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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54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0:0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괴로움은 외부로부터 오는 괴로움과

내부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괴로움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며

내부의 괴로움은 자신의 마음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어떤 괴로움이거나 괴로움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리면 그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된 괴로움이므로 알아차렸다고 해서 완전하게 소멸하지는 않습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할 때만이 그 괴로움이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때 괴로움은 소멸된 것이 아니고 알아차림에 의해

잠시 물러나 있다가 다시 나타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알아차리는 것과 함께 언제나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을 알아차리는 행위는 전면의 마음자리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이때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반드시 마음만 대상으로 삼아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전면에 마음을 고정하면 있는 마음은 사라지고 전면을 지켜보는 마음만 있습니다.

이때 지켜보는 마음이 특별한 감정이나 마음의 동요가 없는 한 지켜보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현재 가장 분명한 대상이 전면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호흡이나 통증 등 강한 대상이 있을 때는

전면의 마음자리에 이 대상들이 나타납니다.

경행을 할 때도 마음을 전면에 두면 발의 모양을

발이 있는 곳이 아닌 전면에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 상태는 몸에 있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보다 집중력이 있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호흡이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몸에서 알아차릴 수도 있고,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이때 호흡을 몸에서 알아차리면 신념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흡을 전면에서 알아차리면 심념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마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면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다양한 마음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마음을 알아차리면 많은 종류의 불선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럴 때마다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이때 이 마음은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음의 종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수행자는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마음이 되었거나 언제나 현재에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현재에는 항상 하나의 마음밖에 없으므로

마음의 종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수행자가 괴로울 이유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만약 여러 가지의 마음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다면

이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때 ‘이것이 누구의 마음인가?’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언제나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것에 마침표를 찍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에 마침표를 찍으면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에 빠진 것입니다.

현재는 항상 계속되고 있는데 현재의 알아차림을 놓치면

과거가 되어서 대상이 관념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항상 현재로 오기 위해서는 먼저 몸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몸을 알아차리는 것을 놓쳤을 때는

‘지금 내 마음이 대상을 놓쳤네’ 하고 놓친 그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면

즉시 현재로 돌아옵니다.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궁극의 진리인

무상, 고, 무아라는 법을 알기가 쉽습니다.

결국 아는 것이 마음이고 그 마음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비로소 무상을 압니다.

 

이렇게 무상함으로 인해 오는 정신적 방황을 통해서

괴로움의 실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무아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단지 대상이지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지혜가 나서

최종적으로 무아를 아는 지혜가 성숙합니다.

이때의 마음은 느낌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진리의 법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을 알아차릴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한 그 마음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지금 알아차리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음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마십시오.

마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항상 지금 여기에서 현재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현재를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은 항상 현재 일하고 있으며, 대상을 알고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을 아는 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알아차리기 어려우면 가만히 현재를 지켜보십시오.

이때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마시고 오직 현재에 마음을 고정하십시오.

얼마간 이렇게 지켜보다가 현재 무엇이 현재를 지켜보고 있는지 알아차려보십시오.

그러면 현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마음이라고 알게 될 것입니다.

이때 현재를 지켜보는 마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알아차림과 집중의 힘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는 힘과 집중의 힘을 배양하는 것이 바로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노력이 앞에서 이끌어야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노력을 해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이 집중입니다.

집중은 다른 것이 아니고 대상에 마음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저 스스로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은 살아온 습관에 의해 잠시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달아납니다.

이때 이러한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이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알아차림은 항상 하나로 결속되어서 항상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이란 말에 기억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알아차릴 대상을 기억하여 잊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과 알아차림은 먼저 몸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만약 몸이 긴장하고 있다면 이 긴장을 통하여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몸은 마음에 의해서 이끌립니다.

그러므로 몸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마음이 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리는 힘을 키우면

자연스럽게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는

움직이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서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몸을 통하여 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관계에서 마음이 몸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몸이 마음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리면 마음을 알 수가 있고,

마음을 알아차리면 몸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몸과 마음은 항상 함께 있으면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서로 반응합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상호적인 관계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지혜를 얻습니다.

 

이때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라고 보는 것은 기존의 생각입니다.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대상의 바른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은 몸의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마음은 마음의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몸은 몸의 역할이 있고 마음은 마음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물질적 영역에서 물질적 현상이 있는 것과

정신적 영역에서 정신적 현상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 2가지를 서로 분리해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바른 지혜가 납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 반드시 어떤 조건하에서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요할 때 집중력이 있어야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반드시 고요할 때만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화가 났을 때는 고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화가 났을 때 오히려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리기가 좋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고요해야만 마음을 알아차린다거나

지혜가 있어야만 마음을 알아차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느 때고 마음을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내는 것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대상이 분명할 때 대상에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고요할 때는 고요한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흥분했을 때는 흥분한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마음은 항상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 마음은 언제나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요할 때보다 화가 났을 때, 미움이 일어났을 때,

괴로울 때, 부끄러울 때, 후회할 때 이런 강력한 마음이 일어났을 때 알아차리기가 좋습니다.

강력한 대상이 일어나면 즉시 마음이 반응하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대상을 알아차릴 때 겨냥이 잘 되지 않을 경우에는 명칭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호흡의 경우에는 ‘일어남, 꺼짐’이라고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거나

경행을 할 때는 ‘오른발, 왼발’이라고 명칭을 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의 발전이 있을 때

마음이나 느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명칭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과 느낌은 미세한 대상입니다.

명칭은 거친 대상이기 때문에 거친 대상으로 인해 미세한 대상이 가려져버립니다.

그래서 명칭을 붙이면 마음과 느낌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릴 때 대상과, 알아차림과, 아는 마음이라는

3가지 조건이 성숙되어야 알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명칭을 사용할 경우에는 대상과, 명칭과, 알아차림과, 아는 마음이라는

4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명칭을 붙일 때는 마음이 대상의 실재를 알아차리지 않고,

마음이 명칭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호흡의 일어남과 꺼짐을 알아차릴 때

호흡의 일어나는 순간에 꺼짐이라고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고,

호흡이 꺼지는 순간에 일어남이라고 명칭을 붙일 수 있습니다.

이때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명칭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과 상관이 없는 것을 입으로 외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른발을 들어 올릴 때도 왼발이라고 명칭을 붙이거나

왼발을 들어 올릴 때도 오른발이라고 명칭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명칭을 대상으로 하면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면 집중력이 생기지만, 실재를 보지 않아서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명칭은 거칠기 때문에 대상을 붙잡는 장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명칭 자체가 대상의 성품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염불을 외울 때 아무 뜻도 모르고 외우면 근본집중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실재하는 마음이나 느낌을 알 수 없습니다.

근본집중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집중이라서 법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명칭 없이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찰나집중을 해서 비로소 법의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명칭이 대상을 겨냥하는 효과를 얻었다고 해서

계속해서 이러한 효과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알아차린 결과로 수행의 효과를 얻어야지

명칭의 효과로 수행의 결과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명칭이 크게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는

이와 같이 명칭이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유념하셔야 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