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77

通達無我法者 2011. 1. 16. 22:5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갈애는 보통 사람들이 몹시 바라는 마음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갈애에 의해서 이끌려가고,

갈애는 모든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깨달음은 갈애가 끊어져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갈애의 종류는 3가지가 있는데

감각적 쾌락을 바라는 갈애가 있으며,

살고 싶고, 다시 태어나고 싶은 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고,

그리고 삶이 끝나기를 바라는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갈애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삶이 질이 결정됩니다.

우리의 즐거움과 괴로움, 행복과 불행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신의 갈애가 결정합니다.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갈애를 일으키게 하는데,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면

갈애가 있어야 할 자리에 지혜가 자리 잡게 되어

선하지 못한 모든 번뇌가 소멸합니다.


탐욕으로 인해서 생긴 욕망의 쾌락은

지극히 짧은 순간에 끝이 나지만 그 과보는 일생을 두고 받습니다.

쾌락은 단지 한 순간에 느낌이며,

느낌은 순간에 일어나서 순간에 사라지지만,

그 과보는 몇 생이 계속될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감각적 쾌락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이지

내가 느끼고 내가 즐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한 순간의 감각적 쾌락을 위하여 생명과 명예를 던져 버리는 것도

한 순간의 느낌이 원해서 하는 갈애로 인한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는 갈애의 소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느낌이 일어날 때 느낌을 알아차리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리지 못해서 갈애가 일어났다고 한다면

다시 또 갈애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면 갈애가 소멸합니다.


수행은 언제나 일어난 현재의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그 순간 소멸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따로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알아차리는 노력만이 모든 갈애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갈애가 완전히 소멸하면

그 모든 결과들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고, 이는 괴로움의 소멸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이나 중생이 사라졌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괴로움의 근원인 정신과 물질의 과정이 소멸한 것일 뿐입니다.

 

아라한과의 성취가 갈애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는 것처럼,

아나함과의 성취는 욕계의 재생, 늙음과 죽음, 감각적 갈애의 소멸을 뜻합니다.


수다원과를 성취한 수행자는 악처에 이르게 하거나,

일곱 번 이상 다시 태어나는 모든 갈애의 소멸이 보장됩니다.

그래서 수다원이 되면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서 윤회를 끝난다고 말합니다.

수다원은 악처에 모든 괴로움과, 욕계에 일곱 번 이상 태어나는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는 그때 비로소 갈애가 소멸될 수 있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기법에 함축된 의미는 갈애가 약화되면 괴로움도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빠사나의 지혜는 갈애의 순간적인 소멸을 보장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 대상들은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게 하는데

위빠사나 지혜가 없는 경우에는 결국 갈애와 그에 수반되는 괴로움으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알아차려서 위빠사나 지혜를 개발한 수행자는

모든 현상들의 일어나고 사라짐과 그것들의 무상 고 무아만을 발견합니다.

 

수행자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즉시 일어나고 사라진 것도 발견합니다.

그래서 사실 갈애가 일어날 틈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일어나는 느낌을 기뻐하지도 않고,

또 다른 느낌을 갈망하지도 않기에 모든 갈애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수행자는 또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일어났다가 곧장 사라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일어나는 모든 느낌을 즐거워하지 않고

또 다른 느낌을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모든 갈애에서 벗어납니다.


성스러운 도에 이른 갈애의 소멸은 영원한 것이며,

모든 감각 대상과 관련된 것임에 반하여,

위빠사나에 의한 소멸은 소멸이 영원하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는 면에서 성스런 도의 소멸과는 다릅니다.

 

알아차리는 순간만 그리고 알아차리는 대상에 대해서만 갈애가 소멸됩니다.

그런 이유로 위빠사나에 의한 소멸은 일시적 소멸이라고 합니다.


명상하는 수행자는 봄, 들음 등을 있는 그대로 압니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아는 상태에서는 갈애가 생길 여지가 없으며,

그 결과 집착, 업의 생성, 재생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갈애가 소멸됨으로써 윤회의 바퀴가 부분적으로 단절되며

이를 일시적인 소멸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에 알아차리는 순간 갈애가 소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소멸이지 완전한 소멸은 아닙니다.

이러한 위빠사나 수행의 예비 단계의 도의 과정을 거쳐서 성스러운 도인

열반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만이 비로소 갈애가 소멸되며,

그리고 아라한의 성스런 도과에 이르렀을 때만이 갈애가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도과를 성취하지 못했더라도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일시적인 갈애가 멈추는 현상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시적인 갈애의 중지 현상을 통해서 더 많은 갈애가 소멸되는 기회를 맞을 것이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아라한이 되어 갈애가 완전하게 소멸되는 단계에 점진적으로 이르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청정도론이란 주석서에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아서

갈애를 극복한 스리랑카의 마하띠사 장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장로께서 탁발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숲 속 집중 수행처를 떠나

아누랏다뿌라로 가는 도중에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서 집을 뛰쳐나온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여자는 장로를 보자 욕정이 생겨서 요염하게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그러나 마하띠사는 그 여자를 바라보는 순간 이빨을 주시하였습니다.

마하띠사 장로는 뼈를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 왔기 때문에 여자의 전신이 뼈 무더기로 보였습니다.

 

장로는 이 정신적 표상에 집중에서 선정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정상태에서 해골의 표상을 알아차린 다음에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장로는 계속 길을 가다가 도중에 여자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사내는 장로에게 어떤 여자를 못 봤냐고 물었습니다.

장로는 무언가를 보기는 했는데 그게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장로가 본 것은 도중에 지나쳐간 뼈 무더기가 전부였습니다.

장로가 실제로 본 것은 여자의 이빨이었지만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여자의 몸과 감각 접촉을 뼈의 표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장로의 마음에 여자와의 감각접촉에 대한 욕정이 생길 틈이 없어졌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정의 마음을 토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번뇌에서 벗어나고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의 이빨을 보고

해골의 표상을 떠올렸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의아해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명상을 해보지 않고서는 수행으로 무엇을 이루었는지 분명하게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수련 없이 그냥 집중만으로는 정신적 표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표상은 꾸준하고 장기간에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 것에 달려 있습니다.

 

상상은 인식의 힘입니다.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인식이 강해지는데 그렇게 강해진 인식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어떤 표상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만약 마하띠사 장로가 웃는 여인을 뼈로 인식하지 못했다면,

인적이 없는 숲 속에서 욕정을 일으켜 유혹에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당시에 성욕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여자의 남아 있는 인상은 언젠가 마하 띠사를 유혹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닦은 뼈에 대한 알아차림 덕분에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에서 벗어난 최종 해탈을 얻은 것입니다.

 

여기서 위빠사나를 통한 갈애의 소멸을 부분적 소멸, 일시적 소멸이라고 하고,

아라한과를 통한 갈애의 소멸을 완전한 소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일시적 소멸을 통해서

언젠가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소멸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느낌에서 생긴 갈애가 완전하게 소멸되면 갈애의 모든 산물을 뜻하는 집착도 함께 소멸합니다.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알아차림은 갈애, 집착, 업의 생성 등의 일시적 소멸을 보장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번뇌와 윤회의 고통을 끝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완전한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주목할만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으면 보는 순간마다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

갈애, 집착, 업의 생성, 재생에 이르게 됩니다.


보는 순간 이러한 느낌들이 일어날 때 그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필연코 우리는 갈애를 일으켜서 번뇌를 일으키게 하는 윤회의 연속적인 과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행위를 하면 그 행위가 과보의 굴레를 돌리고,

과보의 굴레가 다시 번뇌의 굴레를 돌리고,

그러한 번뇌가 다시 행위를 하게 하는 업의 굴레를 돌리고,

이렇게 끊임없이 우리는 번뇌가 행위를 하게하고, 행위가 과보를 일으키고,

과보가 다시 번뇌를 일으키는 순환의 사이클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보는 순간에 재생 연결식과 정신과 물질과 육입과 접촉과 느낌이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단순하게 보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사실 본다는 것은 이러한 다섯 가지 조건으로 느낌을 일으키고,

그 느낌은 반드시 갈애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형상과 맞부딪치는 것이 감각 접촉이며, 그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즐거움 혹은 괴로움이 바로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과보가 모두 봄의 모든 순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항상 현재로 와서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감각기관에 알아차림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속마음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만의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신견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현재 마음의 상태를 정확히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지적을 받아도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몰라서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알아도 남에게 밝혀지는 것이 싫어서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있다고 하는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서 이러한 잘못 된 견해들이 생기는데,

이러한 견해가 있는 한 영원히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진리가 좋은 것인지 알면서도 얻기가 어려운 것은 수행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노력을 하는 것인데 나태함이 노력을 가로 막습니다.

적은 노력으로 큰 것을 얻으려는 탐심이 있어서는 진리가 결코 가까이 올 수가 없습니다.


내가 욕망을 가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남이 보기에 추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욕망을 가지고 추하다고 말하는 것은

남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치 기준은 완벽한 것이 아닙니다.

항상 알아차려서 가장 슬기로운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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