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11

通達無我法者 2011. 2. 18. 22:0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을 할 때 수행을 하는 있는 자가 있는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수행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과 몸이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라는 관념이 생기면 대상의 성품을 볼 수가 없으며,

수행자라고 하는 새로운 상이 생겨 아만심에 빠집니다.


수행은 두 가지가 있는데 자아의 유무로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있다는 자아를 강화하는 수행은 깨달음과는 무관하며

내가 없음을 아는 수행을 할 때만이 해탈에 이룹니다.


자아를 강화하면 성취욕을 충족시켜서 자신감을 갖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가 없는 것을 알게 되면 집착이 끊어져서 도과를 성취할 것입니다.

두 가지 중 하나의 선택은 수행자의 조건에 따라서 결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를 강화하는 수행을 잘못하면,

나는 수행자라고 하는 유신견이 생겨서

우월감을 갖거나 편협해질 수 있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자아가 있으면 결코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정신적인 깨달음은 있지만 사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깨달음은 있지만 깨달은 자가 없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바로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 12장,

역관으로 본 연기법에 대해서 공부를 하시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연기는 역관과 순관이 있습니다.

이것을 24연기라고 합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처음에 발견하신 연기는 역관이셨습니다.

먼저 죽음에 대해 숙고하셨고 죽음은 태어남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태어남이라고 하는 생은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서 끝에 무명이라는 것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명 이후에는 더 거슬러 올라갈 것이 없어서

다시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는 순관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역관과 순관을 오르락내리락 하시면서 인류 역사에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잠시 부처가 되기 전의 보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보살을 빠알리어로 보디삿타라고 합니다.

보디는 깨달음을 의미하고,

삿타는 구하는 자, 매달리는 자, 헌신하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자라는 뜻으로 구도자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깨달음은 최고의 깨달음을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보살은 부처가 되기 위해 헌신하는 구도자를 이릅니다.


역대의 모든 붓다는 무수한 세월동안 보살로서 바라밀 공덕을 쌓은 결과로 부처가 됩니다.

그래서 상좌 불교에서는 보살을 뜻하는 보디삿타는 부처님의 전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운 구도자일 뿐이지,

어떤 초월적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부처가 되기 위한 이러한 보살에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성적인 보살입니다.

외적 대상에 대해서 숭배를 하지 않고,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보살입니다.

둘째는 헌신적인 보살입니다.

믿음과 신앙심이 깊은 보살로서 지나친 믿음은 맹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활동적인 보살입니다.

언제나 남을 위해 활동적으로 봉사합니다.

명예나 평판을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고 봉사하는 정신으로 열심히 남을 돕습니다.


이상 세 가지 유형의 보살이 결국 바라밀 공덕을 쌓은 과보로 부처가 되십니다.

다시 본문으로 가 보겠습니다.


위빠시 붓다가 되기 전의 보살께서는 끝이 없이 지속되는 윤회의 사슬을 보고,

인류가 겪는 끊임없는 생로병사의 윤회의 과정을 연결하는

고리를 부술 수 있는 꿰뚫는 지혜를 얻기를 고대하셨습니다.


그 분은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생과 노사가 계속해서 일어나는지를

체계적으로 숙고하셨습니다.

순서를 거슬러 올라가는 숙고를 거쳐 명상은 조금씩 더욱 더 깊어져 갔으며,

결국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 되는 범인이 바로 무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셨습니다.


보살께서는 여러 번에 걸쳐 생과 노사로부터 시작하는 역순으로 연기를 알아차리셨습니다.

다시 무명으로부터 시작하는 일반적 순서로 순관을 알아차리셨습니다.


마침내 위빠시 보살은 모든 번뇌를 부수고

번뇌의 흐름을 뿌리 뽑을 수 있는 꿰뚫는 지혜의 빛을 밝혀,

연기의 연결고리를 끊고 결국 궁극의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위빠시 보살과 마찬가지로 고따마 붓따께서도 깨달음을 얻기 전, 보살이었을 때

생과 노사로부터 일어나는 인류의 끝없는 고통에 대해서 염려하셨습니다.

그분 역시 인류가 겪는 고통인 생로병사의 과정이 끝없이 계속되는 근본 원인에 대해

깊이 명상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고따마 붓따께서도 마침내 꿰뚫는 지혜를 얻어

연기의 전 과정을 밝히고 모든 번뇌의 흐름과 잠재적인 성향과 그리고 속박을 종식시켜

마침내 최고의 지위인 부처의 반열에 오르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말씀드린 꿰뚫는 지혜는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연기의 전 과정을 밝혔다는 것은

12연기의 역관과 12연기의 순관인 24연기를 모두 밝힌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번뇌의 흐름이란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번뇌가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유류(有漏)라고 하며 바가지에서 물이 새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또는 윤회가 계속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잠재적 성향이란 과보로 인해서 생긴 축적된 성향을 말합니다.

축적된 성향이란 의식의 가장 깊은 층에 있는 미세한 번뇌를 일컫습니다.

이 미세한 번뇌는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 지혜로서만이 소멸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속박을 종식시켜서 최고의 지위인 부처의 반열에 올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속박이란 무엇일까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벗어나야 하는 이 속박은 열 가지의 족쇄를 말합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결(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속박이란, 생명을 존재의 세계에 붙들어 매는 번뇌를 말합니다.


열 가지 속박 중에서 처음 다섯 가지를 오하분결(五下分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생명을 욕계에 붙들어 매는 번뇌입니다.

첫째 유신견,

둘째 회의적 의심,

셋째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

넷째 감각적 욕망,

다섯째 악한 의도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생명을 낮은 존재의 세계에 붙들어 매는 번뇌라서 속박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고양되지 못하고 낮은 세계에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바로 이상 말씀드린 다섯 가지의 속박입니다.


그리고 오상분결(五上分結)이라고 해서

존재를 색계와 무색계에 붙들어 매는 번뇌가 있습니다.

여기서 족쇄의 여섯 번째는 색계에 대한 욕망,

그리고 일곱째는 무색계에 대한 욕망

여덟 번째는 아만,

아홉 번째는 들뜸,

열 번째는 어리석음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 번뇌가 오상분결(五上分結)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계속하면 이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족쇄는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도과를 성취해야 소멸됩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의 번뇌가 소멸됩니다.

사다함이 되면 첫 번째부터 세 번째의 번뇌가 소멸되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번뇌가 약해집니다.

아나함이 되면 첫 번째부터 다섯 번째 번뇌가 소멸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라한이 되면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모든 번뇌가 소멸되는 것입니다.


아라한이 되면 이처럼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다시 태어나는 원인을 일으키지 않아 윤회가 끝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도 번뇌가 소멸되지 않는다면

아직 아라한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고 당장 모든 번뇌가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번뇌는 수행의 정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소멸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수행을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 출현하신 고따마 부처님께서도

다른 부처님들과 똑같이 수행을 하시고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 수행자들도 부처님께서 가신 길을 똑같이 걸어가기 위해서

지금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 지혜로 역관과 순관의 24연기를 밝히고,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란 번뇌의 흐름과 과보로 인한 축적된 성향과

지금까지 말씀드린 열 가지 속박의 족쇄를 부수는 길입니다.


이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신분이나 능력의 구별이 없습니다.

단지 이것을 원하고 이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만 있습니다.


이렇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자명하게 밝혀져 있으므로

더 이상 방황하지 마시고 이 길로 오시기 바랍니다.


역대의 부처님들께서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월동안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우고, 바라밀 공덕을 쌓은 결과로 부처가 되셨습니다.


이렇게 노력을 하셔서 부처가 되신 뒤에

“내가 깨달은 이 법은 너무 심오하다.

이 법은 이해하기 어려우며, 매우 고귀한 내적 평화를 안겨 준다.

이 법은 지성과 논리로 접근할 수 없다.

이 법은 미묘한 것으로 오직 현자(賢者)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따마 부처님께서도 늙은이, 병든 사람, 시체, 사문을 만나서

죽음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사문의 평화로움을 얻고자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산다는 것도 나고 죽는 윤회의 연속이며,

이 윤회 속에서 온갖 종류의 삶의 형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붓다께서 세상에 출현하시던 그렇지 않던 간에

의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항상 존재합니다.

하지만 오로지 붓다께서 출현하신 시대에만 생과 노사는 이러저러하며,

또한 업의 생성과 집착과 갈애, 느낌, 접촉 등은 이러저러하다는

설명과 가르침을 듣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연기는 붓다에 의해서 밝혀지고

연기의 바탕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연기법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존재하므로 저것이 존재하며

이것의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 또한 사라진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명이 존재하므로 오온이 존재하며

무명이 사라지면 오온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시작은 자신의 오온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래서 오온을 떠난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자신의 오온을 대상으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자, 잠시 12연기의 도표를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12연기 도표 부분 4에서 생과 노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노사는 원인 없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태어남을 원인으로 노사가 일어납니다.

태어남은 몹시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이 때 혐오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늙음과 질병 그리고 죽음은 태어난 날부터 우리의 등 뒤에서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년, 매달, 그리고 매일 늙어가고 있습니다.

늙음이란 활력과 젊은 외모, 젊은 기질을 잃고, 흰머리와 난청, 노안,

기억의 상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이빨이 없어져 딱딱한 음식을 씹기가 힘들어지고,

누구의 도움 없이 걸을 수가 없는 것이 늙음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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