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39

通達無我法者 2011. 3. 10. 01:0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 몸을 구성하고 있는 32가지의 물질이 있으며,

몸을 인식할 수 있는 실재하는 대상인 4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머리카락, 털, 손톱, 이빨 등의 32가지 물질은 존재를 구성하는 관념으로,

몸의 더러움을 알아차리는 부정관(不淨觀)수행의 대상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지대(地大), 수대(水大), 화대(火大), 풍대(風大)의 4가지 실재입니다.

몸은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것을 인식할 때는 이상의 4가지 요소로 인식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손은 존재로써 있는 것이지만,

손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따뜻함입니다.

이때 손은 관념적인 대상이며, 손에 있는 따뜻함이 실재하는 대상인 것입니다.


4대(四大)의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중요한 선택이며,

인식하는 대상을 통하여 성품을 알아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몸의 4대는 조건에 의해서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화합하기도 합니다.

4대(四大)가 상충을 하면 병이 나거나 죽게 되고, 화합을 하면 건강하게 삽니다.


몸은 항상 4대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 하나의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강해지기 때문에

한 가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4대는 몸의 궁극적 실재를 표현하기 위한 명칭에 불과한 것이며,

4대의 실재는 단지 몸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느낌일 뿐입니다.


4대(四大)는 다양한 느낌으로 나타나므로 느낌이 나타날 때마다

이 느낌이 지대인가 화대인가로 구별할 필요가 없고 단지 느낌으로 알면 됩니다.


지대(地大)는 몸에 있는 흙의 본성으로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양면성을 가졌으며,

단단함, 부드러움, 무거움, 가벼움, 딱딱함 등으로 나타납니다.


수대(水大)는 몸에 있는 물의 본성으로 흐름과 응집과 유동성이 있으며,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의 성분인 피, 땀, 오줌, 눈물, 콧물로 나타납니다.


화대(火大)는 몸에 있는 불의 본성으로 따뜻함과 차가움의 양면성을 가졌으며,

성장과 늙어감, 소모, 소화를 돕고 병균을 죽이는 요소입니다.


풍대(風大)는 몸에 있는 바람의 본성으로 움직임, 진동, 떨림의 요소이며

에너지, 운동, 긴장, 지탱이고, 호흡, 재채기, 트림, 하품 등으로 나타납니다.


죽음은 단지 4대(四大)의 변화로서 부드럽다가 단단해진 것이며,

피가 흐르다 멈춘 것이며, 뜨겁다가 차가워진 것이며, 움직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교재 제 21장,

수온(受蘊)과 연기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온(受蘊)이란 느낌의 무더기를 말합니다.

느낌은 여러 가지 많은 느낌으로 모여 있지만,

이러한 느낌도 오온(五蘊)으로 모여서 작용을 합니다.


느낌은 마음의 작용으로 수(受), 상(想), 행(行) 중에서 수(受)에 해당합니다.

마음의 작용을 앞선 마음인, 식(識)과 함께 일어나서 함께 소멸합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모두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 기관과 여섯 가지 감각 대상이 부딪혀서 일어나는데

이 때 아는 마음과 함께 느낌도 같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무엇이나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다른 것들과 함께 일어납니다.


이처럼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내가 대상을 받아 들여서 알거나 느낄 때

사실은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감각 기관이 아는 것이며,

사실은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감각 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고,

감각 기관이 기억하고 상상하는 것이며,

내가 마음의 의도를 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감각 기관의 의도가 있어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인 식(識)과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 에

‘나’라고 하는 자아가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이라고 하는 물질도 나의 몸이 아니고,

단지 몸이라는 동일한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도 나의 몸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 무더기로 결합된, 단지 물질일 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실은 아는 마음도 감각 기관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느낌이 나의 느낌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의 느낌도 상대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나의 느낌이 아니라고 알아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상대의 느낌도 상대의 느낌이 아니라고 알아서 상대를 비난하거나 미워할 것이 없습니다.


피차 몰라서 나의 느낌이라고 생각해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느낌은 단지 느낌일 뿐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느낌은 연기를 회전시키는 가장 강력한 연료입니다.

느낌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덤덤한 느낌이 있습니다.


즐거운 느낌은 더 즐거운 느낌을 바라서 연기를 회전시킵니다.

괴로운 느낌은 괴로움을 없애려고 해서 연기를 회전시킵니다.

덤덤한 느낌은 무관심이라서 습관대로 사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에 연기를 회전시킵니다.


이렇듯 느낌은 단지 느낌으로 있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갈애를 일으켜서 반드시 연기(緣起)를 회전시킵니다.


바로 이런 연기의 배경에는 나의 느낌이라는 잘못된 견해가 있습니다.

만약 느낌이 단지 느낌일 뿐이지 나의 느낌이 아니라고 알면

우리는 극단적 욕망을 취하지도 않을 것이며, 슬픔과 비탄에 잠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느낌으로 인해 연기가 회전하지 않아 바로 열반을 성취합니다.


그러나 느낌이 나의 느낌이라고 알면 갈애를 일으켜,

무엇이나 움켜쥐려고 집착을 해서 끝없는 윤회를 해야 합니다.


인생은 유신견(有身見)으로 시작해서 느낌으로 끝납니다.

누구나 유신견 때문에 집착을 해서 새로운 태어남이 있습니다.


이 태어남이 계속되는 것은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는 것이고,

이 태어남이 끝나는 것은 느낌이 소멸하여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느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이제 제 21장,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 누가 이 책을 읽고 있습니까?

이 책을 읽고 있는 자는 남자인가요? 아니면 여자인가요? 혹은 느낌인가요?

무엇이 정답인가요?


오온 중의 하나인 느낌의 무더기를 수온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정답은 수온(受蘊)이 글을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글을 읽는 자는 나, 혹은 나 자신이 아닙니다.


연기법에서는 접촉을 원인으로 하여 느낌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즉 접촉을 했기 때문에 느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선 원인에 대한 결과입니다.

이때 접촉은 연기(緣起)이고 느낌은 접촉에 의해 일어난 연생(緣生)입니다.

접촉과 느낌 사이에 원인이라는 조건이 있어서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나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느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언제 그리고 어디에서 느낌이 일어납니까?

이에 대한 답은 ‘접촉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느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느낌은 눈을 기반으로 하여, 귀를 기반으로 하여, 코를 기반으로 하여,

혀를 기반으로 하여, 몸을 기반으로 하여, 그리고 마음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경전을 볼 때,

느낌은 눈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때의 기반은 원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또 기반이란 말은 토대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기반이나 토대는

단지 원인으로서의 조건일 뿐이지, 이것들은 서로가 다른 것입니다.

느낌이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감각 기관을 기반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감각 기관을 원인으로 느낌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 느낌과 눈은 다른 것이며 느낌과 귀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기반, 토대, 원인이라는 말은 단지 조건을 제공해서 일어난다는

연기적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비담마에서 마음은 심장을 토대로 일어난다고 할 때,

단지 심장이라는 물질적 조건을 토대로 마음이 일어나는 연기를 설명한 것이지

마음이 심장에 기거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약에 심장이 없는 생명일 때는 마음은 몸을 토대로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몸과 함께 있다고 했지, 심장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단지 토대일 뿐이지 거기에 기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들은 이런 이론에 정신이 팔려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의 지혜로 보면 이런 것들은 매우 단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론에 치우치면 색다른 견해를 말하게 되어 수행자들에게 혼란을 줍니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살아갑니까?

우리는 매 순간 느낌과 함께 살아갑니다.

느낌은 허공과 같습니다.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면 어디에나 허공이 있습니다.

이처럼 느낌이 없는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지혜와 알아차림을 가지고 자신 안에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 때 ‘안’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 기관을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에서 대상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 부딪혀서 육식(六識)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부딪히는 장소를 육근에 두고 알아차리는 것을 안에서 알아차린다고 말합니다.

이 때 육근(六根)을 육문(六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6문에서 알아차림을 두는 것을 문지기가 지키고 있어서

탐, 진, 치라는 도둑이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리는 대상과 상황에 따라서

6문에 알아차림을 두지 않고 6경에 두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는 밖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알아차리는 대상과 상황에 따라서

안팎에 알아차림을 두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수행을 하면서 알아차릴 대상이 부딪히는 장소를 안과 밖,

그리고 안팎으로 구분해서 알아차리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꿀라 삐따에게 말씀하시기를

“오온을 가진 자가 단 한 순간이라도 느낌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은 자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느낌은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서나 존재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수행자들은 느낌이라는 것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특별한 느낌을 찾아다닙니다.


수행자들이 특별한 느낌을 찾는 것은 느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는 것이 느낌인지 몰라서 특별한 느낌이나 색다른 느낌을 찾습니다.

어느 경우에도 느낌을 찾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느낌은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는 것인데, 우리가 느낌을 찾는다면

특별한 느낌이나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그런 짜릿한 느낌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도 느낌인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 알고 있는 것도 느낌이며, 찾고 있는 것도 느낌입니다.

아무런 느낌이라고 알지 못할 때는 덤덤한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


저희 한국 명상원에서 좌선을 할 때 먼저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런 뒤에 잠시 눈꺼풀이 닿아 있는 느낌을 알아차리도록 합니다.

그리고 입술, 손, 엉덩이가 닿아 있는 느낌을 차례로 알아차립니다.

그런 뒤에 코, 가슴, 배, 또는 몸의 일부,

그리고 전면 중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곳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도록 합니다.


이렇게 수행을 시작할 때 “눈꺼풀의 느낌을 알아차리십시오.” 라고 말하면

일부의 수행자는 눈꺼풀의 느낌이 없다고 말합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느낌이라고 하기 때문에 특별한 느낌을 찾아서

아는 것이 느낌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알고 있는 것이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느낌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눈꺼풀이 닿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느낌이 없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눈꺼풀이 닿아 있는 것을 아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닿아 있는 것을 압니까?”라고 물으면 안다고 대답합니다.

이 때 눈꺼풀이 닿아 있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느낌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을 찾지 마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알고 있는 그것이 바로 느낌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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