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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6

通達無我法者 2010. 12. 19. 20:3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욕망의 늪에서 헤매고 있습니까?

욕망은 달콤하지만 천박한 것입니다.

이제 욕망의 포로가 된 자신을 구하십시오.

욕망이 당신을 키웠지만 그 욕망이 이제 당신을 죽음으로 이르게 합니다.

이제 탐욕에 찌든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당신은 아직도 화를 내서 자신을 불태우고 있습니까?

화는 화를 낸 자가 가장 큰 피해를 입습니다.

당신의 오만한 편견이 화를 내게 합니다.

알아차리십시오.

 

당신은 아직도 무지에 눈이 멀었습니까?

눈을 뜨십시오.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당신은 아직도 허상을 붙잡고 헛된 꿈을 꾸고 있습니까?

꿈을 깨십시오.

이제는 사실을 직시하여 오랜 망상으로부터 벗어나십시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경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경전에 ‘올바른 길에 도달하고’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올바른 길이란 숭고한 길로써 깨달음의 순간에 나타나는 의식을 뜻합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위빠사나 수행자가 진리인 열반을 성취하면

도(道)의 의식이라는 의식이 내면에서 일어납니다.

 

도(道)의 의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같은 단계의 의식에 다다른 수행자는

이 길에서 열반을 틀림없이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道)의 끝에 이르면 확실히 열반으로 인도됩니다.

이 길을 올바른 길이라 하고, 숭고한 길이라 하고,

이 길을 위빠사나의 도(道)라고 합니다.

 

네 단계의 깨달음이 있고, 따라서 네 가지 형태의 도(道)의 의식이 있습니다.

각각의 도의 의식은 정신적 번뇌의 어떤 부분을 완전히 없앱니다.

 

네 번째 도(道)의 의식에 도달한 후에 모든 번뇌가 한꺼번에 없어집니다.

도(道)의 의식에 의해 소멸된 번뇌는 수행자에게 다시 생기지 않습니다.

 

숭고한 길에 도달하고, 정신적 번뇌를 한꺼번에 없앨 수 있는

열반을 성취하려면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이 오직 유일한 길입니다.

 

다음에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길’ 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숭고한 길에 도달했다는 것은 도(道)의 의식의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이고

열반을 실현했다는 것은 과(果)의 의식의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도(道)에 의해서 과(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도(道)의 의식 바로 뒤에 과(果)의 의식이 옵니다.

 

아비담마를 어느 정도 알면 이것을 더 명확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 도(道)의 의식과 과(果)의 의식은 둘 다 열반을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둘 다 열반을 직접 체험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道)와 과(果), 이 두 순간은 모두 열반을 실현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요약하면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라고 하시고 알아차림을 확립하는데서 얻는 이익을

다음과 같이 7가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 중생을 정화하고

두 번째, 슬픔을 극복하게 하고

세 번째, 비탄을 극복하게 하고

네 번째, 육체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다섯 번째,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여섯 번째, 올바른 길에 도달하게 하고, 이것이 도(道)입니다.

일곱 번째, 과(果)인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유일한 길인가요?

바로 유일한 길이란 다름 아닌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을 말합니다.

네 가지는 신, 수, 심, 법 사념처를 적절하게 알아차렸을 때

우리는 일곱 가지 이익을 얻어서 지고의 행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차림의 확립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합니다.

알아차림의 확립을 ‘사띠빠타나’ 라고 합니다.

 

사띠빠타나는 사띠와 빠타나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서 빠타나는 ‘대상에 가라앉고, 들어가고, 덮어버리는 어떤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띠빠타나는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대상에 가라앉는, 대상에 들어가는, 그리고 대상을 덮어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아차림은 표면 위에 떠돌지 않는 특성을 가졌다고 합니다.

알아차림이라고 불려지면, 그것은 대상에 깊이 가라앉아야 하고,

대상에 들어가야 하고, 그리고 온통 대상을 덮어버려야 합니다.

다시 경전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의 수행에 대한 요약입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자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립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자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몸이란 말을 반복했는데 이것은 수행자가 느낌이 아니라,

마음이 아니라, 법이 아니라, 오직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고 할 때 뜻은 매우 단순해 보입니다.

이 말의 뜻은 몸을 알아차릴 때는 몸 이외에는 어떤 것을 알아차려서도 안 되고,

오직 몸을 알아차리는 것 하나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집중력을 키워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매우 단순합니다.

사실 이러한 단순함이 위빠사나 수행의 특징입니다.

 

몸 이외의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오직 느낌 하나에 마음을 머물게 해야 합니다.

이것저것 찾아서 대상을 옮겨가면 들떠서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몸에서 몸을 알아차릴 때만이 고요함이 생기고

몸의 특성을 아는 지혜가 납니다.

 

여기서 ‘지낸다’ 는 말은 ‘머문다, 생활한다’는 등, 일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일상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이라서

이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리고 ‘알아차림’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알아차림으로 번역한 사띠(sati)는 기억, 억념 등의 뜻이 있지만

수행과 관련된 문맥에서는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지 않습니다.

 

이때의 기억은 현존하는 기억으로, 알아차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지,

과거를 기억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대상에 깊이 들어가고, 대상을 파지하고, 대상에 확립하고,

그리고 마음을 보호하는 것으로써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가능케 하는

선(禪)은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알아차림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이미 청정도론에서는 알아차림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마음이 들뜸과 게으름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보호한다.

그러므로 이 알아차림은 모든 요리의 맛을 내는 소금과 향료처럼,

모든 정치적인 업무에서 일을 처리하는 대신처럼,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하셨습니다.

 

“알아차림은 모든 곳에서 유익하다고 세존께서 설하셨다. 무슨 이유인가?

마음은 알아차림에 의지하고, 알아차림은 보호로써 나타난다.

알아차림이 없이는 분발과 절제함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알아차림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알아차림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의 주위에 맴돌지 않고

대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정해진 대상이나 명상의 주제에서 맴돌거나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고,

그 명상 주제로 바로 깊이 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알아차림은 대상을 거머쥐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움켜쥐거나 거머쥐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대상에 깊이 들어감’ 이라는 첫 번째 설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대상을 정확하게 거머쥐어서 그것을 파지(把持)하고 파악하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이렇게 대상을 정확하게 거머쥐지 않으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는 선정을 실현할 수 없고

통찰지로써 그 대상의 무상, 고, 무아를 알아차릴 수도 없습니다.

 

세 번째, 알아차림은 확립입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도 알아차림의 확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첫 번째 대상에 깊이 들어감과

두 번째 대상을 파지하는 것을 바탕으로 이제는 대상에 확립된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만이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알아차림은 마음을 보호합니다.

대상에 알아차림이 확립되어 있으면 그 대상을 통하여 나쁜 표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보호’ 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강한 힘에 의해서 나쁜 표상 등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마음을 나쁜 표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차릴 때는 나쁜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서 선한 상태가 되지만,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도둑이 들어와서 나를 지배합니다.

그러면 나는 결코 선한 것으로 보호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막아서 보호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 그 자체가 계율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음에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라는 이 구절은

수행자가 어떻게 수행을 하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몸에서 몸을 알아차릴 때,

즉 몸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차릴 때,

열심히 그리고 분명한 앎을 하고 그리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열심히’ 란 뜻은 수행자가 몸에서 무엇이든지 알아차리거나,

알아차리기 위해서 활기가 있어야 하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열심히’ 란 수행자가 기울인 활력, 또는 노력을 말합니다.

 

노력 없이는 마음을 계속 대상에 머무르게 할 수가 없고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알아차릴 때, 잠시도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머물러 있지 않고 떠납니다.

그러면 수행을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노력입니다.

이 노력을 ‘열심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 노력은 마음이 대상에 머물러 있도록 마음의 의도를 내는 것을 노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활력이 필요합니다.

이 활력이 바로 노력입니다.

 

마음을 대상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활력 또는 노력이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매우 절대적인 것입니다.

 

‘수행자는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을 할 때에는 항상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호흡, 여러 가지 동작, 몸의 작은 움직임들을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알아차림이란, 돌이 벽을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돌을 던지고자 하면 힘을 써야 합니다.

힘을 주어 돌을 던지면 돌은 벽을 때립니다.

돌이 벽을 때리듯이 알아차림은 대상을 때립니다.

어떤 대상이든 수행자의 마음은 이들 대상에게로 갑니다.

 

대상을 때리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이때, 때린다는 것은 마음이 대상에 가서 접촉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하면서 활력이나 노력이 함께 있을 때

수행자의 마음은 대상에 얼마동안 머무를 것입니다.

 

돌이 벽을 친 후, 벽이 물에 젖어 있다면 벽에 머물 것입니다.

그 돌은 벽에 박힐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활력과 알아차림의 도움을 받는다면

마음이 대상에 가고 대상에 머무를 것입니다.

 

마음이 대상에 머무는 것을 집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것을 집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알아차림을 했을 때만이 비로소 집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집중력을 계발했을 때만이 지혜를 갖게 되고 몸의 자연적 성품을 이해할 것입니다.

수행자는 몸에 관해서 명백한 이해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알아차리고 분명한 앎을 해야 한다는 말은

또한 집중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집중력은 분명한 앎, 즉 지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알아차림과 마음의 집중은 집중이란 묶음에 속합니다.

바로 여덟 가지의 요소, 여기에 팔정도가 있습니다.

 

바른 이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그리고 바른 마음의 집중입니다.

 

이들 여덟 가지 요소는 다시 세 가지 묶음으로 나누는데

도덕적 묶음, 집중의 묶음, 그리고 지혜의 묶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입니다.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이 집중의 묶음에 속합니다.

어느 한 가지를 수행할 때 다른 것들도 같이 수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알아차림이란 여기서 집중이란 뜻으로 해석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