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13

通達無我法者 2011. 2. 20. 20:5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괴로움을 단 한 번에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한 번에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탐욕이 충족되지 않아서 또 화를 내게 됩니다.

탐욕을 가지고 있는 한 괴로움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한 번에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았다면

그것은 사교(邪敎)이거나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해도 일시적인 것입니다.

괴로움은 오직 지혜로서만이 완전히 소멸시킬 수가 있습니다.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큰 힘을 가졌기 때문에

누구도 이것에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없앨 수 없는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그것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이 괴로움이네!’ 라고 알아차려서 그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도표를 살펴보시겠습니다.


우리의 태어남이란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의 생명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남이 괴로움이라고 생각한다면 수행자는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만드는 크고 작은 일중에서 가장 큰 일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는 ‘태어남은 고통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든 천인이든 범천이든 누구나 태어남은 고통이며 괴로움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많은 태어남을 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적들의 먹이가 되며, 생존경쟁이 시작되고, 병이 기다리고,

그리고 죽음이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몰라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연기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우리들 대부분은 일상적인 오류를 범해서

소위 우주의 지배자가 된다거나, 천계의 왕이라는 피상적이고 헛된 명예와 매력에 속고 맙니다.


또한 무지한 범부인 우리들은 보시를 할 때마다 계속해서

천인이나 범천의 왕이 누리는 명예라는 헛된 것을 갈망하고 기원합니다.


사실 제석천왕도 천상에서 죽은 뒤에 다음에 어디에 태어날지를 알 수가 없어서 불안해합니다.

이처럼 연기에 따르자면 이들 천상의 존재들 또한 괴로움의 진리에 묶여 있으며 감금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비록 천상에 태어났지만 언젠가는 사악도와 인간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감옥과 같은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든 천인이든 범천이든 그들은 감옥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도과를 성취하는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과를 성취하기 이전에는

우리는 영원히 태어나고 죽는 윤회의 감옥 속에서 갇혀 살아야 합니다.

천인이 되는 혜택을 바라는 자는 자신이 갇히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사람이나 천인이나 범천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명예라는 것은

위조된 가공의 매력이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태어남이라고 할지라도 태어남을 기원하는 자는

천길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높다란 절벽에 서 있기를 기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최고의 지위를 얻고 최고의 부를 얻었다고 한들 죽음이 그를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죽음 이후의 생명은 누구도 모릅니다.


이처럼 태어남은 재생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재생이 바로 환생이 아니라는 것과

태어남은 자신이 행한 업의 과보를 받아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어머니의 자궁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대변과 소변사이의 극히 좁고 답답한 곳에서 보낸 9개월간의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기억력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주의 제왕, 천계의 왕으로 태어난다 하여도 그 시작점은 반드시 태어남입니다.

이처럼 모든 새로운 태어남을 기원하는 것은 괴로움을 얻기를 기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방법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윤회를 끝내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보시 공덕이 되는 행위를 할 때는

첫째로 오온이라는 짐을 몹시 혐오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둘째로는 생과 노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연기의 윤회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해야 한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모든 잘못된 것 가운데 가장 큰 잘못은

낡은 오온을 버리고 새로운 오온을 얻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괴로움을 해결하려고 하는 일이 모두 괴로움을 다시 만드는 일만 골라서 합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갈애는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들이며,

이런 괴로움으로 인해 태어나는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해결하는 가장 유일한 길은

새로운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괴로움이 있네!’ 라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새로운 오온은 새로운 태어남을 얻는 것을 뜻하고

태어남을 얻는 것은 바로 괴로움을 얻는 것입니다.


어떠한 오온이든지간에 그것을 바란다는 것은 늙음과 질병 그리고 죽음을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태어남이든지 간에 반드시 늙음과 죽음에 직면해야만 합니다.

어떤 이는 더 나아가 우주의 제왕, 천계의 왕으로서의 높은 지위를 누리기를 계속 기원합니다.

그것은 늙음과 질병, 죽음의 고통이 지속되기를 계속해서 기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에 무지하고 익숙지 못한 자들이 따라가는 길입니다.

연기의 길은 어리석은 자가 가는 길이고, 연기를 끝내는 길은 지혜가 있는 자가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태어남이 저절로 우연히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는 근본원인이 있는지를 질문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태어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업의 생성이라는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늙어서 죽는 이런 과정에서 볼 때, 늙어서 죽는 괴로움은 태어남 때문인데

사실은 태어남을 일으키는 업의 생성이 더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아야하겠습니다.


근본 원인이 되는 업의 생성은 도표의 부분 3의 현재의 원인으로, 

이것은 부분 4의 미래의 결과로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업의 생성은 태어남보다 더욱 더 두려운 대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업의 생성은 괴로움의 시작인 새로운 존재의 태어나는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업의 생성은 연기의 고리를 연결시키는 매개체로서 신, 구, 의 3업,

혹은 공덕행, 공덕이 없는 행, 부동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이제야 알았습니다. 태어남이 괴로운 것이라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 태어남을 조정하는 것이 바로 업의 생성입니다.

그래서 태어나지 않으려면 과연 어떤 업을 생성시키느냐 하는 것으로 태어남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연기에 따르면 과거에 행해진 행위는 업의 형성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부분 1의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난다고 할 때의 행입니다.

이때 이 행이라는 업은 과거에 형성된 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현재 새로 일으킨 업, 새로 일으킨 행위는 업의 생성이라고 불립니다.

이 둘의 단어는 다르지만 뜻은 동일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시점에서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루 동안 즉, 해가 뜰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얼마만큼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업을 짓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은

이런 업으로 인해서 다시 태어나는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존재로 이끄는 모든 행위는 업의 생성이다.”


그렇습니다. 결국 업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지,

여기서 자아가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기 안에 자아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원인이 결과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생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선한 일이든 불선한 일이든 간에

다음 생에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즉 우리는 미래라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업의 생성이 스스로 일어난 것인지,

혹은 거기에도 어떤 원인이 있는 것인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생성이 일어납니다.

집착, 또는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서 업의 생성, 즉 생각과 말과 행위의 업이 일어납니다.


12연기법과 빠띠삼비다마까에 의하면 집착과 업의 생성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진리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빠띠삼비다마까는 짧은 경문의 모음집으로 분석적 통찰이라는 경전을 말합니다.


자!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집착의 원인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집착의 범인인 갈애가 나옵니다.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납니다.

갈애가 강해지면 집착의 형태가 됩니다.

갈애가 집착의 원인이기 때문에 갈애는 집착보다 더 두렵고 위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늙어서 죽는 것이 고통인데,

그것을 일으키는 것은 태어남이고,

태어남은 늙음과 죽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태어남이 바로 업의 생성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것은 업의 생성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업을 생성시키는 것이 바로 집착이었습니다.


이 집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착의 원인을 살펴보니까

그것이 바로 갈애라는 원인으로 집착이라는 결과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또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늙어서 죽는 것은 갈애로 인한 것입니다.

그 갈애가 집착을 하게하고 집착이 업의 생성을 일으키고

업의 생성이 태어나게 하고, 태어났으니까 결국은 늙어서 죽어야 하는

이 비탄한 슬픈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해가 뜰 때부터 한 밤중이 될 때까지, 하루 온 종일 동서남북 이곳저곳,

이 도시 저 도시, 이 나라 저 나라, 이 대륙과 저 대륙 간을

자동차 비행기 등 온갖 종류의 탈 것을 이용해서 오고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여행과 여정들은 갈애로 인해 또는 갈애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입니다.


갈애의 노예가 된 인간은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요구를 하게 되며

거래를 위해서 여기저기로 이끌려 다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갈애로 인해 집착이 유발되기만 하면

한 밤중이든, 빗속이든, 폭풍우 속이든 가리지 않고

강도가 들끓는 지역이나 전쟁터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갈애의 노예들은 어떤 위험도 가리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달려갑니다.

노예가 그 주인인 갈애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갈애는 너무도 강력하고 영향력이 크며 충동적이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아기라도 작은 몸을 굴려서 장난감을 집어 들게 하며

나이 든 어른까지도 지배하여 굴복시킵니다.

아이들이 울음으로 어른을 굴복시키는 것도 모두 갈애에 속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현재 자기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 보기를 바랍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갈애는 스스로 일어나는지,

아니면 어떤 원인으로 일어나는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느낌이 갈애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느낌은 더욱 불쾌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비로소 갈애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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