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38

通達無我法者 2011. 3. 8. 23:5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호흡은 깨달음을 얻은 모든 성자들의 수행의 대상입니다.

붓다, 벽지불, 아라한들께서도 모두 호흡을 알아차리셨습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성자들과 번뇌를 해결하고자하는 많은 수행자들이

모두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합니다.


호흡은 한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일어나서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소멸하는데, 생명은 호흡과 호흡사이에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인데,

몸에서 가장 두드러진 대상이 호흡이라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도 호흡을 알아차리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호흡은 중요한 대상입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면 마음이 밖으로 나가서 탐욕과 성냄을 일으키지 않아

마음을 정화하는데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계율을 지키게 되는 것이며,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 통찰지혜를 얻습니다.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지 않게 하여 정화하는 효과를 얻고자 하는 호흡이

나중에는 법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모든 호흡은 저마다의 모양과 성품이 달라서 같은 호흡이 없는데,

길고 짧음, 강하고 약함, 단단함과 부드러움, 뜨거움과 차가움 등이 있습니다.


호흡을 계속 알아차리면 한 번 일어난 호흡은 다음에 일어난 호흡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어 무상의 성품을 봅니다.

호흡이 변하는 무상을 알면 자연스럽게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서

괴로움의 성품을 아는 지혜가 납니다.

그리고 호흡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되어 마지막에는 무아의 성품을 압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지혜가 나게 되면

갈애와 집착이 끊어지고 업을 생성하지 않아 열반에 이릅니다.


호흡이 초기수행에서는 단순하게 집중력을 얻고자 하는 대상이었지만

나중에는 해탈을 얻는 중요한 법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제 20장 청정에 대한 문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알아차림은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두 가지는 두는 알아차림과 있는 알아차림입니다.


처음에 수행을 시작하면 계속해서 알아차려야합니다.

이것이 두는 알아차림입니다.

두는 알아차림을 계속하면 집중하는 힘이 생기고,

이러한 힘이 생기면 나중에 지혜가 납니다.

그러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아차리는 힘이 생깁니다.

이것이 있는 알아차림입니다.


두는 알아차림은 노력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있는 알아차림은 지혜와 함께 있습니다.


처음에 두는 알아차림을 하려면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알아차림의 힘이 있는 알아차림으로 바뀝니다.

있는 알아차림이 되면 앞에서 믿음과 지혜가 알아차림을 이끕니다.


있는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믿음과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과 지혜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룹니다.

이것이 최적의 수행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있는 알아차림이 되면 법이 앞에서 수행을 이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아라한이 되었다고 해서 알아차림을 졸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있는 알아차림이 생활이 되어서 항상 알아차림 속에서 삽니다.

수다원에서 사다함이 되면 일상의 알아차림이 더 강해지며,

사다함에서 아나함이 되면 일상의 알아차림이 더 밀밀해집니다.

그러다 아라한이 되면 항상 알아차림 속에서 삽니다.


그러면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무인작용심(無因作用心)으로 삽니다.

아라한은 있는 알아차림으로 새로운 원인을 만들지 않습니다.


수행자여러분!

여기에는 바른 마음가짐이란 바른 지혜에 대한 바른 태도입니다.

즉 이치에 맞게 숙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물질은 물질이 뿐, 나 혹은 내 것이 아니고,

느낌은 느낌일 뿐이지, 나 혹은 내 것이 아니며,

지각과 형성 작용 또한 지각과 형성 작용일 뿐이지, 나 혹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바른 마음가짐이란 실재하는 법을 통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른 마음가짐이란 이치에 맞게 숙고하는 여리작의(如理作意)를 말하는데.

오온은 단지 조건 지어진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만 있다는 것이지,

이것이 나라고 하거나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사실 실재하는 법은 무상이고, 무상을 보는 마음가짐이 바로 바른 마음가짐입니다.

아라한 꼬티까 장로는 그 자신이 아라한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비구들의 이익을 위해서 사리뿌따 장로께 이러한 질문을 드렸던 것입니다.


수행자여러분!

부처님의 법문은 일방통행이 아니고 항상 쌍방 통행이셨습니다.

‘이것이 진리니까 꼭 이렇게 들어야한다’가 아닙니다.

수행자들이 궁금해서 듣기를 간청했을 때 법문을 하십니다.

이것이 교육의 중요한 기본자세입니다.


만약 꼭 알려주어야 할 법이 있으면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가?’ 하고 물으신 뒤에

비구들이 스스로 질문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꼭 이것만이 옳다고 주장하시기보다 이런 방법이 있고 또는 저런 방법이 있으니

스스로 선택하도록 항상 선택의 기회를 주시는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이 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제가 수행을 하고 있는 한국명상원에서 이따금씩 수행자들이 저에게 감사를 예를 표합니다.

그러나 저 역시도 제가 법을 준 것이 아니고, 수행자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라고 늘 말해 줍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 있어도 사람들은 구하지 않거나,

좋다고 알아도 법을 지속적으로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법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맞습니다.

또한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실 법이란 매우 어려운 것이라서 원해도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가끔씩 침묵을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수행자들의 물음에 왜 침묵을 하시는가를 물었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지금 그에게 어떤 얘기를 해줘도 그가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

그래서 침묵하는 것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는 유일한 길임을 말씀 하셨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질문자이신 꼬띠까 장로께서도 아라한이십니다.

사리뿌따의 지혜만큼 아니더라도 번뇌를 해결하신 분으로서의 지혜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리뿌따 장로에게 질문을 한 것은

여러 수행자들에게 직접 법을 드러내 보이려고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몰라서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니고 모두 아시지만,

법문을 하기 위해서 상대에게 가끔씩 질문을 하십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애와 지혜이십니다.


수행자 여러분!

바른 마음가짐을 지니지 않고서는 수행자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가 불가능합니다.

유신견을 가지고서는 대상의 성품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바른 마음가짐과 함께 계(戒)가 필요합니다.

계(戒)는 수행자를 청정하게 하고, 마음집중에 도움이 되는 5계 내지 8계의 도덕적 규범을 말합니다.

 

계와 바른 마음가짐은 초보 수행자가 수행을 하기 전에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이것들이 갖춰진 이후에 비로소 일어남과 사라짐의 성품을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계와 바른 마음가짐은 바른 알아차림에 의해서만이 가능 합니다.

정확한 알아차림은 탐진치가 없기 때문에 계율을 지켜 고요한 마음을 갖습니다.


느낌은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에게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와서 보라’고 요청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에게

마음이 사라지는 것을 ‘와서 보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에히 빠시꼬(Ehi passiko) 라고 해서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이 ‘와서보라’는 것은 또한 ‘스스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상의 요청은 수행자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것으로써

이에 대해 반드시 지혜와 알아차림으로 대해야만 합니다.


수행자가 이 부름에 응할 때는 반드시 갈애나 성냄이 없어야 합니다.

만일 즐거운 느낌에 대해 갈애를 가지고 반응하거나

괴로운 느낌에 대해 성냄이나 불쾌함을 가지고 반응한다면

연기의 과정은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될 것입니다.


알아차릴 대상은 법이 나타난 것입니다. 

모든 대상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이 있는 것을 ‘와서 보라’고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상을 없애려고 하거나 더 좋은 대상을 바라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지혜를 얻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대상이 ‘와서 보라’고 하는 것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3년 혹은 4년 동안 진리[法]를 구해 왔다고 하지만

올바른 기준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법이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법은 언제나 와서 보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인 오온은 항상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것은 마치 보트 안에서 노를 젓는 사람이 물을 찾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일어남과 사라짐이 있고,

일어남과 사라짐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있습니다.

괴로움을 알면 무상을 알게 되고, 괴로움의 진리인 통찰 지혜가 따라오게 됩니다.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지 못하는 타고난 무지로 인해서

수행자는 무상을 영원한 것으로, 괴로움을 행복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지 못했거나, 

훌륭한 스승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스승은 주로 사성제와 연기법을 결합하여, 연기의 회전이 어떻게 시작되며,

연기의 수레바퀴를 어떻게 부술 수 있는지를 가르칩니다.


수행자 여러분! 있는 법은 ‘와서 보라’고 나타났지만

지금까지 볼 수 없는 것은 보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 방법이 바로 대상을 분리해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입니다.

분리해서 본다는 것은 보이는 대상이 있고, 그것을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괴로울 때도 괴로움의 원인이 있어 생긴 결과이므로, 

괴로움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지켜봐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괴로움이 있네!’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분리해서 보는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괴로움과 함께 어울려 싸웁니다.

없애려고 싸우고, 벗어나려고 싸우고, 오히려 괴로움을 키우려고 싸웁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고 이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몰랐습니다.

부처님도 우리와 똑같은 괴로움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바라밀 공덕의 과보로 연기를 발견하신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찾아내시어 괴로움에서 벗어나셨습니다.

바로 이 방법이 ‘그렇네!’ 하고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이것이 좋은지 알아도 실천 수행을 하지 않으면, 단지 생각에 머물고 지식에 그칩니다.

지식은 때로는 가증스러울 수도 있고, 교묘히 위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지혜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마음만 먹으면 위빠사나 수행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직은 초기 단계이지만 지금 전국 곳곳에 위빠사나 수행처가 있으니

어디고 가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저는 수행을 하기 위해서 미얀마에 갔지만,

수행을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미얀마에 간 것 입니다.

그런데 이제 한국에서도 수행을 배우고 우리말로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수행자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입니다.

저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 수행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호기심이 있으신가요?

한 번 찾아서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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