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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48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3:2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이끕니다.

마음이 있어 행위를 하고,

행위가 과보가 되어 다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속적인 과정이 윤회입니다.

 

과거의 무명이라는 마음이 있어 업을 형성하여 현재를 있게 한 것입니다.

현재는 재생 연결식이라는 마음이 있어 정신과 물질이 생긴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의 원인이 되는 현재는

갈애라는 마음이 있어 집착을 하여 업을 생성합니다.

 

미래는 태어나는 마음이 있어 태어남이 생기고

이로 인해 죽는 결과가 있습니다.

 

결국 마음이 있어 몸이 생기며 몸이 생기면 죽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이끄는 마음을 알아차려야지 무아의 지혜가 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스승이신 쉐우민 사야도께서 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신 것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에 의해서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마음을 계속해서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마음이 남긴 느낌을

가슴에서 계속 지켜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마음이 가슴에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그만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마음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전부 실천할 수 있는 수행방법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념처를 모두 실천할 수 있으며 집중력을 키우는 훌륭한 방법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위에 돌을 던졌을 때 돌은 사라지고 돌로 인해서 생긴 파문이 일어납니다.

이때 물속에 가라앉은 돌은 마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이렇게 일어나는 순간에 돌이 물에 가라앉듯이 즉시 사라집니다.

그리고 물위에 돌을 던질 때 생긴 남아 있는 파문이 바로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은 꼭 가슴이 아니고 머리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때로는 몸의 어느 위치에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곳이나 강하게 나타나는 느낌이 있는 곳에서

마음이 남긴 흔적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만약 이렇게 강한 느낌이 없을 때는

자연스럽게 덤덤한 느낌을 알아차리거나 호흡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나타나는 느낌도 모두 다릅니다.

 

그리고 빨리 가슴으로 가서 알아차리면

아직 느낌의 영향이 적기 때문에 강한 느낌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때도 그냥 그 상태의 느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의외로 가슴에 느낌이 없는 수행자가 있을 수가 있으나

이런 경우에는 특별한 느낌을 찾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있는 덤덤한 느낌도 중요한 느낌의 하나이므로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아무런 느낌이 없으면 몸에 있는 다른 강한 대상을 찾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느낌이 없더라도 마음을 그냥 가슴에 머물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미세한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은 강한 망상이 왔을 때는 강하게 일어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가슴의 느낌이 고요할 수 있습니다.

가슴의 느낌이 아니더라도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호흡도 거칠거나 미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가슴만 지켜본 것은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관념과 실재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겉으로 드러난 모양과 그 모양이 가지고 있는 실재가 있습니다.

이때 실재는 지혜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슴에 생긴 단단함으로 인해 얼마간 의도적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처럼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이제는 본격적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의 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는 하나이지만 나타나는 상태가 다릅니다.

그리고 나타나는 마음의 종류도 다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상황에서 다양하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하나씩 기록으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수 년 동안 정리한 것이지만 이렇게 해서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체계화 한 뒤에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까지를 완성시켰습니다.

 

얼마 동안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니 스승께서는

이제부터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말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마음은 분명하지 않은 것이라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복잡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을 정리하면서 수행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마음이 무엇인지 드러내놓고 설명하기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래서 스승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를 말해주어도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바로 이것이 정신세계의 현실입니다.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지혜는 아무리 손에 쥐어주어도

무슨 말인지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나 아는 마음이 무엇이고,

어떻게 알아차리느냐고 물어도 사실 명쾌한 대답을 듣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고심을 하면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하기 위해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부터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야도께 보고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기 어려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다는 자부심에

더 열심히 정진을 했습니다.

 

이렇게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를 하면서 정진을 하는데

어느 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좌선을 하는 중에 문득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하고 알아차려보았습니다.

이렇게 일하는 있는 마음을 점검해보니 그 순간에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를 한다고 했던 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바로 알아차린 뒤에 지난 번 것이 단지 생각으로 안 것이라고

확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하고 지켜보니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을 뒤에 생긴 마음이 지켜본 것입니다.

바로 이때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새로 낸 것입니다.

 

사실 지금 여기서 설명하는 이러한 이론은 당시에는 알 수가 없었고

한참 뒤에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이런 이론 없이 그냥 막연하게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이런 상태를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에 대상이 분명해지고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졌습니다.

 

이때 고요함과 함께 대상을 완전하게 밀착해서 밀밀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호흡의 부드러운 느낌 하나하나를 더욱 면밀하게 알아차리게 되어서

처음에는 깜짝 놀라서 얼른 알아차림을 풀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다시 호흡을 알아차리려고 하면 이런 상태가 거듭 계속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것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기 전에 처음에 아는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했을 때는

사실 제대로 알아차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이처럼 분명하게 알아차린 것이 아니고 생각으로 알아차린 것이었고

이런 사실을 자세하게 표현할 수가 없어서 분명하게 검증을 받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세계에 대한 표현의 한계입니다.

 

얼마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다가 귀국을 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다시 미얀마 쉐우민 명상원에 가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중에

이러한 집중의 상태가 한 시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만 이런 집중현상이 잠시 생겼었는데

이제는 한 시간 내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불안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이럴 수도 있는가?

이것이 혹시 삿된 길로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얼른 이 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대상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는데 역시 똑같이 밀밀한 집중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뒤에 한 시간 내내 이런 상태로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확신을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사야도께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야도께서는 이제 한 시간 동안만 그렇게 수행을 할 것이 아니고

앞으로는 하루 종일 그렇게 수행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제서야 이렇게 하는 수행이 삿된 길이 아니고

바른 수행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너무 밀밀하고 너무 분명해서

이것이 혹시나 잘못된 수행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던 것입니다.

수행자들은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처음에는 그것이 바른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스승에게 점검을 받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좋다고 판단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좋지 않은 것을 바른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경험에 의해서 하는 판단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많은 상태에서 경험한 것이라서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수행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정신세계를 탐험하는 것이라서

어떠한 속단도 금물입니다.

그래서 사야도께서는 항상 ‘수행자가 스스로 판단하지 마라. 판단은 내가 한다.

비구는 그냥 알아차리기만 해라.’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법이 요구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법이 요구하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실패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경험이 있는 스승의 가르침이 없으면 수행의 발전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야도의 말씀에 의해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처음에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했지만 오래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은

아직 집중력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수행을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약간의 흥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이제는 한 시간 내내 이렇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뿐이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하루 종일

이렇게 마음이 ‘아는 마음을 알기’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들은 호흡이나 경행을 할 때

발의 움직임을 몸이 아닌 전면의 마음에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마음이 몸이 있는 곳에 가서 알아차리는 것보다도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시간이 더 길어집니다.

 

또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망상이 들어오면

얼른 망상하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어서 오랜 동안 망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망상을 하더라도 얼른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하는 마음을 새로 일어난 마음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망상을 하는 순간 빠르게 망상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서

다시 대상에 마음을 기울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대상을 알아차리면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다 보면

몸에서 알아차리는 것보다 느낌이 분명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집중이 되면 알아차리는 힘보다 집중의 힘이 강해져서

마음이 점점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는 대상이 분명하지 않으면 전면에서 다시 몸으로 와서 알아차려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면 집중의 힘과 알아차리는 힘이 균형을 맞추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노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노력이 알아차림과 집중의 균형을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항상 전면에만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힘이 약하면 몸으로 와서 실재하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