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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66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01:3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은 감성적인 힘도 필요하지만 이성적인 힘으로 끌고 나가야합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위해서는 정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냉철한 이성으로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직시해야 합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면 인내할 수가 없어서 수행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성만 있고 감성이 없어도

관용과 자애가 없어 수행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성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어야하지만

이성이 앞서서 이끌어나가야 합니다.

 

수행을 한 뒤에 전보다 냉정해졌다면 분리해서 보는 지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해졌다는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수행을 계속하면 오히려 더 큰 자애가 생깁니다.

 

단지 냉정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그간에 보지 못하던 대상을 분리해서 보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 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마음의 작용인 느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느낌을 말할 때

경전에서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불고불락의 느낌이라하고

논장에서는 바로 이 느낌을 평정의 느낌, 우뻭카라고 말한 사실입니다.

 

경장에서는 덤덤한 느낌이란 뜻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논장에서는 이 느낌을 같은 표현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 정신적 느낌으로 분류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한 순간에 대상을 하나밖에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에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다는 두 가지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논장에서 말하는 이런 경우에는 하나의 느낌으로 표현해야 되기 때문에

평정한 느낌을 사용한 것입니다.

 

평정한 느낌을 빨리어로는 우뻭카웨다나라고 합니다.

이때 우뻭카는 열 가지 뜻으로 사용하는데

그중 아홉 가지는 모두 중립 중도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느낌을 말하는 우뻭카웨다나라고 할 때만

덤덤한 느낌 무관심한 느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뻭카웨다나라고 할 때는 무지의 느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느낌은 너무 종류가 많습니다.

마음의 종류나 느낌의 종류나 똑 같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미세한 감정의 변화에 비춰본다면

마음의 종류보다 느낌의 종류가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느낌의 종류가 많다면 사실은 그것을 아는 마음의 종류도 똑같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느낌을 분류할 때 우리는 아는 느낌과 모르는 느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아셔야하겠습니다.

 

아는 느낌은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이 있는 느낌이고

그렇지 않고 모르는 느낌일 때는 무관심의 느낌이기 때문에

무지의 느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알면 지혜이고 모르면 무지입니다.

그래서 느낌이 아무리 많아도 어떤 느낌이거나

알아차리면 단순하게 아는 느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무지의 수많은 느낌이 거듭될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느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느껴진 것의 특성을 가진 것이 느낌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설하셨기 때문이다.

‘도반이여, 느껴졌기 때문에 느낌이라고 한다’라고

이것이 본성의 분류에 따라 다섯 가지이다.

즉 즐거움, 괴로움, 정신적 즐거움, 슬픔, 평정이다.

 

즐거움은 원하는 것과 감각 접촉을 경험하는 특징이 있다.

관련된 대상을 활기차게 하는 역할을 한다.

육체적인 만족으로 나타난다.

몸의 감각기관이 가까운 원인이다.

 

괴로움은 싫어하는 감촉을 경험하는 특징이 있다.

관련된 대상을 시들게 하는 역할을 한다.

육체적인 괴로움으로 나타난다.

몸의 감각기관이 가까운 원인이다.

 

정신적 즐거움은 원하는 대상을 경험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저런 원하는 측면을 향유하는 역할을 한다.

정신적인 만족으로 나타난다.

편안이 가까운 원인이다.

 

슬픔은 싫어하는 대상을 경험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저런 싫어하는 측면을 향유하는 역할을 한다.

정신적인 고통으로 나타난다.

반드시 심장이 가까운 원인이다.

 

평정의 특징은 무관심한 느낌이다.

관련된 대상을 활기차게 또는 시들게도 하지 않는 역할을 한다.

고요함으로 나타난다.

희열이 없는 마음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상이 느낌에 대한 주석서의 정의였습니다.

 

다음은 세 번째 마음의 작용인 인식입니다.

느낌과 함께 일어나는 인식이 없으면 대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인식은 오온에서 상온에 해당하며, 이때 대상을 아는 마음은 식온입니다.

 

인식은 같게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과 같게 연상을 해서 아는 기능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냥 보는 게 아니고 무엇과 비교해서,

상상으로 꾸미거나, 표상으로 만들어서 보는 것을 인식한다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의식 속에 이런 인식이 저장되어 있다가

그대로 고정 관념이 되어서 그것을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이 인식입니다.

 

인식을 빨리어로 샨냐(sañña) 라고 하는데

이 샨냐는 여러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이 인식은 표상이라는 뜻이 있는데,

무엇인가 상상으로 만들거나, 모양으로 형상화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각, 지각, 인식, 기호, 이름, 표시, 몸짓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인식한다고 했을 때는 어떤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으로 저장해놓은 정보를 꺼내서 봅니다.

대상을 아는 마음은 의식이지만 인식은 개념을 설정하거나 꾸며서 봅니다.

이런 다양한 기능이 모두 인식의 작용입니다.

 

마음의 작용 52가지 중에서 수(受)와 상(想)은 하나씩이고

나머지 50가지가 모두 행(行)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인식이 바로 그 중에 하나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인식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식하는 특징을 가진 것이 인식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설해졌기 때문이다.

‘도반이여, 인식하기 때문에 인식이라고 부른다’라고.

인식은 인식하는 특징이 있다.

그 본성으로는 한가지이지만 종류에 따라서는 세 가지이다.

유익한 것, 해로운 것, 그리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중에서 유익한 마음과 관련된 것은 유익한 인식이고,

해로운 마음과 관련된 것은 해로운 인식이며,

판단할 수 없는 마음과 관련된 것은 판단할 수 없는 인식이다.

 

인식으로부터 분리된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인식의 종류도 마음의 종류만큼 있다.

비록 이 인식이 마음과 같은 방법으로 분류되지만

특징으로 볼 때 모든 인식은 인식하는 특징이 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구나’라고 다시 인식할 수 있는 원인이 될 표상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목수들이 목재에 표시를 하는 것처럼

표상에 따라 이해하려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보는 것처럼.

 

대상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든 나타난 대상이 가까운 원인이다.

마치 어린 사슴들이 허수아비를 보고 사람이라고 인식을 일으키는 것처럼.

이상이 주석서에서 말하는 인식의 정의였습니다.

 

다음은 네 번째 의도입니다.

의도가 없다면 마음은 대상을 알려는 어떤 행위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경전에서는 의도를 업이라고 합니다.

의도로써 생각과 말과 행위라는 세 가지 업을 짓습니다.

이처럼 의도는 행위를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오온에서 행온에 속하는 것이 바로 이 의도입니다.

그래서 의도와 행은 동의어입니다.

수상행이라고 말하는 마음의 작용에서 행은 바로 의도를 뜻합니다.

이것을 마음의 형성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의지라고도 표현합니다.

 

주석서에서는 의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의도한다고 해서 의도라고 한다.

묶는다는 뜻이 있다.

이것은 의도하는 성질을 특징으로 한다.

격려하는 역할을 한다.

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마치 대목수와 제자처럼 자기일과 남의 일을 실천하게 한다.

급한 일을 기억하여 이것과 관련한 대상들을 실행하게 하는 성질에 의하여

이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다섯 번째 집중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집중을 하지 못하면 그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지 못합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면 대상을 알지 못합니다.

집중을 빨리어로는 ‘에까가따 (ekaggatā)’라고 하는데

‘마음이 한 점으로 모임’이라는 말입니다.

이때 집중은 삼매의 동의어입니다.

 

이때의 에까가따를 한문으로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집중이란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겨냥한 뒤에 거기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잠시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달아납니다.

그래서 마음을 한 곳에 모아서 그곳에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을 집중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대상에 머물지 않으면 고요함이 생기지 않고

고요함이 없으면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집중이 되지 않으면 결코 지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모두 상호 작용하고 있습니다.

 

집중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근접집중을 해서 근본집중을 하는 사마타 수행의 집중이 있습니다.

그리고 찰나집중을 하는 위빠사나 수행의 집중이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의 집중은 대상과 하나가 되지만

위빠사나 집중은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찰나 집중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납니다.

 

그래서 대상과 하나가 되는 집중은 고요함이고

분리해서 하는 찰나집중은 지혜를 얻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집중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대상에 마음을 고르게 놓는다. 또는 바르게 놓는다.

또는 단지 마음을 모은다고 해서 집중이라고 한다.

이것은 방황하지 않거나 또는 산만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

동시에 생긴 대상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마치 물이 목욕가루를 결합시키듯이

 

고요함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경우에 즐거움이 가까운 원인이다.

바람이 없을 때 흔들림이 없는 등불처럼

마음이 안정된 상태이다.

 

다음은 여섯 번째 생명력입니다.

생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의 생명을 생명력, 생명의 능력이라고 하며

한문으로는 명근(命根)이라고 합니다.

생명력은 이름 그대로 살아있는 힘입니다.

 

생명력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신적 생명력 다른 하나는 물질적 생명력입니다.

여기서 마음의 작용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히 정신적 생명력입니다.

 

정신적 생명력이 없으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력은 모든 마음과 함께 일어납니다.

주석서에서는 생명력을 이렇게 정의 합니다.

 

이것 때문에 관련된 대상들이 살고,

또는 이것은 자기 스스로 살고

또는 단지 살아있기 때문에 생명력이라고 한다.

이것의 특징은 물질의 생명력을 설명한대로 알아야한다.

 

이처럼 우리는 정신과 물질이 있어서 사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정신적 생명력과 물질적 생명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신적 생명력이 있어서 몸에 물질적 생명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우리가 정신과 물질이 하나가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력은 살아있는 것의 힘을 말합니다.

그 힘은 보이지 않는 원천 에너지이지만 여기서는 마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력은 마음의 의도인 행을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정신에 포함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생명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생명력은 살고자 하는 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