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49

通達無我法者 2011. 1. 7. 00:1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오늘은 무명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는 것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혜는 세 가지로 계발됩니다.

지혜는 먼저 듣고, 그리고 대상을 겨냥하고, 수행을 해서 얻는 세 가지 과정을 거쳐서 성숙됩니다.


첫째는 문혜(聞慧)라고 합니다.

문혜는 경전을 읽거나 법문을 듣고 지혜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혜(思慧)입니다.

사혜는 알아차릴 대상을 겨냥해서 지혜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수혜(修慧)입니다.

수혜는 수행을 해서 무상, 고, 무아를 알아 완전한 지혜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언어의 그물에 걸릴 수 있지만

수행은 언어의 그물을 관통해버립니다.


수행은 철학이나 지적사유가 아닌 실천을 말합니다.

그래서 대상을 겨냥하는 수행을 해야 완전한 지혜가 납니다.


이렇듯 우리는 자기 수준에 따라서,

그리고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지혜가 성숙됩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먼저 법문을 듣거나 경전을 읽고,

그리고 수행을 시작해서 대상을 겨냥하는 알아차림을 해야 되고,

그 알아차림이 지속된 결과로 무상, 고, 무아의 법을 알아서

완전히 성숙된 지혜를 얻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턱대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전히 알려고 해서는

그것이 무명이며 그것이 갈애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는 업의 지혜입니다.

둘째는 선정의 지혜입니다.

셋째는 위빠사나의 지혜입니다.

넷째는 도의 지혜입니다.

다섯째는 과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지혜는 이상 다섯 가지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지혜가 성숙되어서

완전한 지혜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유념하십시오.


자, 이 다섯 가지의 지혜는

첫째, 업의 지혜입니다.

이때 말하는 업은 행위를 말합니다.


업은 실재하는 행위가 있다는 것,

이때에 행위는 허상이 아닙니다. 실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행위는 자신의 마음이 한다는 것,

행위에 대한 책임은 외부에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행위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

선심을 가지고 선행을 하면 선과보가 있고,

불선심을 가지고 불선업을 하면 불선과보가 생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업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구의 3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때 일예를 들자면

생각은 공중에다 대고 글씨를 쓴 것이고

말은 모래위에 대고 글씨를 쓴 것이고

행위는 바위위에 새긴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그 업에 결과가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업에 관해서 분명한 앎이 필요합니다.

업에 대한 분명한 앎이란 업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업에 의한 원인과 결과를 믿는 것입니다.


업은 과거에 지어놓은 업과 현재의 짓고 있는 업이 있습니다.

현재의 모든 결과들은 과거의 지어놓은 업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지만 불교도라면 과거의 업은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이미 과거의 업에 의해서 현재가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는 지난 업입니다.

지난 업은 현재 어떻게 바꿀 수가 없으므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업에 의지해야합니다.


현재의 업에 의지해야한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하는 행위가 선업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업에 대한 지혜가 있어서 불선업을 제어하고 선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업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이렇게 과거의 업과 현재의 업이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좋은 업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나쁜 업은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언제 어느 때나 항상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해야 합니다.

좋지 않은 행은 역시 좋지 않은 결과를 나타낸다고 믿어야합니다.


이렇게 업과 관련된 첫 번째 지혜를 업자성정견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업은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소유이며,

자신이 지은대로 받는다는 견해가 바로 업자성정견입니다.

이것이 업의 지혜입니다.


이 업의 지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과거의 업과 현재의 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12연기 도표를 보면

1번 칸에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난다고 했을 때

이때의 행이 업인데, 이것은 과거에 형성된 업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행은 이미 형성된 업,

마음에 의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을 말합니다.


과거는 우리가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거로 돌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업 중에서 과거의 업은

이미 형성된 업이라서 손을 댈 수가 없는 업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하나의 업은 3번 칸에 있는 업의 생성을 말합니다.

1번 칸에 있는 행은 업의 형성이지만은

3번 칸에 있는 업의 생성은 지금 내가 새로 만들 수 있는 그런 행위를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 과거에 대해서 연연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지 말아야합니다.

 

단지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느냐,

지금 내가 어떤 업을 생성하느냐, 하는 이것만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 업의 지혜입니다.


두 번째로 선정의 지혜가 있습니다.

이 선정을 빨리어로는 쟈나라고도 말하는데,

또 다른 말로는 사마타 수행이라고도 말합니다.


선정에 관한 지혜는 선정 수행을 해서 얻는 지혜를 말합니다.

이 선정수행을 또 다른 말로는 사마타 또는 지(止) 멈춤이라고도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고요함에 머무는 수행, 적지수행(寂止修行)이라고도 합니다.

사마타수행을 계속하면 색계선정이나 무색계선정에 들게 됩니다.


이러한 선정 삼매에 관한 것을 선정 정견이라고 합니다.

이 선정에 대한 바른 견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 선정을 닦아야 될까요?

왜 사마타 수행을 해야 될까요?

 

우리는 범부로 살아가면서 수행을 시작하려면 제일먼저 나타나는 것이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감각적 쾌락과 악한 의도와 게으름과 혼침과 들뜸과 의심이 일어나서 수행을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이때 이러한 다섯 가지 장애가 나타나면 어떤 특정한 대상하나를 선택해서

그것과 하나가 될 때 이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번뇌를 억누르는 것이 바로 선정수행입니다.

그래서 멈춤이라는 뜻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선정수행을 닦아서 선정에 이른 것을 선정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는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지혜입니다.

위빠사나는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통찰수행으로 지혜를 얻는 수행입니다.

특히 위빠사나라는 말은 상징적으로 지혜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선정수행은 고요함, 멈춤이지만

위빠사나는 지혜수행, 끊음이라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위빠사나의 지혜로써 도와 과의 지혜를 얻어 열반을 성취하게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지혜의 향상은 7청정과 함께 향상이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 지혜는 마하시 사야도에 의해서 발표된 16단계의 지혜가 있고,

부처님께서 밝히신 열 가지 단계의 지혜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밝히신 열 가지 단계의 지혜는

첫째,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현상들의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앎입니다.

이를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또는 현상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라고 합니다.


자신의 오온을 무상, 고, 무아로 알아차려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할 때 몸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은 모두 무상, 고, 무아로 알아차려야합니다.  

또한 수상행식의 마음과 마음의 작용들이 나타날 때마다 마찬가지로 무상, 고, 무아로 알아차려서 숙고해야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 두 번째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아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지혜는 사라짐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지혜는 두려움에 대한 지혜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지혜는 고난에 대한 지혜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지혜는 혐오감에 대한 지혜입니다.


여러분!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할수록

지혜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지혜가 생깁니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이미 현상을 바르게 아는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일어나서,

생멸의 지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을 지혜가 있고,

그 뒤에 방가냐냐라고 하는 사라짐의 지혜를 얻게 된 뒤에는

오히려 편안함을 얻는 게 아니고 두려움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의식 속에는

오랫동안 살아온 고정관념, 잠재된 축적된 성향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지혜가 생길 때마다 그것에 저항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르는 지혜가 생길 때에는

반드시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을 유념하셔야 됩니다.


이렇게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상승하는 것이 

결코 우리가 받아들이기 쉬운 것만이 아니고, 어려운 것들이라고 아셔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스스로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대한 지혜, 고난에 대한 지혜, 혐오감에 대한 지혜의 과정을 거쳐서,

이것이 괴롭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일곱 번째에 단계인 해탈을 이루려는 지혜로 갑니다.


바로 이렇게 괴로운 일련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이제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앎이 생깁니다.


오온에 대하여 혐오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 다음에

괴로움뿐인 오온에서 벗어나고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리는 것이 싫은 단계에 접어들면

수행을 하기가 싫어지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마음역시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합니다.

이때 수행자는 오온을 싫어하는 마음조차도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알아차려야합니다.


누구나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苦)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함께 있다는 것을 다시 알아차려야합니다.

이것이 해탈을 이루려는 지혜입니다.


여러분! 이렇듯이 우리가 가는 길은 모든 것이 편안하게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하나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은 고난의 행군입니다.


그래서 이 고난의 행군을 부처님께서 몸소 경험하시고 바로 우리들에게 그 길을 드러내 보이신 겁니다.

내가 이것을 경험했으니 너희도 이 길로 와라! 라는 부처님의 자애로움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선택하도록 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탈을 이루려는 이 지혜에서

우리는 좌절하지 말고 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수행에 정진해야합니다.


여러분! 수행자는 마음에 믿음이라는 종자를 심어야합니다.

믿음이라는 종자를 심어야 알아차림이라는 나무가 자라게 하여서 그 지혜의 열매가 열리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알아차려서 지혜를 얻을 때만이 모든 번뇌를 여윈 최상의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왜 그러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욕계에 생명입니다.

우리는 무명으로 태어나서 무명으로 죽고 다시 무명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현재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가 가신 위대한 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끊임없이 정진을 하셔서 해탈을 이루려는 지혜를 얻으셔야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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