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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34

通達無我法者 2010. 12. 26. 22:47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자기가 최고라는 마음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최고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사람은 수행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위빠사나는 정직하지 못한 마음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자기 목적을 성취하려고 과장하는 사람은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위빠사나는 과거에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에 상관없이

오직 진실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 하는 수행입니다.

그렇지 않고 수행을 한다는 사실조차 과시하는 사람은 결국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법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바른 수행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자신이 괴로운 것은 지금 이전과, 전생의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인해서 생긴 과보로 괴로운 것입니다.

이 괴로움은 누가 준 것이 아니고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괴로움을 한탄만하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서 지금도, 지금 이후도,

다음 생도 괴롭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괴로움은 누구도 풀어줄 수 없고 오직 괴로움을 만든 스스로 밖에 풀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현재 여기에 있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 가장 좋은 원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들인 마음이 집중에 의해서 지혜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가장 최상의 선택을 얻은 것입니다.

바로 그런 지혜의 원인만이 해탈에 이르게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를 잠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마치 양쪽의 주둥이가 있는 자루에 여러 가지 곡식,

즉 밭벼, 보리, 녹두, 완두, 참깨, 논벼 등이 가득 담겨 있는데

어떤 눈 밝은 사람이 그 자루를 풀고 이것은 밭벼, 이것은 보리,

이것은 녹두, 이것은 완두, 이것은 참깨, 이것은 논벼라고 아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은 아래로는 발바닥에서부터

위로는 머리카락에 이르기 까지 피부로 덮여져 있으며

그 안에는 여러 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즉, 이 몸은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과 발톱, 이빨,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장, 늑막, 지라, 허파, 창자, 위장, 소화 안 된 음식물, 대변, 뇌,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비계, 눈물, 임파액, 침, 콧물, 관절액, 오줌이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양쪽 주둥이가 있는 자루는 아래와 위가 구멍이 뚫린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을 말합니다. 우리의 몸은 눈, 코, 귀, 입 등 위쪽으로 구멍이 뚫려 있고,

아래쪽으로는 대 소변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쪽으로 뚫린, 그리고 아래쪽으로 뚫린 자루 안에

밭벼, 보리, 녹두, 완두, 참깨 등이 가득 담겨 있고,

그것을 지혜로 본 자들은 ‘이것은 밭벼다. 이것은 보리다.

이것은 녹두다. 이것은 완두다. 라고 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들의 몸이라는 위와 아래가 터진 자루 안에 있는,

머리카락, 몸의 털, 이빨, 힘줄, 뼈, 콩팥, 심장, 여러 가지 형태의 기관들이,

곡식이 들어 있는 완두, 녹두, 참깨 등과 하등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 자루에 담긴 여러 가지 곡식들은 낱낱이

저마다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그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자루이지

그것이 나의 자루라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양쪽 주둥이가 뚫린 자루에 이런 것들이 담겨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장기 또한, 우리들의 기관 또한, 이런 곡식들과

하등의 다를 것이 없는 것들이 모여 있는 형태의 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양쪽 주둥이가 열린 자루나 우리 몸이나 하등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그 자루는 단지 자루일 뿐입니다.

그것을 소유하는 자아는 없습니다.

 

그렇듯이 이 몸도 단지 몸일 뿐입니다.

이 기관들도 단지 각자 역할 하는 기관일 뿐입니다.

그것들이 모여서 몸이고, 그런 곡식들이 모여서 자루이듯이

이 두 가지가 하등의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여기서 아셔야겠습니다.

 

이것을 밝히는 또 다른 이유는 이 몸이 나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들은 여러 부분들로 모여 있는 단순한 형태의 하나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유념해야겠습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라는 것은 여러 종류를 말합니다.

 

비유를 적용해보자면 사대로 이루어진 몸은 양 쪽에 주둥이가 있는 자루와 같습니다.

머리카락 등 32가지는 여러 가지 곡식이 섞여서 자루 안에 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자는 눈 밝은 사람과 같습니다.

수행자에게 32가지 몸의 부분들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

자루를 풀어서 여러 가지 곡식들이 그 사람에게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집중을 해서 표상이 생기면

그 낱낱의 기관들이 곡식처럼 하나의 표상일 뿐이지

그것들이 그것 자체가 자아가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라는 이야기는, 이와 같이 머리카락 등을 파악하여

자신의 몸에서나 남의 몸에서나, 때로는 자신의 몸에서 때로는 남의 몸에서,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며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이상의 사실로 보아서 부정관이 주는 의미는 대상을 낱낱이 하나하나 분석해서 봄으로써

이것이 나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그 낱낱의 것들이 더러움과 혐오스러움으로

가득 찬 것을 알아서 그 몸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유신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노력은 유신견을 강화하는 것으로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바꾸기 어려운 이 유신견, 무지를 조정하는 이 유신견, 결코 없어지지 않는 이 유신견,

나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신 겁니다.

 

바로 그 몸의 낱낱의 기관들을 보게 하시고 그 낱낱의 기관들의 더러움을,

혐오를 보게 하셔서 그 몸을 집착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강한 무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들이 자신의 몸을 얼마나 강하게 집착하고 있느냐는 것에 대한 반증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수행을 할 때 사실은 어떻게 수행을 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들의 선택입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마음이 대상을 겨냥하는 것으로,

일차적으로 알아차림의 효과가 있습니다.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마음이 오직 대상을 주시하기 때문에

다른 생각이 들어 올 틈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알아차림을 지속시키면 고요함이 생겨 대상의 성품을 볼 수 있는 지혜가 납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의 이차적인 효과입니다.

 

이처럼 지혜는 알아차림을 지속시킨 조건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지혜를 바라면 지혜가 숨습니다.

구름이 달을 가릴 수 없듯이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언젠가 그 구름은 벗겨지고 달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볼 수 없던 지혜가 자기도 모르게 환하게 밤을 밝힐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바라는 마음은 탐욕이며 그 순간에는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무엇도 바라지 말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법을 바라면 법이 숨고, 법을 바라지 않을 때만이 법이 나타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할 때 완전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남이 한 말을 들어서 알거나, 책을 읽어서 알거나, 생각으로 알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해하는 수준으로 아는 것이라서 지식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대상과 하나가 되는 실천을 통해 경험으로 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선정수행이라고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표피적으로,

지식으로 아는 것은 완전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게 아는 것은 대상의 성품을 알아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입니다.

 

알아서 끊을 수 있을 때 완전하게 아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완전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과 선정에서는 번뇌가 있지만 지혜에서는 번뇌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현재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과거나 미래로 가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번뇌가 들어올 틈을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틈이 생길 때마다 다시 더 큰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괴로움 자체의 힘이 소멸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려서 생긴 지혜의 힘이 커지면 상대적으로 괴로움이 약해집니다.

하지만 아직 이것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꿈속에서 겪는 괴로움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꿈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잠재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제일 먼저 깨어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꿈으로 인해 두렵고 불쾌할 때도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문제가 있는 곳에 법이 없고, 법이 있는 곳에 문제가 없습니다.

법은 알아차릴 대상이며, 이것보다 더 큰 법은 무상, 고, 무아의 진리입니다.

법은 대상의 법과 진리의 법이 있습니다.

 

수행자가 무엇이나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그 순간 선한 마음이 일어나 관용이 생깁니다.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대상을 겨냥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번뇌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또한 무상, 고, 무아의 진리가 있는 곳에는

지혜가 충만하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괴로운 문제는 알아차리지 못해서 생기며

진리의 법을 몰라서 집착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은 지혜로운 마음이며,

알아차리지 못하는 마음은 무지한 마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있던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괴로움을 알아차리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린다고 해서 괴로움이 완전하게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노력하면서 알아차리고 얼마나 집중을 했느냐에 따라 소멸하는 정도가 다릅니다.

 

소멸은 순간 소멸과 일시적 소멸과 완전 소멸이 있습니다.

괴로움을 알아차릴 때 정확하게 겨냥하면 순간 소멸이 됩니다.

이렇게 순간 소멸이 되었을 때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일시적인 소멸이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집중의 힘이 있기 때문에 그 힘이 유지되어서 다른 대상을 볼 때에도

순간 소멸이 일어난 것 같은 일시적 소멸의 현상이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 소멸과 일시적 소멸의 연속적 과정을 거치면

다음 단계에 지혜가 성숙되어 비로소 완전한 소멸에 이르게 됩니다.

이 완전한 소멸이 바로 아라한의 소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순간적 소멸을 경험해서

그것들을 지속시켜 일시적 소멸에 이르게 하고

일시적 소멸에 이르는 수행의 전 과정을 거치면

결국 언젠가 완전한 소멸을 이루게 되어서 열반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완전 소멸의 열반은 아라한의 열반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자의 지혜의 단계에 따라서 소멸의 과정도 다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합당한 노력을 해야 그에 따른 그에 따른 합당한 결과를 얻습니다.

 

우리가 탐욕을 일으킬 때 그 탐욕은 균형이 깨진 상태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만큼 취하고, 알맞게 균형을 맞추어서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