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79

通達無我法者 2011. 1. 16. 23:5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자에게는 수행방법에 대한 갈애가 있는데

바꾸지 않으려는 갈애와 바꾸려는 갈애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하고 있는 수행방법을 집착하여

더 좋은 방법이 있어도 외면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의 수행방법에 대해서 확신이 없어서

항상 더 좋은 방법을 찾아서 여기저기를 헤매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수행방법만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최고의 방법도 버릴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러 가지 수행방법을 찾아 헤매는 것도 위험합니다.

무엇이나 하나라도 제대로 해서 갈고 닦아야 합니다.


수행은 비교될 수 없는 것이라서

자기의 수행방법이 최고라는 갈애와 내가 최고라는 갈애가 항상 함께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조건이 있는데 갈애가 없는 조건이 최상입니다.

가장 이상적이고 적절한 조건은 갈애가 없는 중도의 마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다섯 번째 사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사견은

어렸을 때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아 준 부모에게 입은 은혜에 

표하는 공경이나 경의, 후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쩌다가 성관계를 맺어서 애를 가졌고

책임감에서 애를 키운 것이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감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를 돌보아 드리는 게 선행도 아니며

부모에게 못되게 구는 것도 죄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견해로 이러한 사견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일곱 번째 사견은 인간계와 축생계를 제외한 다른 중생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견은 동물이 인간으로 재생할 수 있다는 견해를 부정합니다.


여덟 번째 사견은 인간이 천인계나 축생계,

또는 지옥에 재생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죽으면 삶이 끝난다는 단멸론을 가르칩니다.


아홉 번째 사견은 화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태에 들지 않고 완전히 성장한 성체를 가지고 나타나는

천인, 범천, 아귀, 아수라 등과 같은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도처에서 선하거나 악한 유령과 만났다는 보고가 있고

유령, 천인, 범천 등을 불러올 수 있는 무당과 심령술사가 있으며

이들은 때로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에게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견해는 지지할 수가 없습니다.


열 번째 사견은 이 세상과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을 설하고

자신들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문이나 바라문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스스로의 실제적이고 남다른 경험을 토대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독자적으로 설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들의 모든 가르침은 다 추측과 공론이어서 거짓이며 삿된 것임을 뜻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날 이 견해는 종교를 조롱하는 사람들에 의해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부처님과 아라한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하지만 이 견해에 근거하고 있는 논리는 자가당착적이고 파멸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견해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도

역시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해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똑같은 사유를 통하여 우리는 이 견해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법은 최상의 지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법은 체험적인 탐구에 적합하며 불법을 증명할 만한 과학적인 증거가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서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편 사람은 ‘산자야’였습니다.

산자야는 무조건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싸잡아 공격했으며,

아라한과 부처님 또한 그러한 비난의 대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산자야가 주장한 불가지론은 초경험적인 것의 본질은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학설입니다.

산자야는 육사외도의 한 분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리불과 목갈라나 존자도 이 산자야에 소속된 수행자였습니다.


지금까지 열 가지 사견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견에 대한 집착 중에 열 가지 사견을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잘못된 견해를 말합니다.


그러면 열 가지 사견에 반해서 바로 바른 견해는 무엇일까요?

열 가지 사견은 결국 업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업의 부정은 보시행이나 효도나 다른 선행에서 얻어지는 공덕과

아라한과나 부처님의 지위를 얻기 위해 업의 잠재력을 부정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같은 맥락에서 열 가지의 바른 견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또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열 가지의 바른 견해는 업, 도덕적 과보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 가지 잘못된 사견을 말씀드렸는데

이제 열 가지 바른 견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바른 견해는 보시가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보시자는 적어도 보시를 받는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그렇게 보시를 받은 사람들은 보시자를 칭찬하고

보시자가 곤경에 처해있을 때 도와줄 것입니다.


보시자는 좋은 임종의 표상을 지닌 채 평온하게 죽어서

천인계나 인간계의 좋은 생으로 태어납니다.

좋은 재생을 통하여 언젠가 보시자는 성스러운 도와 열반에 이를 것입니다.


부처님, 벽지불, 아라한의 목표에 이르는 기나긴 정신적인 여정을 시작한 보살과

다른 사람들은 대개 보시행과 함께 했습니다.


보시의 과보는 일부 사람들의 물질적 번영을 보아도 명백히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업, 농사 등의 똑같은 일을 하는데 결과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번창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나아지는 점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힘들이지 않고서도 성공을 이루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힘들게 일하고도 번영하지 못합니다.


다른 요소가 같다면 사람들이 재산형성에 각기 다름은

의심할 여지없이 전생의 보시의 여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봐야 되겠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바른 견해는 업의 법칙을 믿는 사람은 아낌없이 보시를 하거나 손님접대,

선물을 주는 것과 같은 작은 보시행에서 오는 업의 과보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네 번째의 바른 견해는 도덕적 과보, 즉 업의 법칙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선행이나 악행에 따라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삶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부모와 스승의 지도에 따라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은 인기를 얻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성공을 하며 장성했을 때 성공한 사람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생에 이룬 선업으로 좋은 집안에 태어나

건강과 재산과 신체적인 아름다움, 참된 친구들을 얻는 축복을 받습니다.

악업의 나쁜 효과는 병약함, 가난, 용모의 추함 등입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의 바른 견해는 업에 대한 믿음으로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임신한 순간부터 아이를 잘 보살핍니다.

어머니는 태 안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 모체의 건강과 먹는 음식, 동작에 특별히 주의합니다.

만약 어머니가 좋은 불교신자라면 아이에게 정신적 영향을 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포살을 지키며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생각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부모는 아이의 물질적 요구를 챙겨주어야 하고,

교육을 시켜서 청년이 되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그리고 아홉 번째의 바른 견해는

이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 화생으로 생겨난 천인과 같은 중생에 대한 바른 견해입니다.


이러한 바른 견해에도 또한 업의 법칙에 대한 믿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업의 법칙으로 중생은 죽은 뒤에 자신의 업에 따라 축생계나 천인계나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반대로 사람이 동물이나 천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어느 정도까지는 증명할 수 있지만,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가

신통력이나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 또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수행자가 사마타 수행을 하면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죽어서 새로운 존재가 된 사람의 모습을 볼 수도 있는 천안통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통력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사마타나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추론의 힘에 의존해야 합니다.


곳곳에 자신들의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경전에서 태어남을 기억하는 지혜를 얻은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람, 동물, 유령, 아귀로 살아온 자신의 전생을 이야기 합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해보면 이러한 전생의 이야기는 죽은 다음에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거나, 반대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고,

또 어떤 중생들은 곧바로 화생을 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가리킵니다.


여기서 현자가 제시한 내생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은 업과 내생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고,

또 다른 사람은 그러한 믿음을 부정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업과 내생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보시와 지계와 같은 선업을 짓지 않을 것이며

악업을 짓기를 삼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욕망에 자신을 내맡겨 버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고 찬탄할 만한 어떠한 덕성도 없습니다.

만약 자신의 믿음과 반대로 업과 내생의 법칙이 사실이라면

그는 악처에 떨어질 것이며 윤회를 하면서 많은 생 동안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업과 내생을 믿는 사람은 악업을 삼가고 선업을 지을 것이며,

설사 업이나 내생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덕성으로 인해 칭찬과 높은 명성을 얻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선업을 알아차리면 기쁨이 생길 것입니다.

선한 시민으로서 그는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이익은 분명코 그가 현생에서 가지는 업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내생이 사실이라면 그는 내생의 행복을 보장받습니다.


어쨌든 내생에 대한 믿음은 현생이나 내생에서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권하신 절대 오류가 없는 바른 견해입니다.


마지막으로 열 번째 바른 견해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한 최상의 지혜를 선언할 수 있고,

자신의 가르침을 믿도록 할 수 있는 거룩한 덕성을 지닌 부처님과 아라한,

또는 성자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도 업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왜냐하면 아라한과 부처님들의 영적인 성취는 본질에 있어서 업과 다르지 않은,

스스로의 바라밀에 부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바라밀을 계발하는 것은 일종의 배움입니다.

마치 아이가 교육을 잘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많은 것을 배우는 것처럼,

보살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 지혜를 구하는 바라밀을 닦았습니다.


어떤 부모와 어른들은 자기 아이를 데리고 영화관이나 극장에 데리고 가는 반면,

다른 부모와 어른들은 절에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좋거나 좋지 못한 습성을 기르게 되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거나 삶의 숭고한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좋은 습성과 좋은 수련은 일종의 바라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종교적인 삶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커다란 열정과 노력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이러한 아이의 종교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나

어떤 사람의 영적인 삶에 대한 남다른 사랑은

전생의 바라밀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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