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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8

通達無我法者 2010. 12. 20. 23:0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나쁜 일을 하는 것 보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좋은 일인 줄 알면서도 하지를 못합니다.

나쁜 습관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을 할 때도 오직 좋은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하면서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면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좋은 일을 하고 오만해 질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서 좋은 결과를 바라면 좋은 결과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탐욕으로 하는 것이라서 괴로움이 따릅니다.

좋은 일에 어떤 목적도 없을 때라야 비로소 온전하게 좋은 일입니다.

 

가장 좋은 일은 해탈을 목표로 하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번뇌가 사라진 가장 고귀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공부한 대념처경의 서언을 보충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며 지낸다.’라고 말할 때는

이 말은 단순하지만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 비구는 이라고 할 때 ‘여기’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이것을 교법이라고 하는데 빨리어로는 ‘사사나’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여기’라는 말로 표현 된 것입니다.

 

다음에 ‘몸에서 몸을 알아차린다.’고 할 때

‘몸’에서는 물질로서의 몸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물질의 몸을 32가지의 부속물의 집합으로 보셨습니다.

이때의 몸은 머리털, 몸털, 손톱과 발톱, 이빨 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몸을 알아차린다고 할 때는 몇 가지 알아차릴 대상이 있습니다.

첫째, 몸을 알아차릴 때 다른 대상과 섞이지 않게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몸이라는 단단한 덩어리를 분해해서 알아차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분해는 대상의 성품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바른 이해에 대한 치유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는 단지 몸만을 알아차려야지

다른 느낌이나 마음이나 법을 알아차리지 말고

오직 몸을 알아차리는 것을 전념해야 합니다.

 

이렇게 다른 대상과 섞이지 않게 알아차려야

몸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각 염처별로 모든 염처에 적용되는 수행의 특성입니다.

 

이때의 몸을 알아차릴 때 전체의 하나로 알아차리지 말고

여러 가지 물질이 결합되어 있는 물질들의 집합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동차가 많은 부속으로 결합되어서 자동차인 것처럼

몸도 여러 가지 집합체로 구성되어 몸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야 몸에 대한 바른 견해가 생깁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는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요소와 뜨거움과 차가움의 요소와

수축하고 팽창하는 요소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단단하다고 알아차릴 때는 단지 단단함을 알아차려야지

이것이 싫다거나 좋다고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둘째, 몸을 알아차릴 때 단지 몸으로 알아차려야지

이 몸이 나라고 하거나, 내가 몸을 소유하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단지 물질적 대상으로서 몸일 뿐이며

마음이 그것을 지켜보는 것일 뿐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사실 바르게 알아차리면 내 몸이라는 생각이 나지 않고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습니다.

그래서 내 몸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몸을 알아차릴 때는 몸이 항상하지 않고, 항상 변하는 무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에서 몸을 바르게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마지막에 몸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 무상을 알게 되며,

이렇게 알아차렸을 때 비로소 항상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지혜입니다.

 

수행자가 몸을 알아차릴 때 무상하다고 알아차리는 것과 함께

일곱 가지 알아차릴 대상이 있습니다.

 

하나, 무상하다고 알아차리고 항상하다고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둘, 괴로움이라고 알아차리고 즐거움이라고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셋, 무아라고 알아차리고 자아가 소유한다고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넷, 몸의 더러움을 알아차려서 역겨워해야 하며,

몸이 깨끗하다고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다섯, 탐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서 탐욕에 물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여섯, 소멸하도록 해서 일어나게 하지 않습니다.

일곱, 완전하게 놓아버려서 움켜쥐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상이 몸을 알아차릴 때 지혜로 본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알아차릴 때는

항상하지 않고 무상하게 알아차려야 하며,

즐거워하지 않고 괴로움이라고 알아차려야 하며,

자아라고 알지 않고 무아라고 알아차려야 하며,

깨끗하지 않고 더러움이라고 알아차려야 하며,

탐욕으로 보지 말고 탐욕 없이 알아차려야 하며,

일어나지 않게 하고 소멸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며,

움켜쥐려고 하지 않고 완전하게 집착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상이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것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처음부터 이렇게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을 주석하는 내용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이러한 주석서는 완결편입니다.

그래서 주석서는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설하지 않고,

완성된 모든 내용을 집대성 한 것이라서 초보 수행자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리다 보면

언젠가 이런 과정을 아는 지혜가 생겨 도과를 성취한다는 믿음만 가지면 됩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수행은 지혜가 성숙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성숙되지 않는 지혜를 억지로 얻으려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냥 길을 가다 보면 때가 되어 저절로 지혜가 납니다.

그래서 인내하면서 계속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수행을 배우는 스승에게 개인적 지도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수행은 자기 수준에 맞게 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입니다.

자기의 길을 가는 거북이가 승리하듯이, 결국 거북이가 더 빨리 가듯이,

우리는 거북이처럼 자기의 길을 가야 합니다,

 

경전 구절에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세상을 빨리어로 ‘로카(loka)’라고 합니다.

블교에서는 로카라고 하는 세상이 사실 오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정신과 물질이 바로 세상인 것입니다.

 

불교가 한 인간의 번뇌를 해결하는데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불교의 세계관은 오직 몸과 마음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망이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갈애와 집착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세상이란 오취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욕망이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적 욕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몸을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적 욕망인 것입니다.

그리고 싫어하는 마음은 악한 의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장애인 감각적 욕망과 악한의도,

이 두 가지를 알아차려서 제어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에 의해 이렇게 다섯 가지 장애 중에서 두 가지가 제어되면

자연스럽게 나머지 장애인 혼침과 게으름과 들뜸과 의심이 소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처럼 몸의 감각적 욕망이 알아차림에 의해 제어되면

몸의 안락함을 바라는 갈애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싫어하는 마음이 알아차림에 의해 제어되면

몸의 불편함으로 인해서 오는 불만족이 사라진 것입니다.

 

또 욕망이 알아차림에 의해 제어됨으로서

몸의 기뻐함이 제어되고,

싫어하는 마음이 알아차림에 의해 제어됨으로서

기뻐하지 않는 마음이 제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이 알아차림에 의해 제어됨으로서

몸에 있지 않는 깨끗함을 바라는 마음이 제어되고,

싫어하는 마음이 알아차림에 의해 제어됨으로서

몸에 실재하는 더러움과 괴로움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 경전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느낌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면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 하면서 지낸다

 

경전의 이 구절은 몸에서 몸을 알아차릴 때와 똑같습니다.

느낌이 일어났을 때 일어난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 덤덤한 느낌이 있는데,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즐거운 느낌 이네’ 하고 알아차려야합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도 ‘괴로운 느낌 이네’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덤덤한 느낌일 때는 무관심한 느낌이므로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도 ‘무관심한 느낌 이네’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런 느낌들이 일어나는 것은 세간적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렸을 때

‘느낌이 있네!’하고 알아차리는 순간 바로 출세간적 느낌으로 바뀝니다.

 

세간적 느낌에서는 정신적 느낌으로 진행되어 고통이 따르지만,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정신적 느낌으로 진행되지 않아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고,

단지 출세간의 느낌으로 머뭅니다. 그래서 느낌이 소멸합니다.

바로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아 결국에는 출세간의 열반을 성취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느낌을 알아차릴 때 즐거움을 괴로움이라고 알아차리고,

괴로움을 화살이라고 알아차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을 무상이라고 보는 지혜를 가진 비구야 말로

바른 수행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느낌이거나 괴로움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실 느낌은 무상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즐거운 느낌도 마찬가지입니다.

즐거운 느낌이 항상 하다면 즐거움이 항상 하겠지만,

느낌은 무상하므로 결국 즐거운 느낌이 즐거운 느낌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느낌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일 경우에는

알아차려서 지혜로 보면 고요하고 즐거운 느낌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리지 못해서 지혜로 보지 못하면 괴로운 무지의 느낌으로 바뀝니다.

덤덤한 느낌은 무관심한 느낌이라서 무지의 느낌이라고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경전구절의 세상에 대한 욕망이라고 할 때 여기서는 몸과 마음의 느낌을 말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은 정신과 물질입니다.

그래서 느낌에서는 정신과 물질의 느낌을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애가 일어나 욕망이 일어납니다.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나의 느낌이라고 알아서 끝없는 갈애와 집착의 사슬에 묶여서 지내게 됩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위빠사나 수행자는

느낌이 일어났을 때 단지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듯이

느낌에서도 역시 단지 느낌이라고 단순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 가는 길이며, 바로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렇지 않고,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 느낌이 증폭되어서 끝없는 갈애와 끝없는 집착, 끝없는 업의 생성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서 죽어야 하는 괴로움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느낌을 느낄 때는 단지 그냥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것도 섞지 말아야 하며

그 느낌은 나의 느낌으로 알지 않고,

단지 감각기관의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 궁극의 도과를 성취하게 됩니다.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묘원법사 :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