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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52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0:0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옳은 것을 말하려면 단지 옳은 것을 말하면 됩니다.

옳은 것이라고 해서 극단적으로 주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옳지 않은 사람이 분개하여 더 나쁜 길로 갑니다.

 

옳지 않은 것을 말하려면 단지 옳지 않은 것을 말하면 됩니다.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해서 극단적으로 주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옳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때는 더욱 예절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내가 옳고 내가 나쁘다고 말하게 되면 말하는 자신도 옳지 않습니다.

옳고 그른 것은 단지 행위일 뿐입니다.

 

여기에 나와 너가 없습니다.

나와 너라는 자아로 판단하는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이것을 모르면 영원히 사물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어서 완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은 반드시 스승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고 싶어도 스승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원래 부처님의 정법이 있는 시대에 태어나기 어렵고,

태어나서 부처님의 정법을 만나기 어렵고,

부처님의 바른 법을 가르치는 스승을 만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많은 수행자들에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배울 수 있도록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동의어 반복이 많습니다.

같은 말을 계속 들으면 모르는 것도 차츰 알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여러 가지 내용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겠습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이 대상을 알 때는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않고

그냥 습관적으로 아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는 마음이 대상을 알 때 깨어서 압니다.

이때 깨어있다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그래서 대상과, 알아차림과, 아는 마음 3가지가 있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냥 대상을 알 때는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이고,

수행을 할 때는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입니다.

알아차림이란 대상이 마음에 와서 부딪칠 때 깨어서 알도록 돕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대상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새로 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길을 걸을 때 걸어가는 것을 막연하게 아는 것이 일반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걸을 때 걷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시선을 여러 곳에 두고 걷고 있거나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걷기 때문에 정작 걷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걷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는 것은 수행자들이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길을 걸을 때는

오른발 왼발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압니다.

이때 대상과 아는 마음을 연결해주는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에 자세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냥 걷는 것은 걷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알아차림이 있을 때 비로소 걷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런 뒤에 걷고 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마음이 발을 겨냥하지 않고 마음을 겨냥합니다.

이때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반드시 걷고 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때 무엇을 하거나 그 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알아차릴 때 몸을 알아차리면 신념처(身念處)이고,

마음을 알아차리면 심념처(心念處)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마음이 있어서 합니다.

이때는 마음이 있어서 대상을 아는 것이 일차적 현상입니다.

이때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거나,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거나,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냥 마음을 알아차리거나, 또는 일하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이차적 현상을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초보 수행자는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열심히 해서

다음 단계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 의하여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있어서 모든 것을 알 때는 마음이 신, 수, 심, 법이라는

사념처 수행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

사념처 수행이란 4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으로 이것을 심념처입니다.

물론 이때도 사념처가 모두 작용하지만

심념처는 두드러지게 마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다른 수행과 다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6가지 감각기관에 알아차림을 두고

6가지 감각대상이 와서 부딪칠 때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란 문지기가 지키고 있기 때문에 번뇌가 침투하지 못합니다.

 

대상을 볼 때는 마음을 눈이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소리를 들을 때는 마음을 귀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립니다.

냄새를 맡을 때는 마음을 코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립니다.

맛을 볼 때는 마음을 혀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립니다.

신체가 부딪칠 때는 마음을 몸이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립니다.

생각을 할 때는 마음을 생각이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립니다.

이처럼 각각의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대상과 부딪칠 때

대상을 아는 것이 모두 똑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생각이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다른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는 것과 하등에 다를 것이 없는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마음도 하나의 감각기관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몸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단지 몸이라는 감각기관이 아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므로 결코 특별한 수행이 아닙니다.

다만 마음은 신체라는 감각기관이 아니고

정신이라는 감각기관이라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눈으로 대상을 받아들일 때 눈이라는 감각기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라는 감각기관도 함께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론으로 설명해서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것을 알아차리는 것과 하등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단지 몸의 감각기관이 아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둔다는 것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대상을 볼 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립니다.

코로 냄새를 맡을 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립니다.

혀로 음식 맛을 볼 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립니다.

몸으로 대상과 부딪칠 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이 생각을 할 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는 것이 모두 심념처 수행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으로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모두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대상을 알아차린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감각기관이라고 하면 몸을 말하지만

몸과 더불어 있는 마음도 감각기관의 하나입니다.

감각기관은 6가지가 있는데 안, 이, 비, 설, 신은 몸에 있는 감각기관이고

나머지 의는 마음에 있는 감각기관입니다.

 

이 의를 빨리어로는 마노(mano)라고 합니다.

한문으로는 의(意)라고 하거나 의근(意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의라고 하는 마음을 감각기관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몸에 있는 5가지의 감각기관은 각각의 위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은 몸의 위치와 다릅니다.

마음은 몸의 어느 위치에 있지 않고 언제나 몸과 함께 있습니다.

 

여기서는 마음이 있는 위치를 편의상 ‘전면(全面)’이라고 합니다.

또는 ‘면전’이라고도 하고 ‘앞에서’라고 말하기도 하며,

또는 ‘마음자리’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마음이 위에서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뒤에서나, 옆에서나 또는 앞에서 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똑같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나 TV를 볼 때 전면에 있는 화면을 통해서 보듯이

마음도 이렇게 전면에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몸과 함께 있을 뿐이지 어느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때 뇌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몸이 아닌 앞이라는 공간에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안다고 할 때는 모두 전면에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하게 마음의 위치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의 위치를 찾으려고 하는 마음도 사실은 전면에서 일어납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몸의 감각기관에서 느끼는

강하고 분명한 느낌처럼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 대상을 받아들일 때는 몸에서 느끼는 것보다 순화되어서 느껴집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볼 때는 대상의 느낌의 강도가 약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렇게 대상이 미세해짐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다른 이익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몸을 알아차리는 것과 다르게 형체가 없는 비물질이기 때문에

이것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이때는 마음을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말고 느끼거나 마음으로 알아야 합니다.

 

느낌의 분류는 다양한데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으로 나누는 분류방법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몸의 느낌이 아닌 마음의 느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할 때 아는 것도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본다’로 시작해서 다음에는 ‘느낀다’로 수행을 합니다.

그러다가 ‘안다’로 수행을 하게 됩니다.

어떤 대상이거나 단지 알고만 있으면 되는 단계가 오면 집중력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가 되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훌륭하게 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본다고 하는 상태에서 수행을 할 경우에는

대상의 모양에 빠지거나 관념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항상 모양으로 대상을 접근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먼저 대상을 모양으로 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눈을 감아도 모양으로 보려고 눈을 사용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이렇게 눈으로 보려고 하면 머리가 아픕니다.

좌선을 할 때 눈을 감고 수행을 하면 대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세하게 보려고 눈을 사용하면서 힘을 쓰기 때문에 장애가 생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알아차릴 때 표상으로 보지 않고

느낌과 마음으로 알기 때문에 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한문으로는 관법(觀法)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한문으로 관(觀)한다고 할 때

사실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할 때는 편의상 관용어로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자는 느낀다거나 안다고 해야

언어가 주는 속박에서 벗어나서 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모양 너머에 있는 실재하는 진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느끼는 것으로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대상의 모양에 빠지지 않고 대상의 실재를 아는 것입니다.

대상을 느끼기 시작하면 이 단계에서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알기 시작합니다.

 

부처님께서 12연기에서 느낌을 발견하시고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린 결과로 법을 발견하시고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황금의자는 보리수 아래가 아니고

느낌과 갈애사이에 있는 자리입니다.

 

느낌으로 인해 갈애가 일어나고,

이 느낌을 알아차려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면

느낌과 갈애가 모두 소멸하는 것이 열반입니다.

 

그래서 느낀다는 것은

대상의 실재를 아는 매우 훌륭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