  현성공안에 의한 화두를 간택한 납자는 간단없이 참구해야 한다. 납자는 조사가 제시한 활구를 하루 24시간 끊어짐 없이 제시(提撕)하여야 한다. 납자는 오로지 화두에 전심전력할 뿐, 화두 이외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생각 생각에 간절히 화두에 대한 의단을 형성하여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경계에 이르러 화두삼매에 들어야 한다.

  대혜선사는 화구참구를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는데, 첫째 화두에 대한 의정을 일으키고, 둘째 화두를 간단없이 참구해야 하고, 셋째 번뇌망념을 끊고 투철히 깨달음이다. 화두에 대한 의심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는 갈등, 의심, 곤혹이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참구의 방법은 이른바 “화두를 본다(看話).”는 것인데, 여기서 화두(話)를 본다(看)는 것은 화두를 관(觀)한다는 뜻이 아니라, “화두를 의심한다.”는 말이다. 의심하고 의심하여 만 가지 의심이 하나의 의심이 되어야 비로소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될 수 있다.  옛 조사가 말하기를 “큰 의심에 크게 깨닫고(大疑大悟), 작은 의심에 작게 깨닫고(小疑小悟), 의심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無疑無悟).”라고 하였다.

  그런데 화두를 참구함에는 반드시 활구를 참구하여야 한다. 알음알이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을 사구라 하고, 일체의 분별망념을 초월하여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길마저 끊어진 것을 활구라 한다.

  원오선사는 “활구 아래에서 깨달으면 영겁토록 잊지 않고, 사구 아래에서 깨달으면 자기마저도 구제하지 못하니, 만약 조사와 부처와 더불어 스승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활구를 밝혀야 한다.”라고 활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렇듯 본분납자는 활구를 참구하여 사량분별을 여의고, 행주좌와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중생을 바꾸어 부처가 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억천만겁 내려오는 번뇌 망념을 돌이켜 화두일념으로 나아가는 것은 지난한 일임에 틀림없다. 옛 조사는 화두참구에 있어서 세 가지 중요한 요건을 설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삼요(三要)라고 불리는 신심과 분심, 그리고 의심이다. 이 삼요를 갖추어 타성일편을 이루어야 한다.

(7) 탁마(琢磨)
   조주선사가 말하기를 “10세의 어린 사미라도 나보다 나으면 기꺼이 배우고, 100세의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하면 기꺼이 가르쳐야 한다.”라고 하였다. 순역경계를 당하여 항상 화두가 여일한 가운데, 널리 배우고 가르쳐 공부를 더욱 순숙되게 하고 참구를 여물게 해야 한다.

  오늘날 납자의 일각에서 탁마의 정신을 망각하고 상대와 세상에 대한 허물로 허송세월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본색납자는 자기의 허물을 볼지언정 남의 허물에 대해 시비하지 않으며 도류(道類)와 더불어 항상 탁마하여야 한다.

  서산대사는 일찍이 “차라리 영겁 동안 생사에 윤회하더라도 모든 성인의 해탈을 구하지 않는 것이 선가의 안목이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지 않고 항상 자기의 허물을 보는 것이 선가의 수족(手足)이다.”라고 말했다.

  선가의 안목에 의거하여 수선탁마(修禪琢磨)하며 일체 생명을 보살피고, 선가의 수족에 의거하여 상대의 허물을 보되 나의 허물로 돌리고, 나의 장점을 보되 상대의 장점으로 돌리되, 그 장단점에 양변을 모두 초월하여 중도의 입장에서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한다.

  순경계에서 화두참구가 순일하더라도 역경계를 당하여 흩어져 버린다면, 화두일념이 될 수 없다. 순역경계 어디서나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끊어지지 않아야 의단이 독로하여 조관(祖關)을 투과할 수 있다.

(8) 행각(行脚)
  납자는 수행정진을 위하여 여러 선지식을 참방하고 도반과 더불어 탁마하기 위하여 행각을 할 수 있다. 행각은 만행으로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옛 조사가 말하기를 “하루 종일 밥을 먹어도 한 톨의 쌀알을 씹은 바가 없고,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한 뼘의 땅을 밟은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수행자는 보아도 본 바가 없고, 들어도 들은 바가 없어 일체 경계에 끄달리지 않아 오로지 여여하게 본분사를 지켜 나가야 한다.

  행각 중에는 되도록 번거로운 일을 피하고 오로지 화두일념으로 일체 경계를 수용하되 경계에 매몰되지 않고, 수연자재(隨緣自在)하게 공부를 지어가야 한다. 행각 중에는 항상 계정혜 삼학을 등지하고, 육바라밀을 호지하는 대승보살로서의 본분납자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9) 삼매(三昧)
  화두를 들지 않아도 들리고 떨쳐내어도 떨쳐지지 않아 저절로 의정이 현전하게 되면 이를 자연화두(自然話頭)라 한다. 고요한 가운데 또렷또렷하고(寂寂惺惺), 또렷또렷한 가운데 적적(惺惺寂寂)한 때에 이르러 몸과 마음과 경계가 한결같아, 동정일여(動靜一如)하고 몽중일여(夢中一如)하고 오매일여(寤寐一如)한 화두삼매에 들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여(一如)는 “화두가 끊어짐 없이 늘 한결같다.”는 의미이다.

  동정일여란,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간단없이 지속적으로 의정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몽중일여란 화두가 잠잘 때 꿈 가운데서도 한결 같음을 의미하고, 오매일여란 깨어있을 때나 깊은 잠을 잘 때에도 의심이 지속되는 것을 가리킨다.
  언제 어디서나 생사심(生死心)이 끊어지고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되어, 마치 여울물에 비친 달과 같아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헤쳐도 없어지지 않는 때에 이르면 세월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화두할 때 화두 함(能)과 화두 되어짐(所)이 하나 되어 능소(能所)가 끊어져 동과 정이 일여하고 오와 매가 일여일 때를 동정일여, 오매일여의 경지라고 표현한 것이다. 저 화두가 일여한 경지에 이르러 화두하는 자도 없고(能空), 화두 함도 없으니(所空) 움직임과 고요함,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 공하여 실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움직이는 가운데 고요함이 있고,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으며, 밝음 가운데 어두움이 있고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는 것이다.

  이때가 바로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깨어있음도 없으며 잠듦도 없는 화두삼매일 뿐이다.

(10) 거량(擧量)
  화두수행 중에 힘을 얻은 바가 있으면 공부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점검받기 위하여 스승에게 수행을 점검받는 법거량을 할 수 있다.

  간화선에서는 화두수행이 제대로 진행되고 순숙되고 있는지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공부상황과 화두를 타파했는지 검증 받는다. 여러 유형의 물음과 검증이 있을 수 있지만, 깨달음의 정사(正邪)를 판별하기 때문에 통칭 법거량(法擧量)이라 한다.

  법거량은 스승과 제자가 비밀스럽게 1대 1로 면대하여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서 단독 혹은 여럿이 문답을 통해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의 문답은 즉문즉답(卽問卽答)으로 진행되며, 문답이 격내(格內)와 격외(格外)의 언어와 행동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거량은 법을 구하는 자세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진실된 마음이 합해져 향상일로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11) 점검(點檢)
  납자는 수행정진 하는 중에 방장, 조실, 선덕 등 선지식을 참방하여 자신의 공부를 점검해야 한다. 특히 안거 중에는 입실하여 공부에 미진한 점과 부족한(막힌) 부분을 묻고 정로를 지시받아야 한다. 수행자는 때때로 선지식을 찾아가 공부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지는 않은지, 고칠 점과 보완할 점을 일일이 여쭈어 스승의 지도에 따라 시정하여 공부가 무르익도록 점검받아야 한다.

  이 때 선지식은 수행과정에서 신심과 원력의 문제, 공부 중에 부딪치는 여러 가지 경계의 문제, 병통에 대처하는 방법, 참구를 깊고 면밀하게 하는 방법 등에 대하여 지도해 주며,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때까지 자상하게 일러주어야 한다.

  선지식의 지시(점검)를 받지 않고 홀로 공부할 경우, 사도(邪道)에 빠질 위험이 있기에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에서는 선지식과의 문답을 통한 점검을 매우 귀하게 여긴다.

(12) 인가(認可)
  인가는 수행자가 화두를 타파하였는지를 점검하여 깨달음을 인정하고 인정받는 수행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다. 즉, 수행자가 화두수행을 통해 견성오도(見性悟道)했을 때 선지식이 그 깨달음의 경계를 점검하고 올바로 깨달았으면 인가하여 점두(點頭)해주는 것을 말한다.

  간화선에서 깨달음의 정과 사를 판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으므로, 수행자가 각고의 수행정진 끝에 깨달음을 성취하였을 때, 선지식의 인가점두를 통하여 객관적 인정을 획득하게 된다.

  선지식은 철저한 점검을 통하여 인가함으로 수행자가 작은 지견에 빠지거나 착각도인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신이 체득한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도, 옳고 그름을 확인하는 마지막 절차인 인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인가받지 않는 무사도인(無師道人)은 자칫 외도와 사도에 빠질 수 있다.

  예로부터 설사 깨달음을 얻어 인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더욱 정진하여 보림(保任)에 힘쓰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다. 조그마한 경지를 얻었다고 인가도 받지 않고 보림도 없이 함부로 망동하게 되면, 자신도 망치고 타인도 그릇된 길로 인도하게 된다.

(13) 교화(敎化)
  수행자가 견성성불하기 위하여 수행 정진하는 것과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것은 결코 두 가지 일이 아니다. 항상 화두를 참구하고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두 수레바퀴를 굴려 지혜와 자비가 함께 수행되어지는 비지쌍운(悲智雙運), 복혜쌍수(福慧雙修)의 가풍을 진작시켜야 한다.

  수행 가운데서도 이러할진대 깨달음을 성취한 연후 육도중생을 널리 구제함은 대승보살의 비원일 것이다.『심우도』에서도 깨달음을 얻고 난후(返本還源) 마지막으로 중생의 삶의 현장인 저자가리로 나아가(垂手入廛) 화광동진(和光同塵)할 것을 설하고 있다.

  중국의 조사선과 달리 한국 선종의 종풍은 늘 선과 화엄의 결합으로 나타나고 있다. 선의 견성성불과 화엄의 보현행원이 결합하여 선수행과 보현행원이 일치하는 선엄일치(禪嚴一致)의 가풍을 유지해 왔다. 선엄일치에서 주장된 심지법문이 바로 견성성불과 요익중생이다.

 

 

 

"선방 30년이 무슨 자랑거리인가"

[야단법석] 월암 스님, 수좌들에게 촌철살인
"조계종 거량은 멱살잡이? 입지 좁아지는 간화선

다음은 벽송선원 선원장 월암 스님의 법문 가운데 가사화하지 못한 부분을 추려 뽑은 것이다.
 

 

   
▲ 벽송선원장 월암 스님
철마다 안거 2천여명 들어온다. 많은 스님들이 간화선 이외의 수행을 택하고 있음을 미뤄 짐작할 뿐이다. 지도 점검을 해주는 이가 없으니 지대방에서 나오는 얘기로 봐서 그렇다. 간화선은 예전에 비해 다른 수행법에 많이 밀린다. 많은 사람들이 출가의 재가자는 아닌지 깊은 성찰해야 한다. 재가의 출가, 출가의 출가자가 돼야 보현행원을 실천할 수 있다.

소통 거부하는 선방 "야단법석 나가지 말라"

지난번 실상사 야단법석에서 향봉 스님이 직설적으로 말한 게 <불교닷컴> 등에 보도돼 수좌회에서 회의를 했다. 설왕설래하다가 결론은 '다시는 야단법석에 수좌가 참석하면 안된다'로 내렸다. 특히 나는 법문 나갈 기회가 많았다. 나를 지목해서 주의하라는 뜻으로 들리더라. 그래서 오늘 강의도 조심스럽다. 대표 스님 몇 분 말씀이 '그래도 나가라'고 해서 나왔다.

요즘 수좌들은 불친절하다. 불친절한 간화선이다. 입실한 수좌들 점검은커녕 요즘 조실 방장 스님은 자기 상좌 이름도 모른다. 화두를 묻는 스님도 아무 생각 없고, 대답하는 분도 입 벌리고 침흘리는 X에게 뼈다귀 던져 주듯이 화두를 준다. 자신과 우주에 대한 사무치는, 팔만사천 땀구멍이 열리듯이 치열함이 있어야 하는데. 3개월 동안 앉아서 시계만 쳐다보는 이도 있다. 죽비를 놨는데 그제사 화두를 어떻게 드느냐고 묻는 사미가 있더라. 이게 현실이다.

선지식이 없다라고 말하지만 '선지식이 필요 없는 시대'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대 달마 혜능 부처님이 오신들 그 분들을 인정하겠는가. 지식이 높아지고 물질문명 발달한 지금이다. 헐벗고 고통당할 때 그들이 필요한 것이다. 천당과 극락이 필요 없는 시대다. 중생의 업력 그 편리함에 만족하는 것은 아닌가. 수행자의 한사람으로서 진정으로 선지식을 구하고 있는가. 경청하는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입전수수는 뒷전 조실방장 돌아갈 때까지 한다"

조주 선사 20세가 되기도 전에 남전선사를 예배했다, 40년을 남전 스님 시봉을 했다. 마지막 20년 동안 중국을 돌아다녔다. '100살이라도 나보다 못하면 가르칠 것이고 10살이라도 나보다 나으면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입전수수(入纏垂手 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돕다). 조실방장 최고의 자리를 던지고 삼수갑산으로 갔다. 육신 보살들이다. 요즘은 돌아가실 때까지 조실방장한다. 후계자 싸움이나 하고.

현성공안(現成公案 현상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구도(求道)의 과제로 한다). 천년 전의 운문 임제 스님이 말한 말라비틀어진 말로 뭣을 하겠다는 건가. 내 자신의 문제로 오버랩되지 않으면 현성공안이 되지 않는다. 인간과 우주에 관한 사무치는 발심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출재가를 막론하고 탁마의 장이 사라졌다. 야단법석은 탁마의 장이다. 앉아 있으면 그 자리가 선방이다. 대혜 스님은 '오래앉아 있기 대회하는 수행은 잘못된 것이다.'라며 묵조선을 비판하고 간화선을 주창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종일관 앉아 있는 것만을 가르친다. 실제 경계에 부딪히면서 공부해야 한다. 내용은 간화선이면서 방법은 묵조선을 한다면 되겠나. 해제 죽비치면 화두는 일주문에 걸어놓고 나온다. 간화선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혜능 스님만 최고이고 신수 스님은 안본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선사는 종파주의 입장에서 편향되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혜능 스님만 최고이고 신수 스님은 왜 거들떠 보지 않나. 자기 은사는 고승 선사보다 더 큰 부도탑을 세우는 현실이다. 교조주의에 빠져있다면 한국불교는 문제다. 한국 선방은 7성급 호텔이다. 중국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겨울에 입김이 나고 서리가 낀다. 여름엔 모기와 싸운다.

이제 좀 공부가 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공부될 듯 하니 세월이 흘러 버렸다. 좀 더 젊고 건강할 때 해야한다.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지 않고는 매화꽃을 피울 수 없다.

분별망념으로 그냥 의심한다. '의심하라'는 것은 해답을 찾으라는 것이다. 문 밖에서 보고 있으면 안된다. 문 안으로 들어가 화두와 하나가 돼야 한다. '본래면목' '중도정관'이라고 하는 자리에 서서 잡아야 한다.

염불한 사람은 염불선이 최상승이다. 감기 걸린 사람에게는 감기약 머리 아프면 두통약이 최고듯이. '자연화두'여야 한다. 저절로 들어지는 화두가 가볍다. 무거우면 오래 못 간다. 대혜스님도 자연화두를 말했다. 스스로 그러함이 자연이다. 우리는 억지로 든다. 무거우니 몇 년하다 팽개쳐버린다. '정견'이 바로 서면 자연화두로 나아간다. 한번 뛰어 넘으면 건방만 늘어가지고 아무리 오래 수행해도 도로아미타불이다. 관념 속의 수행은 백날해봐야 소용없다.

"오와 매가 유하면 오매일여는 틀린 말이다"

오매일여란 오와 매가 유한 입장에서는 안맞는 말이다. 오도 매도 없으면 일여가 된다.

나의 수행과 조사들의 말이 조합될 수 있는가. 수행의 입장에서는 불교는 신앙과 수행의 종교다. 신앙 수행 체계가 분리돼 있다. 화두참선하고 있는 납자들은 불전에 심신이 없다. 공부께나 하는 사람들은 신심이 없다. 신심있는 사람들은 공부가 약하다. 신해행증이라는 것이 수행체계로 갖춰져 있는 입장에서 융섭하게 하나로 드러나야 한다. 수행 신앙 하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된 수행자라 할 수 없다. 선방의 풍토는 조석예불을 법당에 안가고 선방서 대충한다. 중노릇 처음할 때는 불전에 신심이 강한데 점점 사라진다.

실천 불교가 아니고 관념 불교하고 있다. 내가 더 모범이 돼야 하는데 나부터 그렇지 못하다. 조실방장이면 더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어떠한가. 비구 5년차면 뒤로 나앉는다. 부처님께 공양올리는 것도 돈 주고 사람 사서 한다. 월급 받는 부전이 우리들 대표로 나가서 하는 것 아니냐. 본사 말사 주지 먼저 신심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왜 중노릇을 하면할수록 관념적으로 흐르는가. 나부터 그렇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삼매의 입장에서 보면, 정견이 확립되어 실참이 가미되면 성인의 깨달음이 아니더라도 의식이 달라진다.

조계종의 거량은 전부 멱살잡이다. 임제문풍에서 거량하는 것이 멱살잡이 하는 걸로 안다. 조실방장 스님들이 아들들에게 멱살잡히면 부끄러우니까 거량을 피한다. 그러니 '입실문실'이 있을 턱이 있나. 옛날에는 거량이 중요한 깨달음의 수단이었다. 점검도 없어져 버렸다. 밝은 태양과 달이 없으면 할 수 없이 반딧불 눈이라도 모아 밝혀야 한다. 말법시대 아닌가. 선지식 명안종사가 없으면 서로 반딧불이 되어 탁마하고 이끌어주는 역할해줘야 한다. 그런데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고 있다.

선배 스님들이 임제가풍을 굉장히 자존으로 내세운다. 선종의 오가. 임제 조동이 맥이 이어져 오는 입장이라 위대하다고 한다. 북경 및 하북성의 수도 바로 옆 정정현 임제사는 당나라 시대에는 변방 중의 변방, 북경 수비도시다.

"임제선풍은 군사문화의 잔재물이다"

임제를 둘러싸고 있는 교화대상은 군인들이다. 창, 활, 방 등이 군사 용어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가 군인이냐. 민간인에 맞는 언어로 바꿔야 한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절박한 사람들을 위한 언어들이라 폭력적이다. 그래서 간화선하는 사람들의 인격이 '단순 무식 폭력 고집 불친절'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조주 천태 북종 위양종 법안종이 문풍이 내려왔다면 법의 모습이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은 중화주의적인 입장이다. 부처는 인도인이라, 중국은 중국인 조사를 으뜸으로 친다. 법당은 현재의 부처인 조실방장이 법문하는 곳이다.

우린 독단적 문화를 가지고 몽골과 조선족, 한국은 독립국가로 끝까지 남아 있는 이유가 있다. 한국선도 특징 맛 가풍 종풍이 있어야 한다. 간화선의 태동 연원은 우리 것이 아니다. 태양은 하나지만 중생이라 국가 민족의 경계가 있다. 한국선, 불교의 특징이 있어야 한다. 무조건 '조사선 최고' 이건 아니다. 간화선이 우리 것이다라고 하면 중국 사람들 콧방귀 뀐다. 전부 중국 것 가져다 쓰는 것 아니냐. 우리는 조사를 중국조사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게 늘 배웠기 때문에. 조사선 제일주의로 따라가서는 안된다.

"고시원 30년이면 패가망신. 그런데 우리는?"

한국불교는, 수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화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여 있다. 선방은 선불장이라 한다. 부처 뽑는 고시원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방에 몇년 보냈냐를 계급장처럼 자랑한다. '내가 고시원에서 30년 보냈다' 그러면 그 놈은 미친 놈이다. 자기도 집구석도 사회도 망한다. 선방서 오랜철 난 것은 귀감이 될 수도 있다. 수행과 깨달음이 하나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몇철 난 것만 뻐기고 있다면 양비론으로 접어들 수 있다.

삼매에 들어 오래 앉아 있었다면 모르지만 억지로 앉아서 며칠을 몇년을 버텼다면 망신이다. '활발발'이라고 하는 간화선이 살아있는 말귀여야지, 말라비틀어진 사구를 억지로 들고앉아 의심하고 있다면 되겠나. 간화선의 위기가 아니라 간화선 수행자들의 위기다.

 

[불교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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