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초기불교산책·각묵스님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

通達無我法者 2010. 8. 27. 22:10

 

 

불교TV 강의 자료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 ― 해체해서 보기


2008년 11월 6일부터 매주 목/금/토 방영



강의: 각묵 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강의 주제:

제1강: 왜 초기불교와 해체해서 보기인가

제2강: 초기불교의 기본주제: 행복1

제3강: 초기불교의 기본주제: 행복2(궁극적 행복)

제4강: 초기불교의 중요법수 개관 - 온/처/계/근/제/연 37조도품

제5강: 초기불교의 진리 ― 사성제: ① 고성제와 집성제를 중심으로

제6강: 초기불교의 진리 ― 사성제: ② 멸성제와 도성제를 중심으로

제7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1: 색온

제8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2: 수온

제9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3: 상온

제10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4: 행온/식온

제11강: 마음 과연 무엇인가 ―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

제12강: 세계란 무엇인가 ― 12처와 18계를 중심으로

제13강: 인간이 가진 능력들 ― 22근(기능)을 중심으로

제14강: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 1 ― 12연기를 중심으로

제15강: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 2 ― 12연기를 중심으로

제16강: 초기불교의 수행 ―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1

제17강: 초기불교의 수행 ―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2

제18강: 초기불교의 수행 ― 4정근과 4여의족을 중심으로

제19강: 초기불교의 수행 ― 오근과 오력을 중심으로

제20강: 초기불교의 수행 ― 칠각지를 중심으로

제21강: 초기불교의 수행 - 도란 무엇인가 ― 팔정도1

제22강: 초기불교의 수행 - 도란 무엇인가 ― 팔정도2

제23강: 초기불교의 수행 - 사마타와 위빳사나(지관수행)

제24강: 초기불교의 수행 - 삼학과 오법온과 칠청정

제25강: 족쇄를 푼 성자들 - 10가지 족쇄와 네 가지 성자


* 질문은 http://cafe.daum.net/chobul을 방문하여 올려주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답변드리겠습니다.



제1강: 왜 초기불교와 해체해서 보기인가


⑴ 무엇이 초기불교인가?

①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이다.

   부처님 출생에 관한 학설

      1. 남방전통: 기원전 543 혹은 544년

      2. 중성점기설: 기원전 483년

      3. 일본학자들: 기원전 386 혹은 383년 (아쇼까 즉위를 불멸 116년 후로 본 계산)

      4. 몇몇 일본학자들: 기원전 486년 (아쇼카 즉위를 불멸 218년 후로 본 설)

② 초기불교는 조금 더 넓혀서 보면, 불멸 218년 후(스리랑카의 설) 혹은 불멸 116년 후에 즉위한(캐쉬미르의 전승)의 아쇼까 대왕 때 거행된 삼차결집에서 결집이 완료된 가르침을 말한다.

③ 가장 넓게는 빠알리 삼장(Ti-Piṭaka)에 전승되어오는 모든 가르침이 초기불교이다.


④ 초기불교의 역사적인 근거는 니까야(Nikāya)와 아함(阿含, Aagama)이다.

   니까야(Nikāya)는 ‘모은(collected) [가르침]’이란 뜻이다. ni(아래로)+√ci(to gather 초기경전에서는 ‘모임, 회합, 무리’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아함(Aagama)은 ‘전승된(handed down) [가르침]’이다. ā(이쪽으로)+√gam(to go)


   4부 니까야: 디가(Dīgha) 니까야, 맛지마(Majjhima) 니까야, 상윳따(Saṁyutta) 니까야, 앙굿따라(Aṅguttara) 니까야(일본에서는 각각 장부(長部), 중부(中部), 상응부(相應部), 증지부(增支部)로 옮겼음)는 초기불교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다 소부 니까야(Khuddaka Nikāya)의 운율로 된 경들, 즉 숫따니빠따(經集, Suttanipāta), 법구경(法句經, Dhammapāda), 자설경(自說經, Udāna), 여시어경(如是語經, Itivuttaka), 장로게(長老偈, Theragāthā), 장로니게(長老尼偈, Therīgāthā), 본생담(本生譚, Jātaka)의 7가지는 당연히 초기불교의 영역에 포함되어야한다. 오히려 숫따니빠따는 4부 니까야보다 더 오래된 가르침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4아함(Aagama): 장아함(長阿含), 중(中)아함, 잡아함(雜), 증일(增一)아함이다. 이들은 한문으로 거칠게 그리고 축약되어 번역되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일차자료가 되게에는 불충분하다. 니까야와 비교 가능하기 때문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하겠다.


** 율장(Vinaya)은 승가의 계율과 승단의 규정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가르침(dhamma)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율장은 한역 오대광율과 상좌부 율장 등으로 오늘 날 까지 전승되어오지만 그 구조와 내용은 전체적으로 대동소이하다.

한역 율장은 다섯 가지가 잘 알려져 있다. 이를 중국에서는 오대광율(五大廣律)이라 불렀다. 그것은 십송율 61권(404~409, 불야다라, 구마라집), 마하승기율 40권(불타발타라, 법현, 416~418) 사분율 60권(410~412, 축불념), 오분율 30권(불대집, 422~424),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701~713)이다. 그리고 상좌부 율장이 스리랑카와 미얀마와 태국 등의 남방에서 빠알리어로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으며 잘 실천되고 있다. 그 외 산스끄리뜨 등으로 된 단편 들이 다수 존재한다.

상좌부 율장(律藏, Vinaya-Pitaka)은 ① 비구 위방가(Bhikkhu-vibhaṅga, 비구 분석, 비구 빠띠목카) ② 비구니 위방가(Bhikkhunī-vibhaṅga, 비구니 분석, 비구니 빠띠목카) ③ 마하왁가(Mahāvagga, 大品) ④ 쭐라왁가(Cullavagga, 小品), 이 둘을 칸다까(Khandhaka, 犍度, 品)라 부름) ⑤ 빠리와라(Parivāra, 補遺)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있는데 한역오대광율도 같은 방법으로 되어 있다.


상좌부 논장(論藏, Abhidhamma-Pitaka)은 다음의 칠론(七論)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집론(法集論, Dhammasaṅgani), 분별론(分別論, Vibhaṅga), 계론(界論, Dhātukathā), 인시설론(人施設論, Puggalapaññatti), 논사(論事, Kathāvatthu), 쌍론(雙論, Yamaka), 발취론(發趣論, Paṭṭhāna)

북방 설일체유부도 칠론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품류족론(品類足論)』 『식신족론(識身足論)』 『법온족론(法蘊足論)』 『시설족론(施設足論)』 『계신족론(界身足論)』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의 6족론과 가다연니자(Kātyāyaniputra)가 지은『발지론(發智論)』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광박한 주석서인 『大毘婆沙論』도 중요하다.


⑵ 왜 초기불교인가?

첫째, 초기불교는 불교의 시작점이다.

모든 나무에 뿌리가 있듯이 불교 2600년의 전개에도 그 뿌리가 있다. 뿌리를 거부하고 나무가 살아남을 수 없듯이 뿌리를 모르는 불교는 역사를 아는 이 시대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 초기불교는 역사를 아는 이 시대에 불교 만대의 표준이다.

부처님의 금구성언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초기불교는 불교 만대의 뿌리요 그래서 모든 불교의 표준이 될 수밖에 없다.

셋째,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합리성과 체계성에 바탕하고 있으며 분석적이다. 이는 수학을 토대로 하여 전개되는 과학이라는 현대의 방법론과 일치한다. 세계적인 불교수행지도자인 고엔카 거사님은 불교를 Science(과학)이라고 역설한다. 5온/12처/18계/22근/4제/12연 37조도품

넷째, 초기불전의 매개 언어인 빠알리어를 비롯한 범어는 격변화와 동사곡용을 기본으로 하며, 이는 한글과 같은 언어체계이다. 그러므로 한문 경전과 달리 문법적 구조가 정확하다. 그러므로 문장을 곡해하거나 왜곡하거나 잘못 이해할 소지가 현저히 줄어든다.

다섯째, 초기불교 경전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는 주석서가 있다. 이 주석서는 사리뿟따 등 부처님의 직계제자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쉽게도 북방의 아함에는 주석서가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빠알리로 기록된 니까야로 된 초기불교는 불교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서 탈피하여 불교교리의 곡해가 제거될 것이다. 소설불교와 신변잡기불교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현대과학의 방법론이 수학이듯이 주석서의 방법론은 아비담마(대법, 법에 대해서)이다. 둘 다 분석적이라는 측면에서 같은 방법론이다.

여섯째, 초기불교의 이해는 자주적인 진정한 한국불교를 구현 할 수 있다. 부처님의 원음을 통해서 중국불교를 바판적인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원효스님 등이 추구했던 자주불교의 전통을 오늘에 구현할 수 있다.

일곱째, 교세가 위축되고 있는 한국불교가 딛고 일어서야할 바닥이요 출발점이다.


⑶ 왜 해체해서 보기인가?

초기불교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해보라면 주저 없이 ‘해체해서 보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해체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경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데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영감이 가장 뛰어난 분으로 칭송되며 시작(詩作)에 능했던 왕기사 존자는 상윳따 니까야 천 명이 넘음 경(S8:8) {742}번 게송에서 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bhāgaso pavibhajjaṁ) 설하시는 분”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주석서는 “마음챙김의 확립 등의 부분(koṭṭhāsa)으로 법을 해체하는 것(dhammaṁ vibhajantaṁ)이라는 말이다.”(SA.i.279)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해체는 pavibhajja/vibhajja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위밧자(vibhajja)라는 술어는 빠알리 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밧자와딘(해체를 설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이런 상좌부 불교를 일본학자들은 분별상좌부라 부른다. 분별이란 말이 사량분별이라는 용어에 익숙한 우리의 어감으로는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아서 강의자는 해체나 분석이라고 옮긴다. vi-는 분리접두어고 √bhaj는 to divide의 뜻이다.

물론 이러한 분석과 해체의 궁극적 지향점은 개념[施設, paññatti]의 해체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명칭이나 말 즉 개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의 도처에서 강조하신다.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처/계/연 등으로 설해지는 모든 존재(제법, 유위법, sabbe dhammā)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함으로 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그래서 해탈/열반/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경전의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다. 특히 상윳따 니까야의 무더기 상윳따(S22)나 감각장소 상윳따(S35)나 인연 상윳따(S12) 등의 많은 경들은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땅에 떨어진 머리칼을 보고 아무도 아름답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머리라는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색깔과 특정한 형태로 여인이라는 전체상과 얼굴이라는 부분상에 묶여 있을 때 머리칼을 아름답다하고 그것에서 애욕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머리칼을 ‘단지 머리칼’로만 보면 그것은 애욕의 대상이 아니다. 이영애의 눈과 코와 입술이 아무리 예쁘다할지라도 그것은 전체상을 이루고 있을 때 이야기다. 눈을 빼고 코를 분리하고 입술을 도려내어 알코올에 담가두었다면 아무도 그것에서 애욕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애욕을 일으킨다면 그야말로 성도착증환자이거나 또라이일 것이다. 그리고 머리칼, 눈, 코, 입술 등은 땅, 물, 불, 바람이라는 네 가지 근본물질들의 조합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이들을 아름답다 여기는 것은 우리가 관념적으로 취하는 전체상과 부분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처럼 해체해서 보면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명칭이나 말에 속지 않고 이런 것들은 단지 오온이고 12처이고 18계이고 조건발생(연기)일 뿐임에 사무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온처계연으로 해체해서 보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그래서 대념처경(D22) 등의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수행 방법의 핵심도 나라는 존재를 몸/느낌/마음/심리현상들(신/수/심/법)로 해체해서 그 중의 하나에 집중(삼매, 사마타)하거나 그 중의 하나의 무상/고/무아를 해체해서 보는 것(통찰, 위빳사나)이다.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그는 불교적 수행을 하는 자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나와 존재와 세상과 생사문제를 이처럼 온처계연으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염오-이욕-소멸을 통해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해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해체해서 보는 연습을 거듭할 때 우리는 깨달음 해탈 열반을 실현하게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고구정녕하신 가르침이라고 파악한다. 그래서 강의 제목을 “해체해서 보기 ―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으로 잡았다.


부처님께서는 대반열반경에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는 유훈을 남기셨다. 초기불교의 법수는 전통적으로 온/처/계/근/제/연(5온/12처/18계/22근/12연기)과 37조도품으로 정리가 된다.(청정도론) 전자는 교학의 핵심이 되는 법수이며 후자는 수행의 기본이 되는 가르침이다. 이 모든 가르침이 모두 해체해서 보기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번 강좌를 통해서 이러한 초기불교의 기본 법수들을 초기경에 입각해서 정확하게 점검해보려 한다. 초기불교의 법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토대가 될 때 불교 2600년사를 통해서 전개되어온 후대 모든 불교의 가르침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된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공(空, śūnya)으로 보려는 것이 반야중관의 직관적인 시각이고 세계를 깨달음의 입장에서 아름답게 꽃으로 장엄하여 보려는 것이 화엄의 종합적인 시각일 것이다. 여기에 반해 초기불교는 세계를 법으로 해체해서 봐서 깨달음을 실현하려는 해체적인 시각이다. 아직 깨달음을 실현하지도 못한 범부중생이 세상을 해체해서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내지 못하면서 깨달은 양하여 세계를 찬미하고 찬탄하여 횡설수설한다면 이 어찌 슬픈일이 아니겠는가. 직관이나 통합만을 강조해온 한국불교에는 초기불교의 해체적 시각이 너무너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이번 강의가 부처님의 원음을 제대로 이해해서 올바른 불교적 인생관과 세계관과 실천관을 갖추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제2강: 초기불교의 기본주제: 행복1


불교의 목적: 이고득락(離苦得樂)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행위, 정치행위, 문화행위, 철학행위, 의술행위, 종교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불교도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예부터 스님들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표현하였다.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구경의 행복이 된다.


금생의 행복

부처님께서는 금생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기술(sippa, vijja)을 익혀야 한다고 하셨다. 자기 소질에 맞는 기술을 익혀서 그것으로 세상에 기여를 하고 급여를 받거나 이윤을 창출하여 금생에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중요한 행복이다.

그러나 기술만으로 금생의 행복은 얻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그 사람이 전문직종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나쁜 인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사회와 자신을 망가지게 한다. 바른 인성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이웃에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각각 지계와 보시로 강조하셨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에게 맞는 기술을 익히고,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므로 해서 금생의 행복을 얻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셨다.


내생의 행복

인간이 짓는 종교행위는 기본적으로 내생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금생에 종교행위를 함으로 해서 사후에 천상이나 극락세계에 태어나거나 천당에 가게 된다고 각 종교마다 이론은 다르지만 이구동성으로 사후세계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짓는 의도적 행위(업)가 원인이 되어, 해로운 업(불선업)을 많이 지은 자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 태어나게 되고 유익한 업(선업)을 많이 지은 자는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고 가르친다.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방법으로 보시와 지계를 말씀하셨다. 한역 〈아함경〉에서는 이를 시.계.생천(施.戒.生天)이라고 옮겼다. 금생에 이웃에 봉사하고 승가에 보시하며,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살면 내생에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는 말씀이다.


궁극적 행복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 번째 행복은 궁극적인 행복(parama-sukha, 至福)이며 이것은 열반이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세상의 어떤 가치체계나 신념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이다. 스님들은 이러한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서 출가하여 수행을 하며, 재가 신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가치체계와 신념체계로 받아들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념적인 존재(施設)를 해체해서 법(dhamma)으로 환원해서 보아야하는데,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의 완성, 오온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철견(徹見), 12연기의 역관(逆觀), 계.정.혜의 실천 등으로 말씀하셨다.

초기경에서 보자면, 이러한 세 가지 행복을 바르게 추구하는 방법은 팔정도로 귀결이 된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수단(직업),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를 닦아서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과 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자야 말로 진정한 불자이다.



제3강: 초기불교의 기본주제: 행복2(궁극적 행복)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 번째 행복은 궁극적인 행복(parama-sukha, 至福)이며 이것은 열반이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세상의 어떤 가치체계나 신념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이다. 스님들은 이러한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서 출가하여 수행을 하며, 재가 신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가치체계와 신념체계로 받아들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념적인 존재(施設)를 해체해서 법(dhamma)으로 환원해서 보아야하는데,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의 완성, 오온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철견(徹見), 12연기의 역관(逆觀), 계.정.혜의 실천 등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열반을 실현할 것인가


⑴ 사성제의 통찰을 통해서

나는 알아야 할 것(고성제)를 알았고,

닦아야 할 것(도성제)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집성제)을 버렸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다.

(숫따니빠따 558게)


⑵ 중도(8정도)를 깨달음으로써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이들 두 가지 극단을 따라서는 안 된다. 무엇이 둘인가?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다.)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다른 하나의 극단이다.)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게 깨닫고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었나니 이 (중도는)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중도인가? 바로 이 여덟 가지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八正道)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깟짜야나곳따 경, S56:11)


⑶ 온-처-계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함을 통해서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 괴로움이고 … 무아이고, 느낌은 …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 괴로움이다 … 무아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도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무상 경 등, S22:12~14)


염오(nibbidā) - 이욕(virāga) - 소멸(nirodha)

염오(nibbidā) - 이욕(virāga) - 소멸(nirodha) - 고요(upasama) - 최상의 지혜(abhiññā) - 바른 깨달음(sambodha) - 열반(nibbāna)

염오 - 이욕  - 해탈(vimutti) - 해탈지(vimuttiñāṇa)


⑷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통해서

“이와 같이 참으로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行]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일어남, 일어남’이라고 전에 들어 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영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이와 같이 참으로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行]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소멸, 소멸’이라고 전에 들어 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영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사꺄무니 고따마 경, S12:10)

결론적으로 사성제/8정도/5온/12연기 등으로 설해지고 있는 법(dhamma)을 봄을 통해서 해탈, 열반, 깨달음을 실현한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yo dhammaṁ passati, so maṁ passati)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대반열반경, D16)

법을 보기 위해서 개발된 전문적인 기법(테크닉)이 간화선이나 위빳사나 등의 수행법이다.

개념(paññatti)과 법(dhamma)의 엄정한 구별이 중요하다.



제4강: 초기불교의 핵심: 법(法, dhamma, dharma)


⑴ 초기경의 도처에서 부처님은 법을 강조하셨다.

① 법을 의지하여 머무르리라

“아무도 존중할 사람이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이 머문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참으로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하는가?”(A4:21)

앙굿따라 니까야「우루웰라 경」1(A4:21)에 나타나는 세존의 성찰이다.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뒤 아직 아무에게도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지 않으셨을 때에(주석서에 의하면 세존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다섯 번째 7일이라고 한다. - AA.īi.24)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둑에 있는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 앉아서 과연 나는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를 두고 진지하게 사유하셨다. 경에 의하면 세존께서는 자신이 의지할 자를 찾아서 신들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사문․바라문을 포함한 하늘과 인간의 모든 세상 모든 존재를 다 살펴보셨지만 세존께서 구족한 계(戒)와 삼매[定]와 통찰지[慧]와 해탈보다 더 잘 구족한 자를 그 누구도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세존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지으신다.

“참으로 나는 내가 바르게 깨달은 바로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리라.”(A4:21)


② 법의 바퀴를 굴리다

이러한 법을 전개하시는 것을 불교에서는 전법륜(轉法輪, dhamma-cakka-pavattana)이라하며 최초에 팔정도를 중심으로 중도를 천명하신 가르침을 초전법륜경(S56:11)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법을 근본으로 하셨다.

그리고 “법을 의지하여 머물리라.”는 이러한 부처님의 태도는 부처님이 전법과 교화를 하신 45년간 내내 “법을 의지처로 삼고[法歸依] 법을 섬으로 삼아라[法燈明].”는 가르침과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自歸依]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自燈明].”는 가르침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세존께서 반열반하시기 직전에 남기신 첫 번째 유훈도 바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아난다 존자도 세존께서 반열반하신지 얼마 뒤에 고빠까 목갈라나 바라문과 나눈 대화에서, 비구들은 법을 의지처로 한다고(dhamma- paṭisaraṇa) 바라문에게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M109/īi.9)


③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이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왁깔리여, 법을 볼 때 나를 보고 나를 볼 때 법을 보기 때문이다.”(왁깔리 경(S22:87) §8)

그리고는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설하시고 염오-이욕-해탈-해탈지를 설하셨다.


“바라문이여, 그분 세존께서는 일어나지 않은 도를 일으키신 분이고 생기지 않은 도를 생기게 하신 분이고 설해지지 않은 도를 설하신 분이고 도를 아시는 분이고 도를 발견하신 분이고 도에 정통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제자들은 그 도를 따라가면서 머물고 나중에 그것을 구족하게 됩니다.”(고빠까 목갈라나 경(M108) §5)


④ 마지막 유훈 ―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난다여, 아마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선 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것이다.”(「대반열반경(D16) §6.1)


이처럼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직후에도 스스로 깨달은 법을 의지해서 머물리라고 하셨고, 45년간 제자들에게 설법하실 때에도 법을 강조하셨으며 이제 사바세계에서 자취를 감추시는 반열반의 마지막 자리에서도 법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라 유훈하셨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반열반하고 계시지 않는 지금에 사는 우리가 뼈가 시리고 가슴이 사무치게 존중하면서 배우고 궁구하고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법(dhamma)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부처님께서는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결집에 참석한 500 아라한들은 일단 법의 바구니(Dhamma-Pitaka = Sutta-Pitaka, 經藏)와 율의 바구니(Vinaya-Pitaka, 律藏)라는 두 개의 바구니를 먼저 설정하였다. 그 가운데서 율의 바구니부터 먼저 채우기로 결의하였는데 합송에 참석한 아라한들은 “마하깟사빠 존자시여, 율은 부처님 교법의 생명(āyu)입니다. 율이 확립될 때 교법도 확립됩니다. 그러므로 율을 첫 번째로 합송해야 합니다.”라고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요약]

담마(Dhamma, 법): 온처계근제연 37조도품

아비담마(Abhidhamma, 對法, 勝法): 아비담마 칠론:『담마상가니(Dhammasaṅgaṇī, 法集論),『위방가(Vibhaṅga, 分別論)』,『다뚜까타(Dhātukathā, 界論)』, 『뿍갈라빤냣띠(Puggalapaññatti, 人施設論)』,『까타왓투(Kathāvatthu, 論事)』,『야마까(Yamaka, 雙論)』, 『빳타나(Paṭṭhāna, 發趣論)』

위나야(Vinaya, 律): 두 가지 위방가(Sutta-vibhaṅga, 경의 분석, 비구계목과 비구니계목을 뜻함)

아비위나야(Abhivinaya, 對律): 대품, 소품, 부록(附錄): 주석서들과 복주서들에서는 이 둘을 아비위나야(Abhivinaya)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아비담마와 아비위나야]

아비담마와 아비위나야라는 술어는 이미 초기경전에 나타난다.(디가 니까야 합송경(D33) §3.3과 앙굿따라 니까야 망아지 경(A3:137), 망아지 경(A9:22) 등)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아비담마(abhidhamma)와 아비위나야(abhivinaya)에 대해서’란 담마(法)와 아비담마(對法)와 위나야(律)와 아비위나야(對律)의 네 가지라고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서 담마(法)는 경장이요 아비담마(對法)는 칠론(七論)이요 위나야(律)는 [비구계와 비구니계의] 두 가지 분별이고 아비위나야(對律)는 칸다까(Khandhaka, 犍度)와 빠리와라(附錄, 補遺)이다. 혹은 경장과 논장이 담마(법)이고 도(道)와 과(果)는 아비담마(대법)이며, 모든 율장은 위나야(율)이고 오염원을 가라앉게 하는 것이 아비위나야(대율)이다. 이처럼 담마와 아비담마와 위나야와 아비위나야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DA.īi.1047)

아비담마는 법에 대한 것[對法]이란 뜻이고 아비위나야는 율에 대한 것[對律]이란 뜻이다. 주석서의 설명처럼 일반적으로 담마(법)는 경장을, 아비담마(대법)는 논장을, 위나야(율)는 율장의 경분별(비구계목과 비구니계목)을, 아비위나야(대율)는 율장의 대품과 소품과 부록을 말한다. 아비위나야는 따로 독립된 장으로 결집하지 않고 율장에 포함시켰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그 때부터 마지막 반열반에 드시는 순간까지 법을 생명으로 여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법을 생명으로 삼아야한다.


⑵ 법이란 무엇인가?

① 교학으로서의 법: 청정도론을 위시한 주석서들은 교학으로서의 법을 온/처/계/근/제/연(蘊處界根諦緣)으로 정리하였다.

온(蘊, 무더기, khandha): 5온 = 물질[色, rūpa], 느낌[受, vedanā], 인식[想, saññā],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ā], 알음알이[識, viññāṇa]의 다섯 가지 무더기이다.

처(處, 감각장소, āyatana): 12처 =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內處]와 형색/소리/냄세/맛/감촉/마음(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대상[六外處]인 12가지 감각장소이다.

계(界, 요소, dhātu): 12처의 마음(마노)에서 여섯 가지 알음알이를 독립시켜서 모두 18가지가 된다. 즉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와 형색/소리/냄세/맛/감촉/마음(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와 눈의 알음알이[眼識], 귀의 알음알이, 코의 알음알이, 혀의 알음알이, 몸의 알음알이,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의 여섯을 합하여 18가지가 된다.

근(根, 기능, indriya): 모두 22가지가 있다. 22가지는 아래 제13강의 자료를 참조할 것.

제(諦, 진리, sacca): 4제 =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고성제),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집성제),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멸성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도성제)의 네 가지 진리이다.

연(緣, 조건발생, paccaya, pat(iccasamuppāda): 12연기를 말한다.


① 수행으로서의 법: 주석서들은 37조도품(助道品, 菩提分法, bodhipakkhiya-dhammā)을 들고 있다.

4념처(마음챙김의 확립), 4정근(바른 노력), 4여의족(성취수단), 5근(기능), 5력(힘), 7각지(깨달음의 구성요소), 8정도의 일곱 가지로 분류되며 법수로는 모두 37가지가 된다. 이 법수들에 대해서는 모두 해당 강의 자료들을 참조할 것.



이러한 불교의 기본법수들을 불교에서는 법(dhamma/dharma)이라 한다. 불교교학에서 법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고유성질을 가진 것)를 뜻한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전자는 Dhamma로 후자는 dhamma로 구분해서 표기하기도 한다. 위에서 나열한 온처계근제연과 37조도품은 부처님 가르침으로서의 법(Dhamma)이다. 아비담마에서는 고유성질을 가진 것을 법(dhamma)이라고 정의한다.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것이 법이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존재일반을 어떤 기준으로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해서 설명하였다. 그 기준을 불교에서는 법(dhamma)이라고 한다. 불교학의 토대가 되는 아비달마에서는 법을 ‘고유성질(sabhava)을 가진 것(sabhāvaṁ dhārenti)’이라고 정의한다. 예를 들면 지대(地大)는 견고성을, 탐욕(貪)은 대상을 끌어당기는 성질을, 성냄(瞋)은 대상을 밀쳐내는 성질을 각각 고유성질로 가진다. 그래서 75법이니 100법이니 하는 말은 이 세상의 존재일반은 모두 75가지 혹은 100가지의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4위 82법, 5위 75법, 5위 100법]

이러한 법들은 크게 몇 가지 범주로 무리 지어져 있는데 이 범주를 위(位)라고 부른다. 그래서 5위라는 말은 이러한 제법은 다섯 가지 큰 범주로 분류된다는 뜻인데, 그것은 마음(心, 心王),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심리현상들(心所),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 현상들(心不相應行), 물질(色), 무위(無爲)의 다섯이다. 한편 가장 오래된 체계인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 현상들(心不相應行)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4위가 된다.


이렇게 하여 설일체유부에서는 마음 1가지, 심리현상들 46가지,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 현상 14가지, 물질 11가지, 무위법 3가지하여 모두 5위75법들을 인정하고, 비슷한 방법으로 유식에서는 5위100법을, 상좌부는 4위82법을 설한다. 그래서 5위100법이니 5위75법이니 하는 용어가 생긴 것이다. 비록 각 학파마다 일체법(諸法)의 개수를 조금씩 다르게 설정하지만, 존재일반을 이처럼 여러 가지 법들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통찰하는 것은 불교의 모든 학파에서 한결 같다.


⑶ 법은 해체해서 보기이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존재를 온처계근제연의 법들로 해체해서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의 특징은 해체해서 보기이다.

해체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영감이 가장 뛰어난 분으로 칭송되는 왕기사 존자는 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S8:8)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여기서 해체는 위밧자(vibhajja)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 위밧자라는 술어는 빠알리 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위밧자와딘(해체를 설하는 자들)이라 불렀다.

그러면 무엇을 해체하는가? 개념[施設, paññatti]을 해체한다. 나라는 개념, 세상이라는 개념, 이영애라는 개념, 돈이라는 개념, 권력이라는 개념, 신이라는 개념을 해체한다. 이런 것들에 속으면 그게 바로 생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칭이나 언어 즉 개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강조하셨다.


[고정관념의 해체와 무상/고/무아의 통찰]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해체해서 보는 이유이다. 그것은 첫째,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처럼 제법들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보면, 자아(我)니 인간(人)이니 중생이니 영혼(壽者)이니 우주니 하는 무슨 변하지 않는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착각이나 고정관념을 척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인무아) 둘째는 이렇게 법들로 해체하면, 이러한 법들의 찰나성(無常)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찰나를 봄으로 해서 제법이 괴로움(苦)일 수밖에 없음에 사무치게 되고, 제법은 모두가 독자적으로는 생길 수 없는 연기적 흐름(無我)이라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법무아).

자아니 인간이니 하는 개념적 존재(施設, 빤냣띠, 산냐)로 뭉뚱그려두고는 그것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한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그래서 아비달마는 존재일반을 철저히 법들로 분해해고 해체해서 제시하는 것이다. 아비달마에서는 법의 찰나성을 통찰한 깨달음을 무상(無相)해탈이라 하고, 괴로움과 무아를 철견한 깨달음을 각각 무원(無願)해탈과 공(空)해탈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화엄경 등 대승경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해체해서 보기는 초기불교의 생명]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5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처/계/연 등으로 설해지는 조건지워진 법들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존재를 법들로 해체해서 그들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하여, 염오(厭惡, 넌더리, 역겨움, 구토)하고 탐욕이 빛바래고[離慾] 그래서 해탈/열반/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수많은 초기경전의 일관된 흐름이다.

해체라는 관문을 넘지 못하고 불교를 논하면 안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왜? 그는 부처님 제자가 아니요, 불교적 인생관, 불교적 세계관, 불교적 신념을 가진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처럼 분석을 강조하던, 반야중관처럼 직관을 강조하던, 화엄처럼 종합을 강조하던, 그것은 불교적 방법론인 해체에 토대해야하기 때문이다. 직관을 강조하는 반야부의 여러 경들조차 해체 끝에 드러나는 법의 자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놀란 적이 있다. 이런 토대위에서 그들은 무자성과 공의 직관을 다그치는 것이다.

어느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법들로 해체해서 보자.



제5강: 초기불교의 진리 ― 사성제: ① 고성제와 집성제를 중심으로


⑴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총섭된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움직이는 모든 생명들의 발자국들은 모두 코끼리 발자국에 총섭되고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 크기로서 최상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유익한 법[善法]이던 그것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총섭됩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입니다.” (맛지마 니까야 코끼리 발자국 비유경(M28) §2)


“그는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惱]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의 번뇌[有惱]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사문과경(D2) §97 등)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본 사람은 괴로움의 일어남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도 본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일어남을 본 사람은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도 본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을 본 사람은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일어남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도 본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본 사람은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일어남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본다.”(가왐빠띠 경(S56:30) §4)


진리[諦]로 옮긴 sacca는 √as(이다, 있다, to be)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as는 ‘있다, 이다’를 뜻하는 영어의 be동사와 꼭 같이 범어 일반에서 널리 사용되는 어근이다. 이것의 현재능동분사가 sat이고 여기에다가 가능분사를 만드는 어미 -ya를 첨가하여 satya라는 형용사를 만들어 이것이 중성명사로 쓰인 것이다. satya의 빠알리 형태가 sacca 이다. 그래서 형용사로 쓰이면 진실한, 사실인 등의 의미이다. 중성명사로서는 진실, 진리, 사실 , 실제란 의미로 쓰인다.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dukkha-ariya-sacca]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dukkha-samudaya-ariya-sacca]

  samudaya = saṁ(함께) + ud(위로) + √i (가다, to go)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dukkha-nirodha-ariya-sacca]

  nirodha = ni(아래로) + √rudh(방해하다, to obstruct)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

  [道聖諦, dukkha-nirodha-gāmini-paṭipadā-ariya-sacca]

  paṭipadā = prati(~에 대하여) + √pad(가다, to go): 발로 실제 길을 걸어가는 실천

     적인 의미가 강함. 중도의 도도 이 단어이다.


지난 번 강의에서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은 ① 사성제를 관통함을 통해서, ② 팔정도의 실현을 통해서, ③ 온/처/계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소멸을 통해서, ④ 12연기의 순관/역관을 통해서라는 네 가지로 실현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넷은 궁극적으로는 사성제로 귀결된다. 팔정도는 사성제의 네 번째인 도성제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사성제에 포함된다. 물론 팔정도의 처음인 바른 견해(정견)의 내용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오온/오취온은 사성제의 첫 번째인 고성제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온/처/계의 가르침은 사성제에 포함된다. 12연기의 순관(順觀, 流轉門, anuloma)은 사성제의 고성제와 집성제에 해당하고 역관(逆觀, 還滅門, paṭiloma)은 사성제의 멸성제와 도성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은 사성제에 포함된다.


⑵ 고성제는 ① 사고팔고(四苦八苦)와 ② 삼성(三性)으로 정리된다.

① 사고팔고(四苦八苦)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대상]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대상]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5)

일반적으로 사고팔고로 정의된다. 생/노/병/사와 愛別離苦, 怨憎會苦, 求不得苦, 略 五陰盛苦이다. 정리하면 생사문제가 된다. 출가는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② 괴로움의 세 가지 성질[三性]

“도반 사리뿟따여, '괴로움,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도반이여, 도대체 어떤 것이 괴로움입니까?”

“도반이여,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苦性, dukkhatā]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런 괴로움의 성질[苦苦性], 형성된 괴로움의 성질[行苦性],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의 성질[壞苦性]입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이 있습니다.” - (괴로움 경(S38:14) §3 ― 잠부카다까 유행승과 사리뿟따 존자의 대화)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중생의 삶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 아무리 큰 행복일지라도 끝내 변하고 말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행고성(行苦性, saṁkhāra-dukkhatā): 본질적으로는 오온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나’라거나 ‘내 것’으로 취착하기 때문에(五取蘊) 괴로움이다.


이 세 가지는 청정도론 XVI:35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나타나고 있다.

“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은 고유성질로서도, 이름에 따라서도 괴롭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괴로움[苦苦]이라 한다. ②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변할 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원인이 되기 때문에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壞苦]이라 한다. ③ 평온한 느낌과 나머지 삼계에 속하는 형성된 것들[行, saṅkhāra]은 일어나고 사라짐에 압박되기 때문에 형성된 괴로움[行苦]이라 한다.”


⑶ 집성제(集聖諦,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는 갈애요 갈애는 셋으로 정리된다

① 갈애(渴愛, taṇhā)

taṇhā는 동사 √tṛṣ(to be thirsty)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목마름’이다. 그래서 목마를 갈(渴)자를 넣어서 갈애(渴愛)로 옮기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再有]을 가져오고(ponobbhavikā)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6)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는 근본원인이라고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다. 이 갈애가 근본원인이 되어 중생들은 끝모를 생사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물론 갈애만이 괴로움의 원인은 아니다. 무명과 성냄이나, 성냄, 질투, 인색 등의 불선법들은 모두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생사윤회의 원인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갈애를 가장 대표적인 원인으로 들고 계시는 것이다.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nandi-rāga-sahagatā)’라는 것은 [갈애가] 환희와 탐욕과 뜻으로는 하나라는 뜻이다.”(DA.īi.799)


② 욕애(慾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

욕애(慾愛, kāma-taṇhā):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a-taṇhā]’란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의 동의어이다.”(DA.īi.800)

유애(有愛, bhava-taṇhā): 색계․무색계에 대한 갈애(常見) -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란 존재를 열망함에 의해서 생긴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이 함께 하는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에 대한 탐욕과 禪을 갈망하는 것의 동의어이다.”(DA.īi.800)

무유애(無有愛,, vibhava-taṇhā): 비존재에 대한 갈애(斷見) -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라는 것은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이 함께 하는 탐욕의 동의어이다.”(DA.īi.800)


⑶ [갈애에 대한 연기적 고찰]

“다시 비구들이여, 이런 이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잡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거기서 자리잡는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①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잡는다.

② 형상은 …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마음의 대상[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잡는다.

③ 눈의 알음알이는 …  마노의 알음알이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잡는다.”

④ 눈의 감각접촉[觸]은 … 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⑥ 눈의 인식은 … ⑦ 눈의 의도는 …  ⑧ 눈의 갈애는 …  ⑨ 눈의 일으킨 생각은 … ⑩ 눈의 지속적인 고찰[伺]은 … 귀의 지속적인 고찰은 … 코의 지속적인 고찰은 … 혀의 지속적인 고찰은 … 몸의 지속적인 고찰은 … 마노의 지속적인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잡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디가 니까야 대념처경(D2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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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강: 초기불교의 진리 ― 사성제: ② 멸성제와 도성제를 중심으로


⑴ 멸성제

① 멸성제는 열반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7)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asesa-virāga-nirodha)’이라는 등은 모두 열반의 동의어들이다. 열반을 얻으면 갈애는 남김없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이라고 설하셨다.

열반은 하나이지만 그 이름은 모든 형성된 것들의 이름과 반대되는 측면에서 여러 가지이다. 즉 남김없이 빛바램, 남김없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갈애의 소멸, 취착 없음, 생기지 않음, 표상 없음, 원함 없음, 업의 축적이 없음, 재생연결이 없음, 다시 태어나지 않음, 태어날 곳이 없음, 태어나지 않음, 늙지 않음, 병들지 않음, 죽지 않음, 슬픔 없음, 비탄 없음, 절망 없음, 오염되지 않음이다.”(DA.īi.801) - 26개의 동의어를 들고 있음. 후대에는 모두 43개의 동의어를 듦.


② 열반은 탐진치의 소멸이다

“도반 사리뿟따여, '열반, 열반'이라고 합니다. 도반이여, 도대체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도반이여,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 이를 일러 열반이라 합니다.”(상윳따 니까야 열반 경(S38:1) §3)


주석서적인 논의를 종합하면 열반은 출세간도를 체험하는 순간(magga-kkhaṇa)에 체득되는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asaṅkhata)를 뜻한다. 이러한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를 체득하는 순간에 번뇌가 소멸하기(kilesa-kkhaya) 때문에 열반은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라고 불리는 것이지, 단순히 탐/진/치가 없는 상태로 쇠약해지고 무기력해진 것이 열반은 아니다.(SA.īi.88 참조)


③ 갈애의 소멸에 대한 연기적 고찰

“다시 비구들이여, 그런 이 갈애는 어디서 없어지고 어디서 소멸되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된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①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② 형상은 … ③ 눈의 알음알이는 …  ④ 눈의 감각접촉[觸]은 … 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⑥ 눈의 인식은 … ⑦ 눈의 의도는 …  ⑧ 눈의 갈애는 …  ⑨ 눈의 일으킨 생각은 … ⑩ 눈의 지속적인 고찰[伺]은 … 귀의 지속적인 고찰은 … 코의 지속적인 고찰은 … 혀의 지속적인 고찰은 … 몸의 지속적인 고찰은 … 마노의 지속적인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디가 니까야 대념처경(D2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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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열반은 버려서 실현된다]

초기불교의 궁극적인 메시지를 하나로 말해보라면 그것은 열반이다. 두 가지로 표현해보라면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부처님께서 특히 출가자에게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신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열반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버림이다. 그래서 초기경의 도처에서 열반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 갈애의 소진, 탐욕의 빛바램[離慾], 소멸, 열반이다.”(A3:32 등)로 표현되고 있고,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S38:1 등)이라고도 설해지고 있으며, “[세속을] 전적으로 역겨워함[厭惡, 넌더리], 욕망의 빛바램, 소멸, 고요함, 최상의 지혜, 바른 깨달음, 열반”(D14 등)이라는 문맥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이것을 실현하는 길이 바로 도, 저 팔정도요, 더 풀어서 말하면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37조도품)이다. 이런 열반의 실현에 전념하는 방법으로 세존께서는 출가를 말씀하셨으며, 이런 출가의 삶이야말로 이세상의 진정한 복밭[福田]이라 강조하셨다.


⑤ [열반은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끝나야 드러난다]

이처럼 열반은 온갖 종류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끝나야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를 위시한 인간들은 출가자든 재가자든 삶에 대한 무한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삶이 아닌 것은 허무요 끝장이라 생각하며 바들바들 떨어온 게 중생의 역사 아니던가? 물질문명의 극치를 구가하는 현대의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삶에 대한 강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끝나야 열반이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망발인가!

이런 인간들의 구미를 맞추려다보니 역사적으로 불교 안에서부터 가장 난도질당하고 곡해당해 온 것이 부처님 제일의 메시지인 이 열반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래서 열반은 무주처열반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고, 생사뿐만 아니라 열반마저도 허망하다고 이해되었고, 마침내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라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탐진치 그대로가 열반이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어 왔다. 그런데 이런 말들의 이면에는 생사로 대표되는 삶에 대한 무한한 의미부여가 들어있고, 이 삶 속에서 오래오래 단맛을 쪽쪽 빨아먹으리라는 간절한 소망이 들어있다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혹자는 반박할 것이다. 생사를 떠난 열반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분법적인 사고라고. 그에게 말하고 싶다. 그대는 이미 스스로가 이 삶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태도로는 절대로 열반을 알 수도 볼 수도 실현할 수도 없다고.


⑥ [스승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부처님 제자다. 제자가 자기 스승의 말씀에 대고 자신의 부질없는 생각으로 마구 황칠을 해대면 곤란하지 않은가? 부처님께서 세속에 넌더리치고 열반을 실현하라고 했으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른 제자 아닌가? 세속문제는 세속의 정치인, 경제인, 지식인, 문화인, 의료인 등 세속전문가들에게 맡겨두면 된다. 출가자인 나는 열반을 바르게 실현하고 드러내는 전문가가 되어야하지 않는가?


⑵ 도성제

① 도성제는 팔정도다

“도반이여, 그러면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가 있고 도닦음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가 있고 도닦음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252] 그러면 어떤 것이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이고 어떤 것이 도닦음입니까?”

“도반이여,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이고 이것이 도닦음입니다.”(상윳따 니까야 열반 경(S38:1) §4)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이다. [422]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8)


② 팔정도의 정의

“①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견해[正見]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라 한다.

②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正思惟]인가? 도반들이여, 출리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 ― 이를 일러 바른 사유라 한다.

③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말[正語]인가? 비구들이여, 거짓말을 금하고 중상모략을 금하고 욕설을 금하고 잡담을 금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말이라 한다.

④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행위[正業]인가? 비구들이여, 살생을 금하고 도둑질을 금하고 삿된 음행을 금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행위라 한다.

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생계[正命]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그릇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한다.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생계라 한다.

⑥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정진[正精進]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하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정진이라 한다.

⑦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正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身隨觀] 머문다. 세속에 관한 욕심과 정신적 고통을 제쳐두고서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며 머문다. 느낌들에서 … 마음에서 … 법들에서 법을 따라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속에 관한 욕심과 정신적 고통을 제쳐두고서 열심히, 충분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마음챙김이라 한다.

⑧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正定]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모든 감각적 욕망을 떨쳐내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리고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수반하며, 멀리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 pīti]과 행복감[樂, sukha]을 특징으로 하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sampasādana)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희열이 사라졌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때문에 성자들이 그를 두고 ‘평온하게 마음 챙기며 행복에 머문다’라고 일컽는 제3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즐거움도 버렸고 괴로움도 버렸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사라졌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捨念淸淨] 제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라 한다.”(디가 니까야 대념처경(D22) §21)


[4성제 종합]

“바르게(sammā) 그 스스로 모든 법들을 깨달으셨기 때문에 바르게 깨달으신 분(Sammā-sambuddha, 正等覺者)이라 한다. 그분은 모든 법을 바르게 그 스스로 깨달으셨다.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할 법들(즉, 사성제)을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한다(abhiññeyya)고 깨달으셨고, 철저히 알아야 할 법들(즉, 고제)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pariññeyya)고 깨달으셨고, 버려야 할 법들(즉, 집제)을 버려야 한다(pahātabba)고 깨달으셨고, 실현해야 할 법들(즉, 멸제=열반)을 실현해야 한다(sacchikātabba)고 깨달으셨고, 닦아야 할 법들(즉, 도제)을 닦아야 한다(bhāvetabba)고 깨달으셨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을 완전히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버렸기 때문에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Buddha)다(Sn.558)””(청정도론 VII.26)


사성제 -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함 - abhiññeyya

  고성제 - 철저하게 알아야 함 - pariññeyya

  집성제 - 버려야 함          - pahātabba

  멸성제 - 실현해야 함        - sacchikātabba

  도성제 - 닦아야 함          - bhāvetabba


제7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1: 색온


⑴ 오온: 온(蘊, 무더기, khandha)

오온(pañca-kkhandha): 

      물질의 무더기[色蘊, rūpa-kkhandha]

      느낌의 무더기[受蘊, vedanā-khandha]

      인식의 무더기[想蘊, saññā-khandha]

      심리현상들의 무더기[行蘊, saṅkhārā-khandha]

      알음알이의 무더기[識蘊, viññāṇa-kkhandha]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기

인류가 있어온 이래로 인간이 자신에게 던진 가장 많은 질문은 아마 ‘나는 누구인가’일 것이다. 인간과 신들의 스승이신 부처님께서도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셨다. 중요한 질문이기에 아주 많이, 그것도 아주 강조해 말씀하셨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을까. 부처님께서는 초기경 도처에서 간단명료하게 ‘나’는 ‘오온(五蘊, panca-kkhandha)’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라는 존재는 물질(몸뚱이, 色), 느낌(受), 인식(想), 심리현상들(行), 알음알이(識)의 다섯 가지 무더기(蘊)의 적집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로 해체해서 대답하셨을까. 그것은 ‘나’ 혹은 자아(아뜨만)라는 고정불변하는 어떤 실체(sara)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영원불변하는 나를 찾아서 온갖 노력을 다해봐야 그것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얻어진 것처럼 여겨지는 인식(想, 산냐)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소의경전인 〈금강경〉도 자아니 영혼(壽者)이니 하는 산냐의 척파를 외치지 않았던가.


해체해서 보면 무상/고/무아가 드러난다

부처님께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오온’이라고 말씀하신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나라는 존재를 몸뚱이와 느낌과 인식과 심리현상들과 알음알이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이들의 변화성과 찰나성 즉 무상(無常)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은 괴로움(苦)이다. 우리는 변하는 것을 가지고 행복이라 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것도 변하면, 즉시에 괴로움이 되고 만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행복을 괴고성(壞苦性, 변하는 괴로움)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변하고 괴로운 것을 가지고 나라거나 나의 자아라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변화를 통찰할 때 괴로움과 무아도 꿰뚫게 된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오온의 무상.고.무아는 도처에서 아주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어디 초기경뿐인가. 우리가 조석예불에서 정성을 다해서 외는 〈반야심경〉의 핵심도 오온(照見五蘊皆空)이 아니던가.


무상/고/무아를 통해 해탈한다

이처럼 나라는 존재를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면 무상과 고와 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할 때 불가능해보이던 중생의 해탈은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뿐만 아니라 대승경전에서조차 무상(無常)을 통한 해탈을 무상(無相)해탈이라 하고, 고를 통한 해탈을 무원(無願)해탈이라 부르며, 무아를 통한 해탈을 공해탈이라 천명하고 있다. 실체 없는 자아에 계합하는 것이 해탈이 아니라 무상.고.무아에 사무쳐야 해탈이다. 불자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그 즉시 외도가 되어버린다.


[오온의 무상고무아와 염오-이욕-해탈에 대한 경전적 근거]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심리현상들은 무상하고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도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상윳따 니까야 무상 경(S22:12) §3 등)


“‘염오(nibbidā)’란 염오의 지혜(nibbidā-ñāṇa)를 말하는데 이것으로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를 드러내고 있다.”(SA.ī.53 ― 의지처 경(S12:23) §4의 주해)

“‘탐욕의 빛바램(이욕, virāga)’이란 도(magga, 즉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이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는 것은 탐욕의 빛바램이라는 도에 의해서 해탈한다라는 과(phala)를 설하셨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라는 것은 여기서 반조(paccavekkhaṇā)를 설하셨다.(MA.ī.115 = 맛지마 니까야 뱀의 비유 경(M22)  29에 대한 주석)

또 다른 주석서를 인용하자면, “‘염오(nibbidā)’는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이고 ‘탐욕의 빛바램(virāga)’은 도이다. ‘해탈지견(vimutti-ñāṇadassana)’은 과의 해탈(phala-vimutti)과 반조의 지혜를 뜻한다.”(AA.īi.228) 이 주석서에서는 있는 그대로 알고 봄[如實知見]을 얕은 단계의 위빳사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과거/현재/미래 경1(S22:9) 등 온 상윳따(S22)의 도처에서는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소멸을 실현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도 당연히 염오는 강한 위빳사나요, 이욕은 도요 소멸은 아라한과라고 주석서들은 밝히고 있다.


[진아란 없다]

매년 여름과 겨울에 한국의 유서 깊은 명산대찰에서는 각종 수련대회가 열린다. 몇몇 사찰에서는 아예 주제를 ‘나를 찾는 여행’으로 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명산대찰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불교적 대답인 오온을 강조한 곳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오히려 나를 진아로 추앙하고 대아나 주인공으로 경외하여 부르면서 이러한 영원불변하는 참 나를 찾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교수행이라고 공공연히 외쳐댔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진아니 대아니 하는 대답이 나오는 한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불자는 나는 누구인가에 서슴없이 오온이라 답할 줄 알아야 하고, 나를 오온으로 해체해서 살펴보아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가 무상하고 고요 무아임을 통찰해서 해탈열반을 실현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외도이기를 그만두고 진정한 부처님 제자가 될 것인가.


⑵ 색온 - 물질 - 근본물질과 파생된 물질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물질이라고 부르는가? 변형(變形)된다고 해서 물질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서 변형되는가? 차가움에 의해서도 변형되고, 더움에 의해서도 변형되고, 배고픔에 의해서도 변형되고, 목마름에 의해서도 변형되고, 파리, 모기, 바람, 햇빛, 파충류들에 의해서도 변형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변형된다고 해서 물질이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삼켜버림 경(S22:79) §4)


“물질 등은 자아(attā)가 아니고 자아에 속하는 것(attaniyā)도 아니고 실체가 없고(asārā) 주인이 없다(anissarā). 그래서 이들은 공(suññā)하다. 이러한 그들의 성질(bhāva)이 공함[空性, suññatā]이다. 이러한 공함의 특징을 ‘변형됨(ruppana)’ 등을 통해서 ‘보여주시기 위해서’라는 뜻이다.”(SA.ī.210)

“‘변형된다(ruppati)’고 했다. 이것은 물질(rūpa)이라는 것은 차가움 등의 변형시키는 조건과 접촉하여 다르게 생성됨을 두고 말한 것이다.”(SAṬ.ī.210)

여기서 변형(ruppana, ruppati)은 변화(viparinnāma)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변형(變形)은 형태나 모양이 있는 것이 그 형태나 모양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물질만의 특징이다.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와 같은 정신의 무더기들은 변화는 말할 수 있지만 변형은 없다. 형태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형은 물질에만 있는 성질이다.

“법들에는 보편적이고 개별적인 두 가지 특징(lakkhaṇa)이 있다.(중국에서는 보편적 특징을 공상(共相)으로 개별걱 특징을 자상(自相)으로 옮겼다.) 이 둘 가운데서 물질의 무더기를 [변형된다는] 개별적인 특징[自相, paccatta-lakkhaṇa = sabhāva-lakkhaṇa]을 통해서 드러내셨다. [변형되는 것은] 물질의 무더기에만 있고 느낌 등에는 없기 때문에 개별적인 특징이라 불린다. 무상/고/무아라는 특징은 느낌 등에도 있다. 그래서 이것은 보편적 특징[共相, sāmañña-lakkhaṇa]이라 불린다.”(SA.ī.291~292)

즉 변형(變形, deformation)은 형체를 가진 물질에만 적용되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성질이다. 그래서 물질을 이런 변형이라는 물질에만 존재하는 개별적인 특징을 가지고 설명하셨다는 뜻이다.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는 형태가 없기 때문에 변형은 존재할 수 없다.


제8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2: 수온


[개요]

느낌은 정서적인 측면 이다. 인식은 이지적인 번뇌[見惑=어리석음]와 느낌은 정서적인 번뇌[修惑=탐욕과 성냄]와 관계있다. 느낌은 단박에 정리되지 않는다.


느낌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느낌이라고 부르는가?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을 느끼는가? 즐거움도 느끼고 괴로움도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도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삼켜버림 경(S22:79) §5)


“‘느낀다(vedayati)’는 것은 여기서 오직 느낌(vedanā va)이 느끼는 것이지 다른 중생(satta)이나 개아(puggala)가 느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느낌은 느끼는 특징을 가졌기(vedayita-lakkhaṇā) 때문에 토대와 대상을 반연하여(vatth-ārammaṇaṁ paṭicca) 느낌이 오직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여기서도 [느낀다는] 느낌의 개별적 특징(paccatta-lakkhaṇa)을 분석하신 뒤에(bhājetvā) 설하셨다.”(SA.ī.292)


“비구들이여, [232] 그러면 어떤 것이 세 가지 느낌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세 가지 느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다섯 가지 느낌인가?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樂根],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苦根],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喜根],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憂根], 평온의 기능[捨根]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가지 느낌이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백팔 방편 경(S36:22) §§5~6)


느낌에 대한 관찰

“비구들이여, 즐거움을 느낄 때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로움을 느낄 때 적의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경우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상윳따 니까야 버림 경(S36:3) §4)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살에 꿰찔리고 연이어 두 번째 화살에 또다시 꿰찔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람은 두 화살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모두 다 겪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을 때,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그래서 이중으로 느낌을 겪는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상윳따 니까야 화살 경(S36:6))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지금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 지워진 것이며,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 지워졌는가? 바로 이 몸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 그런데 이 몸은 참으로 무상하고 형성되었고[有爲]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緣起, 緣已生]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발생인 몸에 조건 지워진 이 괴로운 느낌이 어찌 항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무른다. 그가 몸에 대해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물면 몸에 대한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상윳따 니까야 간병실 경 1(S36:7) §7)

즐거운 느낌과 평온한 느낌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설하심.



제9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3: 상온


[개요]

인식은 이지적 번뇌와 관계있고 우리의 사상과 철학과 관계있다. 단박에 전환 가능하다. 유신견과 관계있다. 상락아정이라는 인식의 전도에 빠져서 어리석음[치]로 발전된다.


인식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인식이라고 부르는가?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을 인식하는가? 푸른 것도 인식하고 노란 것도 인식하고 빨간 것도 인식하고 흰 것도 인식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이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삼켜버림 경(S22:79) §6)


“‘푸른 것도 인식하고’라는 것은 푸른 꽃이나 천에 대해서 준비단계(parikamma)의 [인식을] 만든 뒤에 근접단계나 본 단계의 [인식을] 얻으면서 인식한다. 여기서 인식이라는 것은 준비단계의 인식(parikamma-saññā)도 해당되고 근접단계(upacāra-saññā)의 인식도 해당되고 본 단계의 인식(appanā-saññā)도 해당된다. 그리고 푸른 것에 대해서 푸르다고 일어나는 인식도 해당된다. 이 방법은 노란 것 등에도 적용된다. 여기서도 세존께서는 인식하는 특징을 가진(sañjānana-lakkhaṇa) 인식의 개별적인 특징(paccatta-lakkhaṇa)을 분석하신 뒤에 설하셨다.”(SA.ī.292)

한편 여기에 나타나는 준비단계와 근접단계와 본 단계는 삼매 수행에도 적용되어서 설명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9장 §4와 해설 등을 참조할 것.


초기경에서 인식(想, 산냐, saññā)은 다양한 문맥에서 나타난다.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경우가 오온의 세 번째인 인식의 무더기(想蘊)이다. 오온의 두 번째인 느낌(受, vedanā)이 우리의 예술적이고 정서적인 심리현상들(行)의 단초가 되는 것이라면, 인식은 철학이나 사상과 같은 우리의 이지적인 심리현상들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버려야할 인식

인식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상을 받아들여 이름을 짓고 개념을 일으키는 작용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작용은 또 무수한 취착을 야기하고 해로운 심리현상들(不善法)을 일으키기 때문에 초기경의 여러 문맥에서 인식은 부정적이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최초기 가르침인 <숫따니빠따> 제4장에서도 인식은 견해(見)와 더불어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나타나며, 특히 ‘희론하는 인식(papañca-saññā)’을 가지지 말 것을 초기경들은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버리고 극복되어야 할 대표적인 인식으로 <금강경>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 자아가 있다는 인식, 개아가 있다는 인식, 중생이 있다는 인식, 영혼이 있다는 인식을 들고 있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인식들은 단지 인식에만 머물지 않고 존재론적인 고정관념으로 고착된다고 이해한 구마라즙 스님은 이러한 인식을 상(想)으로 옮기지 않고 상(相)으로 옮겼다.


인식의 전도[상전도, saññā-vipallāsa] - 4전도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고, 부정한 대상에 대해서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고, 깨끗하다고 여기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전도라 한다.”(청정도론 XXII.53)

무상 고 무아 부정을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여기는 것을 인식의 전도라 한다.


닦아야할 인식

한편 남.북방의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에 의하면 인식은 마음(心)과 항상 함께 일어나는 심리현상(遍行心所)이다. 그러므로 멸진정에 들지 않는 한 우리는 인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식이 마음과 함께 일어나기 마련인 것이라면 해탈.열반에 방해가 되는 존재론적인 인식은 버리고 해탈.열반에 도움이 되는 인식들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에는 제거되어야할 고정관념으로서의 인식만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증득하고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개발하고 닦아야 하는 인식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앙굿따라 니까야에는 수행자들이 닦아야할 여러 가지 조합의 인식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앙굿따라 니까야 인식경2(A7:46)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인식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에 들어가고 불사를 완성한다. 무엇이 일곱인가? 부정(不淨)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죽음에 대한 인식, 음식에 혐오하는 인식,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 오온에 대해서 무상(無常)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무상한 오온에 대해서 괴로움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괴로움인 오온에 대해서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니 대아니 진아니 영혼이니 일심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가 있다고 희론하는 인식이나 고정관념을 여의고, 5온.12처.18계로 분류되는 존재일반이 모두 무상이요 고요 무아라고 인식하는 습관을 길러 필경에는 무상.고.무아를 꿰뚫는 통찰지(반야, 慧)를 완성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실천하는 자야말로 해탈.열반의 길을 가는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일 것이다.



제10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4: 행온과 식온


[개요]

초기경에서 행(行, saṅkhāra)는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이 가운데 행온(saṅkhāra-kkhandha)의 행은 ‘심리현상들’을 뜻한다. 오온의 행온은 항상 복수로 나타난다. 청정도론에서는 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50가지를 들고 있다.


심리현상들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심리현상들이라고 부르는가?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고 해서 심리현상들이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하는가? 물질이 물질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느낌이 느낌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인식이 인식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심리현상들이 심리현상들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알음알이가 알음알이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고 해서 심리현상들이라 한다.”(삼켜버림 경(S22:79) §7)


여기서 심리현상들로 옮긴 원어는 상카라(saṅkhārā)이고 중국에서 행(行)으로 옮긴 술어이다. 오온의 문맥에서 나타나는 상카라는 항상 복수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에 유념해야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오온의 네 번째인 상카라[行]를 ‘심리현상들’로 옮기고 있다.

혹자들은 오온의 행온을 의도적 행위나 업형성(력) 등으로 이해하고 옮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행온의 한 부분인 cetanā(의도)만을 부각시킨 역어이다. 행온에는 이 의도를 포함한 50가지 심리현상들(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모든 심리현상, 혹은 심소법들)을 다 포함한다는 것이 주석서와 복주서들을 비롯한 아비담마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행(saṅkhāra)의 세 가지 의미

옛날 중국에서 역경승들이 행(行)으로 옮긴 범어는 상카라(saṅkhāra, Sk.samskara)인데 이것은 saṁ(함께)+√kṛ(행하다, to do)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 어근 √kṛ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려서 중국에서 행(行)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그러나 행이라는 한역 단어만을 가지고 상카라의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 의미는 초기경들에 나타나는 문맥을 통해서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상카라는 경들에는 크게 다음의 네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


첫째,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개고(諸行皆苦)의 문맥에서 제행으로 나타나는데 항상 복수로 쓰인다. 이 경우의 제행은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들을 뜻한다. 즉 열반을 제외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유위법들을 행이라고 불렀다. 이 경우에 행은 ‘형성된 것들’에 가까운 뜻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렇게 통일해서 옮기고 있다. 그 외 목숨의 상카라(ayu-saṅkhara), 존재의 상카라(bhava-saṅkhara), 생명의 상카라(jīvita-saṅkhāra)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경우도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둘째, 오온의 네 번째인 행온(行蘊, saṅkhāra-kkhandha)으로 나타나는데 이 경우에도 예외 없이 복수로 쓰인다. 오온 가운데서 색(色, 물질)은 아비담마의 색법이고 수상행(受想行)은 아비담마의 심소법(心所法)들이고 식(識)은 아비담마의 심법이다. 그러므로 오온에서의 행은 상좌부 아비담마의 52가지 심소법들 가운데서 느낌[수]과 인식[상]을 제외한 나머지 심소법들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 의도, 주의, 집중, 의욕과 유익한(善) 심리현상들 모두와 해로운(不善) 심리현상들 모두를 포함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경우의 행은 ‘심리현상들’로, 행온은 ‘심리현상들의 무더기’로 옮기고 있다.


셋째,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난다. 12연기에서의 행도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데 청정도론에서 ‘공덕이 되는 행위(punna-abhisankhara),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로 설명이 되듯이 이 경우의 행은 ‘업지음들’ 혹은 ‘의도적 행위들’로 해석된다. 이 경우의 행은 업(karma)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kamma-formations(업형성들)로 이해하고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의도적 행위들’로 옮긴다.


넷째,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인 신행(身行, kāya-saṅkhāra) 구행(口行, vacī-saṅkhāra) 의행(意行, mano-saṅjhāra)으로 나타난다. 본서 부미자 경(S12:25) §§8~10과 앙굿따라 니까야 상세하게 경(A4:232) §3 등에서 보듯이 이때의 행은 의도적 행위이다. 그리고 청정도론에서는 이 삼행도 12연기의 행처럼 업형성 즉 의도적 행위로 이해한다.(청정도론 XVII.61 참조) 그래서 신행 구행 의행은 각각 신업 구업 의업의 삼업(三業)과 동의어가 된다.

그런데 이 신구의 삼행은 상황에 따라 ‘작용’으로 이해해야 하는 곳도 있다. 예를 들면 이 몸의 상카라(신행)를 들숨날숨으로, 말의 상카라(구행)를 일으킨 생각[尋, vitakka]과 지속적 고찰[伺, vicāra]로, 마음의 상카라(의행)를 느낌과 인식으로 설명하는 경이 몇 군데있다.(본서 까마부 경 2(S41:6) §3이하를 참조) 이 경우에 상카라는 ‘작용’ 정도로 이해해야한다고 본다. 들숨날숨이나 생각과 고찰이나 느낌과 인식은 결코 의도적 행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행(상카라)은 그 용처에 따라서 그 의미를 각각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상카라(saṅkhāra)에다 접두어 abhi-를 붙인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나타나는데 이 경우는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 특히 청정도론과 주석서 문헌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고 보여진다.(본서 부미자 경(S12:25) §8의 주해 참조) 그래서 본서에서 역자는 아비상카라를 ‘업형성’이나 ‘의도적 행위’로 옮기고 있다.


한편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 문헌과 아비담마에서는 위의 느낌과 인식을 포함하여 모두 52가지의 심리현상들을 들고 있는데, 이들을 다시 공통되는 것들 13가지와 과 해로운 것들 14가지와 유익한 것들 25가지로 분류한 뒤에 이들을 다시 ‘반드시들’과 ‘때때로들’로 나누어서 고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2장을 참조할 것.




알음알이의 무더기


알음알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알음알이라고 부르는가? 식별한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한다.(vijānātīti kho tasmā viññāṇaṁ) 그러면 무엇을 알음하는가? 신 것도 식별하고 쓴 것도 식별하고 매운 것도 식별하고 단 것도 식별하고 떫은 것도 식별하고 떫지 않은 것도 식별하고 짠 것도 식별하고 싱거운 것도 식별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식별한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한다.”(삼켜버림 경(S22:79) §8)


본경을 위시한 니까야들에서 알음알이는 단지 여섯 감각기능을 통해서 대상을 아는 작용을 뜻한다. 그래서 주석서 문헌에서 알음알이(viññāṇa)와 마음(citta)과 마노[意, mano]는 ‘대상을 아는 것(ārammaṇaṁ vijānāti ― ItA.ī.9; ārammaṇaṁ cinteti ― DhsA.63 등)’으로 정의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아는 작용은 반드시 느낌과 인식과 심리현상들과 같은 심소법들의 도움이 있어야한다고 아비담마는 덧붙이고 있다.


[왜 오온을 설하셨는가]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심리현상들은 무상하고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도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상윳따 니까야 무상 경(S22:12) §3 등)


“‘염오(nibbidā)’란 염오의 지혜(nibbidā-ñāṇa)를 말하는데 이것으로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를 드러내고 있다.”(SA.ī.53 ― 의지처 경(S12:23) §4의 주해)

“‘탐욕의 빛바램(이욕, virāga)’이란 도(magga, 즉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이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는 것은 탐욕의 빛바램이라는 도에 의해서 해탈한다라는 과(phala)를 설하셨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라는 것은 여기서 반조(paccavekkhaṇā)를 설하셨다.(MA.ī.115 = 맛지마 니까야 뱀의 비유 경(M22)  29에 대한 주석)

또 다른 주석서를 인용하자면, “‘염오(nibbidā)’는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이고 ‘탐욕의 빛바램(virāga)’은 도이다. ‘해탈지견(vimutti-ñāṇadassana)’은 과의 해탈(phala-vimutti)과 반조의 지혜를 뜻한다.”(AA.īi.228) 이 주석서에서는 있는 그대로 알고 봄[如實知見]을 얕은 단계의 위빳사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과거/현재/미래 경1(S22:9) 등 온 상윳따(S22)의 도처에서는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소멸을 실현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도 당연히 염오는 강한 위빳사나요, 이욕은 도요 소멸은 아라한과라고 주석서들은 밝히고 있다.



제11강: 마음 과연 무엇인가 ―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


[개요]

마음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마음은 무상하다

마음은 찰나생․찰나멸이다

마음은 흐름이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다

마음은 연이생(緣起, 조건발생)이다

고정불변한 마음은 없다  --- 그러므로 절대로 마음을 절대화하면 안된다. 그건 불교가 아니고 외도다. 무엇보다도 절대화해버리면 절대로 못깨닫는다. 절대는 복종과 순종과 믿음과 충성의 대상이지 깨달음은 아니다.!! 불교의 믿음은 불법승계에 대한 믿음으로 족하다.

무상․고․무아와 연이생을 보는 것이 해탈이다

무상․고․무아는 해탈의 관문(vimokkha-mukha)이다


[마음의 정의]: 대상을 아는 것

여러 초기경에서는 ‘식별(識別, 了別)한다고 해서(vijānāti) 알음알이라한다’고 알음알이[識]를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알음알이가 일어나는 것을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cakkhuñ 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ṁ)”(괴로움 경(S35:106) §3) 등으로 경의 도처에서 표현하고 있다. 즉 알음알이는 감각장소와 대상을 조건으로 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여러 경들에서는 “마노로 법을 안다(manasā dhammaṁ vijānāti).”(S35:70/iv.42)”라고도 설명하는 구절이 나타난다. 이를 종합해보면 ‘감각장소를 통해서 대상을 아는 것’을 알음알이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주석서 문헌에서는 마음(citta)을 “대상을 사량한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 [대상을] 안다는 뜻이다.(cittan ti ārammaṇaṁ cintetīti cittaṁ; vijānātīti attho - DhsA.63)”라거나 는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초기경전과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 문헌뿐만 아니라 북방 아비달마와 유식에서도 심의식은 동의어라고 한결같이 나타나고 설명되고 있다. 이미 초기경전의 몇 군데에서 “마음[心]이라고도 마노[意]라고도 알음알이[識]라고도 부른 것(yam kho vuccati cittam iti pi mano, iti pi viññāṇaṁ)”(배우지 못한 자 경1(S12:61) §4와 주해 참조)이라고 나타난다.

그럼 이러한 마음[心], 마노[意], 알음알이[識]에 대해서 유념해야할 몇 가지를 적어보자.


첫째, 마음 혹은 알음알이는 조건발생이다. 감각장소와 대상이라는 조건이 없이 혼자 독자적으로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마음은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다.


둘째,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일 뿐이다.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은 남북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식의 아뢰야식도 반드시 종근기라는 대상을 가진다. 그럼 마음은 어떻게 대상을 아는가? 상좌부 아비담마는 이것을 인식과정으로 정교하게 설명해낸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4장을 참조할 것.


셋째, 마음은 단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마음을 절대화하면 절대로 안된다. 마음을 절대화하면 즉시에 외도의 자아이론이나 개아이론이나 영혼이론이나 진인이론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것이 금강경에 나타나는 산냐의 이론이다. 이것은 우리 불교가 가장 유념하면서 고뇌해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넷째, 마음은 무상하다. 그리고 실체가 없는 것(무아)이다. 특히 본 무더기 상윳따(S22) 도처에서 알음알이를 위시한 오온의 무상은 강조되고 있다. 여기에 투철하고 사무쳐야  염오-이욕-소멸 혹은 염오-이욕-해탈-해탈지가 일어나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해탈열반을 성취하고 성자가 된다. 그렇지 않고 마음을 절대화해버리면 결코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 오온을 절대화해버리면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유신견이라 하셨고 이것은 중생을 중생이겠금 얽어매는 열가지 족쇄가운데 첫 번째로 초기경의 도처에서 나타나며, 이러한 유신견이 있는 한 그는 성자의 초보단계인 예류자도 되지 못한다.


다섯째,  마음은 찰나생․찰나멸이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citta)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그 비유를 드는 것도 쉽지 않다.”(앙굿따라 니까야 하나의 모음, A.i.9)라고 앙굿따라 니까야는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 카나(khaṇa, 찰나, 순간)로 정착이 된다. 찰나의 규명은 주석서 문헌을 통해서 이루어낸 아비담마 불교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을 위시한 법들은 찰나생․찰나멸하는 일어나고 사라짐(기멸)의 문제이지 있다․없다(유무)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주석서는 더 나아가서 이 찰나도 다시 일어나고 머물고 무너지는(uppāda-ṭṭhiti-bhaṅga) 세 아찰나(亞刹那, sub-moment)로 구성된다고 설명하여 자칫 빠질지도 모르는 찰나의 실재성마저 거부하고 있다.


여섯 째, 마음은 흐름(상속, santati)이다. 마음이 찰나생․찰나멸이라면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유지되어가는 우리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 이렇게 명명백백한데 어떻게 없다 할 수 있는가? 초기불교와 주석서에서는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전개되는 이 마음을 흐름으로 설명한다. 이를 주석서에서는 심상속(心相續, citta-dhāra, citta-srota, 금강경: 心流注)이니 바왕가의 흐름(bhavaṅga-sota)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남북방 불교에서 공히 강조하고 있다. 마음은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으로 대표되는 탐욕․성냄․어리석음(탐진치)이 다할 때 까지 흐르는[相續] 것이다.








제12강: 인간이 가진 능력들 ― 22근(기능)을 중심으로


[개요]

일반적으로 기능[根, indriya]에는 모두 22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⑴ 눈의 기능[眼根] ⑵ 귀의 기능[耳根] ⑶ 코의 기능[鼻根] ⑷ 혀의 기능 [舌根] ⑸ 몸의 기능[身根] ⑹ 여자의 기능[女根] ⑺ 남자의 기능[男根] ⑻ 생명기능[命根] ⑼ 마노의 기능[意根] ⑽ 즐거움의 기능[樂根] ⑾ 괴로움의 기능[苦根] ⑿ 기쁨의 기능[喜根] ⒀ 불만족의 기능 [優根] ⒁ 평온의 기능[捨根] ⒂ 믿음의 기능[信根] (16) 정진의 기능[精進根] (17) 마음챙김의 기능[念根] (18) 삼매의 기능[定根] (19) 통찰지의 기능[慧根] (20) 구경의 지혜를 가지려는 기능[未知當知根] (21) 구경의 지혜의 기능[已知根] (22) 구경의 지혜를 구족한 기능[具知根]이다.(아비담마 길라잡이 제7장 §18)


[설명]

‘기능[根]’으로 옮긴 인드리야(indriya)는 문자적으로만 보면 √ind(to be powerful)에서 파생된 남성명사인 indra의 형용사 형태로서 ‘인드라(Indra)에 속하는’의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드라는 다름 아닌 신들의 왕으로 우리에게 제석이나 석제로 알려진 인도의 신이다. 그래서 인드라는 힘의 상징이며 지배자, 통치자, 권력자를 뜻한다. 이러한 지배력을 가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중성명사로 정착된 것이 인드리야 즉 기능[根]이다. 그래서 기능들은 각각의 영역에서 이들과 관계된 법들(sampayutta- dhammā)을 지배하는(issara) 정신적인 현상을 뜻한다. 기능은 모두 22가지로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아비담마 길라잡이』7장 §18과『청정도론』XVI장의 전반부를 참조할 것.


이 22가지는 상윳따 니까야 기능 상윳따(S48)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다. 물론 한 경에서 22가지가 언급되고 있는 경우는 없으며 기능 상윳따에서 주제별로 독립되어서 나타나고 있다. 이 22가지가 함께 언급되고 설명되는 것은 위방가(분별론)라는 아비담마 논서에서부터이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인간이 가진 기능이나 특수하고 고유한 능력의 측면에서 해체해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능다섯 가지 느낌과 믿음 등의 다섯 가지 기능과 남자, 여자, 생명의 세 가지 특수한 기능과 예류도부터 아라한과까지의 여덟 단계의 성자들이 가지는 세 가지 능력으로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여자의 기능[女根, itthindriya]’과 ‘남자의 기능[男根, purisindriya]’은 이 둘이 중요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 앙굿따라 니까야 속박 경(A7:48/iv.57~59) §2 이하를 제외한 니까야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아비담마에서는 파생된 물질(upādā rūpa)에 포함되어 나타나는데, 담마상가니(Dhs §§633~634)와 위방가(Vbh.122~123)에서 정의되고 있으며 담마상가니 주석서(DhsA.321~323)와 청정도론 XIV.14:58에서 설명되고 있다.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에는 “‘여자의 기능(itthindriya)’이란 여자의 상태(여자됨, itthi-bhāva, 즉 여자의 외관상의 표시, 속성, 활동, 자세 등)에 대한 통제를 하는 것(indaṭṭhaṁ karoti)을 말한다. ‘남자의 기능’이란 남자의 상태(남자됨, purisa-bhāva)에 대한 통제를 하는 것을 말한다.”(SA.īi.237)라고 설명하고 있다.

‘생명기능[命根, jīvitindriya]’은 함께 생겨난 정신과 물질들을 지탱하는 기능을 말한다. 담마상가니(Dhs §635)와 위방가(Vbh.123)에서 정의되고 담마상가니 주석서(DhsA.323)와 청정도론 XIV.59에서 설명되고 있다.


(20) 구경의 지혜를 가지려는 기능[未知當知根] (21) 구경의 지혜의 기능[已知根] (22) 구경의 지혜를 구족한 기능[具知根]

“‘구경의 지혜를 가지려는 기능[未知當知根, anaññāta-ññassāmīt-indriya]’은 ‘나는 그 시작을 알지 못하는 윤회에서(anamatagge saṁsāre) 전에 알지 못했던 법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도를 닦는 자(paṭipanna)가 예류도의 순간(sotāpatti-magga-kkhaṇa)에 일어난 기능이다. ‘구경의 지혜의 기능[已知根, aññindriya]’은 그렇게 법을 안 자들에게 속하는 예류도(sotāpatti-phala)로부터 [아라한도까지의] 여섯 경우에 일어난 기능이다. ‘구경의 지혜를 구족한 자의 기능[具知根, aññātāvindriya]’은 구경의 지혜를 구족한 자들에게 속하는 아라한과의 법(arahatta-phala-dhamma)들에서 일어난 기능이다.”(SA.īi.237)



제13강: 존재란 무엇인가 ― 12처와 18계를 중심으로


[개요]

12처는 상윳따니까야 육처 상윳따(S35)의 기본주제이다.

육처 상윳따(S35)에는 모두 248개의 경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모두 육내처와 육외처를 주제로하고 있다. 이 안의 감각장소와 밖의 감각장소(대상)를 일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12가지 외에 다른 일체는 세울 수 없다고 하신다.

처(處, 감각장소)로 옮긴 원어 āyatana는 ā(이리로) + √yat(to strech)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ā + √yam(to move)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해되는 중성 명사이다. 불교 이전부터 인도 바라문교의 제의서(祭儀書, Brāhmaṇa) 문헌에 많이 나타나는 단어인데 거기서는 주로 제사지내는 장소를 아야따나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동물들의 서식지를 아야따나로 부르기도 하였다. 청정도론 XV.5에 의하면 아야따나에는 ① 머무는 장소(nivāsa-ṭṭhāna) ② 광산(ākara) ③ 만나는 장소(samosaraṇa) ④ 출산지(sañjāti-desa) ⑤ 원인(kāraṇa)의 다섯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이쪽으로 온다는 문자적인 의미를 중시하여 입(入)으로 번역하기도 하였고, 이 단어가 장소(base, sphere)의 의미로 쓰이므로 처(處)라고 옮기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2연기의 다섯 번째 구성요소인 saḷ-āyatana는 육입(六入)으로 옮겼으며, 눈의 감각장소[眼處, cakkhu-āyatana] 등과 형색의 감각장소[色處, rūpa-āyatana] 등의 육내/외처(12처)와, 공무변처(空無邊處)부터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의 4처는 처(處)로 옮겼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감각작용과 관계된 육입이나 12처는 ‘감각장소’로 옮기고 있으며 4처는 ‘장소’로 옮기고 있다.


12처는 일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일체인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意]과 마음의 대상[法] ― 이를 일러 일체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로만 떠벌리는 것일 뿐이다. 만일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일체 경(S35:23) §§3~4)


“‘단지 말로만 떠벌리는 것일 뿐이다’라는 것은 말로만 말하게 되는 토대가 될 뿐이라는 말이다. 즉, 이 12가지 감각장소들을 떠나서 또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법(sabhāva-dhamma)이 있다고 설 할 수 없다는 뜻이다.”(SA.ī.358)


[12처의 무상/고/무아와 염오-이욕-해탈-해탈지]

3. “비구들이여, 눈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 내 것이 아니고 그것은 나가 아니고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봐야한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음[意]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 내 것이 아니고 그것은 나가 아니고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봐야한다.”

4.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귀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코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혀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몸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상윳따 니까야 안의 무상 경(S35:1) §§3~4)


“비구들이여, 형색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 내 것이 아니고 그것은 나가 아니고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봐야한다.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마노의 대상[法]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 내 것이 아니고 그것은 나가 아니고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봐야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상윳따 니까야 밖의 무상 경(S35:4) §§3~4)


이처럼 존재를 12가지로 한정짓고 이 열두 가지 각각이 무상/고/무아임을 천명하여 이들 각각에 대해서 염오-이욕-소멸 혹은 염오-이욕-해탈-해탈지를 성취하게 하시려는 것이 12처 가르침의 핵심이다.


18계는 마음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12처 가운데서 마노(mano, 意)를 다시 마노와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의 일곱 가지로 세분한 것이 18계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왜 12처를 18계로 더 세분해서 요소들로 말씀하셨을까? 마노 혹은 마음을 자아라고 영혼이라고 거머쥐는 것을 척파하기 위해서이다. 마노는 하나가 아니라 7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체해서 보여주시는 것이 18계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은 이렇게 설명한다.

“요소는 영혼이 아닌 것(nijjīva, 非命)의 동의어이다. 세존께서 “비구여, 이 사람은 여섯 가지 요소를 가졌다.(M140/īi.239)”라는 등에서 영혼이라는 산냐(壽者想)를 부수기 위해 요소(界)라는 가르침을 설하셨다.”(Vis.XV.22)


영혼이라는 산냐(jīvasaññā)는『금강경』의 수자상(壽者相, jīva-sañjñā)과 꼭 같은 단어이다. 한편『앗타살리니』(Aṭṭhasālinī,『담마상가니』의 주석서, DhsA.38)에서 법(dhamma)을 ‘nissatta-nijjīvatā’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생(satta)도 아니고 영혼(jīva)도 아님’이라는 말이다. 요소(界)로 옮기고 있는 dhātu도 dhamma와 같은 어근인 √dhṛ(to hold)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법이나 요소라는 술어가 자아라는 산냐(我相)나 인간이라는 산냐(人相)나 중생이라는 산냐(衆生相)나 영혼이라는 산냐(壽者相) 등을 부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처럼 중국에서 계(界)로 옮긴 dhātu는 그것이 드러내고자하는 법들이 중생이라는 실체가 없고 공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은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기 때문에 요소들의 다양함이라고 불린다는 말이다. 즉 요소는 중생이니 자아니 인간이니 하는 개념적 존재[施設, paññatti]를 18개의 요소들로 해체해서 보면 무상/고/무아가 드러나고 그래서 개념적 존재의 공성이 드러나게 된다는 의미이다.


12처와 18계의 특징 몇 가지


첫째, 존재를 나를 중심으로 해서 안과 밖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신다. 안으로는 6내처 밖으로는 육외처뿐이라고 하신다.

둘째, 18계는 육내처에서 다시 6식을 독립시킨 것이다. 의처(意處)를 나라고 영원한 마음이라고 자칫 집착할까봐 이를 다시 7가지로 분류해낸 것이다.

셋째, 마노의 역할은 두 가지이다. ① 색성향미촉 외의 대상을 인지하는 기관이다. ② 전오식과 의식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안식이 받아들인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의식이 일어나서 이를 판단해야하는데 안식과 의식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마노(의)이다. 아비담마의 인식과정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넷째, 이렇게 살펴봄으로 해서 절대적이고 영원한 세상이라든지 절대적이고 영원한 우주라든지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라는 고정관념을 극복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라든지 우주라든지 일체라든지 존재라든지 하는 개념에 속게 된다. 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안과 밖으로 해체해서 보는 것이 12처와 18계이다.

다섯째, 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육내외처로 18계로 해체해서 보면 일체 모든 존재의 무상/고/무아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삼특상을 철견하면 염오-이욕-소멸이나 염오-이욕-해탈-해탈지를 성취하게 된다.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사실 육처 상윳따의 248개 경들 가운데 반 이상이 무상고무아를 설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들도 존재나 육내외처를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제14강: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 1 ― 12연기를 중심으로

제15강: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 2 ― 12연기를 중심으로


[개요]

연기는 상윳따 니까야 인연 상윳따(S12)의 주제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12연기로 정착이 되었다. 물론 12개의 구성요소가 다 나타나지 않는 10지연기나 9지연기나 8지연기나 6지연기나 더 줄여서 4지/5지 등으로 구성된 연기가 인연 상윳따에는 나타난다.

연기의 정형구가 설해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① 12연기의 순관/역관과 ②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의 두 가지 방법이다.


[12연기의 순관/역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연기인가? 비구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行]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생긴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연기[緣起]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연기 경(S12:1) §3)

[이를 연기의 순관(順觀, 流轉門, anuloma)이라한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청정도론(제17장)에서 설해져 있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行]들이 소멸하고, [2]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물질이 소멸하고, 정신/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근심/탄식/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상윳따 니까야 연기 경(S12:1) §4)


“역관(逆觀, 還滅門, paṭiloma)을 설하시면서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라고 하신 것은 빛바램[離慾, virāga]이라 불리는 도(magga)에 의해서 남김없이 소멸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SA.ī.10)

“형성된 것들[行, saṅkhārā = 5온, 12처 등]에 대해서 전적으로 탐욕이 빛바랜다(이욕)고 해서 ‘빛바램(virāga)’이며 이것은 도(magga)를 말한다. ‘남김없이 소멸함’이란 남겨두지 않고 소멸함 즉 근절함을 말한다. 이와 같이 [12연기의] 각 항목들이 소멸함은 모든 형성된 것들의 소멸을 말한다. 이와 같이 무명 등의 소멸이라는 말을 통해서 아라한과를 설한 것이다.”(SAṬ.ī.11)

정리하면 빛바램(이욕, virāga)은 도(즉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를 뜻하고 소멸(nirodha)은 아라한과를 뜻한다. 주석서와 복주서의 이 설명은 중요하다. 12연기에서 12연기 각지의 이욕-소멸은 이전 강의에서 살펴본 온/처/계 등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소멸이 일어나는 과정에서의 이욕-소멸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과거/현재/미래 경1(S22:9) 등 무더기 상윳따(S22)의 도처에서 오온에 대한 염오-이욕-소멸이 설해지고 있다. 물론 무상 경(S22:12) 등은 염오-이욕-해탈-해탈지[견]을 설하고 있지만 여기서 해탈은 과의 실현을 뜻한다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SA.ī.268) 그러므로 해탈과 소멸은 과의 증득이라는 같은 현상을 나타내는 술어이다.

아무튼 온/처/계의 염오-이욕-소멸을 통해서도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12연기 각지의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을 통해서도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멸(nirodha)은 바로 사성제의 세 번째 진리인 소멸의 진리(멸성제, nirodha-sacca) 즉 열반을 뜻한다.(분석 경(S12:2) §16의 주해 참조) 그러므로 온처계의 가르침과 사성제와 12연기와 8정도(팔정도의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이므로)는 모두 궁극적으로는 소멸(nirodha = 열반)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러한 문장구조와 이러한 주석서와 복주서의 설명은 12연기의 가르침은 5온-12처-18계-4성제-8정도 등의 가르침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청정도론 서문에서 붓다고사 스님이 강조하고 있듯이 온/처/계/근/제 37보리분법으로 대표되는 초기불교의 인간관, 존재관, 세계관, 진리관, 수행관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12연기의 가르침은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다고 강조하고 싶다. 디가 니까야 대인연경(D15) §1에서 세존께서 강조하셨듯이 연기의 가르침은 심오한(혹은 아주 어려운) 가르침임을 우리는 명심하고 연기의 가르침을 정독해야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순관(anuloma)으로 12개의 구절을 윤회를 설하시는 것(vaṭṭa-kathā)으로 말씀하신 뒤에 그 윤회에 대한 말씀을 제쳐두고(vinivaṭṭetvā), 역관(paṭiloma)으로 12개의 구절을 통해서 윤회를 벗어남(vivaṭṭa)을 말씀하시면서 아라한과(arahatta)로써 가르침의 절정(kūṭa)을 취하셨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500명의 비구들은 위빳사나를 시작하는 자(āraddha-vipassakā)가 되어 간략한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사람들(ugghaṭitaññū-puggalā)이 되었다. 그들은 마치 태양의 광선을 받아서 완전히 원숙해진 연꽃들(paripāka-gatāni padumāni)처럼 진리(sacca)들을 깨달은 뒤 아라한과(arahattaphala)에 확립되었다.”(SA.ī.10)


[12연기의 추상화의 정형구]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도 없다. 이것이 멸할 때 저것도 멸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行]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行]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상윳따 니까야 십력 경1(S12:21) §5)


이것은 12연기를 추상화한 정형구로 잘 알려져 있다. 빠알리 문장은 다음과 같다.

      imasmiṁ sati idaṁ hoti

      imassuppādā idam uppajjati

      imasmiṁ asati idaṁ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ṁ nirujjhati

복주서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고 ‘있다’는 표현을 하였다고 해서 실재하는 어떤 것을 두고(vattamānaṁ yeva sandhāya) 말한 것이 아니라 “도에 의해서 소멸에 이르지 못한 상태(maggena anirujjhana-sabhāva)”(SAṬ.ī.51)를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같은 방법으로 ‘이것이 없을 때 저것도 없다.’라는 표현을 하였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에 의해서 소멸에 이른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 바로 다음에 이 연기의 정형구를 설하시는 것은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연기의 가르침과 연결하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12연기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위에서도 살펴봤듯이 존재를 특히 나라는 존재를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면 염오-이욕-소멸(nibbidā-virāga-nirodha)이 일어난다. 주석서는 여기서 염오는 강한 위빳사나이고 이욕은 도과 소멸은 (아라한)과라고 설명한다. 나라는 존재를 12연기로 해체해서 보면 역시 남김 없는 이욕-소멸(asesa-virāga-nirodhā)이 일어난다. 여기서도 이욕은 과요 소멸은 아라한과라고 주석서는 설명한다. 이처럼 존재를 해체해서 봐서 염오-이욕-소멸이나 남김 없는 이욕-소멸에 도달하여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초기불교의 핵심이다. 본경에서는 이러한 오온과 12연기가 함께 설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기는 심오한 가르침]

연기(緣起)의 도리는 〈대연경〉에서 “심오한 가르침”이라고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을 만큼 깊고 어려운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한정된 지면으로 제대로 설명한다는 것은 정말 무리한 시도이다. 연기의 가르침은 초기경에서 이미 6지(支) 연기, 8지 연기, 9지 연기, 10지 연기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이 완성된 형태로 최종으로 정리된 것이 바로 12지 연기이고 이를 우리는 십이연기라고 부른다.


[연기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드러낸 것]

거듭 강조하지만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 연기를 설하신 것은 모두 예외 없이 ⑪생-⑫노사우비고뇌로 표현되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지 우주의 생성원리 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한다.


[12연기는 삼세양중인과이다]

십이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12연기는 <원인과 결과의 반복적 지속>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과해버리면 십이연기는 그때부터 혼란스러워 진다. 12연기 가운데 ①무명-②행과 ⑧애-⑨취-⑩유는 원인의 고리이고 나머지 ③식-④명색-⑤육입-⑥촉-⑦수와 ⑪생-⑫노사우비고뇌는 결과(과보)의 연결고리이다. 이렇게 12연기는 원인의 연결고리와 결과의 연결고리가 반복적으로 연결되어서 괴로움의 발생구조를 중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삼세양중인과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남북 아비담마/아비달마의 공통된 설명방법이다. 유식에서는 대신에 2세1중인과를 설하는데 성유식론에 의하면 2세만 이야기하면 3세는 자연스럽게 인정되기 때문에 2세1중인과로 족하다고 한다. 아무튼 초기-아비담-유식에서 공히 12연기는 윤회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설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삼세 양중인과인 두 가지 중요한 이유]

이렇게 불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12연기의 10번째 구성요소인 생(生, jāti)은 범어로 보면 한생에 최초로 태어나는 것이라는 이외의 뜻으로는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로 생멸(生滅)한다는 의미의 생이 될 수가 없다. 생멸의 생은 일어남의 의미인 samudaya나 udaya이다. jāti는 태어남의 의미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유와 생 사이에는 한 생이 개재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12연기 가운데 세 번째 구성요소인 식(식, 알음알이, viññāṇa)은 한생의 최초에 생긴 알음알이를 뜻한다. 상윳따 니까야 우현 경(S12:19)과 알음알이 경(S12:59)과 디가 니까야 대인연경(D15) §21과 앙굿따라 니까야 외도의 주장 경(A3:61) §9와 존재 경(A3:76)과 상윳따 니까야 몰리야팍구나 경(S12:12) §4 등에서 연기의 정형구에 나타나는 알음알이는 한생의 최초에 어머니 모태에 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2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초기경전에 튼튼한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해야 한다. 물론 주석서는 예외 없이 12연기의 식을 한생의 최초에 일어나는 알음알이인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āṇa)으로 설명하고 있다.


[因-果의 고리]

이 가운데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애-취-유이고 근원적 원인은 무명과 행이다. 그래서 사성제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애(갈애)라고 들고 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라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갈애를 척파해야 하며 갈애를 척파하기 위해서는 갈애가 일어나는 조건인 식-명색-육입-촉-수의 연기구조를 이해해야하고[正見] 이를 바탕으로 팔정도를 실천해야 한다.


[12연기에 대한 네 가지 설명]

이렇게 원인-결과의 중층적 고리인 12연기는 이미 다양한 부파의 다양한 대가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설명되어 왔다. 《구사론》에서는 한 찰나에 연기의 12지가 동시에 함께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찰나(刹那)연기”와, 12찰나에 걸쳐서 연속적으로 12지가 연이어서 상속(相續)한다는 “연박(連縛)연기”와, 여러 생에 걸쳐서 시간을 건너뛰어서 12지가 상속한다는 “원속(遠續)연기”와, 12지는 모두 5온을 본질로 하여 매순간 오온이 생멸하면서 상속하지만 특정 순간의 두드러진 상태(分位)에 근거하여 각각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라는 “분위(分位)연기”의 넷을 들고 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분위연기를 정설로 간주한다.


[12연기와 조건발생을 구분해야 함]

그리고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이 12연기와 조건발생(paccaya, paṭṭhāna)을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교는 이미 초기불교부터 조건발생으로 존재일반을 설명한다. 이러한 조건은 초기 아비담마에서부터 24가지 조건으로 정리되었고 구사론을 위시한 북방아비달마아세는 6인-4연-4과로 특히 4연으로 정리가 되었으며 이것은 유식에 고스란히 전승되어서 10인-4연-5과 특히 4연으로 정리되어 설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괴로움 특히 윤회의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설하는 12연기를 이러한 24연이나 4연과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24연이나 4연이 발전하여 화엄에서 법계연기로 승화한 것이지 결코 12연기가 법계연기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상호의존의 방법은 ⑴ 원인의 조건(hetupaccaya, 因緣) ⑵ 대상의 조건(ārammaṇapaccaya, 所 緣緣) ⑶ 지배의 조건(adhipatipaccaya, 增上緣) ⑷ 틈 없이 뒤따르는 조건(anantarapaccaya, 無 間緣) ⑸ 더욱 틈 없이 뒤따르는 조건(samanantarapaccaya, 等無間緣) ⑹ 함께 생긴 조건 (sahajātapaccaya, 俱生緣) ⑺ 서로 지탱하는 조건(aññamaññapaccaya, 相互緣) ⑻ 의지하는 조건(nissayapaccaya, 依止緣) ⑼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upanissayapaccaya, 親依止緣) ⑽ 먼 저 생긴 조건(purejātapaccaya, 前生緣) ⑾ 뒤에 생긴 조건(pacchājātapaccaya, 後生緣) ⑿ 반 복하는 조건(āsevanapaccaya, 數數修習緣) ⒀ 업의 조건(kammapaccaya, 業緣) ⒁ 과보의 조건 (vipākapaccaya, 異熟緣) ⒂ 음식의 조건(āhārapaccaya, 食緣) (16) 기능[根]의 조건 (indriyapaccaya, 根緣) (17) 禪의 조건(jhānapaccaya, 禪緣) (18) 도의 조건(maggapaccaya, 道緣) (19) 서로 관련된 조건(sampayuttapaccaya, 相應緣) (20) 서로 관련되지 않은 조건(vippayuttapaccaya, 不相應緣) (21) 존재하는 조건(atthipaccaya, 有緣) (22) 존재하지 않은 조건(natthipaccaya, 非有 緣) (23) 떠나가버린 조건(vigatapaccaya, 離去緣) (24) 떠나가버리지 않은 조건(avigatapaccaya, 不離去緣)이다.



6인: 능작인, 구유인, 상응인, 동류인, 변행인, 이숙인

4연: 증상연, 등무간연, 소연연, 인연

5과: 증상과, 사용과, 등류과, 이숙과, 이계과 (아비달마 구사론)

6인-4연-5과에 대한 설명은『아비달마 불교』(권오민, 민족사, 106~121쪽을 참조할 것.)


아무튼 연기든 조건이든, 이러한 연이생(緣已生)의 가르침은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온 모든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핵심이 되는 것임은 자명하다.


[12연기는 무아를 드러내는 강력한 수단]

십이연기를 접하면서 우리가 명심해야하는 더욱 중요한 사실은, 연기의 가르침은 자아니 진아니 대아니 주인공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쯤으로 깨달음을 착각하지 말라고 단언한다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실체는 어느 시대 어느 불교에도 결코 발붙일 틈이 없습다. 만일 여래장이나 진여나 불성을 존재론적인 실체로 이해해버린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불교라는 깃발을 내걸고 외도짓거리를 하는 현양매구(懸羊賣狗)일 뿐입니다. 이것이 실천적 측면에서 본 십이연기의 중요성일 것이다.



제16강: 초기불교의 수행 ―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1

제17강: 초기불교의 수행 ―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2


[서론]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어떻게 여인을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쳐다보지 말라.”

“세존이시여, 쳐다보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말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대반열반경(D22) §5.9)


부처님의 육성이 생생히 살아있는 초기경들 가운데서 실참(實參) 수행법을 설하신 경을 들라면 『디가 니까야』(장부)의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satipaṭṭhāna Sutta, D22)과 『맛지마 니까야(중부)의 「들숨날숨에 마음챙기는 경」(出入息念經, M118)과 「몸에 마음챙기는 경」(念身經, M119)의 셋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서 「대념처경」은 초기불교수행법을 몸(身)·느낌(受)· 마음(心)· 법(法)의 네 가지 주제 하에 집대성한 경으로, 초기수행법에 관한한 가장 중요한 경이며, 그런 만큼 가장 유명한 경이기도 하다. 마음챙김(sati, 念)으로 대표되는 초기불교 수행법은 이 경을 토대로 지금까지 전승되어오고 있으며, 남방의 수행법으로 알려진 위빳사나 수행법은 모두 이 경을 토대로 하여 가르쳐지고 있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챙김이란 무엇인가]

마음챙김은 빠알리어 sati(Sk. smṛti, 念, 기억)의 역어인데 이것은 √smṛ(to remember)에서 파생된 추상명사로 사전적인 의미는 기억 혹은 억념(憶念)이다. 그러나 초기경에서 사띠(sati)는 거의 대부분 기억이라는 의미로는 쓰이지 않는다.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주로 접두어 ‘anu-’를 붙여 ‘anussati’라는 술어를 사용하거나 √smṛ에서 파생된 다른 명사인 ‘saraṇa’라는 단어가 쓰인다. 물론 수행과 관계없는 문맥에서 sati는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첫째, 마음챙김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apilāpana)이다.『청정도론』은 말한다. “마음챙김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apilāpana)을 특징으로 한다. 잊지 않는 것(asammosa)을 역할로 한다. 보호하는 것(ārakkha)으로 나타난다. 혹은 대상과 직면함(visayābhimukha-bhāva)으로 나타난다. 강한 인식이 가까운 원인이다. 혹은 몸 등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기둥처럼 대상에 든든하게 서있기 때문에, 혹은 눈 등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 문지기처럼 보아야 한다.”

둘째, 마음챙김이란 대상을 거머쥐는 것(pariggahaka, 把持, 把握)이다. 그래서 대념처경 주석서에는 “마음챙기는 자(satimā)라는 것은 [몸을] 철저하게 거머쥐는(pariggāhikā, 把持, 把握) 마음챙김을 구족한 자라는 뜻이다. 그는 이 마음챙김으로 대상을 철저하게 거머쥐고 통찰지(반야)로써 관찰한다. 왜냐하면 마음챙김이 없는 자에게 관찰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나타난다.

셋째, 마음챙김은 확립(upaṭṭhāna)이다.

『청정도론』은 말한다. “각각의 대상들에 내려가고 들어가서 확립되기 때문에 확립(paṭṭhāna)이라 한다. 마음챙김 그 자체가 확립이기 때문에(sati yeva paṭṭhānaṁ) 마음챙김의 확립(念處)이라고 한다.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서 그들을 더러움(不淨, asubha), 괴로움, 무상, 무아라고 파악하면서, 또 깨끗함, 행복, 항상함, 자아라는 인식(saññā)을 버리는 역할을 성취하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네 가지로 분류된다. 그러므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라 한다.”

넷째, 마음챙김은 마음을 보호(ārakkha)한다.

그래서『청정도론』은 “그의 마음이 수승한 마음챙김으로 보호될 때(saṁrakkhiyamāna)”라고 하였다.


[왜 마음챙김으로 옮겼나]

“바라문이여, 이처럼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각각 다른 대상과 각각 다른 영역을 가져서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마음[意]을 의지한다. 마음이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意]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意]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챙김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해탈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열반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그대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서버렸다. 그대는 질문의 한계를 잡지 못하였구나. 바라문이여, 청정범행을 닦는 것은 열반으로 귀결되고 열반으로 완성되고 열반으로 완결되기 때문이다.”(상윳따 니까야 운나바 바라문 경(S48:42) §§4~8)


이처럼 마음챙김은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래서 마음챙김으로 옮긴다. 그리고 2세기에 안세고(安世高)가 옮긴「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이라는 경의 제목을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안세고는 아나빠나(ānāpāna, 出入息)를 안반(安般)으로 음사하고 있으며 사띠는 念이 아닌 수의(守意) 즉 마음(意, mano)을 지키고 보호(守)하는 기능으로 의역하고 있다. 이처럼 이미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던 최초기에 마음챙김은 보호로 이해되어 왔다. 이런 것을 참조해서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긴다.


[마음챙김은 대상을 챙기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일견 ‘마음을 챙김’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마음이 대상을 챙김”이다. 이처럼 마음챙김은 마음이 대상을 챙기는, 수행에 관계된 유익한 심리현상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여기서 마치 송아지 길들이는 자가

기둥에 묶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마음챙김으로써

대상에 굳게 묶어야 한다.”

라고 옛 스님의 경책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마음챙김에 관한 가장 요긴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마음챙기는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이다. 주석서의 설명을 종합해보면 마음챙김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고, 대상을 거머쥐고, 대상에 확립되어 해로운 표상이나 해로운 심리현상들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마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마음챙김이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상응부에서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자기의 고향동네인 비구의 행동의 영역인가?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S.v.147-48)”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마음챙김이란 마음이 대상을 챙기는 것이요, 마음챙기는 공부는 마음이 대상을 거듭해서 챙기는 공부요, 마음챙김의 확립은 마음이 정해진 대상에 확립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챙김은 그 대상이 중요하다. 「대념처경」에서 설명되고 있는 마음챙김의 대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⑴ 몸(kāya, 身): 14가지

  ① 들숨날숨

  ② 네 가지 자세

  ③ 네 가지 분명하게 알아차림

  ④ 32가지 몸의 형태

  ⑤ 사대를 분석함

  ⑥-⑭ 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⑵ 느낌(vedanā, 受): 9가지

  ① 즐거운 느낌 ② 괴로운 느낌 ③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④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 ⑤ 세속적인 괴로운 느낌 ⑥ 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⑦ 세속을 여읜 즐거운 느낌 ⑧ 세속을 여읜 괴로운 느낌 ⑨ 세속을 여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⑶ 마음(citta, 心): 16가지

  ① 탐욕이 있는 마음 ② 탐욕을 여읜 마음

  ③ 성냄이 있는 마음 ④ 성냄을 여읜 마음

  ⑤ 미혹이 있는 마음 ⑥ 미혹을 여읜 마음

  ⑦ 위축된 마음 ⑧ 산란한 마음

  ⑨ 고귀한 마음 ⑩ 고귀하지 않은 마음

  ⑪ 위가 남아있는 마음 ⑫〔 더 이상〕위가 없는 마음

  ⑬ 삼매에 든 마음 ⑭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

  ⑮ 해탈한 마음 ⑯ 해탈하지 않은 마음

⑷ 심리현상(dhamma, 法): 5가지

  ① 장애(蓋)를 파악함

  ② 무더기(蘊)를 파악함

  ③ 감각장소(處)를 파악함

  ④ 깨달음의 구성요소(覺支)를 파악함

  ⑤ 진리(諦)를 파악함


「대념처경」은 이렇게 모두 44가지로 마음챙김의 대상을 구분하여 밝히고 있다.


[마음챙기는 공부의 요점]

이제 「대념처경」에 나타나는 마음챙기는 공부의 요점 몇 가지를 적어보자.

첫째, 마음챙김의 대상은 ‘나’ 자신이다. 내 안에서(ajjhattaṁ) 벌어지는 현상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 내 밖은 큰 의미가 없다. 왜? 해탈열반은 내가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부 범망경(D1) 등에서도 부처님께서는 ‘바로 내 안에서(paccattaṁ eva) 완전한 평화(nibbuti)를 분명하게 안다’고 하셨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대념처경」에서는 이러한 나 자신을 몸, 느낌, 마음, 심리현상들로 나눈 뒤, 이를 다시 몸은 14가지, 느낌은 9가지, 마음은 16가지, 법은 5가지로 더욱더 구체적으로 세분해서, 모두 44가지 대상으로 나누어서 그 중의 하나를 챙길 것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런 바탕 하에서 때로는 밖의(bahiddhā) 즉 남의 신·수·심·법에 마음을 챙기라고도 하고 계시며 때로는 나와 남 둘 다의 신·수·심·법에도 마음챙기라고도 설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 출발은 항상 나 자신이다.

둘째, 무엇보다도 개념적 존재(paññatti)의 해체가 중요하다. 이것이 「대념처경」에서 마음챙김의 대상을 신·수·심·법으로 해체해서 제시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필자는 파악하고 있다. 나니 내 것이니 남이니 산이니 강이니 컴퓨터니 자동차니 우주니 하는 개념적 존재를 해제할 때 무상·고·무아를 그 특징(sāmañña-lakkhaṇa, 共相)으로 하는 법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더 이상 개념적 존재를 두고 갈애와 무명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그래서 해체는 중요하다. 해체의 중심에는 나라는 존재가 있다. 중생들은 무언가 불변하는 참 나를 거머쥐려 한다. 이것이 모든 취착 가운데 가장 큰 취착이다. 「대념처경」이 나라는 존재를 신·수·심·법으로 해체하고 다시 이를 21가지나 44가지로 더 분해해서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제시하신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체하지 못하면 개념적 존재(paññatti)에 속는다. 해체하면 법(dhamma)을 보고 지금 여기서 해탈·열반을 실현한다.

셋째, 거듭 강조하지만 마음챙김은 대상이 중요하다. 이것은 입만 열면 주객을 초월하는 것이 수행이라 얼버무리는 우리 불교가 깊이 새겨봐야 할 점이다. 「대념처경」은 거친 대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미세한 대상으로 참구의 대상을 나열하여 들어간다. 그러나 「대념처경」에서 나타난 순서대로 21가지 혹은 44가지 대상을 모두 다 챙기고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넷째, 마음챙김으로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통합하고 있다. 불교수행법은 크게 사마타수행과 위빳사나수행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지(止)로 한역되었고 후자는 관(觀)으로 한역되었으며 지관수행은 중국불교를 지탱해온 수행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마타는 삼매(定)수행과 동의어이고 위빳사나는 통찰지(慧, 반야)수행과 동의어이다.

「대념처경」은 마음챙김을 통해서 이러한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다. 사실, 그것이 집중이던 관찰이던 마음챙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마타는 찰나생·찰나멸하는 법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표상(nimitta)이라는 개념적 존재(paññatti)를 대상으로 하고, 위빳사나는 찰나생·찰나멸하는 법(dhamma)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마음챙김이 없이는 표상에 집중하는 사마타도 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빳사나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마음챙김은 이런 두 종류의 수행에 공통적으로 중요한 심리현상이다.

다섯째, 「대념처경」은 사성제를 관찰해서 구경의 지혜(aññā)를 증득하는 것으로 결론 맺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무상·고·무아의 삼특상 가운데서 고의 특상과 그 원인과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을 꿰뚫어 아는 것으로 해탈·열반의 실현을 설명하고 있다.

『청정도론』에 의하면 해탈에는 세 가지 관문이 있다. 그것은 무상·고·무아이다. 무상을 꿰뚫어 알아서 체득한 해탈을 표상 없는(無相) 해탈이라 하고, 고를 꿰뚫어 알아 증득한 해탈을 원함 없는(無願) 해탈이라 하고, 무아를 꿰뚫어 알아 요달한 해탈을 공한 해탈이라 한다. 「대념처경」은 그러므로 고를 통찰하는 원함 없는 무원의 해탈로 결론짓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사성제를 철견하는 것이야말로 초기경에서 초지일관되게 설명하고 있는 깨달음이요 열반의 실현이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그것은 염오로 인도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소멸로 인도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욕망의 빛바램 경(S47:32) §3)



제18강: 초기불교의 수행 ― 4정근과 4여의족을 중심으로


[네 가지 바른 노력, 四正勤, sammappadhāna]

네 가지 바른 노력은 상윳따 니까야의 바른 노력 상윳따(S49)의 주제이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sammappadhāna]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닦아서 성취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상윳따 니까야 동쪽으로 흐름 경(S49:1) §3)


사정근은 팔정도의 여섯 번째인 정정진의 내용이며 오근/오력의 두 번째인 정진의 내용이며 칠각지의 두 번째인 정진각지의 내용이기도 하다.


[바른 노력은 선법과 불선법의 판단으로부터]

바른 노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법과 불선법의 판단이다. 이것이 없으면 바른 노력도 아니요 바른 정진도 아니다. 그래서 칠각지에서는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택법각지) 다움에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정진각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유익하거나 해로운 법들, 나무랄 데 없는 것과 나무라야 마땅한 법들,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법들, 고상한 것과 천박한 법들, 흑백으로 상반되는 갖가지 법들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기를 많이 [공부]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수행을 성취하는 자양분이다.”(상윳따 니까야 몸 경(S46:2) §12)

주석서는 여기에 나타나는 쌍들 가운데 첫 번째는 모두 유익한 법과 동의어이고 두 번째는 모두 해로운 법과 동의어라고 설명하고 있다.(SA.īi.141)


그러면 무엇이 선법이고 무엇이 불선법인가? 주석서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해로운 법이란 능숙하지 못함에서 생긴 탐욕 등의 법이다.”(AA,ī,44)

“유익함(kusala)이란 능숙함에서 생겼으며(kosalla-sambhūta) 비난받을 일이 없는 행복한 과보를 가져오는 것이다. 해로움(akusala)이란 능숙하지 못함에서 생겼으며 비난받을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것이다.”(SA.īi.141 등)

“능숙함(kosalla)은 통찰지(paññā)를 말한다.”(SAṬ.ī.126)

“능숙함은 지혜(ñāṇa)를 말한다. 이것과 결합된 것을 유익함이라 한다. 그래서 유익함은 지혜를 갖춘 것이다.”(DAṬ.ī.223)

 그러면 불선법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는가? 주석서는 ① 십불선업도(DA.ī.644, MA.i.197 등) ② 12가지 해로운 마음과 함께 일어난 [14가지 해로운 마음부수]법들(DA.īi.843)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다섯 가지 장애(MA.īi.145) 등도 모두 14가지 해로운 마음부수법들에 포함된다.

 한편 선법은 D28.§3 등에서 37조도품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없는 행복한 과보를 가져오며, 궁극적 행복[至福, parama -sukha]인 해탈/열반에 도움이 되는 [37조도품 등]은 선법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불선법이다.



[네 가지 성취수단, 四如意足]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 iddhi-pāda]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이 언덕에서부터 저 언덕에 도달하게 된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열의를 [주로 한] 삼매와 노력의 의도적 행위[行]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정진을 [주로 한] 삼매와 노력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마음을 [주로 한] 삼매와 노력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검증을 [주로 한] 삼매와 노력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성취수단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이 언덕에서부터 저 언덕에 도달하게 된다.”(상윳따 니까야 이 언덕 경(S51:1) §§3~5)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취수단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바르게 괴로움의 끝냄으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도를 게을리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취수단을 열심히 행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괴로움의 끝냄으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도를 열심히 행하는 것이다.”(게을리 함 경(S51:2) §3)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취수단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그것은 염오로 인도하고,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소멸로 인도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염오 경(S51:4) §3)


여기서 성취는 iddhi를 옮긴 것이다. 원래 뜻은 일반적인 성공을 의미하는데 이미 세존의 시대에서도 정신적인 성공이나 성취를 뜻했으며, 특히 신통과 같은 정신적인 성취를 뜻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하나는 신통(iddhi-vidha)인데 구체적으로는 육신통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해탈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padhāna)의 성취를 말한다.

네 가지 성취수단에서의 성취(iddhi)는 특히 삼매의 성취를 말한다. 물론 이러한 삼매 특히 제4선에 자유자재해야 신통(iddhi)도 성취된다고 주석서들은 말한다. 그래서 제4선을 신통의 토대가 되는 禪(padaka-jjhāna)이라고 한다.

성취수단의 정형구는 ① 삼매(samādhi) ② 노력의 의도적 행위(padhāna-saṅkhāra) ③ 삼매를 낳는데 필요한 네 가지 특별한 요소들 즉 열의(chanda), 정진(viriya), 마음(citta), 검증(vīmaṁsa)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삼매와 노력의 의도적 행위는 네 가지 성취수단 모두에 다 포함되어 있다.


부처님께서는 성취수단을 닦은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일 겁도 머물 수 있고 겁이 다하도록 머물 수도 있다고 대반열반경(D22) 3.3에서 말씀하셨다.




제19강: 초기불교의 수행 ― 오근과 오력을 중심으로


[무엇이 다섯 가지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기능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믿음의 기능[信根], 정진의 기능[精進根], 마음챙김의 기능[念根], 삼매의 기능[定根], 통찰지의 기능[慧根]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믿음의 기능은 어디서 봐야하는가? 믿음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예류자의 구성요소에서 봐야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진의 기능은 어디서 봐야하는가? 정진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바른 노력에서 봐야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마음챙김의 기능은 어디서 봐야하는가? 마음챙김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서 봐야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삼매의 기능은 어디서 봐야하는가? 삼매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禪에서 봐야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통찰지의 기능은 어디서 봐야하는가? 통찰지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서 봐야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기능이 있다.”(상윳따 니까야 보아야함 경(S48:8) §§3~3)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기능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믿음의 기능, 정진의 기능, 마음챙김의 기능, 삼매의 기능, 통찰지의 기능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믿음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여래의 깨달음을 믿는다. ‘이런 [이유로]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應供]이시며,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覺]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明行足]이시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이시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이시며, 가장 높은 분[無上士]이시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시며, 깨달은 분[佛]이시며, 세존(世尊)이시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믿음의 기능이라 한다.

[여러 다른 경들에는 다음의 셋이 더 포함되어 네 가지 믿음으로 정형화되어 나타난다.

“그는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법에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지닌다.”

“그는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참되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합당하게 도를 닦으니, 곧 네 쌍의 인간들이요[四雙] 여덟 단계에 있는 사람들[八輩]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받아 마땅하고, 선사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라고 승가에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지닌다.”

“그는 성자들이 좋아하며 훼손되지 않았고 뚫어지지 않았고 오점이 없고 얼룩이 없고 벗어나게 하고 지자들이 찬탄하고 [성취한 것에] 들러붙지 않고 삼매에 도움이 되는 계를 지닌다.”]

비구들이여, [198] 그러면 어떤 것이 정진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열심히 정진하며 머문다. 그는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버리고 유익한 법[善法]들을 구족하기 위해서 굳세고 분투하며 유익한 법들에 대한 임무를 내팽개치지 않는다.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닦아서 성취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정진의 기능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챙기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낸다.

그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느낌들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챙김의 기능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삼매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놓아버림을 대상으로 삼아 삼매를 얻고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을 얻는다.

그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소멸되었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삼매의 기능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통찰지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통찰지를 가졌다. 그는 성스럽고, 꿰뚫음을 갖추었으며, 바르게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일어나고 사라짐으로 향하는 통찰지를 구족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통찰지의 기능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기능이 있다.”(상윳따 니까야 분석 경 2(S48:10) §§3~9)


“믿음의 기능은 확신을 통해서(adhimokkha-vasena) 전향(āvajjana)하여 일어난다. 정진의 기능은 분발(paggaha)을 통해서 전향하여 일어나고, 마음챙김의 기능은 확립(upaṭṭhāna)을 통해서 전향하여 일어나고, 삼매의 기능은 산란하지 않음(avikkhepa)을 통해서 전향하여 일어나고 통찰지의 기능은 봄(dassana)을 통해서 전향하여 일어난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기능들은 모두 열의(chanda, 즉 기능들을 일으키고자 하는(kattu-kāmatā) 유익한 열의 - SAṬ)를 통해서 전향하여 일어나고, 마음에 잡도리함[作意, manasikāra, 즉 기능들의 힘이 미약(dubbala)할 때 이러한 전향을 생기게 하는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 - SAṬ]를 통해서 전향하여 일어난다.”(SA.īi.232)


[다섯 기지 기능과 다섯 가지 힘의 차이]

“비구들이여, 믿음의 기능이 곧 믿음의 힘이고 믿음의 힘이 곧 믿음의 기능이다. 정진의 기능이 곧 정진의 힘이고 정진의 힘이 곧 정진의 기능이다. 마음챙김의 기능이 곧 마음챙김의 힘이고 마음챙김의 힘이 곧 마음챙김의 기능이다. 삼매의 기능이 곧 삼매의 힘이고 삼매의 힘이 곧 삼매의 기능이다. 통찰지의 기능이 곧 통찰지의 힘이고 통찰지의 힘이 곧 통찰지의 기능이다.”(사께따 경(S48:43) §5)


이러한 말씀은 기능[根, indriya]들과 힘[力, bala]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기능들과 힘들은 단지 다른 두 각도에서 같은 요소들을 쳐다보는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용어를 가지고만 보면 힘들은 기능들보다 더 발전된 단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경이나 주석서에서 이를 뒷받침할 출처를 찾을 수가 없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확신을 특징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adhimokkha-lakkhaṇe) 통제를 한다는 뜻에서(indaṭṭhena) ‘믿음의 기능’이라 하고, 불신(assaddhiya)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기(akampana) 때문에 ‘믿음의 힘’이라 한다. 나머지들은 각각 분발(paggaha)과 확립(upaṭṭhāna)과 산란하지 않음(avikkhepa)과 꿰뚫어 앎(pajānana)을 특징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통제를 한다는 뜻에서 ‘기능[根]’이 되고(indriya-bhāva), 각각 게으름(kosajja)과 마음챙김을 놓아버림(muṭṭha-sacca)과 산란함(vikkhepa)과 무명(avijjā)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힘[力]’이 된다고(bala-bhāva) 알아야 한다.”(SA.īi.247)


[다섯 가지 기능을 조화롭게 닦음]

다섯 가지 기능을 조화롭게 닦는 것이 중요하다. 청정도론(IV.45~49)는 이렇게 말한다.

“기능(根)을 조화롭게 유지함이란 믿음 등의 기능(五根)들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그에게 믿음의 기능(信根)이 강하고 나머지 기능들이 약하면 정진의 기능(精進根)이 노력하는 역할을 할 수 없고, 마음챙김의 기능(念根)이 확립하는 역할을 할 수 없고 삼매의 기능(定根)이 산만하지 않는 역할을 할 수 없고 통찰지의 기능(慧根)이 [있는 그대로] 보는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믿음의 기능은 법의 고유성질(sabhāva, 自性)을 반조함에 의해서 조절해야 한다. 만약  마음에 잡도리할 때 그것이 강해진다면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에 의해서 조절해야 한다.

만약 정진의 기능이 강하면 믿음의 기능이 확신하는 역할을 실행할 수 없고 나머지 기능들도 각자의 기능을 실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편안함(輕安) 등을 수행하여 그 정진의 기능을 조절해야 한다.

여기서 특별히 믿음과 통찰지의 균등함(samatā), 삼매와 정진의 균등함을 권한다. 믿음이 강하고 통찰지가 약한 자는 미신이 되고, 근거 없이 믿는다. 통찰지가 강하고 믿음이 약한 자는 교활한 쪽으로 치우친다. 약으로 인해 생긴 병처럼 치료하기가 어렵다. 두 가지 모두 균등함을 통해서 믿을 만한 것을 믿는다. 삼매는 게으름(kosajja)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삼매가 강하고 정진이 약한 자는 게으름에 의해 압도된다. 정진은 들뜸(uddhacā)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정진이 강하고 삼매가 약한 자는 들뜸에 의해 압도된다. 삼매가 정진과 함께 짝이 될 때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다. 정진이 삼매와 함께 짝이 될 때 들뜸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둘 모두 균등해야 한다. 이 둘이 모두 균등하여 본삼매를 얻는다.

다시 삼매를 공부하는 자에게 강한 믿음이 적당하다. 이와 같이 믿고 확신하면서 본삼매를 얻는다. 삼매(定)와 통찰지(慧) 가운데서 삼매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하나됨(ekaggatā)이 강한 것이 적당하다. 이와 같이하여 그는 본삼매를 얻는다. 위빳사나를 공부하는 자에게 통찰지가 강한 것이 적당하다. 이와 같이 그는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상에 대한 통찰(paṭivedha)을 얻는다. 그러나 둘이 모두 균등하여 본삼매를 얻는다.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서 강하게 요구된다. 마음챙김은 마음이 들뜸으로 치우치는 믿음과 정진과 통찰지로 인해 들뜸에 빠지는 것을 보호하고, 게으름으로 치우치는 삼매로 인해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보호한다. 그러므로 이 마음챙김은 모든 요리에 맛을 내는 소금과 향료처럼, 모든 정치적인 업무에서 일을 처리하는 대신처럼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 그래서 말씀하였다.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서 유익하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무슨 이유인가? 마음은 마음챙김에 의지하고, 마음챙김은 보호로 나타난다. 마음챙김이 없이는 마음의 분발(paggaha)과 절제(niggaha)란 없다”라고.” (청정도론 IV.45~49)



제20강: 초기불교의 수행 ― 칠각지를 중심으로


[설명]

‘깨달음의 구성요소[覺支]’로 옮긴 bojjhaṅga는 bodhi + aṅga의 합성어이다. 주석서는 bodhiyā bodhissa vā aṅga로, 즉 깨달음의 구성요소(bodhiyā aṅga)와 깨달은 분의 구성요소(bodhissa aṅga)의 두 가지로 이 합성어를 풀이하고 있다.(SA.īi.138) 계속해서 주석서는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소멸을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念覺支]를 닦는다. … [64]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擇法覺支]를 …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精進覺支]를 …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喜覺支]를 … 고요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輕安覺支]를 …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定覺支]를 …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捨覺支]를 닦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계를 의지하고 계에 확고하게 서서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칠각지]를 닦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많이 [공부]지어서 법들에 대해서 크고 충만함을 성취한다.”(상윳따 니까야 히말라야 경(S46:1) §§5~6)


깨달음의 구성요소의 자양분(Aahāro bojjhaṅgānaṁ)

9.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확립시키는 [104] 법들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기를 많이 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수행을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나아가서 네 가지 법이 있어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⑴ 마음챙기고 분명하게 알아차림(正念正知) ⑵ 마음챙김을 잊어버린 사람을 피함 ⑶ 마음챙김을 확립한 사람을 친근함 ⑷ 이것을 확신함이다.”(SA.īi.155)


10.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유익하거나 해로운 법들, 나무랄 데 없는 것과 나무라야 마땅한 법들,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법들, 고상한 것과 천박한 법들, 흑백으로 상반되는 갖가지 법들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기를 많이 [공부]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수행을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나아가 일곱 가지 법들이 있어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⑴ 탐구함 ⑵ 토대를 깨끗하게 함 ⑶ 기능(五根)을 조화롭게 닦음 ⑷ 지혜 없는 사람을 피함 ⑸ 지혜로운 사람을 친근함 ⑹ 심오한 지혜로 행해야 할 것에 대해 반조함 ⑺ 이것을 확신함이다.”(SA.īi.156)


1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정진을] 시작하는 요소와 벗어나는 요소와 분발하는 요소가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기를 많이 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수행을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11가지 법이 있어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⑴ 악처 등의 두려움을 반조함 ⑵ 이점을 봄 ⑶ 가야 할 길의 과정을 반조함 ⑷ 탁발한 음식을 공경함  ⑸ [정법의] 유산의 위대함을 반조함 ⑹ 스승의 위대함을 반조함 ⑺ 태생의 위대함을 반조함 ⑻ 동료수행자들의 위대함을 반조함 ⑼ 게으른 사람을 멀리함 ⑽ 부지런히 정진하는 자를 친근함 ⑾ 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SA.īi.158)


12.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확립시키는 법들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기를 많이 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수행을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나아가서 11가지 법이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⑴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佛隨念) ⑵ 법을 계속해서 생각함(法隨念) ⑶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僧隨念) ⑷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戒隨念) ⑸ 관대함을 계속해서 생각함(捨隨念) ⑹ 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함(天隨念) ⑺ 고요함을 계속해서 생각함(止息隨念) ⑻ 거친 자를 멀리 함 ⑼ 인자한 자를 섬김 ⑽ 신심을 일으키는 경전들을 반조함 ⑾ 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SA.īi.161)


13.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편안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편안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몸의 편안함과 마음의 편안함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기를 많이 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편안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편안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수행을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나아가서 일곱 가지 법이 편안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⑴ 좋은 음식을 수용함 ⑵ 안락한 기후에 삶 ⑶ 편안한 자세를 취함 ⑷ 적절한 노력 ⑸ 포악한 사람을 멀리함 ⑹ 몸이 편안한 사람을 친근함 ⑺ 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SA.īi.162)


14. “비구들이여, [105]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사마타의 표상과 산란함이 없는 표상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기를 많이 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수행을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나아가서 11가지 법이 있어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⑴ 토대들을 깨끗하게 함 ⑵ 모든 기능들을 고르게 조절함 ⑶ 표상에 대한 능숙함 ⑷ 적당한 때에 마음을 분발함 ⑸ 적당한 때에 마음을 절제함 ⑹ 적당한 때에 격려함 ⑺ 적당한 때에 평온하게 함 ⑻ 삼매에 들지 않은 사람을 멀리함 ⑼ 삼매에 든 사람을 친근함 ⑽ 禪과 해탈을 반조함 ⑾ 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SA.īi.163)


15.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드는 자양분인가?

비구들이여,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확립시키는 법들이 있어 거기에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기를 많이 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수행을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다섯 가지 법이 있어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⑴ 중생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 ⑵ 상카라(行)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 ⑶ 중생과 상카라에 대해 애착을 가지는 사람을 멀리함 ⑷ 중생과 상카라에 대해 중립을 지키는 사람을 친근함 ⑸ 그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임이다.”(SA.īi.164)


-- 상윳따 니까야 자양분 경(S46:51) §§9~15와 그 주석서에서 인용 --


제21강: 초기불교의 수행 - 도란 무엇인가 ― 팔정도1

제22강: 초기불교의 수행 - 도란 무엇인가 ― 팔정도2


[부처님 최초의 설법은 팔정도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 머무셨다.

2. 거기서 [421] 세존께서는 오비구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 하지 않아야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래가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이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경(S56:11) §§1~4)


[팔정도의 중요성]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支聖道]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 수밧다여, 그러나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支聖道]가 있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있다. 수밧다여, 이 법과 율에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가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는 사문들이 텅 비어 있다. 수밧다여, 이 비구들이 바르게 머문다면 세상에는 아라한들이 텅 비지 않을 것이다. (디가 니까야 대반열반경(D22) §5.27)


“빤짜시카여, 나는 기억하노라. 나는 그때에 마하고윈다 바라문이었다. 나는 그 제자들에게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을 가르쳤다. 빤짜시카여, 나의 그런 청정범행은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nibbidā)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탐욕의 빛바램(virāga)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소멸(nirodha)로 인도하지 못했고, 고요함(upasama)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최상의 지혜(abhiññā)로 인도하지 못했고, 바른 깨달음(sambodha)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열반(nibbāna)으로 인도하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범천의 세상에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빤짜시카여, 그러나 지금 나의 이러한 청정범행은 전적으로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소멸로 인도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바로 이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그것은 곧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니라. 빤짜시카여, 이러한 청정범행은 전적으로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소멸로 인도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디가 니까야 마하고윈다경(D19) §61)


즉 이전에 마하고윈다였을 때는 팔정도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반을 실현하지는 못하고 단지 범천의 세상에 태어나는 것만이 가능했다는 말씀이다. 금생에서는 열반을 실현한 부처님이 되어 이제부터 팔정도를 설하시어 천상으로 윤회하는 것조차 완전히 극복한 열반의 길을 드러내 보이신다. 본경 외에도 본서 제1권의 마할리 경(D6 §14)과 깟사빠 사자후경(D8 §13)과 본서의 빠야시 경(D23 §31)에서는 팔정도를 불교에만 있는 가장 현저한 가르침으로 언급하고 있다. 특히 세존의 임종 직전에 마지막으로 세존의 제자가 된 수밧다 유행승에게 팔정도가 있기 때문에 불교 교단에는 진정한 사문이 있다고 하신 본서 대반열반경(D16, §5.27)의 말씀은 불교 만대의 표준이 되는 대사자후이시다.


[경전의 정의]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인가? 도반들이여, 출리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 ― 이를 일러 바른 사유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말인가? 비구들이여, 거짓말을 금하고 중상모략을 금하고 욕설을 금하고 잡담을 금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말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행위인가? 비구들이여, 살생을 금하고 도둑질을 금하고 삿된 음행을 금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행위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생계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그릇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한다.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생계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정진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하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정진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身隨觀] 머문다. 세속에 관한 욕심과 정신적 고통을 제쳐두고서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며 머문다. 느낌들에서 … 마음에서 … 법들에서 법을 따라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속에 관한 욕심과 정신적 고통을 제쳐두고서 열심히, 충분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마음챙김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모든 감각적 욕망을 떨쳐내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리고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수반하며, 멀리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 pīti]과 행복감[樂, sukha]을 특징으로 하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sampasādana)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희열이 사라졌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때문에 성자들이 그를 두고 ‘평온하게 마음 챙기며 행복에 머문다’라고 일컽는 제3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즐거움도 버렸고 괴로움도 버렸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사라졌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捨念淸淨] 제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라 한다.”(디가 니까야 대념처경(D22) §21)


[팔정도가 중도다]

중도(中道)의 가르침은 부처님 최초의 설법이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천명하신다.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 하지 않아야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S56:11)


〈초전법륜경〉뿐만 아니라 37조도품을 중도라고 설하고 계신 〈증지부〉의 한 곳(A.i.295)을 제외한 모든 초기경들에서 중도는 반드시 팔정도로 설명이 되고 있다. 물론 37조도품도 팔정도가 핵심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시기 직전에 찾아와서 마지막 제자가 된 수밧다라는 유행승에게 부처님께서는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이 없다. 그러나 나의 법과 율에는 팔정도가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불교교단)에만 사문이 있다”(D16)고 단언하셨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45년 설법의 최초와 최후 가르침으로 팔정도를 설하셨으며 이것이 바로 중도이다. 그러므로 중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처님께서 초기경들에 정형화해 분명하게 밝힌 팔정도의 정형구를 정확하게 살펴봐야 한다.


[팔정도의 개관]

첫째, 바른 견해(正見)는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로 정의되고 있다. 한마디로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그리고 〈깟짜나 곳따 경〉 (가전연경은 팔정도인 중도를 설한 경이 아니라 중(中)으로 표현되는 바른 견해를 설한 경이다)에서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를 질문 드리는 가전연 존자에게 부처님께서는 “깟짜야나여,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이 없다는 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중(中)에 의지해서 법을 설한다”라고 명쾌하게 말씀하신 뒤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의 정형구로 중을 표방하신다.(S12:15) 즉 연기의 가르침이야말로 바른 견해이다.

이처럼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와 연기의 가르침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사성제 가운데 집성제는 연기의 유전문(고의 발생구조)과 연결되고, 멸성제는 연기의 환멸문(고의 소멸구조)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사성제와 연기의 가르침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것을 바르게 보는 것이 팔정도의 정견이다.

둘째, 바른 사유(正思惟)는 “출리(욕망에서 벗어남)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로 정의되는데 불자들이 세상과 남에 대해서 항상 지녀야할 바른 생각을 말한다.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초기경들에서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자애, 연민, 같이 함, 평온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四無量)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바른 말(正語)은 “거짓말을 삼가하고 중상모략을 삼가하고 욕설을 삼가하고 잡담을 삼가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넷째, 바른 행위(正業)는 “살생을 삼가하고 도둑질을 삼가하고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이다.

다섯째, 바른 생계(正命)는 “삿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하는 것”이다. 다른 경들의 설명을 보면 출가자는 무소유와 걸식으로 삶을 영위해야하며 특히 사주, 관상, 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서는 안된다. 재가자는 정당한 직업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처럼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를 실천하는 지계의 생활은 그 자체가 팔정도의 고귀한 항목에 포함되고 있는 실참수행임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여섯째, 바른 정진(正精進)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정진은 해탈열반과 향상에 도움이 되는 선법(善法)과 그렇지 못한 불선법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전제되고 있다. 선법.불선법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밀어붙이는 것은 결코 바른 정진이 아니다.

일곱째, 바른 마음챙김(正念)은 “몸에서 몸을 관찰하고,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고,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무는 것”이다.

바른 마음챙김이야 말로 팔정도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수행기법이다.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존재를 먼저 몸뚱이(身), 느낌(受), 마음(心), 심리현상(法)들로 해체해서 이 중의 하나에 집중한 뒤, 그것을 무상하고 고요 무아라고 통찰할 것을 설하고 계신다. 마음챙김에서 중요한 것은 해체이다. 중생들은 무언가 불변하는 참 나를 거머쥐려 한다. 이것이 생사윤회의 가장 큰 동력인이다. 무엇보다도 나라는 존재를 해체해서 관찰하지 못하면 진아니 대아니 마음이니 하면서 무언가 실체를 세워서 이러한 것과 합일되는 경지쯤으로 깨달음을 이해하게 되고 이런 것을 불교의 궁극으로 오해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르게 되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여덟째, 바른 삼매(正定)는 초선과 제2선과 제3선과 제4선에 들어 머무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삼매 혹은 선(禪)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혼침, 들뜸.후회, 의심이라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장애들이 극복되어 마음의 행복과 고요와 평화가 가득한 경지를 순차적으로 정리한 것이 네 가지 선(禪)이며 이를 바른 삼매라 한다.


[팔정도의 중요성 몇 가지]

이상의 정형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몇 가지 관점에서 다시 중도를 음미해보자. 첫째, 거듭 강조하거니와 중도는 팔정도이다. 대승불교에 익숙한 우리는 중도하면 팔불중도(八不中道)나 공가중(空假中)으로 정리되는 〈중론송〉 삼제게(三諦偈)를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경에서의 중도는 명명백백하게 팔정도이다. 특히 삼제게는 연기(緣起)적 현상을 공.가.중으로 통찰하는 것을 중도라고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 〈중론송〉의 중도는 연기에 대한 통찰지이며 이것은 위에서 보듯이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용수스님을 위시한 중관학파에서 주창하는 중도는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을 말하는 것이지 팔정도로 정의되는 실천도로서의 중도는 아니다.

둘째, 중도는 철학이 아니라 실천이다. 우리는 중(中)의 의미를 철학적 사유에 바탕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그러한 설명은 오히려 실천체계로서의 중도를 관념적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크다. 중도가 팔정도인 이상 중도는 부처님께서 팔정도의 정형구로써 정의하신 내용 그 자체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중도의 도에 해당하는 빠알리어 빠띠빠다(patipada)가 실제로 길 위를(pati) 밟으면서 걸어가는 것(pada)을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셋째, 중도로 표방되는 수행은 총체적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도를 8가지로 말씀하셨지 어떤 특정한 기법이나 특정한 하나만을 가지고 도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8가지가 총체적으로 조화롭게 개발되어나갈 때 그것이 바른 도 즉 중도다. 그러나 우리는 수행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려 하지 않고 기법 즉 테크닉으로만 이해하려 든다. 그래서 간화선만이, 염불만이, 기도만이, 위빠사나만이 진짜 수행이라고 우기면서 극단으로 치우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중도가 아니요 극단적이요 옹졸한 도일뿐이다.

넷째, 중도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중도는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도는 참선하는 시간이나 염불하고 기도하고 절하는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사찰이나 선방이나 명상센터라는 특정 장소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도는 모든 시간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매순간 머무는 곳, 바로 ‘지금.여기(ditthe va dhamme, here and now. 現今)’에서 실천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是現今 更無時節. 바로 지금 여기일 뿐 다른 호시절은 없다)이라 하셨다.

다섯째, 중도는 한 방에 해치우는 것이 아니다. 수행에 관한한 초기경에서 거듭 강조하시는 부처님의 간곡한 말씀은 “받들어 행하고, 개발하고, 거듭해서 많이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는 팔정도를 많이많이 닦는 것이다. 범부는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해서 중도인 팔정도를 실천하고 깨달은 분들은 팔정도로써 깨달음을 이 땅위에 구현하신다. 주석서에서는 전자를 예비단계의 도라고 설명하고 후자를 완성된 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중도는 한 방에 해치우는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듭해서 닦아야하고 구현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직계 제자 때부터 사사나(Sasana. 명령)라고 불렸다. 실천으로서의 부처님 명령은 극단을 여읜 중도요 그것은 팔정도이다. ‘팔정도를 닦아서 지금 여기에서 해탈열반을 실현하라’는 부처님의 지엄하신 명령은 저 멀리 내팽개쳐버리고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용해서 자신의 명성이나 지위나 이속을 충족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제23강: 초기불교의 수행 - 사마타와 위빳사나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부처님의 직설이다]

‘사마타(samatha)’와 ‘위빳사나(vipassanā)’는 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술어이며 특히 상좌부 불교의 수행 체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핵심 술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두 술어는 일찍이 중국에서 각각 지(止)와 관(觀)으로 정착되었다. 그래서 지와 관을 고르게 닦을 것을 강조하여 지관겸수(止觀兼修)로 정착되었고, 이것은 다시 선종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로 계승되었다. 불교 2,600년사에서 내로라하는 논사들이나 수행자들이 이렇듯 지와 관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한 것을 본 때문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관심은 ‘후대 논사들이나 수행자들의 견해가 아닌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직접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설명하신 것이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어떻게 정의하셨는가?’하는 것으로 기울게 되었다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적지 않은 초기경전에서 세존께서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분명하게 정의하고 계신다.

먼저 언급해야할 경이 앙굿따라 니까야 영지(靈知)의 일부 경(A2:3:10)이다. 이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사마타를 마음(citta)과 마음의 해탈(심해탈, ceto-vimutti) 즉 삼매[定, samādhi]와 연결 지으시고, 위빳사나를 통찰지(paññā, 반야)와 통찰지를 통한 해탈(혜해탈, paññā-vimutti) 즉 통찰지[慧, paññā]와 연결 지으신다. 그리고 삼매는 욕망을 극복하는 수행이고, 통찰지는 무명을 극복하는 수행이라고 밝히고 계신다.

그리고「삼매 경」1(A4:92) 등 세 개의 경들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한 답변을 명확하게 제공하고 있다. 이 세 개의 경들에 나타나는 "마음의 사마타"와 "통찰지라 [불리는] 법들에 대한 위빳사나"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사마타는 마음의 개발을 뜻하는 삼매와 동의어이고, 위빳사나는 통찰지와 동의어이다.

그래서「삼매 경」3(A4:94)에서는 사마타를 얻기 위해서는 사마타를 체득한 분을 찾아가서 '도반이여, 어떻게 마음을 고정시켜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이 삼매에 들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위빳사나를 얻기 위해서는 위빳사나에 통달한 분을 찾아가서 '도반이여, 형성된 것들[行]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명상해야 합니까?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깊이 관찰해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사마타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정시키고 고요하게 하는 삼매를 개발하는 수행(삼매, 定, samādhi)이며, 위빳사나는 유위제법[行]을 명상하고 관찰하여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수행(통찰지, 慧, paññā)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마타를 먼저 닦아야 하는가, 아니면 위빳사나를 먼저 닦아야 하는가, 아니면 둘 다를 동시에 닦아야 하는가이다. 이것도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토론거리가 되고 있다. 쌍 경(A4:170)은 여기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마타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위빳사나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함께 닦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 개인의 문제이지 어느 것을 먼저 닦아야 하는가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앙굿따라 니까야』를 위시한 초기경전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한 중요한 언급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몇 가지 측면에서 비교해서 살펴보자.


[대상 - 개념과 법]

첫째, 사마타든 위빠사나든 중요한 것은 대상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사마타의 대상은 표상(nimitta)이라는 개념(pannatti)이고 위빠사나의 대상은 법(dhamma)이다. 이것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잣대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집중과 통찰]

둘째, 사마타는 대상(표상)에 대한 집중이고 위빠사나는 대상(법)에 대한 통찰이다. 사마타(samatha)는 마음이 표상에 집중되어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그치고(止)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지(止)로 옮겼다. 위빠사나(vipassan)는 ‘분리해서(vi) 보는 것(passana)’이라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대상을 나타난 모양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인 특성을 여실지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관(觀)으로 옮겼다. 이처럼 사마타는 대상(표상)에 집중하는 삼매(定) 수행이고 위빠사나는 대상(법)을 무상.고.무아로 통찰하는 반야(통찰지. 慧) 수행이다.


[닮은 표상과 삼특상]

셋째, 사마타의 키워드는 닮은 표상이고 위빠사나의 키워드는 무상.고.무아이다. 〈청정도론〉은 사마타의 대상을 40가지 명상주제로 정리하고 있다. 이런 대상 가운데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 대상에서 익힌 표상을 만들고, 이것이 마침내 닮은 표상(相似影像. patibhaga-nimitta)으로 승화되어 흩어지지 않고 오롯하게 되어, 매순간의 마음들이 이 닮은 표상에 고도로 집중된 상태를 사마타라 한다. 위빠사나는 마음(心).마음부수(心所).물질(色)로 구분되는 71가지 구경법들 가운데 하나를 통찰하는 수행인데 이처럼 법을 통찰해 들어가면 제법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徹見)하게 된다.


[일시적인 해탈과 해탈]

넷째, 사마타의 고요함만으로는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마타는 마음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그런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 탐.진.치가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마타에서 나올 때는(出定) 다시 탐.진.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태를 경에서는 일시적인 해탈(samaya-vimutta, 앙굿따라 니까야 일시적 해탈 경1(A5:149) 등)이라 한다. 그러므로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의 힘으로 이들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래야 해탈.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그래서 무상.고.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한다.


[지관겸수(止觀兼修)]

다섯째, 이처럼 위빠사나의 지혜(통찰지)가 없이는 해탈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고요함과 고도의 집중이라는 사마타의 힘이 아니면 위빠사나의 지혜가 생기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라는 술어는 거의 대부분 함께 나타나며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지관겸수(止觀兼修)를 강조하였다.



[무엇을 먼저 닦을 것인가]

여섯째, 사마타를 먼저 닦을 것인가 위빠사나를 먼저 닦을 것인가는 결국 인연 닿는 스승의 지도방법과 수행자 자신의 관심과 성향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마타를 반드시 먼저 닦아야한다거나 위빠사나만을 닦아야한다거나 하는 것은 독단적인 견해일 뿐이고, 이런 견해를 고집하면 진정한 수행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수행은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로 귀결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위빠사나는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 그 자체이지 결코 특정한 수행기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제24강: 초기불교의 수행 - 삼학과 오법온과 칠청정


[개요]

삼학(三學, tisso sikkhā)은 계학(戒學, adhisīla-sikkhā)과 심학(心學, adhicitta-sikkhā)과 혜학(慧學, adhipaññā-sikkhā)을 말한다. 심학은 삼매수행과 동의어이고 혜학은 통찰지를 닦는 수행을 뜻한다.

이 셋에다 해탈과 해탈지견을 더하여 다섯 가지 법의 무더기[五法蘊, pañca dhamma-kkhandha]라고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칠청정은 맛지마 니까야 역마차 경(M24)의 주제이다. 그것은 ⑴ 계 청정 ⑵ 마음 청정 ⑶ 견 청정 ⑷ 의심을 제거함에 의한 청정 ⑸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知)와 견(見)에 의한 청정 ⑹ 도닦음에 대한 지 와 견에 의한 청정 ⑺ 지와 견에 의한 청정의 일곱 가지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계(戒)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삼매[定]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통찰지[慧]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해탈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이제 성스러운 계를 깨닫고 꿰뚫었다. 성스러운 삼매를 깨닫고 꿰뚫었다. 성스러운 통찰지를 깨닫고 꿰뚫었다. 성스러운 해탈을 깨닫고 꿰뚫었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갈애는 잘라졌고,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은 부수어졌으며, 다시 태어남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앙굿따라 니까야 깨달음 경(A4:1))


[삼학과 오법온의 설명]

“‘계를 구족함(sīla-sampannā)’이란 번뇌 다한 자의 세간적이거나 출세간적인 계(lokiya-lokuttara-sīla)를 구족한 자라는 뜻이다. ‘삼매(samādhi)’와 ‘통찰지(paññā)’의 경우도 같다. 그러나 ‘해탈(vimutti)’은 과의 해탈(phala-vimutti)이다. ‘해탈지견(vimutti-ñāṇa-dassana)’은 반조의 지혜(paccavekkhaṇa-ñāṇa)이다. 그러므로 계와 삼매와 통찰지는 세간적이거나 출세간적인 것이고 해탈은 출세간적인 것이고 해탈지견은 세간적인 것이다.”(SA.īi.141~142)

“‘계(sīla)’는 네 가지 청정한 계이다. ‘삼매(samādhi)’는 위빳사나의 기초인 여덟 가지 증득(samāpatti)이다. ‘통찰지(paññā)’는 세간적이거나 출세간적인 지혜이다. ‘해탈(vimutti)’은 성스러운 과이다. ‘해탈지견(vimutti-ñāṇa-dassana)’은 19가지 반조의 지혜(paccavekkhaṇa-ñāṇa)이다.”(MA.ī.147)


⑴ 계(sīla): “무슨 뜻에서 계라 하는가? 계행(sīlana)이라는 뜻에서 계다. 무엇을 이 계행이라 하는가? 안정함 (samādhāna)이다. 계를 잘 지님으로써 몸의 업 등이 흩어짐이 없음을 뜻한다. 혹은 지지함 (upadhāraṇa)이다. 유익한 법들의 기초로서 토대가 된다는 뜻이다. 어원을 아는 자들은 이 두 가지의 뜻을 인정한다…. 단속(saṁvāra)이 계다.”(청정도론 I.17 등)

① 계목(戒目)의 단속에 관한 계 ② 감각기능[根]의 단속에 관한 계 ③ 생계의 청정에 관한 계 ③ 필수품에 관한 계 - 청정도론 제1장


⑵ 삼매(samādhi): 삼매는 이미 경에서 cittassa ekaggatā(마음이 한끝으로 모임 =집중)으로 정의된다. 주석서들에서는 구체적으로 유익한 마음의 집중(kusala-cittassa ekaggatā)을 삼매라 정의하고 있다. 마음을 집중하고 제어하고 다스려서 자유자 재함을 얻는 것이 삼매를 닦는 목적이기 때문에 마음의 청정을 삼매라 부른다.

“세 단계의 수행이 있으니 ⑴ 준비단계의 수행 ⑵ 근접[삼매]의 수행 ⑶ 본[삼매]의 수행이다. parikammabhāvanā, upacārabhāvanā, appanābhāvanā cā ti tisso bhāvanā.

세 가지 표상이 있다고 알아야 하니, 준비단계의 표상parikamma-nimitta, 익힌 표상uggaha-nimitta, 닮은 표상paṭibhāga-nimmita이다.”(아비담마 길라잡이 제9장)


⑶ 통찰지(paññā): “3가지 특상이 있으니 무상의 특상, 고의 특상, 무아의 특상이다. 세 가지 수관이 있으니 ⑴ 무상의 수관 ⑵ 고의 수관 ⑶ 무아의 수관이다.(anupassanā)

삼특상을 수관하는 것은 위빳사나의 시작일 뿐 아니라 위빳사나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정도론』을 보면 아래에 나타나는 열 단계의 위빳사나의 지혜는 거친 물질에서 출발해서 점점 미세한 마음 의 현상이 무상·고·무아임을 수관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단계를 거쳐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런 해탈 도 아래 §27에 나타나듯이 공, 표상 없음, 원함 없음의 수관을 통해 성취된다. 그만큼 아누빳사나 와 위빳사나, 즉 隨觀과 內觀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아비담마 길라잡이 제9장)


⑷ 해탈(vimutti): “세 가지 해탈이 있으니 ①  공한[空] 해탈 ② 표상이 없는[無相] 해탈 ③ 원함이 없는[無願] 해탈이다.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을 알아야 하나니 ① 공의 수관(隨觀) ② 표상 없음의 수관 ③ 원함이 없음의 수관이다.”(아비담마 길라잡이 제9장)


⑸ 해탈지견(vimutti-ñāṇa-dassana): 19가지 반조의 지혜(paccavekkhaṇa-ñāṇa)이다.(MA.ī.147)

반조는 도(magga), 과(phala) 열반(nibbāna) 버린 오염원(pahīna-kilesasa) 남아있는 오염원(avasiṭṭha-kilesa)의 다섯에 대해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예류자부터 아라한까지 모두 4×5=20가지의 반조가 되겠지만 아라한에게는 남아있는 오염원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남아있는 오염원에 대한 반조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 19가지 반조가 일어난다. 이것이 해탈지견이다.


[일곱 가지 청정(visuddhi)]

“청정의 주제는 모두 일곱 가지이다. 즉 ⑴ 계 청정 ⑵ 마음 청정 ⑶ 견 청정 ⑷ 의심을 제거함에 의한 청정 ⑸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知)와 견(見)에 의한 청정 ⑹ 도닦음에 대한 지 와 견에 의한 청정 ⑺ 지와 견에 의한 청정이다.

특징과 역할과 나타남과 가까운 원인으로써 정신과 물질을 파악하는 것을 견청정이라 한다.

바로 그 정신과 물질들의 조건을 파악하는 것을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이라 한다.

그 다음에 그가 그와 같이 삼계의 상카라[行]들을 조건과 함께 파악할 때 과거 등으로 분류되는 무더기 [蘊] 등을 통해 그들을 무리(깔라빠, kalāpa)별로 모은다. 파괴한다는 뜻에서 무상이고, 두렵다는 뜻에서 괴로움이고, 실체가 없다는 뜻에서 무아라고 시간(addhāna)과 흐름[相續, santati]과 순간 (khaṇa)을 통해 명상의 지혜로써 세 가지 특상을 명상한다. 그 다음에 조건과 순간을 통해 생멸의 지혜로써 그 [상카라들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을 명상한다.

이와 같이 장애로부터 벗어날 때 그는 생멸의 지혜부터 수순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특상에 대한 위빳사 나의 연속으로써 도를 닦는다. 그 아홉 가지 위빳사나의 지혜를 도닦음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이라 한다.

그가 이와 같이 도 닦을 때 위빳사나가 무르익어 본삼매가 일어날 그 순간에 잠재의식을 끊고 意門전향 이 일어난다. 그 다음에 둘 혹은 세 개의 위빳사나 마음이 무상 등의 특상 중 어떤 하나를 대상으로 일 어난다. 그들은 준비, 근접, 수순이라 이름한다. 수순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 그 수순과 함께 상카라[行]에 대한 평온의 지혜를 출현으로 인도하는 위빳 사나라 부른다.

그 다음에 열반을 대상으로 종성(種姓)의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은 범부의 종성을 벗고 성자의 종성에 참여한다. 그 다음에 도[의 마음]이 고의 진리를 잘 알고, 일어나는 원인의 진리를 버리고, 멸의 진리를 증득 하고, 도의 진리를 닦으면서 본 삼매의 출세간의 인식과정에 들어온다. 그 다음에 둘 혹은 셋의 과의 마음이 일어났다가 멸한다. 그 다음에 잠재의식으로 들어간다.

그 다음에 잠재의식을 끊고서 반조의 지혜가 일어난다.  지자는 도와 과와 열반을 반조한다. 버린 오염들과 나머지 오염들을 반조하기도 하고 혹은 반조하지 않는다. 차례대로 여섯 가지 청정에 의해 개발되어야 할 네 가지 도를 지와 견에 의한 청정이라 부른다.”(아비담마 길라잡이 제9장)



제25강: 족쇄를 푼 성자들 - 10가지 족쇄와 네 가지 성자


[10가지 족쇄]

해체해서봐야 깨닫고 성자가 된다. 유신견극복된다.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실현한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의 성자(ariya)들을 10가지 족쇄(saṁyojana)를 얼마나 많이 풀어내었는가와 연결 지어서 설명한다. 먼저 열 가지 족쇄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자아가 있다는 견해. 중생을 중생이게끔 기만하고 오도하는 가장 근본적인 삿된 견해로, 고정불변하는 자아 혹은 실체가 있다고 국집하는 견해이다. 경에서는 오온의 각각에 대해서 4가지로 자아 등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본서 나꿀라삐따 경(S22:1) §§10~14 및 주해 참조,『아비담마 길라잡이』7장 §7의 해설 참조)

② 계율과 의식(혹은 誓戒)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 형식적 계율과 의식을 지킴으로써 해탈할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것.(『아비담마 길라잡이』7장 §6의 해설 참조)

③ 의심[疑, vicikicchā]: 불/법/승, 계율, 연기법 등을 회의하여 의심하는 것.(『아비담마 길라잡이』2장 §4의 해설 참조)

④ 감각적 욕망(kāma-rāga):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⑤ 적의(paṭigha): 반감, 증오, 분개, 적대감 등을 뜻하며 성내는 마음[嗔心]과 동의어이다.(『아비담마 길라잡이』1장 §5의 3번 해설 참조)

⑥ 색계에 대한 탐욕(rūpa-rāga): 색계 禪(초선부터 제4선까지)으로 실현되는 경지에 대한 집착.

⑦ 무색계에 대한 탐욕(arūpa-rāga): 무색계 禪(공무변처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으로 실현되는 경지에 대한 집착.

⑧ 자만[慢, māna]: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 동등하다, 못하다 하는 마음.(본서 사밋디 경(S1:20) §10과 주해 참조,『아비담마 길라잡이』2장 §4 해설 참조)

⑨ 들뜸(掉擧, uddhacca): 들뜨고 불안한 마음.(『아비담마 길라잡이』2장 §4 해설 참조)

⑩ 무명(無明, avijjā): 사성제를 모르는 것.(본서 분석 경(S12:2) §15 참조)


이 가운데서 유신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의심, 감각적 욕망, 적의, 이 다섯은 아래의 [욕계에서] 생긴 무더기 등을 결박하기 때문에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라 부른다.(『청정도론』XXII.48) 그리고 색계에 대한 탐욕, 무색계에 대한 탐욕, 자만, 들뜸, 무명, 이 다섯은 위의 [색계와 무색계]에서 생긴 무더기 등을 결박하기 때문에 높은 단계의 족쇄[上分結]라 부른다.(Ibid)


[족쇄와 성자]

예류자(sotāpatti)는 유신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의심의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풀린 사람이고, 일래자(sakadāgami)는 이 세 가지가 완전히 다 풀렸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 욕망과 적의의 두 가지 족쇄가 아주 엷어진 사람이다. 불환자(anāgami)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완전히 다 풀려나간 사람이고, 아라한(arahan)은 열 가지 모든 족쇄를 다 풀어버린 사람이다.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은 오온을 나라고 내 것이라고 국집하는 견해이다. 초기경전의 도처에서 부처님께서는 존재를 온처계근제연으로 분석하고 해체해서 설하셨다. 이렇게 해체하신 한 하나의 이유는 이러한 존재에서 자아니 대아니 참 마음이니 우주니 실상이니 하는 따위의 실체가 있다는 관견을 척파하시기 위한 것이다. 실체가 있다고 국집하는 견해를 통털어 유신견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신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제 아무리 날고 기어도 깨달음의 초보 단계인 예류과에도 미치지 못함을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

참 나를 찾기 위해서, 진여불성을 찾기 위해서, 참마음을 관하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을 실체시하여 그것을 들여다보는 것쯤으로, 아니면 그것과 하나 되기 위해서 힘으로 밀어 붙이는 것으로 수행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불교 수행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저 외도의 우빠니샤드식의 행법일 뿐이다.

초기불교교학은 존재를 온/처/계/근/제/연으로 해체해서 보아서 이들에 대해서 염오-이욕-소멸, 혹은 염오-이욕-소멸-해탈-해탈지, 혹은 염오-이욕-소멸-고요-최상의 지혜-깨달음-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렇게 해체해서 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부처님께서는 37조도품을 말씀하셨고 그것은 팔정도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