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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7

通達無我法者 2010. 12. 19. 20:3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나는 어느 곳에서 와서 여기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현재의 결과로 왔을 뿐입니다.

이때 내가 온 것이 아니고 과거의 과보가 원인이 되어 현재로 연결되었습니다.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지 않습니다.

단지 현재의 원인으로부터 미래의 결과로 갑니다.

이때 내가 간 것이 아니고 현재의 과보가 원인이 되어 미래의 결과로 연결됩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내가 태어나고 내가 죽는 것이 아니고,

단지 조건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연속적인 현상입니다.

 

만약 현재의 원인이 미래를 결정할 만한 것이 없으면

미래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열반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번뇌가 불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야한다’ 는 것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중력을 가졌을 때, 마음이 대상에 얼마동안 머무를 때,

수행자는 몸과 마음의 본래의 성품을 알게 됩니다.

그것들이 덧없고, 만족스럽지 않고, 그 실체가 없음을 알 것입니다.

이것이 무상, 고, 무아입니다.

 

충분한 집중력을 가졌을 때 사물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들을 알아차리면 그것들은 알아차리는 즉시 사라집니다.

필요한 집중력을 가졌을 때만이 이것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수행자의 수행이 제대로 되려면 4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수행자는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셋째,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집중력이 계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넷째,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이 4가지 요소는 제대로 된 수행을 위해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입니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부처님께서는 수행을 하는 법, 사물을 알아차리는 법, 호흡과 배의 움직임,

그리고 몸의 다른 움직임과 느낌 및 마음과

그 마음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을 뒷받침할 만한 활력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은 물론

사물의 본래성품을 꿰뚫어보기에 충분한 집중력을 키울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경전에 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이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대한’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몸, 집착의 무더기를 뜻합니다.

 

욕망이란 갈망, 탐욕, 애착을 뜻하고,

고뇌란 악의, 증오, 성냄, 우울을 뜻합니다.

이렇게 제거해야 될 요소들을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은 수행의 결과, 열심히 그리고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리는 것의 결과,

즉, 집중력의 결과를 알려주셨습니다.

 

노력하고 알아차릴 때 집중력과 꿰뚫는 앎, 즉 지혜가 있을 때

수행자는 욕망과 고뇌를 없앨 수 있습니다.

또한 두 개의 거친 장애의 요소인 감각적 욕망과 악한 의도를 없앨 수 있습니다.

모두 다섯 가지 장애요소가 있는데 그중 이 두 가지가 더 거칩니다.

 

수행자가 다른 것보다도 더 거친 이 두 가지를 없앨 수 있을 때

다른 것들도 같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감각적 욕망과 악한 의도는 탐욕과 성냄을 말합니다.

 

호흡이나 배의 움직임, 느낌, 몸의 다른 움직임을 분명히 이해했을 때,

갈망과 애착, 악의나 증오심을 갖지 않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매순간 이들 요소들을 마음에서 제거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때 제거라는 것이 없애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주의를 해야 하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어떤 것도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제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제거하려고 바라지 않습니다.

 

함에도 불구하고 제거하면서 지낸다는 말은

알아차림에 의해 결과적으로 제거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거하려는 것이

또 다른 갈애라는 사실을 우리가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단지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알아차림은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선한 행위가 있으면 불선이 침입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잘못된 것들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거라는 말에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에 의해서 대상이 제거되는 것을 소멸이라고 말합니다.

소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순간적인 소멸과 일시적인 소멸입니다.

 

순간적인 소멸 동안에는 장애들은 순간적으로 제거됩니다.

어느 한 순간, 그 장애들은 안 나타났다가 다음 순간에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들은 건전한 정신적 상태를 수용할 때 그 순간만 제거됩니다.

 

일시적인소멸은 순간적 소멸보다 좀 더 긴 시간 동안 없음(소멸)을 뜻합니다.

마하시의 큰 스님께서는 일시적 소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수행자가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려서

각각의 현상을 덧없고, 만족스럽지 않고, 실체가 없고,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분명히 이해할 때,

정진, 알아차림, 집중력이 내부에서 계발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계발로 마음이 정화되어 알아차리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도

애착과 악의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쉬고 있을 때도 거친 애착과 악의가 일어나지 않기에

수행자는 거친 애착과 악의는 그에게 전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대상들을 알아차림으로써

알아차리지 않은 대상에 대한 번뇌까지도 완화된 상태일 때

그것을 일시적 소멸이라고 합니다.

이는 각각의 알아차리는 행위에 내재해 있는 집중의 묶음의 요소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간적 소멸이 거듭되면 순간적 소멸이 거듭되는 그 알아차림의 힘이

다른 곳에서도 다른 때 작용되므로 다음 단계인 일시적 소멸의 단계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대상을 알아차려서 짧은 한 순간이라도 순간의 소멸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순간적 소멸이 더 나아가서 일시적 소멸의 단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시적 소멸이 더 나아가면 완전한 소멸을 이루어서 그 상태가 아라한의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탐욕과 증오의 바로 일시적인 소멸인 것입니다.

 

수행자는 알아차릴 때마다, 알아차리는 대상에 대한 순간적 소멸과

알아차리지 않은 대상에 대한 일시적 소멸, 이 두 가지 종류의 소멸을 경험합니다.

 

소멸의 두 가지 이로움을 얻기 위해서 수행자는 지금 이 순간 알 수 있는

모든 육체적 현상을 지켜보면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입니다.

 

자, 수행자가 호흡에 마음을 모으고 들어옴과 나감을 알아차릴 때

확고한 집중을 갖기 전이라도 수행자는 집중의 순간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 후에 마음은 흐트러졌다가 다시 집중하고 다시 흐트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수행자의 욕망과 고뇌의 소멸은 순간적이라고 말합니다.

한순간 수행자는 번뇌를 없애고 다음 순간 마음에 다시 번뇌가 일어나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정확하게 알아차림을 겨냥하고 그리고 그 알아차림을 지속시킬 수는 없습니다.

 

어느 경우에 한 시간 좌선에 호흡을 세 번 밖에 볼 수 없었다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머물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 알아차렸다, 못 알아차렸다,

알아차렸다, 못 알아차렸다를 반복할 동안 순간적 소멸이 있다가

다시 순간적 소멸이 사라지고, 순간적 소멸이 있다가 다시 순간적 소멸이 사라지는

그런 반복적인 과정을 거칩니다.

 

자, 얼마 후에 수행을 쌓고 마음이 대상에 더 오래 머물러 있을 때

수행자의 번뇌를 일시적으로 좀 더 오랫동안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알아차리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도 번뇌가 완화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단계에 도달했을 때 일시적인 소멸로 번뇌를 제거했다고 말해집니다.

이 소멸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수행을 완전히 중단하면 번뇌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소멸이 있는데 그것은 완전한 소멸입니다.

그것은 도의 의식의 순간, 열반을 실현한 순간 성취됩니다.

그래서 도 의식의 깨우침에 도달했을 때 수행자는 장애와 다른 번뇌를 모두 버리고

힘을 못 쓰게 하거나 뿌리를 뽑습니다.

 

한번 없어지면 그것들은 수행자에게 전혀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완전한 소멸은 여기에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출세간의 길이 아닌 세간의 길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소멸’ 이란 단어는

번뇌가 일어나지 못하게 함이라는 엄밀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라고 함으로써

수행의 힘과 수행의 기능을 특별히 밝혀주셨다고 주석서에서는 쓰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몸은 더러운 것, 깨끗하지 않은 것, 부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몸이 부정하다는 것은 사실 진실입니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몸이 아름답다는 견해는 사실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몸에서 몸을 알아차린다.’ 라는 말은

몸에서 몸이 부정하다고 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몸이 부정하다고 볼 때

몸의 비현실적인 그 무엇,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않고

몸에 실재하는 그 무엇, 부정함을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몸에 대한 욕망을 버린다고 말씀하신 것은

육체적인 희열에 뿌리박힌 만족을 버리고, 육체적인 즐거움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몸에 대한 고뇌를 버린다고 말씀하신 것은

육체적인 불운에 뿌리박힌 불만을 버리고, 몸을 알아차려서 즐겁지 않음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만족과 불만족으로부터의 벗어남, 즐거움과 즐겁지 않음을 견디어 내는 것,

그리고 실재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실재하는 것을 지워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수행의 힘이고, 이 힘을 가진 수행자가 바로 위빠사나 수행의 도를 성취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몸에서 몸을 알아차린다고 말할 때

우리는 몸 이외의 것을 알아차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또 알았습니다.

사실은 몸에서 몸을 알아차린다는 의미는 또 다른 뜻으로,

몸에 있는 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합니다.

몸의 진실은 더러움입니다. 몸의 진실은 무상입니다. 몸의 진실은 괴로움입니다.

그리고 몸의 진실은 나의 몸이 아닌 단지 몸이라는 조건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몸에서 몸을 알아차린다는 이 단순한 단어가 주는

매우 뜻 깊은 내용을 우리는 이해하셔야 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렇습니다.

몸을 있는 그대로 보면 더러움으로 보고 아름다움으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몸을 잠시만 씻지 않아도 냄새가 나고 그리고 온갖 더러움이 쌓입니다.

우리가 몸을 아름답다고 본다는 것은 어떤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장을 한다는 것도, 우리가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는 것도,

그렇지 못한 몸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또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몸을 더러운 채로 혐오하도록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몸이 가지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성품, 그 참모습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하는 것을 여기서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몸은 와서 보라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이 가지고 있는 그 성품을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몸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신견입니다.

 

우리는 몸을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 볼 때 갈애가 일어나지 않아서 집착을 끊고

집착이 없기 때문에 업을 생성하지 않아서 궁극에는 열반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