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40

通達無我法者 2011. 3. 10. 22:47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 경행, 일상의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그중에 경행을 할 때는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과 움직이는 몸과

그리고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과정으로 계속됩니다.


몸이 움직이는 것을 대상으로 마음이 알아차리면,

차츰 몸과 마음을 구별해서 보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에 의해 몸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리면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발에 집중이 되면 번뇌가 들어오지 못하여

계율을 지키게 되고 고요함과 지혜가 생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하는 것을 알아차리므로

길을 걸을 때는 걷고 있는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거나

움직이려고 하는 의도를 집중적으로 알아차리거나

때로는 몸 전체나 거친 호흡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대상은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만 알아차려야 하며

처음부터 지나치게 집중을 하려고 하면 장애가 생깁니다.


이때 대상을 중요하지 않고,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어느 대상이거나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걷는 속도는 좌선을 하다 걸을 때는 약간 빠르게 한 뒤에 정상적인 속도로 걷되,

지나치게 천천히 걸으면 장애가 생길 수 도 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서있을 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살펴본 뒤에

발바닥이 닿아있는 무거움을 알면 됩니다.


서 있다가 돌 때는 발을 계속 움직여서 도는 것을 알아차리거나,

때로는 어깨가 크게 회전하면서 도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계단을 오르거나 등산을 할 때는 몸 전체를 알아차릴 수도 있고

또는 호흡이 거칠 때는 호흡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걷다가 망상이 생기면 다시 한 번 마음을 모아서 대상을 겨냥하고

그래도 망상이 계속되면 잠시 서서 망상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차츰 집중력이 생기면 마음이 몸에 가서 알아차리지 않고

전면에서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시간에 이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감각기관이 감각 대상과 접촉할 때는 언제 어디서나 느낌이 일어납니다.


눈과 눈으로 보는 대상이 만날 때면 언제나 눈과 접촉하여 일어난 느낌이 생깁니다.

귀가 소리와 접촉할 때는 언제나 귀와 소리가 접촉하여 일어난 느낌이 일어납니다.


같은 방식으로 대상이 코, 혀, 몸, 또는 마음에 접촉하면 각각의 느낌들

즉 코와 접촉하여 일어난 느낌, 혀와 접촉하여 일어난 느낌,

몸과 접촉하여 일어난 느낌, 마음과 접촉하여 일어난 느낌이 일어납니다.


거기에다 때때로 좋아하는 대상, 싫어하는 대상, 중립적인 대상에 따라서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덤덤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열반을 실현할 수 있도록 수행자들을 이끌어줍니다.

누구나 통증이 느낌이라는 것을 압니다.

보통 우리는 쑤심, 통증, 아픔 등을 느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느낌은 그 이상의 것들입니다.


통증을 관념입니다.

통증의 실재하는 것은 찌름, 당김, 화끈거림입니다.

우리가 느낌을 찾을 때는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느낌과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초보수행자에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보다는 더 많이 알아야 합니다.


느낌에 대해서 알아차릴 때 여전히 느낌을 찾는다면 이것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수행자가 존재하는 어떤 느낌을 찾는다면 항상하는 느낌

즉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느낌을 찾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느낌은 무상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느낌은 항상하거나 지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오온과 마찬가지로 연속적인 두 순간에

동일한 모습으로 지속될 수 가 없습니다.

느낌은 일어나자마자 즉시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무상이라는 통찰력을 가지고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합니다.


느낌은 하나 내지 두 순간에 존재합니다. 즉 일어나고 다음순간에 사라집니다.

느낌이 하나 내지 두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은

마음이 한순간에 하나 내지 두 가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뜻과 같습니다.


마음이 한 순간에 하나밖에 존재할 수 없지만, 모든 것에는 일어남과 사라짐이 있기 때문에

두 순간을 하나의 완성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것처럼 느낌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낌에서도 일어남과 사라짐이 있기 때문에 하나 내지는 두 순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일어나면 사라지는 것이 하나의 사이클입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마치 가려운 느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참을 수 없지만 점차적으로 강도가 약해져서

결국 가려운 느낌을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러나 많은 수행자들이 이러한 느낌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느낌에 대해서 인내하지 못합니다.  


수행자여러분!

우리의 행복 불행, 즐겁거나 괴롭다는 것, 아프다는 것이 모두 느낌입니다.

이러한 느낌은 일어나는 느낌과 사라지는 느낌의 실재만 있습니다.

이것이 법으로 본 느낌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느낌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행복은 일어나는 순간에 사라지고

불행도 일어나는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것을 느낌으로 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하는 현상일 뿐인데,

우리는 느낌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항상하고 영원하다고 생각해서

괴로움에 빠집니다.


달리 말하자면 처음에는 가려움의 강도가 극치였고,

그다음에는 중간 강도로 떨어졌다가, 다시 최소의 강도로 떨어지고

결국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아픔, 쑤심 등도

처음에는 아주 강하게 나타났다가 점차 약해지면서 사라집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느낌의 변화를 보지 못하면 한 느낌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그러한 연속적인 느낌 안에는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합니다.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과 달리 고통이나 아픔이 길게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느낌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자기 자신에게 강요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대신에 통찰력을 가지고 일어남과 사라짐,

즉 법이 언제나 보여주고 있는 무상을 확실히 알아차려야 되겠습니다.


느낌은 무상의 법을 보기에 가장 좋은 수행입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대상에 집중해서 지혜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수행자가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 항상 연기법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만일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수행자가 그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에 따른 갈애가 따라올 것입니다.

갈애가 일어나면 집착이 따라오고, 다시 업의 생성이 잇달아 일어나

결국은 그 결과로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리하여 연기의 모든 고리가 연결되어 끝없는 회전을 계속합니다.

그것이 바로 연기의 순환이 중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수행자여러분! 도표 부분 2의 끝이 느낌인데,

이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부분 3에 첫 번째인 갈애로 연결되어

연기의 순환이 중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수행자가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에 따른 갈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만일 갈애가 없으면 집착 또한 일어나지 않으며

집착이 없으면 업의 생성 또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 또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연기의 사슬은 중간에서 끊어집니다.


우리가 항상 좋아하는 것이 문제인 것은, 좋아해서 갈애가 생기기 때문에

연기가 중간에서부터 회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약 괴로운 느낌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불안 등이 피할 수 없이 따라오고

그렇게 연기의 전체과정이 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연기가 끝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알아차림에 의해서

끝에서부터 끊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괴로운 느낌이 있을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끊어지지 않고 노사까지 윤회하여 끝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노사로 인해 다음 생을 받게 되므로 연기가 끝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알아차려서 집착을 끊고 도과를 성취하게 되면

연기가 끝에서부터 끊어집니다.


같은 방법으로 덤덤한 느낌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피할 수 없는 무명이 따릅니다.

이것이 연기가 처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연기가 처음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지혜에 의해 시작부터 끊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덤덤한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무지의 느낌이라고 합니다.


이때 덤덤한 느낌을 빨리어로는 우뻭카 웨다나 라고 합니다.

우뻭카 라는 말은 평정, 사(捨), 무관심이라는 뜻이 있고, 웨다나는 느낌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뻭카 웨다나라고 할 때는 무관심한 느낌 또는 무지의 느낌을 말합니다.


연기의 시작은 무명이고, 덤덤한 느낌이 알아차림이 없는 무지의 느낌일 때,

만약 알아차림이 있다면 지혜의 느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연기가 지혜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이면 연기가 처음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무명이 지혜로 바뀌면 연기가 시작에서부터 끊어져

업을 형성하는 행으로 흐르지 않게 됩니다.


무명은 모르는 것으로 무관심입니다.

모르면 연기가 처음부터 시작됩니다.

수행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바르게 아는 것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순간부터 무명이 지혜로 바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종류의 느낌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데 실패하면

연기가 처음과 중간, 끝에서부터 돌아가는 원인이 됩니다.


만약 세 가지 종류의 느낌을 분명히 알아차렸다면

연기의 사슬을 이루는 고리들이 시작과 중간과 끝에서 끊어집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즐거운 느낌에 이어 갈애가 따라오면

결코 열반을 실현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괴로운 느낌에 이어 성냄, 슬픔이 따라와도

결코 열반을 실현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덤덤한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무명이 일어나고 결국 연기가 시작부터 돌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만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번뇌가 일어나면 무명이 일어납니다.

번뇌가 소멸함으로써 무명이 소멸합니다.

이것은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자에게는 무명이 지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연기는 시작에서부터 끊어집니다.


연기는 세 가지 종류의 느낌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마다

일어났다가 언제 어디서나 세 가지의 위치에서 끊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연기는 중간과 끝 시작부터 또 새롭게 시작할 것입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덤덤한 느낌은 번갈아가면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이러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무명이 일어나서 행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고,

이렇게 연기는 전 과정을 따라오게 됩니다.

즉 식은 행을 원인으로 일어납니다.


여기서 식(識)은 재생연결식으로서 일반적으로 사악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손톱위에 있는 흙에 양만큼 적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태어나고

이 우주의 흙의 양만큼 많은 사람들이 사악도에 떨어진다고 비유를 하셨습니다.


수행자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의 목표는 연기의 회전을 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탈이고, 윤회가 끝나는 것이고, 괴로움이 종식되는 것이고,

지고의 행복입니다.


연기는 열두 가지 마디마다에서 모두 끊어질 수가 있지만

큰 틀에서는 연기가 시작과 중간과 끝에서 끊어집니다.

이러한 연기의 과정에서 느낌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느낌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야 하고

더욱이 느낌의 연기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느낌은 원인과 결과로 진행됩니다.

이 말은 느낌을 일으킬 원인이 없으면 느낌이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느낌과 연기의 구조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고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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