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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32

通達無我法者 2010. 12. 26. 01:3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범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고 생각하여 얻기 위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가지면 가진 만큼 교만하고, 알면 아는 만큼 자아가 강해집니다.

교만하고 자아가 강하면 괴롭습니다.

그래서 가져도 가진 것이 아니고, 알아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그래서 내가 없다고 생각하여 바람 없이 구하며

가져도 교만해지지 않고, 알아도 겸손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만이 바르게 구하는 것이고

바르게 갖는 것이며,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관념이고,

알아차리는 것은 채움이며 실재입니다.

마음은 알아차림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번뇌라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탐,진,치가 없는 마음을 말하나

‘무엇’이라는 것만 있고 ‘어떻게’라는 것이 없습니다.

비운다는 것으로는 번뇌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번뇌의 소멸을 위해서 마음을 비우게 하기보다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채워야 합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마음일 때는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이거나,

극단적 고행을 하는 마음이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의 마음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일 때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는 청정한 마음이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부정관 수행은 사마타 수행으로도 할 수 있고 아니면 위빠사나 수행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고 위빠사나 수행으로 넘어 온 경우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의 1선정이나 2선정에 이른 뒤에 위빠사나 수행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3선정이나 4선정에 이른 뒤에 위빠사나 수행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 외에 1시간을 기준으로 할 때 사마타 수행을 10분에서 15분 동안 한 뒤에

나머지 50분이나 45분을 위빠사나 수행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사마타 수행을 3일 동안 하고 7일 동안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필요할 때마다

순간적으로 병행해서 하는 수행방법도 있습니다.

 

현재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이 잘 보존되고 있는 미얀마의 경우에는

거의가 순수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일부가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포함된 수행을 하기도 하나 사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런 현상은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라는 훌륭한 스승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1945년에 미얀마 양곤에 마하시 선원을 설립하신 뒤에

미얀마의 전 비구와 전 국민을 상대로 사마타 없는 순수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현재 많은 제자들이 스승이 되어 순수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위빠사나 수행도 신념처와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가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상의 네 가지 수행이 항상 함께 있어야 됩니다.

하지만 네 가지 수행이 함께 있다 하더라도 그 중에 어느 염처에 더 비중을 두는 스승도 계십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이처럼 다양한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초보 수행자는 그런 선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느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수행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위빠사나 수행 방법에 대한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이라면 어느 수행을 하더라도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다만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각자에게 더 적합한 수행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처음부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알고 계신 수행 방법을 버리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이라고 해도 마음을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자신이 것이 최고라는 고정관념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수행자에게는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도 없습니다.

 

과연 누가 자신의 번뇌를 해결해 주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지만 지혜를 얻는 수행이 아니기 때문에

수행을 하는 동안만 괴로움이 사라지고, 수행이 끝나면 또 다시 반복되는 괴로움이 거듭됩니다.

 

이것이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사마타는 대상을 억눌러서 선정의 고요함을 얻지만,

위빠사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두고 지켜보아서 지혜를 얻기 때문에 번뇌를 말려 버립니다.

번뇌는 억누르면 억누른 만큼 더 커지지만, 번뇌를 두고 지켜 볼 때만이 그 번뇌가 소멸합니다.

그래서 번뇌를 말리는 수행을 위빠사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내가 최고이고 내가 하는 수행이 최고라는 생각은 유신견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 마음을 열고 다른 수행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몸과 마음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고, 내가 하고 있는 수행 방법이

뭐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서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전통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그 전통은 쓸모없는 것입니다.

 

그 전통은 관념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진실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전통을 붙들고 있을 때 과연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손해를 보는 것이겠습니까?

있는 그대로 실재를 보셔야 합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지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닫힌 마음을 열고 새로운 바람을 쏘여보십시오.

그러면 수행자 여러분에게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최고이고, 내가 하고 있는 수행이 최고라는 생각은

바로 어리석음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부터 부정관에 대해서 5세기 경 ‘붓다고사’가 쓰신 청정도론을 인용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이 몸은’이라고 시작하여 설하신 것은 모두 청정도론의

몸에 대한 알아차림의 명상 주제 하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2가지의 몸을 알아차리는 것도 청정도론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주석서 청정도론의 내용을 본문으로 다시 한 번 부정관을 학습해 보겠습니다.

 

‘이 몸은’이라는 것은 네 가지 근본 물질로 이루어진 더러운 몸을 말합니다.

네 가지 근본 물질이라는 것은 ‘지수화풍’ 사대입니다.

‘발바닥에서부터 위로는’이라는 것은 발바닥으로부터 그 위로,

‘머리털에서부터 아래로는’ 은 머리털 끝으로부터 그 아래로,

‘피부로부터 둘러싸여있다’는 것은 주위가 피부로 싸여 있고

여러 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머리카락 등 갖가지 부정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이 몸에는 머리카락이 있다. 그리고 무엇이 있다. 무엇이 있다.

그리고 그 끝에 ‘오줌이 있다’ 라고 알아차리는 것으로서

부정한 것이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있다’라는 것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발바닥 위로부터 머리카락 끝의 아래까지 피부로 둘러싸여 있고,

갖가지의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표현한 것은

신체에는 오물로,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머리카락과 눈 등 백 가지 병의 발생지는 몸이라고 합니다.

머리카락, 몸의 털 등은 32가지 형태입니다.

여기서 ‘이 몸에 머리카락이 있다. 이 몸에 털이 있다.’ 라고 알아차림을 계속하면,

어느 땐가 여러분은 그것들의 더러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바닥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위로, 머리카락 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아래로,

피부로부터 시작하여 그 주위로, 이 한길 한길에 바로 송장을 갖가지 방법으로 조사해 보면

어떤 진주나 보석이나 에메랄드나 알로에나 사프란이나 캠포나 화장용 분등

아름다운 성분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극도로 악취 나고 혐오스럽고 불미스럽게 보이는

여러 종류의 머리카락 등으로 분류되는 오물만 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하였습니다.

‘이 몸에 머리카락이 있다’ ‘이 몸에 털이 있다’ 등등 그리고 ‘이 몸에 오줌이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 명상 주제를 닦기를 원하는 초심자는

선한 도를 가까이 해서 이 명상 주제를 계속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에게 명상 주제를 설하는 스승은 일곱 가지 습득에 능숙한,

열 가지 마음의 숙고에 대한 능숙함을 설명해야 합니다.

 

여기서 첫째 말로써, 둘째 마음으로써, 셋째 색깔로써, 넷째 형태로써,

다섯째 방위로써, 여섯 째 장소로써, 일곱째 한계로써,

이 일곱 가지 습득의 능숙함을 설명해야 합니다.

 

첫째 ‘말로써’입니다.

이것은 혐오스러움을 마음으로 숙고하는 명상 주제입니다.

그가 비록 경전을 외우는 자 일지라도

처음에 이 명상 주제를 수행할 때에는 말로 독송을 하면서 시작해야 합니다.

어떤 자에게는 독송을 할 때에 비로소 명상 주제가 분명해 집니다.

 

말라야에 머물러 있던 마하테와 장로로부터 명상 주제를 배운 두 장로의 경우처럼

장로는 그들이 명상 주제를 청했을 때 넉 달 동안 이를 독송하고

32가지 부분이 포함된 경을 읽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각 2부와 3부의 경장에 능통한 자들이었지만

그것을 바르게 가져 넉 달 동안 32가지 형태를 외우면서 비로소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명상 주제를 설하는 스승은 제자들에게

처음에는 우선 말로써 독송을 하라고 말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사실은 경장, 율장, 논장에 달통한 삼장 법사도

이것들을 오랫동안 외워서 수다원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경전을 아는 것과 수행을 해서 지혜를 얻는 것은 전혀 다른 길입니다.

여러분들도 물론 경전을 배우시고, 더불어 수행을 해서 여러분의 지혜를 고양시켜야 하겠습니다.

듣고 배우고 아는 것은 지식에 머무나, 자기 몸과 마음을 실천적인 수행을 통해서 경험하는 지혜는

여러분의 의식을 한층 고양시켜서 괴로움을 해결시켜 줄 것입니다.

 

다음에, 외울 때 피부 등 다섯 가지를 한정하고 역순으로 외워야 합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과 일치합니다.

이렇게 외우는 것을 백 번, 천 번 말로써 독송해야 합니다.

말로써 독송함으로써 명상 주제와 주제의 경전이 친숙해지고

마음은 이곳저곳으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32가지 부분들이 분명해 질 것입니다.

 

마치 손가락의 열처럼, 혹은 울타리의 말뚝의 열처럼, 닮은 표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계속해서 집중력을 유지시켜서 독송을 하면 어떤 표상이 나타나서

비로소 선정수행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두 번째 ‘마음으로써’입니다.

말로써 하는 것처럼 마음으로써 독송을 해야 합니다.

말로 독송하는 것은 마음으로 독송하는 것에 조건 되어 지고

마음으로 독송하는 것은 부정의 특징을 꿰뚫는 것에 조건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입으로 외울 때보다 마음으로 독송을 할 때에 대상의 성품에 한결 접근 할 것입니다.

입으로 외우는 명칭은 거친 대상이지만, 마음으로 외우는 것은 고요함이 있기 때문에

훨씬 쉽게 대상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색깔로써’입니다. 머리털 등의 색깔을 구분해야 합니다.

넷째 ‘형태로써’입니다.

다섯째 ‘방위로써’입니다.

 

여섯째 ‘장소로써’입니다.

‘이 부분은 이 장소에 놓여 있다.’고 이와 같이 각각의 장소를 구분해야 합니다.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