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47

通達無我法者 2011. 1. 6. 23:4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중에 하나가

무지로부터 벗어나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은 관념이 아닌 실재를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지혜를 얻는 방법입니다.


법에 성품을 아는 통찰 지혜를 얻어야

비로소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올바른 지도를 받아야합니다.

약도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되듯이 수행도 잘못하면 독이 됩니다.


수행은 경험하지 않는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서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도처에 지뢰밭이 널려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동굴탐험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 반드시 경험자의 안내를 받아야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번뇌를 억누르는 선정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지 않으셨습니다.

번뇌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선정에 고요함도 필요하지만 마지막단계에서는 통찰지혜로 무명을 부셔야합니다.

위빠사나가 통찰 지혜의 방망이를 휘둘러서 무명을 부수는 것이 아닙니다.

통찰 지혜가 나면 무명이 저 스스로 사라지고

밝음이 일어나 해탈의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수행의 필요성에 대해 평생 동안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강요한다고 해서 결코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거나 스스로 선택해서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괴로움이 있다’라는 선언은

괴로움이 있으니 자각을 해서 수행을 하라는 묵시적인 말씀이십니다.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다’라고 하는 선언은 갈애가 괴로움을 만드니

스스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수행을 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이렇게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알아차리는 것이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번뇌를 말리는 수행을 해야 열반에 이르러서 무명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마하시 사야도께서 말씀하신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의 길에 대한 무지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무명은 괴로움이 있다는 고성제와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라는 집성제에 대한 무지로

바로 이것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에 속합니다.


무명은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와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를 모르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진리는 심오하여 매우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열반에 관한 것이며,

열반은 오로지 성자의 성스러운 도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는

도를 증득한 수행자만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결코 아닙니다.

고성제와 집성제는 살고 있는 것에서 드러나 있지만

멸성제와 도성제는 출세간의 삶이라서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스러운 깨달음을 얻은 성자들이 발견한 지혜이기 때문에

범부들의 세계에서는 알 수가 없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에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것은

우리가 수행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지만,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팔정도에 대해서는

수행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는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종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궁극적 목적을 설교합니다.


어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괴로움이 저절로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약이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감각적 쾌락이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고

내생을 부정하기도합니다.


이런 다양한 설교는 모두 진정한 열반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심지어 일부 불교 신자들도 열반을 어떤 거처나 극락세계로 여기고 있으며

이 열반에 대한 이론이 분분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열반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반은 부처에 의해서 체험되고

부처는 그 길을 안내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반은 불교에만 있는 법입니다.


인류 역사상 누구도 열반을 설하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만이 열반을 체험하시고

그리고 이것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저희를 인도하셨습니다.


실제 열반이란 인과 관계를 기본으로 하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불탄 것을 열반 또는 닙바나라고 말합니다.

이 닙바나를 산스크리트어로 말하면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여러분 연기법에 따르면,

무명과 행 등이 정신과 물질을 일으키고, 이러한 인과의 과정으로 인해

늙음 죽음 등 기타 삶의 괴로움이 수반되어 따라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스러운 도에 의해서 무명이 소멸하면 그 결과물인 모든 괴로움이 소멸하며

이러한 고통의 완전한 소멸이 바로 열반입니다.


여기서 성스러운 도를 ‘아리아 막가’라고 하는데

이 ‘아리아’는 성자를 의미하고 ‘막가’는 도를 뜻합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도라고 말했을 때에는

성자들이 경험했기 때문에 성인의 도라는 뜻으로 성스러운 도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기름을 부으면 등불이 계속하여 타오를 것이나,

기름을 붓지 않으면 불꽃이 완전히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성스러운 도를 닦아 열반을 증득한 수행자는

무명과 갈애 등 모든 원인을 제거하여 태어남이라는 결과가 없습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실제로 열반을 증득하기 전에

반드시 이해하고 숙지하고 있어야할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을 뜻합니다.


여러분!

이 열반의 개념은 삶에 대한 강한 갈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호소력이 없습니다.


‘바라지 않고 어떻게 살아!’ 라고 한다면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합니다.


이들에게 정신과 물질의 과정이 소멸한다는 것은

단지 영원한 죽음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수행자의 열과 성을 다하는 부단한 노력은

이러한 이해와 받아들임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를 아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바른 도를 보여줄 수 있고,

천인이나 범천 인간과 같은 다른 존재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에 대한 갖가지 추론과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 박애, 인욕, 보시 등과 같은 일반적인 도덕을 설파 하는가하면

다른 사람들은 세간의 선 수행을 강조하기도합니다.


이러한 모든 수행은 칭찬할만한 것입니다.

수행은 유익한 것은 사실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천인계나 범천계에 태어나는

상대적인 행복에 이르지만, 늙음과 같은 괴로움의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보장해주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


비록 열반을 얻기 위한 노력에 도움이 됨에도 불구하고

열반에 이르는 바른 도를 이루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완전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선택하느냐,

어떤 교리를 선택하느냐, 어떤 스승의 가르침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 그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절식을 한다든가 원시인처럼 산다든지 하는 고행에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인이나 동물을 숭배하기도하고

또 다른 이들은 동물처럼 살기도 합니다.


불교의 견지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팔정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수행으로

단지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는 계금취견이라고도 합니다.

이 계금취견은 우리가 자이나교에서 생긴, 그들의 생활 속에 젖어있습니다.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은 종교적인 금계와 의례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고 해탈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례의식만을 옳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중생을 삼계에 붙들어 매놓고 있는 열 가지 족쇄 가운데 세 번째 족쇄에 속합니다.

네 가지 집착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성자의 초보단계인 수다원에 들면

유신견과 의심과 같은 족쇄와 함께 계금취견도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팔정도는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알아차림, 바른 삼매를 말합니다.


도에는 근본 도와 예비단계의 도와 성스러운 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스러운 도이지만,

이것이 수행자의 일차적 목적이 되거나

그것에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쓴다든가 정력을 쏟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비단계의 도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발전함에 따라

성스러운 도의 통찰지가 한 의식 찰나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찰에 의해 불을 일으키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발화는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도에서 통찰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생기지만

이는 예비수준의 도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충분히 이루어진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혜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노력 끝에 그 노력의 결과로 한 찰나 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도의 길을 가기 위해서 수행을 합니다.

수행은 번뇌를 여의고 행복을 얻기 위해서 합니다.

수행은 대상이 있어야 하고 알아차려야합니다.


그러나 대상을 붙잡기가 어렵고 지속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잘 안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수행을 궁극적으로 ‘나’ 없음을 아는 것인데

잘 되기만 한다면 아만심이 강해져서 오히려 나쁜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안되는 것 속에서 인내를 키우고,

안되는 것 속에서 법의 성품을 알고,

안되는 것 속에서 무아의 지혜를 얻습니다.


수행이 안 되는 것은 해보지 않은 것이라서 그렇고,

대상에 알아차림을 정확히 겨냥하기가 어렵기 때문이고,

아직 집중력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수행이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잘 안된다고 포기를 하게 되면

언젠가 잘 될 수 있는 기회도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수행이 잘 안될 때에는 잘 안되는 것을 알아차려야합니다.


수행을 잘 하려고 하면 마음이 들떠서 더 안 됩니다.

수행이 안 되는 것은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시작하고 즉시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씨를 뿌리고 바로 수확을 하려는 탐욕으로 하는 것입니다.

수확이 안 되면 화를 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어리석음이고 무명입니다.

그래서 탐욕하나에 성냄과 어리석음이 함께 붙어있습니다.


여러분!

수행은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수행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수행자의 의무는 단지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알아차리는 것과 알아차린 결과는 다른 것입니다.

수행을 한 결과는 수행자가 결정할 몫이 아니고

조건이 성숙되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 어떤 결과도 기대하지 않아야

오히려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목표는 있으되 함에 있어서 원함이 없어야합니다.

하려함이 있으면 마음과 몸이 긴장하게 됩니다.

원함이 없이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지만

궁극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길을 반드시 가야만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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