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48

通達無我法者 2011. 1. 6. 23:5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오늘도 12연기의 시작인 무명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명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명의 반대인 지혜는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는 수행을 해야만 생기는 것이므로

무명이 무엇이라고 아무리 들어도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수행을 통해서 지혜가 성숙될 때만이

비로소 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무명은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으로,

좋은 것을 좋지 않은 것으로 알게 합니다.


이 무명은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장님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사람은 무엇을 볼 때

흰색인지, 노란색인지, 빨간색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무명과 장님에 대한 저의 스승의 말씀을 잠시 해드리겠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어떤 사람이 늘 흰옷을 입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장님은 친구에게 흰옷을 입고 싶다고 간절하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조르는 바람에 친구는 할 수 없이 옷을 만들어주었는데,

유감스럽게 그것이 검정색 옷이었습니다.


장님은 흰옷을 입고 싶어 했기 때문에

검정색 옷을 받았지만 자기가 입은 옷이 흰옷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님은 그 옷을 입고 다니면서 드디어 흰색 옷을 입었다고 자랑하면서 큰 마을로 갔습니다.

그는 흰옷을 입었다고 했지만 실제 그가 입은 옷은 검정색 옷이었습니다.


장님이 검은색 옷을 입고 흰옷을 입었다고 말하며 돌아다닐 때

그의 친구가 사실 그것은 흰옷이 아니고 검은색 옷이니 이제 벗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장님은 결코 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친구는 장님의 어머니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지금 아드님이 검은색 옷을 입었는데도 흰옷을 입었다고 자랑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검은색 옷을 주었는데 흰옷을 입었다고 저렇게 말하면서 다니니 창피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드님을 좀 말려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장님인 아들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얘야, 지금 네가 입은 옷은 흰옷이 아니고 검은색 옷이다.

네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으면서 흰옷을 입고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네 친구가 창피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 옷을 그만 벗어라.’


이렇게 어머니가 말씀드리자 아들은 다시 말을 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흰옷을 입고 있는 것이 너무 좋아 보이고 아름다워서

혹시 사람들이 질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어머니가 이처럼 아들에게 옷을 벗으라고 권유했으나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다시 아버지에게로 가서 아들의 검은 옷을 벗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검은 옷을 벗게 하려면 먼저 아들의 눈을 고쳐주어야겠습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들이 앞을 볼 수가 없어서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으니

아들이 눈을 떠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바로 이러한 말씀이 무명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어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지혜가 없는 인간은 누구나 장님과 같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기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나면서부터 장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 장님은 우리가 무명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난 것을 상징적으로 뜻합니다.

그리고 검은 옷은 고(苦)를 상징하고 흰 옷은 열반을 상징합니다.


지금 법문을 하는 저나 여기에 이 방송을 듣는 청취자들이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고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전생에서도 고(苦)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모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괴로움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하도록 한 것이 바로 무명입니다.

무명으로 인하여 몰라서 선업도 행했고 때로는 악업도 행했습니다.

우리는 선행을 행할 때마다, 또는 좋지 않은 악업을 행할 때마다

괴로움인 갈애와 함께 했던 것입니다.


사성제의 진리를 모르는 것, 바로 그것이 무명이고,

이렇게 모름으로 해서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원해서 행한 것이 바로 행입니다.


지금 설명한 무명과 행은 과거에 행한 것이고, 사성제로는 집제에 해당합니다.

사성제 중에 집제는 고의 원인이 되는 법입니다.


과거에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있었고, 행을 원인으로 식이 있었고,

현재 그 식을 원인으로 명색이 있고, 명색을 원인으로 육입이 있고,

육입을 원인으로 접촉이 있고, 접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


무명과 행은 시간으로 볼 때는 과거이고,

과거의 원인으로 인하여 현생에 오온이 있습니다.


과거의 무명과 행은 사성제 중에서 집성제에 해당하는 것이고

현재 갖고 있는 오온은 괴로움뿐인 고성제입니다.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무명이 가려서 반대로 이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온과 함께 살기를 원해서 갈애를 일으킵니다.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알면 다시 태어나려는 업을 만들지 않는데

오온을 좋은 것이라고 집착해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명입니다.


한 사람이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이번 생인 사람에서

다음 다른 생으로 가야할 때 첫째로 무명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사람에서 개의 생으로 가야한다면

개의 생에서 겪어야 하는 괴로움을 모르도록 가리는 것이 바로 무명입니다.

개로 태어난 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모르게 하는 것도 무명이지만,

거꾸로 개의 그런 생이 좋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도 무명입니다.

개의 고통을 모르는 무명이 일어난 후에는 모르기 때문에

개로 태어나기를 원하는 갈애가 생깁니다.


이토록 무명은 우리의 눈을 가려서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으로,

좋은 것을 좋지 않은 것으로 알게 합니다.


무명과 갈애 뒤에는 다시 개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업이 작용합니다.

이미 자기가 행한 악업이 개로 태어나도록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것을 모르도록 가리는 것이 무명이고,

그런 생을 원하는 것이 갈애입니다.

다시 그런 생을 갖도록 행위를 해서 업을 형성한 것이 행입니다.

이때 행은 업의 형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무명에 가린 의도에 의해 일어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윤회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무명, 갈애, 행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가 원인이 되어서 계속 굴러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앞으로 계속해서 윤회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윤회에서 벗어나고 싶으십니까?

정말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은 무명과 갈애로부터 자유로워지셔야 합니다.


여러분, 정말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다면

지금부터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이 길을 따르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길로 가야합니다.

괴로운 삶을 끝내고 윤회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은

바로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맨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어난 맨 느낌은 반드시 갈애로 발전합니다.

이렇게 갈애로 발전할 때 연기가 회전합니다.

연기가 회전하면 다시 윤회의 길로 가서

고통뿐인 다음 생에 태어남이 반복됩니다.


여러분, 고통뿐인 이러한 윤회를 계속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고통이 끝나는 해탈의 길을 가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고통뿐인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다면

느낌이 일어날 때 그 느낌이 갈애로 발전하지 않아야 됩니다.


단지 우리가 대상을 접촉할 때 그냥 그렇네! 그것이 있네! 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느낌이 갈애로 발전하지 않아서

우리는 윤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술과 담배, 도박, 춤, 그런 것들을 끊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술과 담배를 원하는 것이나 끊으려고 하는 것이나 모두 똑같이 갈애에 속합니다.

갈애를 끊으려고 하면 오히려 집착하게 되어서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갈애를 끊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먼저 갈애로 인해서 생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합니다.

이렇게 갈애로 인해서 생긴 괴로움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이미 갈애의 깊은 의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때 술과 담배를 원하는 마음이 괴로운 것이라고 알아차릴 때

그때만이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명에서 벗어나는 길이

그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자꾸 갈애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 그러한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느낌에서 갈애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원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갈애를 제거하기 원한다면 말로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단지 지식에 머물고 맙니다.

생각이 아닌 실수행을 해서 지혜가 생겨야 합니다.


정말 갈애를 제거하기를 원하신다면 가장 먼저 알아야할 것이

오온과 함께 사는 것이 괴로움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알 때만이 갈애를 제거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오온이 좋은 것이라고 아는 것은 무명입니다.

그러나 오온이 괴로움이라고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이렇게 지혜로 알아차릴 때만이 갈애를 없앨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갈애와 고성제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요?

우선 괴로움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오온이 괴로움이라고 알 때 자연스럽게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온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원하게 되어 생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과연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갈애를 일으키는 원인은 현재 오온을 가지고 있는 것이 괴로움인지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갈애를 일으켜서 결국 또 괴로움뿐인 오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로 가는 길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길에 있습니다.

깨달음의 길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길에 있습니다.

연기의 출구는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길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그것은 바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연기의 출구(出口)를 찾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우리는 새로운 생을 또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고 죽는 고통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선택해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원인과 결과를 알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알면 나고 죽는 것이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알 뿐이지

내가 없다고 알아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수행을 해서 원인과 결과를 알아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아 영원히 자유로움을 선택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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