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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와 위빠사나/78

通達無我法者 2011. 1. 16. 23:2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을 할 때는 목표가 있어야 하지만,

함에 있어서는 어떤 것도 바람이 없이 해야 합니다.

 

목표는 의지(意志)로, 뜻을 세우는 것이지만,

바라는 것은 욕망으로써 집착을 동반한 것입니다.

 

목표가 없으면 동기가 부여되지 않아 의욕이 없고,

바라면 탐욕이 되어 대상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없다는 것은 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함에 있어서 욕망이 없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바른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바른 행위를 하게 되며,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 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바라지 않고 알아차리면 성품이 보여서 진리를 볼 수가 있지만,

바라면 탐욕이 눈을 가려 진리를 볼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난다’ 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착을 빠알리어로 우빠따나라고 하는데,

강렬하다는 뜻의 ‘우빠’와 움켜쥐다 는 뜻의 ‘아다나’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집착은 강력하게 움켜쥐는 것을 말합니다.

또 다른 뜻으로는 고기가 석쇠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처음부터 집착을 하지는 않습니다.

앞서서 갈애가 일어나는 것이 거듭될수록 다음 단계로 집착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가 좋아서 보고 또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 갈애라면,

다음 단계로 보고 싶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로 발전한 것이 집착입니다.


갈애는 갈애로 그치지 않고 집착을 하게 되며,

다시 집착은 집착으로 그치지 않고 다음 단계로 업을 생성합니다.

그래서 갈애와 집착과 업의 생성은 하나의 발전 단계의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12연기를 크게 나누면 네 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12연기의 부분 1이 과거의 무명과 행이고,

부분 2는 현재로서 재생연결식, 정신과 물질, 6입, 접촉, 느낌입니다.

이것이 12연기의 오온입니다.


그리고 부분 3은 현재와 미래의 원인으로써 갈애와 집착과 업의 생성입니다.

부분 3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윤회를 위해서 업을 생성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분 3이 없다면 윤회가 끝나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해탈의 세계로 갑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갈애와 집착과 업의 생성을 함께 묶어서 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부분 3을 원인으로 부분 4가 있는데 이것이 생과 노사입니다.


그래서 갈애로 시작된 집착은 바로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입니다.

둘째 사견에 대한 집착입니다.

셋째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넷째 자아론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때 자아론은 내가 있다는 자아의 이론에 대한 집착을 말합니다.


이 집착 네 가지 중에서 첫 번째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은 이미 앞서서 밝힌 바 있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와 마찬가지입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면 똑같은 조건으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이 일어납니다.


감각적 욕망이 약하거나 초보 단계의 탐욕을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라고 합니다.

그러나 초보 단계를 거쳐 더 강하게 탐욕이 일어나서 떨어지지 않는 상태가 바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의 상태입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면 감각 대상들은 감각적 쾌락을 벗어나지 못한 모든 중생들의 욕망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집착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부의 경우는 갈애가 일어나면 거의가 집착하도록 조건 지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것이 범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느낌이 일어나면 반드시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가 일어나면 반드시 집착이 일어나고,

집착이 일어나면 반드시 업을 생성해서 미래의 태어남을 만드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연기의 회전이며, 윤회이며, 범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감각 대상들은 형상, 소리, 향기, 맛, 감촉의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형상은 눈의 즐겁고 매력적인 대상입니다.

그것은 원래 아름다움을 지닌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보는 사람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실재하거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간에 즐거운 형상은 남자, 여자, 소비상품 등에서 발견됩니다.

남자를 매혹시키는 것은 여자의 모습이고,  여자를 매혹시키는 것은 남자의 모습입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원하는 것은 옷, 보석, 자동차, 등 여러 가지 것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욕망을 부추기는 것은 단지 형상이나 색깔만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는 외모만이 아니라 몸 전체로서 서로를 끌어당기며,

사람을 탐욕스럽게 하는 소비상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형상이나 색깔이 단지 욕망의 대상을 이끌어 들이거나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마치 동물의 울음소리가 사냥꾼으로 하여금 쫒아가 찾아내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감각적 쾌락의 대상인 소리는 대표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소리, 노래나 음악 그런 것들입니다.

어떤 소리와 목소리는 참으로 감미로운 반면에 어떤 소리와 목소리는 귀에서만 감미로울 뿐입니다.


우리가 소리나 목소리를 들어서 즐거워 할 때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단순한 소리만이 아니고

그 소리를 내는 전체 물건이나 존재가 우리가 집착하는 초점이 됩니다.

단지 소리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 자체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감각적 쾌락의 대상인 냄새는 향기, 분말, 향수와 같은 모든 냄새를 포함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몸에 이러한 향료를 바르고 이 냄새를 즐거워합니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것은 단지 냄새만이 아니라 그 냄새가 나는 몸 전체를 원합니다.


먹거나 마시는 감각적 쾌락은 음식과 음료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좋거나 즐거운 맛은 어쩌면 실제로 그럴 수도 있고, 주관적으로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돼지와 개, 다른 동물들에게는 음식찌꺼기, 오물과 똥이 감각적 쾌락의 원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쓰거나 매운 음식을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을 좋아합니다.

이들의 즐거움은 일반 사람들의 취향과는 다르기 때문에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먹는 즐거움은 음식에만 국한되지 않고,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과 그 음식을 준비하는 남자나 여자에도 집중이 됩니다.

이는 아내의 음식솜씨가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지만,

아내가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즐거움에서 잘 드러납니다.


감각적 쾌락의 또 다른 원천은 몸의 감촉입니다.

부드럽고 푹신한 침대, 편안한 옷, 겨울에 따뜻한 것과 여름에 시원한 것.

이성의 몸, 이 모든 것들이 감촉에 대한 갈애만이 아니라,

생명체나 무생명체에 대한, 몸 전체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는 감촉의 대상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토록 우리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감각적 즐거움의 근원이 되는 것은 유정물과 무정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 은, 보석, 쌀, 가축, 자동차, 집, 땅 등 그런 여러 가지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즐거움의 원천을 얻고자 매일같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을 얻고, 영화를 보거나 기타 음악 감상 등을 하면서,

이러한 더 나은 것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감각적 욕망인 갈애는 대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으로 발전합니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면 새로운 습관을 즐거워합니다만, 그 습관이 커감에 따라 흡연자는 담배에 중독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극도로 좋아하면 그것을 얻지 못할 때 마음이 불안해지고 좌절감에 빠집니다.

이러한 식으로 갈애가 집착으로 발전합니다.


집착은 갈애가 없이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집착의 두 번째는 사견에 대한 집착입니다.

두 번째 집착인 사견에 대한 집착은, 세 번째 집착인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과

네 번째 집착인 자아론에 대한 집착의 범주에 있는 것을 제외한 모든 사견을 포함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견이 있습니다.

세 번째 집착도 사견이고 네 번째 집착도 사견이지만,

두 번째 사견에 대한 집착은 여러 가지의 많은 잘못된 견해에 대한 집착을 말합니다.


사견은 삿된 견해 또는 잘못된 견해를 말합니다.

이러한 사견에 대한 집착은 열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집착은 네 가지 종류가 있고, 다시 사견에 대한 집착은 열 가지가 있습니다.

그 열 가지의 집착을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사견에 대한 집착 중에서 첫 번째 사견은,

보시란 좋은 업을 짓는 행위가 아니고, 단지 돈만 날리는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선행의 가치와 과보를 부정합니다만, 사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보시행은 보시자를 기쁘게 하고, 보시를 받는 자를 물질과 정신적으로 이롭게 하고,

심지어는 굶주린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보시자는 평판이 좋고 큰 존경을 받습니다.

그래서 죽어서는 천인계에 태어납니다.


이렇게 죽은 뒤에 받는 보상을 회의론자들에게 납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업의 세속적 과보는 신통력을 가진 아라한과 다른 성자들은 생생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신통력의 하나는 천안(天眼)입니다.

이러한 천안으로 보시자가 천인계에 살고 있는 것과 악행을 일삼은 비보시자는 악처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한 광경은 신통력을 얻지는 못했지만 깊은 집중력을 얻은 일부 수행자들에게도 보일 수가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광경을 상상의 산물이라고 치부해 버리겠지만,

저 세상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를 수긍하는 것은 이야기의 신빙성에 더 무게를 싣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사견도 또한 큰 규모의 보시가 가져오는 업의 이익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견은 새해를 맞이하여 손님을 대접하고 선물을 주는 등의 행위가 가져오는 업의 이익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견은 본질에 있어서 첫 번째 사견과 같습니다.

이는 당시 외도들이 무익하다고 치부해 버린 고대 인도에서 성행하던 작은 보시행을 가리킵니다.


네 번째 사견은 도덕적인 선행이나 악행이 가져오는 업보를 부정하는 견해입니다.


사람이 현생에서 짓는 행위에 대해서 받는 업보와, 다른 세속적인 과보에 대한 증거가 많이 있으며,

신통력으로 그것을 입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각적 쾌락을 너무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욕망에 그냥 내 맡겨두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물질적 향상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되는 도덕적 가치와 그 이상에 대해서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업의 법칙을 부정하는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많은 논리를 제시합니다.

최종적인 분석의 결과는 그들이 감각적 쾌락을 지나치게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오늘은 사견에 대한 집착 중에서 네 번째까지 말씀드렸고

다음 시간에는 다섯 번째 사견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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