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보리방편문 설법-청화 큰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3. 25. 10:48

청화큰스님 법문

 

 

        보리방편문 설법

       (菩提方便門 說法)  

 

 

 

 

 

 

 

 

 

 

 

 

 

 

 

 

 

 

 

 

오늘날같이 그지없이 혼란스러운 시대는 성자들의 예지(叡智)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흔히 복잡다기한 시대를 생각할 때는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를 상기합니다. 그러나 춘추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각기 자기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것은 두드러진 사람들에 한해서입니다. 그렇게 혼란한 가운데도 일반 서민들은 자기 나름대로 생활을 했고, 오늘날같이 국민들 모두가 술렁거리는 그런 때는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은 심지어 중학생들까지도 의식화라는 그런 맑스주의의 병을 앓고 있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현대는 명확한 인생관(人生觀)의 정립이 없으면 자기도 바로 못살고, 가정도 바로 못다스리고, 우리 귀여운 학생들도 바로 교육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만 두고본다 하더라도 얼마나 가지 수가 많습니까. 같은 종교 내에도 여러 가지 종파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춘추전국시대의 그 정도의 것이 아니라 외형적으로만 본다 하더라도 몇십 종파, 몇백 종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라든가 신흥 종교를 합하면 그야말로 셀 수가 없습니다.


같은 불교 내에도 날이 가면 갈수록 그 분파가 많이 생깁니다. 분파도 교리적인 차이로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권이라든지 그때그때 정리라든지 그런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분파가 생기고 있습니다. 신앙(信仰)이라는 것은 하나의 신념체계(信念體系)인데, 신념체계에 변동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도 역시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때는 어떠한 진리(眞理)가 가장 옳을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종합적으로 모든 것을 다 수렴(收斂)해서 하나의 진리를 내세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희들 어려서는 사상가(思想家)라 하면 굉장히 차원이 높고 위대한 분들로 생각이 되고 또 사실 시골 지방에서는 사상가 하면 한 면()에 한 두 사람 정도 있을까 말까 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는 학생들도 사상가가 되고, 거의 온 국민이 사상가가 되는 그런 혼란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러한 때는 어떤 누구나가 나름대로 철인(哲人)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인이 되지 않고서는 바른 인생관(人生觀)을 세워서 삶을 헤쳐나갈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지(叡智)는 상대적(相對的)인 어중된 지식이 아니라, 참다운 성자(聖者)가 우리한테 교시한 인생의 등불이 될 수 있는 참다운 지혜가 바로 예지 아니겠습니까. 예지를 꼭 잡아야 자기도 옳게 살고, 우리 민족도 올바른 활로를 개척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수행론과 인간성



그래서 이 시간에는 그 전에 여러 가지로 요청을 받은 바도 있고 해서 다른 복잡한 문제는 거두절미하고 우선 수행론(修行論) 문제에 대해서 주로 말씀하겠습니다. 수행론에 관해서는 저희같은 출가 수행자는 제가 불자님들 보다는 훨씬 더 깊은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몇십년이고 자기 평생동안 그 수행론하고 씨름을 하다 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수행론이 자기 마음에 안맞거나 적성에 안맞으면 결국 노이무공(勞而無功) 돼서 헛된 수고만 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 출가 수행자는 더욱 그렇고 제가 수행자라 하더라도 집안에서 사업도 운영하고 또는 일상생활 속에서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수행론이 자기 적성에 안맞으면 역시 싫증이 나서 오랫동안 못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론에 관한 것이 우리한테는 불가결한 밀접한 관계에 있어놓아서 수행론을 위주로 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수행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불교에서는 인간성(人間性)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성 문제부터서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불교를 마음 심()자, 마루 종()자, 심종(心宗)이라고도 합니다. 심종 이것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를 다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여러 분야의 석학들도 계시고 철학도 하셨기 때문에 다 아시는 문제입니다만 유물론(唯物論), 유심론(唯心論), 이것도 인간의 역사상 굉장히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맑스 주의는 유물론에 입각해 있습니다. 유물론이 없었더라면 맑스주의 체계가 설 수가 없습니다. 유물론적인 논리체계 위에서 소위 말하는 역사적인 그런 해석으로 해서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이 있습니다.


유물변증법이 성립될 때는 필연적으로 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이라든가 계급투쟁이 안생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유물론 체계가 있기 때문에 맑스 주의가 있었습니다. 이북의 주체사상이라든지 이러한 것들도 유물론을 기초로 해서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성 이것은 물질 즉 몸뚱이의 반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립적인 마음의 권위라던가 염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실은 유물론 가지고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결국 우리 몸뚱이라는 물질의 반사에 불과하면 그까짓 것이 그렇게 존엄스럽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울 때는 유물론 체제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교는 어떠한 입장에 서 있는가? 불교는 유심론적인 입장에 서 있지만 이것은 단순 유심론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술어로 이야기하면 그야말로 구체적유심론(具體的唯心論)입니다. 구체적 유심론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물질 쪽으로 항시 관심이 있는 분들은 굉장히 저항을 갖습니다. 내 몸도 물질인 것이고 세상의 과학 문명이 다 물질로 된 것인데 어떻게 해서 모두가 다 마음일 것인가? 보통은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상당히 수행을 했다 하더라도 시야에 보이는 것은 모두 물질뿐이라 굉장히 유심론이란 만법유심(萬法唯心)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저항을 느낍니다. 그러한 것을 두고두고 지금부터 풀이해 가겠습니다만 우선 대전제로 모두가 마음뿐이다 할 때 이 마음은 상대적인 너다, 나다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우주의 본 바탕으로서의 하나의 이른바 성령(聖靈) 기운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질료(質料)가 아닌 공간성(空間性)과 시간성(時間性)을 갖추고 있지 않는, 공간성과 시간성과 인과율(因果律)에 얽매이지 않는, 말하자면 시공과 인과율을 초월하는 하나의 영체(靈體)를 가르켜서 마음이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씀과 같이 구체적 유심론인 것입니다.


헌데 우리 마음을 불교에서는 어떻게 보는가 하면 이것은 반야심경(般若心經)에도 있는 말씀입니다만 우리가 항시 활용하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입니다. 지금 우리는 의식(意識)까지는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일반 동물도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알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하는 오각(五覺)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일반 동물에 비하여 진일보해서 의식(意識)까지를 사용합니다. 헌데 보통 소박한 사람들은 유물론자들이나 그런 사람들은 인간의 의식에 의해서 인식(認識)하는 것을 너무나 신뢰(信賴)합니다. 그리스 철인(哲人) 프로타고라스(BC 480 - 411)같은 분도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 결국 만물이라는 것이 물() 자체가 그대로 있어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에 의존해서 이것이요 저것이요 푸른 것이요 누렇다 하는 것이지, 누렇고 푸른 것이 실존적으로 물자체가 있지가 않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인간의 의식정도에 따라서 인간의 시각(視覺) 따라서 누렇게 보이고 푸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끔 말씀드린바와 같이 같은 물이라도 사람이 보면 물이고, 귀신이 보면 하나의 피로 보고, 천상 인간이 보면 유리로 보고, 고기는 자기가 사는 집으로 보고, 이렇게 본다고 하듯이 똑같은 현상적인 존재이지만 그 사람 시각에 따라서 달리 봅니다.


또 같은 사람도 그 사람의 수행 정도가 깊은가 옅은가에 따라서 달리 봅니다. 하나의 수학 문제도 국민학생이 풀이하는 것과 중학생이 풀이하는 것이 차이가 있듯이 그와같이 우리가 보는 그러한 물질이라는 것도 이것이 실존적인 그대로 있는 물 자체가 아니라 인간성이라 하는 주관(主觀)에 비추어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성 이것이 만유의 척도인 것이지 물 자체가 있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헌데 보통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의식에서 비춰진 그걸 가지고서 좋다, 궂다, 옳다, 그르다, 이제 시비(是非)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意識)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잠재의식(潛在意識), 보다 심층의식(深層意識)이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 의식가지는 우리가 보통 쓰는 것인데 그 저변에는 제칠식(第七識)인 말나식(末那識)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칠식은 어디서 나왔는가? 칠식은 그것이 가장 저변이 아니라 보다 깊은 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또 있습니다. 아뢰야식 그것이 구경의 끄트머리인가? 그것도 끄트머리가 아니라 아뢰야식의 근본은 암마라식(菴摩羅識)입니다. 그러면 암마라식 이것은 어떤 것인가? 암마라식 이것이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육식(六識)밖에는 못 사용하고 있고 또 인간 아닌 동물들은 오식(五識)밖에는 못 쓰고 있다 하더라도, 오관이 있으므로 오식은 쓰겠지요. 일반 식물은 이제 오관도 없습니다.


그렇게 돼 있다 하더라도 가장 구경적인 불성은 모두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동물과 식물 그러한 것들만 구경적인 끄트머리가 불성일 것인가? 또 이렇게 좁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만 사실은 불교에서는 그러한 동물이나 식물이나 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광물질(鑛物質)만이 그 본질이 불성으로 되었다는 국한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서, 눈에 안보이는 하나의 미시적인 세계도 불성으로 되었다고 봅니다.


가사 산소라든지 수소라든지 또 더 미세하니 분석해서 가장 저변의 알갱이인 소립자(素粒子)라든지 모두가 다, 그것들이 우리 인간이 어떤 기계, 기구를 이용해서 파괴시켜 소립자가 되고 양자가 되고 전자가 되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도 결국은 하나의 불성 위에 이루어진 마음의 파동(波動)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과 물질



이것은 가끔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 결국은 에너지의 파동입니다. 에너지와 물질의 문제는 대체로 물리학을 하신 분들은 아시는 바와 같이 그야말로 에너지 곧 물질이요 물질 곧 에너지 아닙니까. 우리가 물질을 파괴하면 물질이라는 형체가 사라지지만 에너지 기운은 그대로 남습니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 에너지는 영원히 멸하지를 않습니다.


소립자를 파괴한다 하더라도 그 모양만 사라지는 것이지 그 에너지는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적 에너지는 영원히 멸하지 않고 영생합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하는 색즉공(色卽空), 공즉색(空卽色)이라. 색은 현상계의 물질을 말합니다. 색은 즉공이요, 선데 그 공이 허무(虛無)같으면 색즉공 다음에 공즉색이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지요. 색즉공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공이 아니라 에너지가 충만한, 시간 공간성을 갖는 질료(質料)는 아니겠지만 그것이 심심미묘(甚深微妙)한 하나의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그 공() 가운데서 인연(因緣) 따라서 다시 식()이 나옵니다. 물질이 즉 에너지요 에너지가 즉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공 공즉색이라고 하는 것이나 같은 뜻입니다.


불교를 하신 분들은 그 물리학적인 술어를 말하면 상당히 저항을 느낍니다. 부처님 뜻은 훨씬 깊은데 왜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것일까?


언어나 글은 인간 정도의 식을 갖는 사람들끼리의 극히 제한된 불확실한 정보전달 수단이기 때문에 모두를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언어에 걸려버리면 불교는 공부를 못해버리고 맙니다. 언어는 모든 것을 다 정확히 표현을 못하며,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그 의미도 달라지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학적 술어로 배대를 시키면 그대로 100% 안 맞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맞으면 맞다고 해버려야 합니다. 보다 세밀한 것은 각자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체계를 세우면 되겠지요.


아무튼 물질은 하나의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것을 일본의 다니구찌 마사하루 사람은 굉장히 강력하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너지의 파동 진동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이것이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천문학(天文學) '우주의 본질과 형량'을 보면 우주에는 에너지가 지금 이렇게 충만해 있는데 -에너지를 금진(金塵)이라는 술어로도 사용합니다.- 금진이 무슨 동기가 생겨서 이렇게 좌()로 선회(旋回)를 할 때는 하나의 양자(陽子)가 되고, 즉 말하자면 자기(磁氣), 자력(磁力)이 나오고, 금진이 우()로 선회(旋回)를 할 때는 전자(電子)가 되고 즉 말로 하자면 전기(電氣)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학설은 금타대화상이 처음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실험을 아직 안해봐서 확증은 못합니다만 저는 여러 가지 거기에 부연된 걸로 해서 확신(確信)을 합니다. 그리고 도인(道人)들은 빈 말을 할 수 없는 것이고, 아주 투철한 직관(直觀)으로 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가 없지요. 세세한 문제에 관해서는 다소 언어의 차이 때문에 달리 보일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천지우주라는 것은 하나의 에너지, 불교 말로는 일체의 여러 가지 가능성(可能性)을 갖춘 순수(純粹)한 하나의 불성입니다.


이 불성을 달리 표현하면 금강륜(金剛輪) 또는 금진(金塵) 그렇게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무슨 동력(動力)이 생기면 금진을 좌나 우로 선회를 시켜서 물질의 근본인 수진(水塵), 화진(火塵), 즉 양성자, 전자 등을 생성시킵니다.


그러면 그 동력은 무엇인가? 동력은 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희랍 철인 엠페도클레스(BC 500 - 430)는 일체 물질이라는 것은 '미움과 사랑' 때문에 물질이 생긴다는 그런 걸로 이론을 정립시켰습니다.


이것을 다시 표현하면 우리 중생이 무엇을 싫어하면 싫어하는 그 마음이 에너지 기운 동력이 돼서 우()로 이렇게 선회(旋回)를 합니다. 우리가 무얼 탐욕심(貪慾心)을 내고 좋아하면 좋아하는 그 염력(念力)이 순수한 에너지를 왼쪽으로 선회를 시킵니다. 사랑하는 그 마음이 우주의 순수 에너지를 이렇게 좌()로 선회를 시키는 것이고, 싫어하는 그 마음은 척력(斥力)이 되어서 이렇게 우로 선회를 합니다. 이와같이 이들이 하나의 함수관계가 돼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나옵니다.


아무튼 저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법문에서도 하나의 천문학(天文學)에 대해서 우주의 질량, 열량, 그런 것을 모두를 다 수치(數値)로 표시하신 것인데 가장 근원적인 것도 역시 어떻게 해서 물질이 나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9세기 철인 가운데서 듀포아랜드라는 철인도 삼불가사의(三不可思議), 칠불가사의(七不可思議)를 말하는 가운데서 가장 부사의(不思議)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물질이 무엇인가? 물질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면 굉장한 문제가 되겠지요.


각 철인들이나 과학자들도 여태까지 그렇게 많이 연구하였지만 물질이 무엇인가? 확실히 잘 모른단 말입니다. 마음은 대체로 무엇인가? 또 마음과 물질과는 어떠한 관계성이 있는가? 이 세가지 문제가 인간이 갖는 지혜 가운데 가장 부사의한 의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은 참 성자(聖者)가 아니면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항상 상대적(相對的)인 것에 머물러 버리기 때문에 상대성을 떠난 이른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그런 문제는 인간의 상대적인 지혜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알려면 그야말로 직관력(直觀力)으로 해서, 성자의 밝은 안목을 떠나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직 범부중생의 지위에서는 성자의 가르침을 믿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고성능을 갖는 전자현미경(電子顯微鏡)을 가지고 본다 하더라도 물질의 저쪽 피안(彼岸)은 알 수가 없습니다. 질료가 있는 이쪽 즉 시공(時空)속에 들어 있는 것만 알지 시공을 떠나버린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 문제는 아까도 말씀한 바와 같이 희랍의 철인들이나 동양의 철인들이 밝혀 놓은 것들이 이렇게 저렇게 표현은 다르지만 모두가 상통(相通)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분야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하신 분들은 좋겠습니다만 아무튼 그 우주의 순수 에너지가 어떻게 해서 물질이 되는가? 그런 문제는 아직 증명한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증명하시고 말씀했습니다. 부처님 당시는 세밀하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냥 물질이라는 것은 중생의 업력(業力)의 소치(所致)라고 하셨을 따름입니다.


지금 시간들이 바쁘실텐데 죄송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철학적인 문제이고 또 우리가 이런 기회를 자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제가 아무래도 한 두 시간 동안은 이야기를 해야 할 성싶습니다.



우리 중생의 업력으로 해서 우주가 구성되는 것입니다. 불교 우주론(宇宙論)에서는 우주가 나중에 가서는 텅 비어버린다고 말을 합니다. 우주가 파괴되어서 텅 비어버린다는 것은 지금 물리학도 대강은 말을 합니다. 엔트로피(Entropie), 즉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가 엔트로피 아닙니까. 지금과 같이 석유나 가스나 원자력 등을 사용하다 보면 마지막에 가서는 사용할 수 없는 열 에너지 찌꺼기만 남습니다. 이렇게 산화가 돼서 불타 버리면 그때는 천지 우주도 다 타버린 셈이 되겠지요, 파괴돼서 텅 비어 버립니다. 우리 불교로 말하면 그 때 괴겁(壞劫)이라.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가 세기고 세길수록 감사하고, 감탄을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주라는 것은 결국은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주가 성겁(成劫)이라 이루어지고, 또는 주겁(住劫)이라 우리와 같은 생물들이 살고, 생물들이 살다가 차근차근 그때는 우주가 만년(晩年)이 돼서 불타서 파괴되어 버립니다. 그때는 텅 비어버립니다. 텅 비면 이제 질료는 조금도 없겠지요. 원자가 있겠습니가, 소립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때는 점이 없단 말입니다. 중성미자(中性微子)도 없고 그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텅텅 비었지만 평등무차별한 공 가운데도 에너지 불변의 법칙은 성립되고 엔트로피는 증장되어 있습니다. 에너지만 남으면 아무것도 없는 허무(虛無)일 것인가? 순수 생명인 에너지 그것은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불성 가운데는 무한한 가능성이 꽉 차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불성공덕(佛性功德) 아닙니까.



불성공덕



그러기에 불성공덕을 범주를 좁혀서 간략히 말하면 자비로운 기운과 지혜로운 기운입니다. 공 가운데 충만해 있습니다.


더 부연시키면 다섯가지 지혜라. 또 백사십 불공법이라. 불성 가운데 들어있는 공덕을 백사십 종류로 구분한 것이 있습니다. 사실 불교는 그렇게 세밀합니다. 또 그 가운데는 플러서, 마이너스, 즉 양기운, 음기운 그런 기운이 무한히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상징적으로 인격화(人格化) 시키면 마이너스 기운은 자비(慈悲)에 해당하고 플러스 기운은 지혜(智慧)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이 배대를 시킬 수가 있는데 물리학적으로만 표현하면 그것이 바싹 말라버리겠지요. 그렇지만 이와 같이 하나의 생명이므로 생명적인 차원에서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자비는 관세음보살님이요 지혜는 문수보살님입니다. 불성도 그렇습니다. 불성도 하나의 성품으로 보면 불성이지만 그것을 하나의 인격으로 말하면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와 같이 텅 비어 버렸지만 그 가운데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런 자비로운 기운, 지혜로운 기운이 가득 차 있습니다.


꽉 차 있는데 자비로운 기운과 지혜로운 기운이 똑같아 버리면 그때는 마이너스 기운과 플러스 기운이 평등해서 제로가 돼서 다시 성겁(成劫)이 일어나지 않고 동()이 없이 조용히 있을 것인데, 음기운, 양기운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비로소 동력(動力)이 생기지요. 동을 한단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 중생의 업력(業力)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와 같이 공겁이 되어 버리면 지금 우리같은 이렇게 원소로 구성된, 성분으로 구성된 이런 몸은 그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주가 다 타버리면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심식(心識)만이 존재하는 중생은 남아 있습니다. 모든 중생이 다 천지우주의 불성(佛性)하고 하나가 돼서 이제 대 우주하고 조화가 되어버리면 다시 중생은 없을 것인데, 천지우주가 다 파괴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중생 가운데는 미처 부처가 못된 심식만, 소위 의식만 있는 중생이 남아 있습니다. 의식만 있는 중생은 - 의식이사 어떻게 불에 타겠습니까? - 남는단 말입니다. 의식만 있는 중생들이 그때는 남아 가지고 그들은 아직 부처가 아니라 중생이기 때문에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생각은 결국 간추려 보면 싫어하고 좋아하고 하는 생각입니다. 선이요, 악이요, 별 생각이 다 있으나 간추려 보면 싫어하고 좋아하는 생각으로 전부 귀일(歸一)이 됩니다. 좋아하는 생각은 인력(引力)이 되는 것이고, 싫어하는 생각은 척력(斥力)이 됩니다. 이것이 정화(淨化)가 되면 자비(慈悲)와 지혜(智慧)인 것이고, 모두 그렇기 때문에 번뇌(煩惱) 즉 보리(菩提)요, 보리 즉 번뇌 아닙니까.


우리가 잘 활용(活用)하면 그 근본 성품은 결국 자비롭고 지혜로운 것인데 우리 중생이 잘 못써서 미움과 탐욕이 됩니다.


그래서 의식만 있는 중생은 싫어하고 좋아하는 그 생각, 그 마음이 싫어하면 불성을 우측으로 선회를 시키지요. 그 때는 그것이 전자(電子)가 됩니다. 또 좋아하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이 동력이 되어서 불성을 이렇게 좌로 회전시킨단 말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이른바 양성자, 중성자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중성자와 양성자를 핵으로 해서 전자가 뱅뱅 도는 원자가 생성되지요.


이렇게 해서 이러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런 의식만 있는 중생이 하나 둘이 아니라 무수한 중생이 있기 때문에 그 무수한 중생들이 싫어하고 좋아하고 이제 보고 싶고, 보기 싫어하고 미워하고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러한 마음, 그것이 동력이 되어서 다시 불교말로 하면 중생들의 공업력(共業力)이라. 공업력으로 해서 천체(天體)를, 우주(宇宙)를 구성(構成)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구, 달, 태양, 화성, 금성, 별이요 한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이 에너지 차원을 못보니까 우리가 지구다, 달이다, 태양이다, 별같은 모양으로 보는 것이지 에너지 차원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그야말로 불성(佛性)으로, 순수 생명 에너지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표면의식(表面意識)만 가지고 살고 잠재의식(潛在意識)은 잘 못 사용합니다. 프로이드나(1856 - 1939), 융(1875 - 1961)같은 철인들도 심층의식(深層意識), 육식(六識) 다음의 말나식(末那識) 그런 단계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보다 더 깊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나 그런 정도는 결국 자기들의 범부의식(凡夫意識)만 가지고 유추해서 보았을 뿐이므로 성자(聖者)와 같이 훤히 트인 심안(心眼)으로 근본(根本)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우리 범부의식 가운데서 그런 상대적인 의식으로만 보았으므로 그 깊이를 볼 수가 없습니다. 내내야 상대적인 의식만 가지고 실험해서 조금 깊이 정신분석(精神分析)적으로 보았을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네들은 분석적(分析的)으로 보기 때문에 깊이 볼 수 없습니다.


프로이드나 융은 불교를 조금은 공부해서 어렴풋이 불교 말을 좀 하지만 깊이는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 의식의 가장 저변에 있는 제구 암마라식(菴摩羅識), 소위 이 식은 부처 불성인데 불성까지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불성은 인간성(人間性)과 우주성(宇宙性)의 본 바탕을 확실히 볼 수 있는 성자만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자(聖者)와 범부(凡夫)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해서 알아야 합니다. 범부는 우주의 근본 실상(實相)을 못보고 맙니다. 성자는 이렇게 우주의 근본 실상을 봅니다. 실상! 이른바 생명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옛날에는 그럭저럭 모두 살아 왔지만 현대와 같은 정보화(情報化) 시대에 와서는, 정보가 중요하지만 너무나 이렇게 혼란스러움으로, 하여튼 그 실상을, 우주의 실상을 우리가 몰라서는 어떠한 분야에서나 자신 있게 행동을 못취합니다.


그런데 실상 이것이 불성입니다. 따라서 우리 부처님 공부는 어떠한 공부든지 모두가 다 이렇게 실상을, 불성을 어떻게 계발(啓發)할 것인가? 거기에 따라서 이제 부처님의 수행법(修行法)이 여러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입니다.


우선 옴마니반메훔같은 것을 두고 본다 하더라도, 옴마니반메훔은 굉장한 하나의 진언(眞言), 즉 주문(呪文)이므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티베트의 고승들은 옴마니반메훔을 주로 합니다. 우리 한국도 진각종(眞覺宗)에서는 옴마니반메훔을 주로 하지요. 그리고 우리 전통적인 불가에서도 관세음보살본심미묘진언(觀世音菩薩本心微妙眞言)이라 해서 관세음보살님의 본심의 리듬을 옴마니반메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언과 같은 것은 오종불번(五種不飜)이라 그래서 함부로 번역을 못합니다. 왜냐 하면 한 가지 뜻 가운데 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제한된 말이나 문자로 표현을 않습니다. 진언은 너무나 함축성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부연(敷衍)시키면 진언같은 맛도 없고, 너무 짧아버리면 몇마디 말로서 뜻을 표현을 못하니까 진언을 마구 범하는 편이지요.


그런데도 옴마니반메훔을 구태여 번역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중생들이 하도 그 뜻을 알려고 하니까 무량의 뜻이 포함되어 있으나 중생의 호기심이라는 것도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중생의 호기심에 또 맞추기 위해서 번역한 분이 있어요. 그걸 보면 '영원한 부처님의 광명'이라고 그렇게 번역을 하지요. 옴마니반메훔도 인도 범어인데 하여튼 범어로도 제대로 다 온전히 표현을 못하니까 하나의 진언으로 하는 것인데 구태여 그 뜻을 풀이하자면 '영원한 부처님의 광명'이지요.


그와 같은 진언이라든지 가사 광명진언(光明眞言)도 광명(光明)이란 뜻이 있듯이, 결국 우주는 하나의 불성이라는 순수 생명 에너지인데,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의 정령(精靈)이다, 우주의 기운(氣運)이다, 이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무량(無量)의 지혜(智慧)를 갖춘 그런 생명의 광명입니다.


이 광명(光明), 빛이라는 관념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태양광선과 같은 그런 가시적(可視的)인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불교말로 하면 그때는 적광(寂光)이라, 고요한 광명, 또는 정광(淨光)입니다. 이런 적광, 정광의 개념이 우리한테는 굉장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실은 공부해 보면 자기가 정화(淨化)됨에 따라서 차근차근 광명하고 접근되어 갑니다. 기도를 참으로 깊이 모신 분들은 광명을 감득(感得) 아니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은 그런 광명을 좀 감득을 해야 이제 환희심(歡喜心)이 이렇게 하늘로 치켜 올라서고 또는 평소에 몰랐던 것이 머리에 마치 번갯불 모양으로 반짝반짝 나온단 말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본이 되는 불성 이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게 소중하니까 그야말로 자기 몸뚱이도 불살라서 이제 그렇게들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합니다. 태울 소()자, 몸 신()자. 몸을 불사르기도 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순교(殉敎)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같은 분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으려고 했으면 할 수가 있었습니다.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것인데 짐짓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생명의 실상을 변증(辨證)한 셈이지요. 사람 몸뚱이는 허망한 것이다. 사람의 진정한 몸뚱이는 마음에가 있다는 것을 변증하기 위해서 그와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생명의 실상을 생각할 때는 사바세계(娑婆世界)의 허망(虛妄)한 것에 대해서 깊이깊이 재삼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관론(止觀論) 같은데 보면 우리 몸이라는 것은 중생의 업력기관(業力器官)이라, 중생의 업을 짓는 기관이라고 했습니다. 업을 지어 놓으면 그 업의 여러 가지 조합(組合)으로 해서 업의 가화합(假和合)이라, 우리 몸뚱이가 이렇게 가짜로 화합한단 말입니다. 가화합돼서 이제 종중연생(從衆緣生)이라, 연() 따라서 무엇이 나온단 말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깨달으실 때는 주로 12인연법(十二因緣法)으로 깨달으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우리 인간 생명의 전생만 생각해 봅시다. '나'란 대체 무엇인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무엇이었으며 어디서 나왔는가? 엄마의 뱃속에서 나왔겠지. 뱃속에서 나오기 전에는 무엇인가? 엄마의 그런 태()에 의지해서 뱃속에 들어가서 나오는 것까지는 아는데 엄마에 의지해서 나오기 전에는 잘 모른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부모한테 의지해서 나왔는가? 잘 모릅니다.


이렇게 소급해 올라가고 올라가서 뚫고 나가니까 결국은 우주의 끝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해서 올라가면 갈수록 즉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모아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산란스러우면 항시 상대적인데 머물고 마는 것인데 마음이 하나로 딱 모이면 집중력(集中力)이라는 것이 생겨서 지금은 의식 차원이지만 제칠(第七) 말나식(末那識), 제팔(第八) 아뢰야식(阿賴耶識), 제구(第九) 암마라식(菴摩羅識)으로 이렇게 쭉쭉 들어갑니다.


정신집중(精神集中)이라는 이것은 원래 우리 정신의 근본 뿌리가 불성이기 때문에 한 번 집중만 딱 시키면 그 집중하는 힘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차근차근 깊이 스스로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전생이 무엇인가? 무엇인가? 이렇게 파고 들어가면 집중력이 생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훨씬 더 명상(暝想)하시는 힘이 강했겠지요. 과거세(過去世)의 선근(善根)도 많기 때문에 그렇게 천재같은 분이 이렇게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일념(一念)으로 해서 확 열려버렸습니다. 그때는 바로 과거가 열려버렸던 것입니다.


도인(道人)들이 공부해서 마음이 열려 올 때 맨 처음에 나오는 신통이 숙명통(宿命通)입니다. 숙명통은 과거를 다 압니다. 자기 전생도 압니다.


과거를 알고 보니 그야말로 도솔천에 있는 하나의 영체(靈體)가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선량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부모의 그런 생명의 파장(波長)에 걸려서 왔습니다. 우리도 모두가 하나의 영체로 해서 이렇게 헤매다가 아버지 어머니의 인연 파장에 걸려서 온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그렇게 돼서 어머님 태 안에서 스스로 영양을 섭취해서 결국은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것은 가화합이라 산소, 수소, 질소, 탄소, 이런 것들이 세포의 성분이 돼서 이와 같이 모여 있습니다.


중생의 업력기관으로 해서 종중연생(從衆緣生)이라, 뭇 인연 따라서 이렇게 생겨났는데 이것이 사실은 실체가 아닙니다. 가짜인 각각의 원소가 임시로 잠시간 화합된 것이고, 화합돼서는 잠시도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번뇌(煩惱)가 무엇인가 하면 이 몸뚱이 이것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물리학을 회상(回想)을 해 보십시다. 대체로 내 몸이 무엇인가? 내내야 각 분자(分子)가 합해서 되었습니다. 또 우리가 죽어진 다음에는 어떨 것인가? 이것은 결국 산소는 산소대로, 수소는 수소대로 다 흩어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눈에 안보이는 것이므로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는 사람들은 그때는 영()을 부인합니다.


엄마의 태안에 안착할 때도, 그것을 하나의 물질로만 생각한 사람들은 들어오는 영혼이 안보이는 것이므로 다만 부모님의 피가 결합되어서 하나의 생명이 나왔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렇게 안보는 것입니다.


도인들이 물질 저쪽 세계를 보는 안목에서는 그렇게 안봅니다. 분명히 하나의 생명이 있다가 생명이 과거에는 사람이 되었다가 무엇 되었다 했겠지요. 즉 말하자면 헤매다가 마치 지금 귀신이 헤매듯이 말입니다. 헤매다가 마침 부모님의 그런 생명의 파장과 맞닫으면 인연 파장이 서로 맞으면 그때는 걸려서 온단 말입니다.


와서 살다가 죽어지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몸뚱이는 결국은 다 각 원소로 이렇게 분해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그때는 다시 영체는 남습니다. 금생에 내가 어떻게 살았던가? 금생에 얼마만큼 내 영혼이 성숙되었는가? 성숙된 정도만 그것이 남습니다.


저희들은 매일 지금도 구병시식(救病施食)을 합니다. 어디가 아프고 하면 부처님 법으로 해서 귀신들을 떼내는 것도 하고, 될 수록 보조해서 낫도록 하고, 또 인연이 닿으면 즉각 약을 쓰지 않아도 낫기도 합니다. 대개 젊어서 죽은 혼실들은 총맞아 죽었다던가 갑자기 교통사고 만나서 죽었다던가 이런 혼신들은 바로 못 갑니다. 나이가 많이 먹어서 자기가 사생관(死生觀)에 투철하고 자기 갈 곳을 아는 사람들은 그냥 바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가는 곳은 영혼의 성숙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아주 나쁜 영혼들은 저 밑으로 뚝 떨어져서 그야말로 참 지옥같은데로 분명히 가는 것이고, 지금은 불교를 믿는 분들도 지옥, 아귀, 그러면 부처님께서 하나의 방편으로 말씀했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안보이는 인간의 제한된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에 분명히 영체(靈體)로 해서 지옥중생이 있는 것입니다. 귀신이 분명히 있듯이 말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귀신이 의심스러우면 점쟁이들을 몇 사람 만나서 이야기해 보십시오. 일반 점쟁이들은 분명히 귀신을 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은 뒤에 몸을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진다 하더라도 결국은 심식(心識)은 남습니다. 앞서 말한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 암마라식은 남습니다.


마음이 생명의 본질


불성(佛性)은 가장 본질이기 때문에 조금도 중단이 없지요.


그 몸뚱이에 대한 애착 때문에 인간이 여러 가지 고난도 많이 받고 시비도 많이 있습니다. 결국은 자기 몸뚱이를 보배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죄악의 씨앗이 생깁니다. 자기 몸을 보배같이 아낀단 말입니다. 손가락에 반지를 몇 개나 끼는 것도 몸뚱이를 아끼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여튼 몸뚱이 이것은 물리학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뻔한 것이고, 영양을 좀 잘먹여 주면 힘이 더 날 것이고, 덜 먹여주면 덜 나오고 하겠지요.


몸뚱이 그것은 생명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의 외피(外皮)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 몸뚱이에 애착을 못버리면 신앙생활(信仰生活)은 절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나 기독교에서 다같이 고행(苦行)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무슨 필요로 요단강 하반 그 광야에서 40일이나 금식기도를 했겠습니까. 밥 한끼도 굶기 어려운 것인데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은 좀 깊이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이 몸뚱이 꼭 무슨 칼로리를 얼마를 먹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단식을 해보면 짐작이 갑니다. 월남의 메디콩 스님은 반체제에 저항하던 중 정부로부터 구속당해서 옥중에서 백일 동안을 단식을 했습니다. 옥중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아니겠지요. 옥중에서 물만 먹고 백일 동안 살았는데 그것도 그냥 지내는 것이 아니라 조석으로 두 시간씩 하루 네 시간 염불(念佛)을 했습니다.


우리 생명은 우리 마음 식()에가 있습니다. 몸뚱이는 하나의 보조에 불과합니다. 영양도 보조에 불과합니다.


저도 40대에 광주 동광사 지도법사로 몇 개월간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보름동안 단식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가서 법문을 했었습니다만, 법문에 갈려고 하면 옆에서 만류를 한단 말입니다. 보름동안 단식하고 가서 쓰러져버리면 어쩔거냐고 합니다. 제가 평소에 말더듬이 있습니다만 보름동안 단식하고 나서는 제 평생에 말 한번 처음으로 잘 해 보았습니다. 한번도 말이 더듬지 않고서 잘 나온단 말입니다.


어떤 누구나 단식을 하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튼 생명 자체 본질은 마음, 즉 식에가 있지 육체에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분리 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에 몸이 즉 마음이요, 마음이 즉 몸이라. 몸이 건전하면 마음도 건전하고 몸이 취악하면 마음도 취악하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가 두고 볼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하여튼 몸은 우리 마음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눈썹 하나, 치아(齒牙) 하나 모두가 다 우리가 지은대로 생긴 것입니다. 관상(觀相)을 보는 사람들은 성품을 압니다. 머리 색깔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을 압니다. 그렇게 중요하게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말이 너무나 빗나갔습니다. 우리 마음 이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마음 이것이 우주의 본 바탕이고 우리 인생의 본 바탕이고, 몸 이것은 거기에 한시적으로 50년, 80년 인연 따라서 쓰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몸뚱이에 우리가 너무나 봉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몸에 너무 지나치게 봉사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 몸뚱이는 좋고, 남의 몸뚱이는 허수히 여긴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는 좋으므로 자기 권속인 아내, 남편, 자식의 몸뚱이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그야말로 싸움의 바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종에 불과한 것이고, 다시 말하면 소리에 따르는 메아리, 형체에 따르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만이 자기 몸뚱이에 대해서 지나친 집착을 안합니다. 지나친 집착을 말라는 이것이 불교의 이른바 고행생활(苦行生活)입니다. 따라서 저희같은 수행자(修行者)는 무얼 만이 먹는 것을 좋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옷도 제일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제일 높은 중이 아닙니다. 될수록 골라서 누더기를 입습니다. 가장 못 먹고, 가장 못 입고, 가장 못살면서 정신적인 면만 최고도(最高度)로 생활하는 것이 그것이 이제 출가 수행자의 본분(本分)인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에 사의지(四依止)라! 가장 알찬 행동 네가지를 보면 첫째 분소의(糞掃衣)라, 우리 옷은 똥 밑씻개나 할 수 있는 그런 누더기를 주어다 깨끗이 빨아 누벼서 옷을 해 입고, 수하좌(樹下座)라, 집 가운데서 자지 말고 항시 나무 밑에서 자고, 상걸식(常乞食)이라, 항시 얻어서 먹고, 얻어서 먹더라도 많이 먹지 말고 주먹밥으로 하나나 되게 먹습니다. 부란약(腐爛藥)이라, 병이 생겼을 때는 길거리의 소똥을 발효시켜서 만든 약만 먹습니다. 그것이 수행자의 표본입니다. 그와 같이 청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근기가 같지 않기 때문에 또 집단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절이 생기고 했지요. 그러나 기본 정신만은 잃지를 말아야 수행자가 청빈과 경건한 생활을 할 수가 있겠지요.


아무튼 우리 마음 이것이 하나의 우주 본체이고, 비록 이렇게 몸이 되었다 하더라도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의 불성이 그때그때 연 따라서 우로 선회하면 전자가 되고 좌로 선회하면 양자가 되고 그런다 하더라도 전자면 전자, 양자면 양자,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전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불성은 조금도 훼손이 없습니다. 불성이 좌로 진동해서 양자가 되고 중성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역시 양자, 중성자 그걸로 굳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파동이기 때문에 찰나고 머물지 않고 변하고 있습니다. 고정됨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성 차원에서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순금으로 가락지를 만드나 무얼 만드나 순금의 성품은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불성 이것은 산소가 되나 무엇이 되나 또는 성분이 되어서 우리 몸을 구성하나 또는 빛도 안나는 쇠뭉치가 되나 무쇠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불성 차원에서는 변질이 없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인연 따라서 천차만별로 모든 것이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사람도 예쁜 사람, 미운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불성은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변질이 없으므로 불성까지를 볼 수 있는 명확한, 아주 영롱한 안목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다 그때는 하나의 불성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돼도 불성은 변함이 없고, 무쇠가 돼도 변함이 없고, 가사 아주 더러운 똥이 되어도 변함이 없기 때문에 여느 스님이 운문(雲門) 스님한테 여하시불(如何是佛)잇고? 똥마른 막대기라! 부처가 무엇인가를 물을 때는 그야말로 초월적이고 존귀하고 이렇게 생각하고 물었겠지요. 그런데 운문스님 도인이 보았을 때는 부처는 존귀한 것만이 아니라 똥이나 무엇이나 모두가 다 부처이니까 똥마른 막대기라 했습니다.


이렇게 탁 내 쏘아 버렸단 말입니다. 그렇게 말을 듣는 사람은 부처라는 것은 그렇게 아주 위대한 것인데, 왜 똥마른 막대기일 것인가? 이렇게 의심하는 그걸로 해서 마음이 모아집니다. 마음이 모아지면 집중돼서 마음이 트입니다. 마음이 트여서 더욱 집중해서 모아지고 깊이 파고 들어가면 그때는 그야말로 확 트이는 것입니다. 확 트이면 그때는 깨달아 버립니다.


그러면 그때는 불성이 훤히 보이니까 똥이나 먼지나 모두가 불성으로만 보이므로 똥마른 막대기를 부처라고 했구나, 그때는 확연히 알 수가 있게 되겠지요. 아무튼 이와 같이 천지우주(天地宇宙), 산하대지(山河大地), 두두물물(頭頭物物), 준동함령(蠢動含靈)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모두가 다 불성 아님이 없습니다.


이것보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이 문구는 꼭 외워 두십시오. 때릴 타()자, 이룰 성()자, 한 일()자, 조각 편()자. 오직 우주를 하나의 걸로 딱 통일시켜 버린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굉장히 편한 것입니다.


전자(電子)는 무엇이고 양자(陽子)는 무엇이고 또 소립자(素粒子)는 무엇이고 너무나 정보(情報)가 많으니까 죽을 지경인데 다 하나로 모아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하나의 걸로 통일시켜 버리면 참 편한 것입니다. 하나의 걸로 통일시키는데 어줍잖은 것으로 통일시키면 사나울 것인데 가장 좋은 불성(佛性)으로 통일시키니 그것이 참 좋지요. 불성 그것은 그렇게 행복도 충만하고, 진여, 법성, 실상, 보리, 도(), 열반, 극락, 중도, 각(), 주인공 다 완전무결한 하나의 불성이므로 그야말로 모두가 다 통일이 됩니다.



부정관, 자비관, 인연관


따라서 우리가 수행하는 방법도 부처님 당시는 벌써 2500년 세월이 흘러갔기 때문에 그때 인도 지방은, 지금도 문맹이 많습니다만 그 당시는 굉장히 무식쟁이 판국이 되었겠지요. 노예 계급도 있고 했으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는 고도한 법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법공(諸法空)이라, 또는 일체만유(一切萬有)는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라 이렇게 말해도 알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분명히 자기 몸뚱이는 좋게 보아서 먹거리를 좋아하고 중생들이 의식주(衣食住) 떠나서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무식한 때라서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초기 법문은 쉽습니다.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런 중생 차원에서 될수록 나쁜 짓 하지 말고 좋은 일하고, 즉 낮은 차원의 윤리만을 주로 말씀을 했습니다. 맨 처음에는 수행법도 부정관(不淨觀)이라, 사람 몸에서 나오는 것은 눈물, 콧물, 오줌, 침 모두가 더러운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미인(美人)이라 하더라도 껍질을 벗겨 놓으면 미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껍질을 둘렀으니 예쁘게 보이는 것이지 껍질을 벗겨 놓으면 내내야 살덩어리고 선지피만 흐르고 하겠지요. 하기 때문에 인간의 몸뚱이 이것은 더러운 것뿐이다. 이렇게 관하는 것이 이른바 부정관(不淨觀)입니다.


어째서 부정관을 시켰는가 하면은 사람들이 너무나 자기 몸뚱이만 생각해서 죄악을 범하므로 무식한때는 응당 그렇게 해야 하겠지요. 부정관이란 우리 몸속에서 눈물, 콧물, 오줌, 똥, 피, 고름 생각할수록 더러운 것뿐이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또 죽어지면 자기 식구들도 보기 싫어하고 결구 썩어서 가는 것이고 또 불로 태우면 재만 남는 것이고 이 몸뚱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염된 것뿐입니다. 어머니 태안에서는 뱃속의 더러운 속에서 지냈고, 또 지니고 나왔고, 아무튼 씨앗부터 죽은 뒤까지 사뭇 더러운 것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중에는 이 몸뚱이에 집착할 필요가 없구나! 이것 때문에 내 생명을 낭비할 필요가 없구나! 이렇게 해서 부정관 공부가 익어지고 차츰차츰 마음이 깊이 들어가면 욕심이 줄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성 쪽으로 접근되면 된만큼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희미해지면 그만큼 법을 더 아는 것입니다. 가사 법문도 꽝꽝하니 막혀 가지고 모르다가도 스승한테 안배워도 가슴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하고 눈이 시원하면 그때는 퍼뜩퍼뜩 지혜가 나옵니다.


어제는 대학도 나오고 공부도 많이 한 30대 성년 한 분 왔어요. 그런데 그 분 말이 조리가 딱 섭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까 선신(善神), 하나의 신장(神將)이 지키어 있단 말입니다. 접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 의식은 선신보다는 차원이 조금 더 밑이 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모르는 것을 선신은 다 아는 것이고, 귀신 중에는 사람보다 훨씬 미련한 귀신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귀신은 몸이 없어 놓아서, 사람은 몸에 집착이 있고, 또 몸에 가려서 잘 모르는데, 몸만 없으면 훨씬 더 아는 것입니다.


가시 미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태 같은 것도 사실 귀신들은 본다 말입니다. 확실히는 못보아도 어렴풋이는 귀신은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몸이 없어서 시공에 대한 제한을 안받는 것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그와 같이 신비에 차 있는 것입니다. 귀신이나 사람이나 모두가 다 근본 성품은 불성이기 때문에 이런 몸뚱아리의 장애만 떠나버리면 그때는 그렇게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는 탐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몸이 더럽다는 부정관을, 또 진심(瞋心)이 많아서 조금만 기분 사나우면 핏대를 올리고 남을 증오하고 그런 사람들은 자비관(慈悲觀)을 시켰습니다. 자비관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단 말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을 항상 생각합니다. 친근한 사람들은 생각하다 보면 그때는 좋아하는 마음이 잠재의식에 박혀서 점점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와같이 진심이 많은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부터서 생각해서 자비심을 더욱더 확장을 시킵니다.


이치를 모르고 미련한 사람들은 인연관(因緣觀)이라, 중생들은 보통 원인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보고 따집니다. 무슨 사태가 일어나면 그 결과만 보고 그렇게 선악을 판단하고 남을 경계하고 심판을 합니다. 그러나 원인을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 즉 인과를 가려서 생각하는 것이 이제 그렇게 하다보면 차근차근 마음이 트여 갑니다. 내내야 부처님 법은 인과를 따지는 것입니다. 인과를 따져 가시다 가장 시초의 원인이 무엇인가? 이른바 제일 원인이 무엇인가? 제일 원인이 바로 불성입니다. 인과를 거슬러 올라가고 올라가고, 물질도 분석하고 분석하고, 알갱이를 나누고 나누다 보면 결국 모두 텅 비어 버리는데 텅 빈 에너지가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불성이 되어버립니다. 사람 몸도 마찬가지고 우리 생각, 의식도 집중하면 할수록 제칠 말나식, 제팔 아뢰야식, 제구 암마라식 이렇게 깊어져서 결국 부처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어느 면으로 보나, 하나의 티끌로 보나 하나의 물질로 보나 무얼로 보나 결국은 모두가 다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그 원자의 근본 뿌리가 불성이기 때문에 분석해 들어가면 끄트머리 가서는 불성이 다 되어버립니다.


그와 같이 인과(因果)를 가리는 것이 인연관(因緣觀)인데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도 무명(無明)이 무엇인가? 무명은 문자 그대로 잘 못보는 것입니다. 어둡단 말입니다. 밝게, 훤히 보면은 불성광명(佛性光明)은 훤히 천지를 다 비추는 것입니다. 천지를 무장무애(無障無?)로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꼭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도 공부의 조도에 따라서 크고 작곤 합니다.


공부가 차근차근 깊어지면 정말로 지금은 안보이지만 부처님 광명은 인간성의 본 광명은 우주를 훤히 비춘다. 이와 같이 확신이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공부가 잘 돼 가면 또 맑을 때는 그냥 저 쪽도 볼 수 있는 것이고, 이른바 천안통(天眼通)이라, 분명히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해서 볼 수 있습니다.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천문학(天文學)은 천안통을 통해야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천안통을 했으므로 지구의 내면, 화성의 내면, 수성의 내면, 또 각 성수의 질량, 열량을 전부 다 수치로 나타낼 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소중합니다. 우리는 인간성의 소중함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마음인데, 우리가 애쓰고 지어서 점점 멀리 한단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멀리 하는가? 이놈의 몸뚱이 때문에 멀리합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이 몸뚱이가 하도 싫으니까 자기 스스로 칼로 찔러서 죽기도 하고, 나중에 부처님께서 그래서는 안된다 하니까 자살은 금했습니다만 사실은 자기 몸뚱이 더러운 것을 생각하면 짜증이 납니다.


그러나 그것만 생각하면 당장에 죽고싶은 생각이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본 바탕은 부처이므로 한 생각 바꾸면 그야말로 무한한 세계가, 천안통도 하고 천지우주를 다 삼킬 수 있는 그런 지혜가 누구한테나 다 갖추고 있는 것인데, 그러니까 그 쪽에 우리 비젼을 두면 비로소 인간이 살맛이 있겠지요.


이와 같이 부처님 초기에는 눈으로 보이는 경계에서 수행방법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염불(念佛)도 부처님을 찾고자 해서 하는 것이므로 이름 -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똥마른 막대기라는 화두(話頭)를 들고서도 마음을 통일시킬 수가 있는 것인데 하물며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마음을 집중 못시킬 까닭이 없겠지요. 가장 하기가 쉽지요. 이 세상의 개념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이름이 부처님 명호입니다.


어느 공부 열심히 하시는 불자님 말씀이 제가 들었습니다만 그 이는 아직 나이도 젊은 분인데 이런 말을 했어요. '저의 평생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불러도 너무나 짧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한 평생 아무것도 안하고 '나무아미타불' 또는 '관세음보살'만 해도 너무나 짧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주 젊은 사람이 참 귀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수행법이 많이 있습니다만 방편설(方便設)은 직통으로 바로 불성을 말씀 못하고 현상적인 문제에 의지해서 불성 쪽으로 가는 방법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방편을 떠난 진실설(眞實說)은 수승한 근기가 있고 이론도 있고 교양도 있고 또 본체를 이야기 해도 알아 먹을만한 정도가 되면 그때는 본체성을 즉 불성을 바로 집어서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불교 말로 교외별전(敎外別傳),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 밖에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바로 마음 딱 집어서 이야기합니다. 그대가 학식이 있고 그대가 몸도 있고 그대가 여러 가지 이론 체계도 많이 있지만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와같이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그대가 지금 남을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고, 그렇게 분별하는 그 마음 바로 부처다. 이와 같이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곧 직()자, 가르킬 지()자, 사람 인()자, 마음 심()자. 그 사람 마음 딱 집어서 그냥 그대로 이 마음 바로 부처다! 그런 법문이 고등 법문이지요. 수행법으로 너절하게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 체계가 많이 있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가 우리 중생들이 마음이 중요한 줄을 모르고서 항시 겉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므로 이제 모두가 허깨비요, 꿈이요, 공이요 해가다가 중생 근기가 익어지면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고 합니다.


지금 나투어 있는 산도, 풀도 이렇게 누렇고 푸르고 한다 하더라도 누렇고 푸른 그것이 중생이 보아서 누렇고 푸른 것이지 그것도 역시 바로 보면 불성, 즉 부처입니다. 이른바 당체즉시(當體卽是)라! 산이면 산, 물이면 물, 또 티끌이면 티끌 그 당체즉시라. 당체 그대로 부처란 말입니다. 다만 중생은 잘 못 보지만 성자는 당체 그대로 부처로 봅니다. 이렇게 하는 법이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지관론과 보리방편문



그래서 여기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조금도 군더더기 없이 여실히 하신 법문입니다.


연원(淵源)은 제 2의 석가(釋迦)라 하는 용수보살(龍樹菩薩)께서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삼매(三昧) 가운데 즉 선정(禪定) 가운데 - 깊은 선정에 들면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보는 것입니다. - 그런 가운데 용수(龍樹) 성자(聖者)로부터 이렇게 감응(感應)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라디오나 텔레비젼의 전파들을 생각해 보시면 짐작이 가십니다만 가사 십만년전에 누군가가 말을 했다 하더라도 정말로 정밀한 레이더와 컴퓨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우리가 다 포착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물리학도 그렇게 말을 합니다.


따라서 도인들이 삼매에 들면 몇천년전의, 미래의 일도 충분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저같은 사람은 아직 천리 만리라서 어림도 없지요만,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부처님은 모두를 다 알고 모두를 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믿어야 진실한 불교 신앙인(信仰人)입니다. 원래는 우리 인간성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금타대화상 그 어른께서 삼매중 선정 가운데서 용수보살로부터 현대 지성적인 시대에 알맞은 가장 고도한 수행법이라고해서 전수 받으신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할 수가 없겠지요. 저도 직접 보지 않았으니가 확실히는 모르지요. 다만 확신을 할 뿐입니다.


부처님의 수행 체계를 가장 잘 세우신 분이, 부처님 교리를 종합적으로 가장 잘 세우신 분이 중국의 천태지의(天台智?) 스님입니다. 천태지의 스님은 마하지관(摩訶止觀)이라는 20권의 책을 냈습니다. 마하(摩訶)란 말은 인도말로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지관(止觀)은 그칠 지()자, 볼 관()자. 마음 공부는 선정(禪定)과 지혜(慧)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불교와 참선은 아주 번쇠하고 난해합니다.


그러나 참선공부는 인류 문화사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가장 고도한 수행법을 단 몇시간 동안에 윤곽을 잡을려고 하면 사실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들어 두셨다 나중에 가시면 감()이 잡히실 것입니다. 이 마하지관(摩訶止觀)은 위대한 지관법으로 그칠 지()자, 산란한 마음을 딱 그치어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말이고, 볼 관()자, 이것은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비추어 보는가? 우리 본성(本性), 무명에 가리여 지금은 바로 못 보나 부처님 말씀에 따라서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불성(佛性)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영생하며 또 불성 가운데는 물질적인 질료는 아무것도 없고 시간성, 공간성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리고 일체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갖춘 하나의 광명(光明)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을 했으니 우리 중생이야 엄두도 못 내지만 부처님 말씀 따라서 확신해서 비춰 봅니다.


현대는 물리학적인 지식을 동원시키면 어느정도 납득이 갑니다. 항시 학교에서 배운 물리학적인 지식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확실히 물리학과 수학은 철학을 할 때도 굉장히 필요합니다. 저는 원래 수학을 많이 못해서 철학 서적을 보면 막혀서 이따금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확실히 물리학적인 소양은 지금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굉장히 필요합니다.


현대는 이론과 실험 과학의 체계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물리학을 모르면 아주 불편한 셈이지요. 지금 물리학도 일체 물질을 파괴하면 에너지라는 광명(光明)만이 남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른바 소립자(素粒子)의 파동설(波動說), 입자설(粒子說) 말입니다. 전자(電子)는 무엇인가? 극소화시키면 광자(光子), 즉 광입자 아닙니까. 전자라는 아주 미세한 알맹이를 극소화 시키면 결국은 하나의 광자입니다. 하나의 광명체(光明體)입니다. 우주에는 지금 이러한 광자가 충만해 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볼 때도 말입니다.


물질을 분석하고 분석하면 저 저변에는 파동, 빛입니다. 지금 우주 공간에는 빈틈도 없이 광자로 충만해 있습니다. 광입자로 말입니다. 저 성층권 밖 무한한 우주 공간에도 일체의 장 에너지가 충만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생각할 때 정말로 부처님께서 우주가 불성 뿐이다. 부처님 뿐이다. 하신 말씀도 물리학으로 비추어 본다 하더라도 거짓말이 아니구나! 이렇게 지금 현대인들은 알 수가 있습니다. 근원적인 것은 하나의 생명의 성역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마하지관은 우리 산란스러운 마음, 좋다, 궂다 하는 마음, 모두 그런 것들이 허망한 것들이므로 허망한 것을 우리가 부정 안해 버리면 참다운 것이 그때는 못나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경전 가운데서 양적으로 가장 비중이 많은 것이 공사상(空思想), 제법공(諸法空)입니다. 이른바 금강경 도리를 22년간이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도 허망하고, 꿈이요, 허깨비요. 몇 번 들으면 듣기가 싫겠지만 중생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니까. 그 당시에 무슨 원소 이론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이 몸뚱이는 이와 같이 고유하게 그대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한 순간도 일초의 몇만분지 일초도 이 몸뚱이는 그대로 있지가 않지만 그것을 모르고 고유하게 있다고 보는 때라 놔서 좀처럼 중생들이 몸은 허깨비같다, 꿈같다 해도 못 알아먹는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우리 중생들이 보고 있는 현상계가 허망하고 메아리고 그림자고 한다는 것을 22년간 고구정녕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육조단경(六組檀經)에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했습니다. 천지 우주가 물질로 꽉 차 있는데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한단 말입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이것도 역시 물리학을 좀 하신 분들은 그냥 생각이 되십니다. 물질은 에너지의 파동 뿐인 것이지 물질이 아닌 질료가 없는, 다시 말하면 공간성도 없는 에너지의 진동, 즉 파동이 그렇게 물질로 보이는 것입니다.


어젠가도 말씀 했습니다만 우리가 횃불을 이렇게 빙빙 돌리면 불 동그라미가 생깁니다. 그러나 불 동그라미가 실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각의 잔상에 의한 착각 때문에 그와 같이 불 동그라미가 있어 보인단 말입니다.


세포들이 합해져서 모여 있으니까 이와 같이 사람 몸뚱이로 보이는 것이지, 세포도 역시 보다 미세한 것들에 의한 불 동그라미 같은 모양만, 파동만 있는 것이지 실재로 공간성이 없단 말입니다.


가장 미세한 원자를 생각해 놓고 보십시오. 원자도 원자핵을 중심으로 주위에 전자들이 돌고 있습니다. 어떠한 존재나 모두가 다 원자로 안 된 것이 없는데 우리가 분석해 놓고 보면 원자 그것이 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들이 돌고 있습니다. 전자가 몇 개나 도는가에 따라서 산소, 수소, 질소요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원자핵을 전자 하나가 돌면 그것이 수소(水素)입니다. 그런데 그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느 전자와의 사이는 텅 비어 있습니다. 원자핵와 전자 사이가 태양과 지구와의 사이, 태양과 지구 사이는 텅텅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태양과 지구 사이의 빈 공간의 비율보다 원자핵과 전자 사이의 공간의 비율이 더 큽니다. 태양과 지구와도 이렇게 텅텅 비어 있는데 모든 물질의 근원이 되어 있는 원자 속이 텅텅 비어 있단 말입니다. 또 다른 원자와 다른 원자 사이도 텅텅 비어 있습니다. 그런 비어 있는 것들이 모여서 우리 몸도 구성하고 물질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 몸을 가리켜서 공취(空聚)라! 빌 공자, 모를 취자입니다. 하여튼 부처님 말씀은 그야말로 한없이 감사합니다. 공취라, 텅 빈 하나의 공 무더기란 말입니다. 텅 빈 공이 모여서 우리 세포가 되었습니다. 근본 원자가 비었거니, 앞서 말씀드린 원자핵은 무엇인가? 핵도 내내야 에너지가 진동해서 돌고 있는 파동에 불과합니다. 전자 역시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모두가 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물질화(物質化) 되서 물질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뿌리에서 보면 에너지뿐입니다. 근본 본질에서 볼 때는 중생이 되고 무엇이 되고 했다 하더라도 본 바탕에서 보면 모두가 부처 뿐입니다.


중생들이 텅 빈 것인데 그 몸뚱아리가 텅 빈 줄을 모르니까 그와같이 22년 동안이나 부처님껫 반야(般若) 공사상을 설하셨습니다. 금강경에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다고 하는, 상()은 결국 현상(現象) 아닙니까. 잘나다 못나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개도 소도 있고 그런 것이 상인데, 상이 없다는 것을 쳐부수기 위해서, 상이 없으면 불()이요 도()요 성자(聖者)요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상이 있으면 범부(凡夫)고 중생(衆生)입니다. 그렇게 구분은 간단 명료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관조(觀照)할 때는, 비춰 보는 것은 무엇을 비추어 보는가 하면, 초기에는 사람들이 아직 미숙한 때라 태양도 보라하고, 서산(西山)에 뉘엿뉘엿 지는 황혼도 보라하고, 이렇게 아주 영롱한 물도 보라하고, 영롱한 물을 자주 보면 혼탁한 마음이 그 인연 따라서 맑아 옵니다. 서산에 넘어가는 석양 그 장엄스러운 태양을 자주 보면 마음이 텅 비어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대적인 것에 인연을 짓게해서 그걸로 해서 우리 마음을 관조해서 통일 시키는 법을 처음에는 썼습니다. 초기 불경에도 그러한 법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올라가면 법당에 있는 거룩하신 부처님을 애쓰고 본단 말입니다. 마리아 상()을 보고, 부처님 상을 보고 그러면 우리 마음이 그만큼 모아집니다.


이렇게 형상(形象)으로 보고는 관조하는 법을 익히기도 했지만 형상은 허망한 것이고 참다운 실상(實相)은 모양이 없다. 가장 고도한 형상은 모양이 없는 순수한 생명입니다. 이렇게 순수한 생명을 이제 인정할 정도가 되면 그대는 이관(理觀)이라, 마음의 원리를 보게 만듭니다. 천지 우주는 불성 뿐입니다.


앞서 마하지관(摩訶止觀)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은 지()고, 마음을 어떤 경계에다 놓고 비추어 보는 것은 관()입니다. 가장 위대하기 때문에 마하지관이라 합니다. 따라서 그대는 에누리가 없이 불성 자리에 마음을 딱 붙여 버립니다. 그것이 천태지의선사가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 모아서 한 체계로 묶어서 제일 지혜가 수승한 사람한테 제시한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어려워서 잘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하지관 수행법하고 이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수행법하고는 비슷비슷합니다.


그 관계를 말씀드립니다만 제가 보는 견해로는 보리방편문이 훨신 더 우수한 것같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마하지관은 마음을 공(), 가(), 중() 그렇게 봅니다. 공은 마음으로 보는 모든 것이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의식은 실존을 못봅니다. 물 자체를 못 봅니다. 못 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은 물 자체가 아니고 결국 모두가 사실이 아닌 가()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비었다는 것이 공이고, 모두가 가상(假相)이라, 거짓 가()자 가입니다. 그러나 텅 비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공이 아니라 무엇인가 일체 존재가 이루어지는 모든 가능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가운데 중()자 중입니다. 중() 이것은 공과 가를 다 포함해 있습니다.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색도 아니고, 그와 같이 다 통하기 때문에 중도(中道)입니다. 천태지관에서는 이렇게 봅니다. 지의선사의 마하지관법은 굉장히 난해한 법문입니다.


보리방편문은 마하지관과 약간 비슷합니다만, 그러나 천태지의선사의 공가중(空假中)은 불성을 논리화시켜서 보았기 때문에 생명적인 역동성(力動性)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생명(生命)을 화석(化石) 시키지 않고서 생명 그대로 공부하는 법이기 때문에 더 우수하다는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다.


너무 전제(前提)가 길어졌습니다만 보리방편문의 체계를 말씀하겠습니다. 이 보리방편문의 구성을 보면 여기 마음 심()이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 바로 부처님임을 설파했습니다. 우리 불교의 대요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해서 그렇게 간명하게 말씀이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법문이 대체로 심즉시불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말씀을 다 합니다.


지금 이렇게 못나고 좁은 마음이 어떻게 부처일 것인가? 이렇게 회의(懷疑)를 품습니다만 이것은 우리 마음의 표면이 불과하고, 우리가 쓰는 나요, 너요, 좋다, 궂다 하는 그 마음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우리 마음의 저변은 무한대로 우주를 감싸 있습니다. 김()가 마음도 천지우주(天地宇宙)를 감싸안고, 박()가 마음도 역시 천지우주를 다 감싸 있습니다. 이것은 시공(時空)을 초월(超越) 무장무애(無障無?)한 마음, 즉 영체(靈體)라 놔서 그때는 중복(重複)이 돼도 하등의 장애가 없습니다. 무장무애라! 박가 마음, 김가 마음 모두가 똑같이 천지우주를 다 감싸 있습니다. 그런데 범부들은 마음을 빙산의 일각 모양으로 겉에 뜬 표면의식(表面意識)만 사용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놈의 몸뚱이에 꽉 가려서 이 몸뚱이의 한계(限界)밖에는 못 사용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문은 그 몸뚱이에 갇혀 있는 마음을 잘 느끼고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이 아()라는 것에 갇혀 있는데 이 마음을 해방시켜서 본래 마음 자리로 환원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佛敎)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런 마음이라 할망정, 이것은 부처가 다 된 마음이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이 마음! 이 마음이 결국은 알고 보면 그때는 바로 부처입니다. 이 마음 바로!


마하지관(摩訶止觀)의 책도 보고, 천태학(天台學)도 보고 논쟁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논쟁을 나중에 안하기 위해서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 그 심즉시불(心卽是佛)하면 보통 심()이 아니라 도인(道人)의 심을 말하는 것이다. 또는 어느 분은 도인의 그런 마음이 아니라 우리 중생심(衆生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심즉시불의 논쟁입니다. 도인(道人)의 마음이 바로 부처이지 어째서 중생 마음이 부처일 것인가? 이렇게 주장한 분도 있고, 중생 마음의 본 바탕이 결국 부처이기 때문에 중생 마음 그대로 부처라 해도 조금도 오류가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두 파가 생겨서 굉장히 싸움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중생마음이 부처라는 논법이 이겼습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



+-如來 眞我


+-法身 … 淸淨法身毘盧遮那佛 … 空 … 陀 -+ | 眞如 涅槃


| | | 法性 極樂


心 | 報身 … 圓滿報身盧舍那佛 … 性 … 彌 | … 佛 … | 實相 一物


| | | 菩提 中道


+-化身 … 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 … 相 … 阿-+ | 道 覺


+-大我 主人公



유()로 말하면 태양(太陽)의 체()는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 해당하고, 태양광명(太陽光明)은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에 해당하고, 태양광선의 그림자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에 해당합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물질이 아니고 우주 가운데 텅 비어 있으니 공()이라 하고, 그 공 가운데는 일체 존재를 일으킬 수 있는 본 성품(性品) 원만보신 노사나불이 충만해 있으니 성()이라 하고, 또 이 자리에서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인 일체현상이 나오므로 상()이라 합니다.


앞서 천태지의 스님의 공(), 가(), 중()을 배대하면 정확히는 좀 문제가 있으나, 이것은 중도(中道)의 중()에 해당하고, 이것은 가()에 해당하고, 이것은 공()에 해당하지요. 이것은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배대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자리는 아미타불의 타()에 배대하고, 원만보신 노사나불은 아미타불의 미()에 배대하고, 일체존재 일체만유를 아미타불의 아()에 배대를 시켰습니다. 따라서 천백억화신 아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고, 청정법신 공만 따로 있지 않고, 가사 우리가 하나의 불빛을 이렇게 볼 때 겉으로 보이는 것은 아()인 불빛이지만 그 안에는 결국 성()과 공()이 다 들어 있습니다. 또 그 반대로 공 가운데도 공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성과 상이 다 있습니다. 소위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말입니다. 또 삼신(三身), 법신, 보신, 화신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신일불(三身一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아미타불은 소박하니 방편적으로 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방편을 떠나서 제일의적으로 해석할 때는 아미타불은 천지 우주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무엇인가? 관세음보살은 천지우주인 아미타불의 자비(慈悲)의 상징입니다. 또 문수보살(文殊菩薩)은 무엇인가? 천지우주 아미타불의 지혜(智慧)가 바로 문수보살입니다. 그렇게 부처님 이름이 많지만 모두가 다 뿔뿔히 있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하나의 개념으로는 표현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덕 따라서 그때그때 이름이 붙습니다.


중생의 병고(病苦)를 다스릴 때는 약사여래(藥師如來)라. 또 하늘에 있는 각 성수들, 별들을 다스릴 때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칠성여래(七星如來)입니다.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 그와 같이 돌멩이나 티끌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번에 말하면 바로 마음이 부처인데, 마음 그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달마대사(達磨大師)의 관심론(觀心論)을 보면 마음을 맨 처음부터서 풀이 했습니다. 인간성이 무엇인가? 마음 그것이 기묘한 것이어서, 우리 마음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참 별것도 아닌데 결국 마음 파고 들어가면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암마라식(菴摩羅識)이고 결국은 부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결국은 들어가면 다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산이요, 냇이요, 티끌이요, 또 원소요, 소립자요, 내내야 들어가면 결국은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은 우주의 순수 생명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에도 모두 이것이 똑같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을 보면 우주라는 것은 종횡(縱橫)으로 얽히고 설키고 딱 묶여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입니다. 하나의 생명 덩어리인데 나만 잘 살고 남이 못살면 균형이 깨집니다. 균형이 깨지면 틀림없이 그때는 무슨 소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지 우주의 도리에 맞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맞게 살려고 하면 될 것인데 우리 중생은 앞서 말씀과 같이 겉만 본단 말입니다.


본래 하나인줄을 본다고 생각하면 균형있게 살수가 있을 것인데, 속은 못 보고 겉만 보니까 이놈의 모양만 보고, 자기 몸뚱이도 사실은 자기 것도 아닌데 권력이고 무엇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을 불경에서는 그때그때 중생의 근기 따라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합니다. 보리(菩提), 도(), 열반(涅槃), 법성(法性), 실상(實相), 여래(如來), 이것이 원래 우리 주인공(主人公)이기 때문에 주인공, 본래면목(本來面目), 진여(眞如), 극락(極樂) 모두가 다 결국 부처라는 하나의 별명에 불과합니다.


이명동의(異名同意)라. 이른은 다르고 뜻은 같습니다. 그러니까 불경을 볼 때 이렇게 나오고 저렇게 나오고 하면 무엇이 무엇인지 잘 몰라버립니다만 결국은 다 불성을 말해 있습니다. 간단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어떤 때는 현상만 가지고 상만 말해 있는 법문도 있고, 어떤 법문은 체만 말한 법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상만 말한 법문을 보면 성과 체는 잘 몰라버립니다. 그래서 옛날 소박할 때는 그렇게 상만 말하는 법문이 다 통할 수가 있었으나, 지금 현대는 일반 철학은 물론 헤겔 철학이나 스피노자의 철학을 다 배웠기 때문에 그야말로-스피노자는 불교도 많이 공부했으므로 책을 보면 이거 부처님 말씀같구나, 이렇게 생각이 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라 그런 치우친 불교해설을 하면 잘 통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뜻도 그것이 아닌 것이고, 부처님 법문은 그때그때 지금 현대는 이것저것 다 종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입니다.


따라서 같은 수행법도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정관(不淨觀)이라. 몸이라는 것은 더럽다. 이렇게 생각하는 공부라던가, 또 모두는 다 비었다. 다 비었다 하더라도 사실 중생들은 비었다는 것을 못 보니까 실감이 갈 수가 없습니다. 또 그것은 너무나 허망하고 말입니다. 도인들이 보면 빈 가운데 다만 비어있지 않고서 불성광명(佛性光明)이 충만한 자리, 모두를 찬란스러운 불성으로 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실상입니다. 그런데 실상이 아니라 텅 비었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허무를 느낍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은 별 것이 아니지만 내내야 마음 저변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같이 그런 고도한 법문이 아니면 우리 마음이 항시 안정을 못취합니다. 항시 불안스럽습니다. 있다고 해도 불안스럽고 텅비었다고 해도 불안스럽고 합니다. 전부가 다 부처다 이렇게 되어버려야 본래성품이기 때문에 마음이 활발하니 풍요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가장 풍요해지는 행법 이와 같이 현상이나 실상이나 모두를 종합적으로 수렴한 법문이 앞서 천태지의 선사의 법문이요, 또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입니다.


따라서 이 법문은 우주만유를 하나의 도리로 딱 통달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체험은 미처 못한다 하더라도 사실은 우리 마음이 개운한 것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어디가 아파도 우리 불성은 아프지 않고, 아파도 말뚱말뚱 불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습니다. 이러한데서 우리가 불성 자리에 마음두고 사는 것이 불교인의 생활이지요.


염불(念佛)도 결국 부처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부처를 안 떠나기 위해서 항시 부처를 염합니다. 본래 부처이니까 말입니다.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결국은 부처뿐인 것이니까 부처를 안 떠나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이니까 말입니다. 옛날의 방편염불은 부처님 그러면 저만큼 밖에서 우리가 부처님을 부르면 우리한테 와서 가피를 준다 이런 식이지만, 사실 원래 염불은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이것 보나 저것 보나 모두가 부처다. 이렇게 부처님을 염불하는 것입니다.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읽어보겠습니다.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心은 虛空과 等할새, 片雲隻影이 無한 廣大無邊한 虛空的 心界를 觀하면서 淸淨法身인달하여 毘盧遮那佛을 念하고, 此 虛空的 心界에 超日月의 金色光明을 帶한 無垢의 淨水가 充滿한 海象的 性海를 觀하면서 圓滿報身인달하여 盧舍那佛을 念하고, 內로 念起念滅의 無色衆生과 外로 日月星宿 山河大地 森羅萬象의 無情衆生과 人畜乃至 蠢動含靈의 有情衆生과의 一切衆生을 性海無風 金波自涌인 海中漚로 觀하면서 千百億化身인달하여 釋迦牟尼佛을 念하고, 다시 彼 無量無邊의 淸空心界와 淨滿性海와 漚相衆生을 空. 性. 相 一如의 一合相으로 通觀하면서 三身一佛인달하여 阿(化), 彌(報), 陀(法)佛을 常念하고, 內外生滅相인 無數衆生의 無常諸行을 心隨萬境轉인달하여 彌陀의 一大行相으로 思惟觀察할 지니라."



"심()은 허공(虛空)과 등()할새" 우리 마음은 허공과 같습니다. 허공은 어느 제한도 없고, 어느 장애도 없듯이 우리 마음은 사실은 장애가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나라는 장애, 너라는 장애 그런 상에 지금 걸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걸려있는 것을 우리가 '마음은 허공과 등할세"라는 실존 그대로 말하는 법문으로 해서 딱 털어버려야 합니다.


마음은 허공과 등할새 "편운척영(片雲隻影)이 무()한" 조각 구름이라던가 조그마한 그림자도 없는 편운척영(片雲隻影)이 무()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넓고 크고 또는 끝이 없는 '허공적심계(虛空的心界)를 관()하면서" 허공같은 그런 마음의 세계를 관찰하면서, 우리 마음의 본 바탕은 이와같이 끝도 갓도 없는 광대무변한 허공같은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인데 다만 텅비어 있는 생명도 없는 그런 허무한 공간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끝도 갓도 없는 그런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청정법신(淸淨法身)입니다. 오염도 없고 그야말로 청정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끝도 갓도 없이 훤히 비어있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비로자나불은 생명인 것입니다. 끝도 갓도 없이 훤히 트여 있는 광대무변한 하나의 생명체 이것이 이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는 것입니다. "청정법신(淸淨法身)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염()하고"


"차() 허공적심계(虛空的心界)에" 이와 같이 끝도 갓도 없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마음세계에, 마음의 세계가 허무하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초일월(超日月)의" 달이나 해보다도 훨씬 더 찬란스런 초월적인 그런 "금색광명(金色光明)을 대()한" 금색광명을 띠고 있단 말입니다. 그냥 우리가 물리적으로 보는 금색광명이 아니라 '초일월의' 그런 물체가 아닌 물질이 아닌 질료가 아닌 순수한 적광(寂光), 정광(淨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광명을 띠고 있는 "무구(無垢)의 정수(淨水)가 충만(充滿)한" 티끌이 없는, 조금도 때묻지 않은 정수가 청정한 하나의 생명수가 충만한 "해상적성해(海象的性海)를 관()하면서" 마치 바다같은 그런 성해를 그야말로 끝도 갓도 없는 바다같은 하나의 광명의 바다를 우리가 관찰 한단 말입니다. 끝도 갓도 없는 광명의 바다를 관찰하면서, 이것 역시 끝도 갓도 없는 광명의 바다도 하나의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것도 생명이기 때문에 그때는 부처님 이름을 붙이지요. 원만보신 노사나불입니다.


그래서 "원만보신(圓滿報身) 인달하여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염()하고" 그런 모든 가능성 모든 생명의 생성하고 또는 섭리하는, 모든 가능성의 생명이 거기에 원만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원만보신 노사나불입니다. 부처님은 신비부사의하고 전지전능하신 살아계시는 실존(實存)의 초월적 인격체(人格體)입니다.


여기 "인달하여'는 접촉사의 고어(古語)에 불과합니다. '원만보신 인달하여' 이것은 '원만보신인'것과 같습니다. 원만보신인 노사나불을 생각하고,


"내()로 염기염멸(念起念滅)의" 자기 마음 안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없어지는 "무색중생(無色衆生)과" 우리 관념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좋다, 궂다, 밉다. 예쁘다 하는 추상관념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무색중생인 것입니다. 우리 관념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무색중생과,


"외()로 일월성수(日月星宿)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밖으로 보는 해, 달, 별, 산, 냇, 등과 대지(大地) 기타 모든 만상의 "무정중생(無情衆生)과" 아직 의식이 발달되지 못한 그런 중생들과 "인축(人畜) 내지(乃至) 준동함령(蠢動含靈)의" 그런 식활동이 있는, 물론 아직은 의식이 완전히 발달은 못되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오관(五官)은 있습니다. '인축내지 준동함령의' 사람이나 축생이나 또는 꾸물거리는 식이 있는 "유정중생(有情衆生)과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일체중생 그러면 그때는 앞서 말씀과 같이 우리 관념의 무색중생, 일반동물이 아닌 무정중생, 동물인 유정중생, 이들을 합해서 일체중생 그럽니다.


일체중생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면, 일체 중생이 무엇인가 하면, 일체중생은 모두가 다 "성해무풍(性海無風) 금파자용(金波自涌)인" 그 원만보신 노사나불이라는 그야말로 광명의 생명의 그런 바다, 초일월의 금색광명이 충만해 있는 생명의 바다 위에서 바람도 없지만 금파자용이라, 스스로 자()자, 뛸 용()자 금색파도가 스스로 뛴단 말입니다.


해와 달과 별, 사람과 동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다 무엇인가 하면, 무량무변한 천지우주에 금색광명이 가득한 가운데서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생성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금색바다에서 뛰노는 물거품같다는 것입니다. 금파자용인 일체존재는 모두가 다 끝도 갓도 없는 금색광명의 바다에서 스스로 뛰는 "해중구(海中漚)로 관()하면서" 거품 구(?)자, 바다 가운데 있는 거품으로 우리가 관찰한단 말입니다. 사실은 거품인 것입니다.


나는 끝도 갓도 없는 창해일속(滄海一粟)이라!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는 바다에 있는 거품이요, 산이요, 냇이요, 사실은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저 성좌(星座)라든지 은하계(銀河系)라든지 보다 더 큰 성운, 그런 것에 비교하면 하나의 점도 못되는 것입니다. 창해일속이라, 그야말로 망망대해(茫茫大海)에 좁쌀 한 알만도 못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마음으로 해서는 파스칼의 말고 같이 천지를 다 감싸있지만 존재적인 의미로는 먼지하나 만큼도 못합니다.


바다 가운데 거품으로 관찰하면서 이것이 숫자가 너무나 많으니까 사람 수, 동물 수, 무생물들의 수, 두두물물 산이요, 냇이요, 들이요, 별이요, 수없이 많으므로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라. 이런 것이 모두가 원래 부처님한테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모양은 천차만별로 구분된다 하더라도 전부가 부처한테서 나왔으므로 근본 부처님 성품은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이 잘 못 본단 말입니다. 바로 보면 아무리 산이 되고 사람이 되고 하여도 조금도 변질이 없는 것입니다.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념()하고" 석가모니불을 좁게 생각할 때는 저 인도(印度)에서 나오신 역사적인 석존이시고, 광범위하게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의 모든 존재가 다 석가모니불입니다. 이렇게 관찰하고,


"다시 피() 무량무변(無量無邊)의 청공심계(淸空心界)와" 즉 맨 처음의 비로자나불을 말한 청공심계와 끝도 갓도 없는 텅 빈 마음의 세계와 "정만성해(淨滿性海)와" 천지우주의 그런 모든 역량, 모든 가능을 갖춘 금색의 바다와 "구상중생(漚相衆生)을" 금색바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중생, 즉 말하자면 거품같이 일어나는 일체중생을, 거품같은 중생을 "공(), 성(), 상() 일여(一如)의" 청공심계의 공, 정만성해의 성, 구상중생의 상, 이것이 결국 셋이 아니란 말입니다. 일여란 결국 하나란 말입니다.


"일여(一如)의 일합상(一合相)으로 통관(通觀)하면서" 하나의 일합상으로 통합해서 종합적으로 관찰하면서 "삼신일불(三身一佛)인" 청정(淸淨)법신, 원만보신(圓滿報身),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인 삼신(三身)이 결국은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하나의 부처인 "아(, 化), 미(, 報), 타(, 法) 불()을 상념(常念)하고, 아는 화신불을 의미하고, 미는 보신을 의미하고, 타는 법신을 의미합니다. 아미타불을 항상 생각하고 내내야 그러니까 아미타불은 자기가 자기를 생각하고 우주가 우주를 생각하는 셈입니다.


"내외(內外) 생멸상(生滅相)인" 자기 마음으로 생각하는 자기 관념이라든지, 또는 밖에 보이는 여러 가지 현상적인 것이라든지, 이러한 내외의 생하고 멸하는, 자기도 죽고, 자기도 없어지는 또는 일체 존재라는 것은 모두가 다 생하고 멸하고 생사를 거듭합니다. 생하고 멸하는 "무수중생(無數衆生)의" 수 없는 중생들의 "무상제행(無常諸行)을" 조금도 고유하게 머물지 않는 행()이란 말입니다.


무상(無常)이라. 우리가 무상이라는 말을 굉장히 깊이 세겨야 합니다. 무상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어떤 것이나 고유한 존재가 없단 말입니다. 어떠한 존재나 어느 순간도 머물지가 않습니다.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나, 내 관념이나, 부처님 불성, 이 외는 모두가 움직이고 경망(輕妄)하기 짝이 없는 원숭이같습니다.


무상제행을, 덧이 없는 허망한 행위를 어떻게 보는가 하면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인" 마음 심()자, 따를 수()자, '마음이 만경에 따라서 궁굴다' 마음이 만 가지 경계로 뒹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요, 별이요, 산이요, 냇이요 모든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마음이라 하는 우리들의 생명체(生命體)가 인과율(因果律) 따라서 만 가지 경계(境界)로 궁굴러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국이 나쁘게 흘러가는 것도 생각해 보면 참 밉살스럽기도 하고 혼란스럽고 딱하지만 그러나 모두가 마음이라고 하는 우리들의 불성기운이 인과법(因果法) 따라서 흘러갑니다. 우리 모두가 혼란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래서 다같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타(彌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사유관찰(思惟觀察)할지니라" 미타의 미()는 원만보신 노사나불, 타()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미타의 즉, 법신과 보신이지요. 현상적으로 제아무리 잘되고 못되고 천지가 모다 파괴돼서 텅텅 비어 버리고 또 생성되고 하는 모든 것이 미타의 일대행위(一大行爲)입니다. 일대 행상으로 생각하고 관찰할지니라.



우주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라!



이 보리방편문은 우주의 모든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딱 묶은 것입니다. 하기 때문에 읽어보시고 읽어보시면은 더욱 더 깊이 생각해 보시면 하나의 아미타 부처님으로 통일 돼 갑니다.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운 것은 이렇게 저렇게 자꾸만 시비분별하니까 즉 우주의 도리가 하나의 진리로 통일이 안될 때는 산란스러운 것입니다. 중생은 미처 못 보아도 공자, 석가, 예수 그런 성자는 분명히 보듯이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딱 통일 되어 갑니다. 즉 부처님으로 통일 되어 갑니다.


따라서 우주라는 것은 하나님뿐인 것이고 부처님뿐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걸 못보고 성자는 항시 하나님하고 같이 살고 있으므로, 예수도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바이블을 보면 그렇게 항시 말씀해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판단할 때도 정말로 부처님 차원에서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말도 하고 행동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대중 가운데는 철학박사님도 계십니다. 제가 철학을 말하면 우스울 것입니다. 그러나 파스칼 같은 분은 우리 불교 철학과 굉장히 가까운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 가운데 '영원의 상() 위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순간순간 영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보란 말입니다.


우리가 산기슭에서 보면 시야가 좁지요. 산 중턱에 올라가면 시야가 더 넓습니다. 산 봉우리에 올라가면 사방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영원의 차원, 부처님의 차원, 하나님의 차원에서 모두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철학서를 보면 마치 불경을 보는 기분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관찰하여라. 그러면 결국 너, 나의 구분이 없고, 또 이와 같이 궁해가 심할 때 함부로 휴지를 버릴 수 없는 것이고, 우리가 오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다 살아 있습니다. 산도 살아 있고, 물도 살아 있고, 나무도 살아 있고, 다 살아 있습니다. 다만 중생들이 그 겉만 봅니다. 나무가 있으면 목신(木神)이 있고, 산이 있으면 산신(山神)이 있고, 물이 있으면 용왕(龍王)이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겉만 보니까 내면의 이러한 생명은 못봅니다.


풍수지리학을 하시는 분들은 산을 보고 용()이 이렇게 꿈틀꿈틀 살아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와같이 희랍 때라든지 로마 때라든지 또는 동양의 고대라던가 바라문교나 그 하나의 일체 만사가 모두가 다 신이 들어있다. 일체만유가 다 하나의 생명체(生命體)다. 이러한 교훈들이 표현만 다를 뿐이지 사실은 하나의 생명체를 말씀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마음을 확 열고 보면 공자, 예수, 노자, 석가, 소크라테스 등은 다 같은 내용을 말했습니다. 또 과거에는 서로 문호를 세우고 벽을 높이고 싸워왔지만 우리 현대는 그렇게 하면 우리 민족도 못살고 우리 마음도 항시 괴롭습니다.


우주를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이 시간에 다른 것은 잘 못 외우서도 '타성일편'이라는 말씀은 꼭 외워 두십시오. 때릴 타()자, 이룰 성()자, 한 일()자, 조각 편()자. 우주를 하나의 도리로 딱 통일 시켜버린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체계로 통일 시키면 굉장히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화두(話頭)에도 무()자가 있고 이뭣고가 있고 많이 있지만 결국 모두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버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의 체계로 묶어버리면 우리 마음은 텅 비어서 마음이 시원스럽습니다. 하나의 체계로 묶은 다음에 하나가 되기 위해서 정작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 보리방편문을 잘 외우십시오. 한 번 암송하면 한 번 외이신 만큼 이상하게 정말로 내 마음이 부처구나! 내 마음 속에는 이와 같이 무량 수의 공덕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시면 조그마한 자기라는 것에 옹색하고 폐쇄된 마음이 해방됩니다. 결국 불교는 자성 해탈이라. 해탈은 자기 마음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물질에 얽매이고 자기에게 얽매이고 어느 관념에 얽매이고 그러한 것을 우리가 다 파헤치고서 이제 이렇게 풀어버리는 이것이 해탈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진리만이 참다운 해방이 있습니다. 지금 물질의 해방, 그 빵 좀 많이 있으면 좋고, 그러한 해방은 참다운 해방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리어 물질에 얽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결국 물질에 칭칭 얽혀서 그걸 못 풀므로 사람들이 경직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다 털어버리면 물질도 관념도 마음도 결국 다 털어버려야만이 참다운 행복과 해탈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앞서 말한 타성일편이라, 천지우주는 오직 마음뿐이다. 부처뿐이다. 하나의 진리로 다 되어 있다. 이렇게 관념을 딱 붙혀두셔야 합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제 말씀같으면 모르려니와 무수 도인들이 다 증명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실상은 안 보인다 하더라도 불교는 진실불허(眞實不虛)라, 성자의 말씀에는 거짓말이 있을 리가 만무하고 또 무수한 성자들이 증명했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그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그만큼 승화(昇華)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부처님뿐이다. 이 마음을 갖는 순간 사실은 우리 머리는 쭈뼛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쓰는 이 마음, 이것이 내 본 생명이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이지만 내 생명은 모든 기능을 갖춘다. 이렇게 한번 정말로 믿는 그 마음이 우리를 굉장히 정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이치로는 알았다 하더라도 - 이치로만 알면 실감이 덜 합니다. - 차근차근 실존적으로 우주의 생명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체험하는 것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인데, 체험을 하려면 역시 전문적으로 하기 위해서 저희같은 출가 수행자가 있겠지요. 그런 점은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냥 부처가 딱 되어버리면 좋겠지만 금생에 나와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잘 못 듣고 잘 못 배우고 잘 못 생각한 것들이 잠재의식에 꽉 차 있습니다. 모두는 물질뿐이고 그것들은 물리적으로 풀이할 수가 있고 현상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믿을 수 있다. 보통은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으로 해서는 모두가 하나의 진리다 하지만 자기가 배운 지식 자기의 기성 관념 때문에 성자의 말이나 글이 많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납득이 잘 안가는 것이고 확실히 잘 못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만 읽어보고 읽어보면 자기 기성 관념이 하나씩 깨집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다 때려 부셔서 완전히 법문 내용하고 하나가 되어버리면 깨달아 그때는 확 트여서 진실하게 공부해 가면 인후개통(咽喉開通) 획감로미(獲甘露味)라. 목구멍이 툭 트여서 말입니다. 처음에 공부하면 답답하고 옹색합니다만 공부가 진전 되면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툭 트여 옵니다. 어디에 막힌데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상쾌한 맛이-물론 도통까지는 아직 천리만리이지만 - 우선 자기 몸이나 마음이나 툭 트여서 어디에 막힘도 얽힘도 없습니다.


그런 관념만 가져도 굉장히 소중합니다. 그런 관념만 가져도 가슴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한 것입니다. 그때는 혼침도 없고 밤새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이 피로하지를 않습니다. 인간의 관념은 그렇게 쓰면 쓸수록 더욱 무시무시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쓰면 차근차근 무디어져서 물질에 딱 얽매여 버립니다. 물질에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이 몸뚱이는 무겁습니다. 천근만근 무거워져서 그렇게들 소중히 아끼고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닦아서 마음이 맑아지면 몸도 차근차근 가벼워 옵니다. 나중에는 이 몸뚱이가 어디가 있는가 없는가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마치 공중에 둥둥 뜬 기분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번뇌의 뿌리가 뽑히면 몸이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나 위대한 도인들이 비행자재(飛行自在)라, 그런 말씀을 우리는 신화(神話)로만 들을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별 것도 아닌 원자력 가지고서 별별 재주와 위력을 다 부리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데 원자력보다도 더 고성능의 무한성능이 불성인데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비약적으로는 잘 안됩니다. 금생에 나와서 잘 못 배우고 잘 못 듣고 잘 못 생각한 것들이 다닥다닥 끼어 있으니까 대부분 그런 기성관념으로 찡찡 막혀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가닥을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도의 위차



이것이 수행의 단계, 즉 수도(修道)의 위차(位次)입니다.


금생의 번뇌뿐만 아니라 과거생의 번뇌 때문에 여러 가지 수행법이 많이 있습니다. 능엄경 보면 처음 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무엇인지 갈피를 못 잡을 정도로 복잡합니다. 그러나 그런 저런 가운데서 가장 쉬운 것을 여기 이렇게 교시(敎示)를 했습니다.


유식오위(唯識五位)라. 오직 유()자, 알 식()자입니다. 이것은 유심(唯心)이라, 오직 마음뿐이다. 오직 식()뿐이다. 그런 말과 똑같은 뜻입니다. 우주는 오직 식뿐이고 오직 마음뿐입니다. 중생은 겉만 보고 오직 마음인 것을 못 봅니다. 물질만 봅니다. 사실은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여기 계시는 어르신들은 공부를 많이 하셔서 정말로 물질이 있지 않다는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이라는 것을 자꾸만 생각을 하십시오. 화두(話頭)로 해서 물질이 공이라는 것을…, 물질은 바로 공입니다.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니라 바로 공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쪼개고 쪼개서 공이 아니라 바로 공인데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사실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동()해서 이렇게 진동해서 선회해서 모양만 보일 뿐이지 마치 횃불을 돌리면 불바퀵 둥글게 보이듯이 물질은 그와 똑같이 이렇게 빙빙 도니까 물질로 보이는 것이지 사실 물질이 아닙니다.


색즉공을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자량위(資糧位)라. 부처님 법문을 딱 믿고서 그렇게 되고자 애쓴단 말입니다. 정말로 '나'라는 것도 허망하고, '너'라는 것도 허망하고 물질도 허망하고, 허망한 것을 자꾸만 생각하고 책도 읽고, 명상(暝想)도 하고, 염불(念佛)도 애쓰고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결국 머나먼 나그네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불이라 하는 멀고 먼 고향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하겠지만 결국 성불이 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고향인 성불로 갈려고 생각하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성불의 준비가 여기 있는 자량위(資糧位)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러 가지 자량을 거기에 따르는 재료를 준비한다는 말입니다. 참선(參禪)도 해보고, 염불(念佛)도 해보고, 경()도 읽고 또 고행(苦行)도 해보고 단식(斷食)도 해보고 여기 자량위에서 하여튼 성불을 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이래저래 자기한테 맞는 행법을 찾아 공부합니다.


이렇게 되면 범부보다는 좀 앞서지요. 욕심도 그때는 누르려고 해보고, 그때는 삼현위(三賢位)라. 현자(賢者)의 위입니다. 성자(聖者)는 억제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하는 행동이 모두가 법도에 딱 맞는 것입니다. 욕심도 누를 수가 있고, 진심도 누를 수가 있습니다. 범부(凡夫)는 못 누르지요. 누르는 정도가 희박해서 조금쯤은 몰라도 아무튼 현자는 악도 눌러서 나쁜 짓을 않고, 성인군자같은 성자는 미처 못돼도 우선 죄악도 안 범하고 애쓰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다 가행위(加行位)라. 이때는 법문도 확실히 알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천지우주는 본래 청정한 눈으로 보면 모두가 하나의 불성(佛性)이다. 이렇게 확신이 서면 그때는 결단심(決斷心)을 내서,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내가 집에서만 해서는 잘 안되겠구나, 그래서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오로지 공부만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오로지 하는 공부가 가행위입니다. 즉 어려운 말로 하면 가행정진(加行精進)입니다.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삼칠일이고 애쓰고 오로지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는 것은 일상생활인 것이고, 그래서는 결국 우리가 본래 부처이지만 불심하고 하나가 못됩니다. 이따금씩 불심을 생각하면 어디로 간 곳이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가 그것을 좀 더 붙들어 잡기 위해서는 오로지 해야 하기 때문에 사흘이고 몇일이고 오직 공부만을 합니다. 보통은 사흘, 일주일 또는 이십일일 또는 사십구일 동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저희 출가 수행자는 일년동안에 두 번 삼개월씩 그렇게 하지요. 더하려면 삼년도 딱 배겨서 산문 밖을 안나가고 정진만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아무리 둔한 사람도 부처님만 자꾸 염하니까 그때는 부처님에 가까워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오로지 공부하다 보면 앞서 언급했습니다만 마음이 시원해 옵니다. 몸도 시원합니다. 마치 무슨 전류에 감전된 것같이 시원해 옵니다. 이렇게 시원해 오면 사실은 몸이 좀 피곤해도 부처님만 생각하면 피로가 순식간에 싹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낌이 오는데 그래도 더 공부를 하면 다스울 난()자, 난법(煖法), 이런 경계는 그냥 했다 말았다 하면 잘 못 나오는 것입니다. 적어도 오랫동안 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희 같이 출가해서 승복을 입었다 하더라도 정진하는 정도가 모호하다거나 업장관계라든지 또는 환경관계가 나쁘면 몇 년동안 공부한다 하더라도 이런 시원한 경계를 잘 못 맛본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아무튼 마치 전류에 감전된 것같이 찌르르 하니 전신이 시원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쉬지 않고 더욱 정진해 가면 그야말로 참 이렇게 이마 앞에 가서, 이마 정()자, 정법(頂法)이라, 가행위의 두 번째인 정위(頂位)에 오면 그때는 욕심은 차근차근 줄어옵니다. 그때는 욕계로 해서는 끝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욕심의 끄트머리가 아니라 욕심을 떠나는 끄트머리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때는 물질은 누가 좋은 물건을 사용해도 그렇게 별로 갖고 싶지 않고, 음식도 그때는 먹으나 마나 합니다. 이런 때가 옵니다. 하도 몸도 시원하고 마음이 시원하기 때문에 그때는 물질이나 음식이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는 시원해 옴과 동시에 어렴풋이 광명이 비춰 옵니다. 광명이 말입니다. 아주 맑은 달이 이렇게 줄어지고 이렇게 커지곤 합니다. 이런 때가 오면 마치 천지우주의 모든 기운이 자기 몸을 향해서 오는 기분입니다. 그러면 힘도 남이 보면 비약해 보이기도 하고 훨씬 자기 이상의 힘을 쓸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어 가다가 또 안 쉬고 더 나가면 그때는 인법(忍法)이라. 참을 인()자 인법까지 되어 놓으면 그때는 별로 큰 후퇴는 없습니다. 정법까지는 애쓰고 하던 참선이나 기도를 놔버리면 그냥 원래대로 후퇴합니다만 인법에서는 너무나 많이 하여 보았으므로 그것이 습관성이 되어 별로 후퇴가 없습니다.


인법 다시 말하면 앞서 보았던 심월(心月), 마음 심()자, 달 월()자입니다. 그런 광명기운이 더 커지고 줄어들고 해서 그때는 우주에 꽉 들어차 버리는 그런 기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되어 가다가 안 쉬고 더 나아가면, 여기서 게으름 부려서 그냥 두어버리면 안되겠습니다만 거기서 더 나아가면 그때는 하나의 달, 심월광명(心月光明)이 차근차근 그 빛이 그야말로 금색광명(金色光明)을 띄워 오는 것입니다. 금색광명이 트여 옵니다.


금색광명이 트여 온 그런 광명을 딱 보는 단계를 가리켜서 이제 세제일법(世第一法) 그러지요. 성자는 당하 못되었다 하더라도 인간 세상에서는 가장 높은 법()입니다. 인간 세()자, 차례 제()자, 한 일()자, 법 법()자, 세제일법(世第一法)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세상에서는 가장, 우리 마음으로 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맹자나 그런 분들은 이런 단계에 올랐겠지요. 그 이는 성자(聖者)가 아니라 현자(賢者)이니까.


이렇게 해서 이 단계를 넘어서 우주가 확 열려서 천지우주가 그야말로 부처님 광명으로 충만되어버려야 이른바 참말로 견성오도(見性悟道)인 것입니다. 그 거짓말로 견성오도(見性悟道)가 아니라, 교만한 사람들은 마음이 좀 열리면 거짓말로 견성오도 했다 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정말로 견성오도 자리가 이제 앞서 말씀드린 천지우주의 광명이 자기한테도 감득이 되고 이른바 광탄만상(光呑萬象)이라! 천지우주가 광명 속으로 다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별이고 무엇이고 모두가 다 그렇게 되어 버려야 그때가 이제 참다운 견성오도가 되겠지요.


이렇게 되는 것이 결국 성자가 가는 길입니다. 우리 인간은 여기에까지 가야 비로소 내 고향에 왔구나. 아! 그때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항시 마음이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일반 범부중생은 가행위(加行位), 즉 사가행범부위(四加行凡夫位) 여기까지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안 놓고 공부를 해서 나아가면, 계율도 바르고 음식도 함부로 안 먹고 정진해 나아가면 그때는 순간 찰나에 천지우주가 광명으로 화하면서 통달위(通達位)라. 통달위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때는 경()은 실지로 안배웠지만 경을 보면 쭉쭉 이렇게 다 알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가 즉 말하자면 견성오도(見性悟道)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와 같이 좀 되었다 하더라도 공부가 그걸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었지만은 아직 우리 번뇌의 습기 그 종자가 남아 있습니다. 습기 말입니다. 금생에 지은, 금생에 잘 못 듣고, 잘 못 배우고, 잘 못 생각하고 잘 못 느낀 것은 이제 다 사라져버렸다 하더라도 과거전생에 지은 업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과거에 낳고 죽고 무수생을 되풀이 하면서 그때그때 사람도 죽이고 축생으로 살생도 하고 남을 배신도 하고 그러한 것들이 우리 잠재의식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성인들도 과거 전생에는 배신도 하고 살생도 많이 했던 것입니다. 어떠한 누구나가 개도 되었다, 소도 되었다, 무수 만생동안 그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지은 번뇌는 견성오도와 더불어서 다 사라진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에 지은 번뇌는 그 종자가 남아 있습니다. 그 놈을 차근차근 빼내야 됩니다. 그 놈을 못 빼내면 우리가 원래 갖추고 있는 불성, 천안통도 할 수 있고, 천지우주를 다 알 수 있고 하늘을 날을 수도 있고, 그러한 재주가 다 들어 있지만 번뇌의 종자가 남아 있으면 그런 재주를 못 부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불성에 갖추고 있는 공덕을 못 부리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을 보면 우리한테 있는 욕심의 뿌리만 다 뽑혀도 우리 몸이 하늘로 날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신화로만 알지 마십시오. 우리가 공부해 보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차근차근 가벼워 옵니다. 이것만 본다 하더라도 정말로 견성오도하여 욕심의 뿌리가 뽑혀지면 육신 그대로 등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원래 무게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봐서 중력이 있는 것이지, 사실은 인력이니 중력이니 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중생차원에서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영원적인 순수 생명 에너지 차원에서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번뇌의 종자를 뽑아버리면 종자를 뽑아버리는 것이 이른바 수습위(修習位)라.


천지우주가 오직 불성뿐이구나! 불성뿐이라는 그 자리에 딱 안주해서, 불성을 확실히 보았으므로 견성오도해서 통달위라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이때는 광탄만상이라, 우주를 불성광명이 다 삼켜버립니다. 다만 번뇌의 뿌리 대문에 불성에 들어 있는 무한한 공덕을 발휘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불성에 입각해서 차근차근 더 닦아 가면 그때는 불성이 보이니까 불성만 보고 있으면 되겠지요.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무엇이나 안한다 하더라도 불성이 보이니까 아! 그 자리를 보고만 있어도 공부가 나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있으면 있는만큼 흐린 탁수를 가만 두면 앙금이 가라 앉고서 바닥이 보이듯이 견성오도한 다음에는 가만히 있으면 정()에만 들어가면 차근차근 번뇌가 녹아갑니다. 녹아서 조금 올라가면 이지(二地), 삼지(三地), 사지… 이렇게 올라가서 십지(十地), 십지에 올라가서 번뇌가 근본적으로 다 해버리면 그야말로 석가모니같은 성불이 됩니다.


자고로 원효(元曉)스님 같은 분은 견성오도한 뒤에 팔지(八地)까지 올라갔다고 하고, 서산(西山)스님 같은 분은 사지(四地)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일본의 공해(空海)스님 같은 분은 삼지(三地)에 올라갔다는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보임수행(保任修行)이라, 지킬 보()자, 맡을 임()자. 즉 견성오도한 그 자리를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불성 봤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면 안됩니다. 더 앞으로는 못나아갑니다. 그러므로 그 교만심(驕慢心)이라는 것이 굉장히 장애(障碍)인 것입니다. 조금 알면 그걸 좀 풀이해 먹을려고, 또 그 견성오도라고 해 가지고서 확 트여서 환희심이 충만하면 우쭐해 가지고서 그래버리면 결국은 공부는 더 못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부처님에 비하면 아직도 멀었는데 신통묘지를 다해야 그래야만이 참다운 깨달음인 것인데 말입니다. 아직은 광명은 좀 봤다 하더라도 우리가 광명 기운을 못 쓰는 것입니다. 순수 에너지에 갖추고 있는 그런 무한한 힘을 못쓴단 말입니다.


그래서 겸허하니 차근차근 인연도 피하고, 자꾸만 사람 만나고 얘기하면 힘이 빠져버리고 이제 시간이 더 없어 못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 깊이 들어간 스님들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중봉(中峰)스님은 배에가 피하고 산에가 피하곤 했습니다.


공자(孔子)의 논어(論語)를 보나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보나 또 어떤 다른 경전을 보나, 우리 중생의 인격을 이와 같이 우주와 하나로 해서 구경지(究竟地)까지 인격완성을 시키는 방법체계(方法體系), 즉 수도의 위차를 명확히 밝힌 법문은 없습니다. 우리는 벌써 이렇게 해서 공부가 인격의 가장 최고봉(最高峰)까지 가는 성불에 이르는 수행의 단계를 다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수도(修道)의 위차(位次)를 외워 두어도 미처 금생 내내 여기도 못 간다 하더라도 목표만은 뚜렷히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목표를 세워 놓으면 그만큼 희망이 있듯이 인간이 제아무리 어려운 구렁에 든다 하더라도 결국 불성은 죽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때묻지 않으므로 불성을 생각하면 자기 위안이 생기고 행복의 미소를 띄울 수가 있습니다.


참선하는 과정도 여러 가지 학설이 많이 있습니다만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직접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몸소 행하시고 49년 설법하신 후 열반 드실 때 또 당신이 몸소 우리한테 보여 주신, 그리고 근본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에서 몇 십번 역설한 법문이 다시 말하자면 참선하는 그 근본선 이것이 아홉 가지 차체정(九次第定)으로 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선근(四善根)입니다. 즉 말하자면 가행위는 시원해지고 또 이렇게 심월(心月)이 나오고, 심월이 컸다 작았다 하고, 찬란스러운 심일(心日)이 나오고, 이와같이 사선근을 거쳐서 다음에 들어가는 삼매가 견성오도인데 선정의 차원으로 하면 그때는 초선정(初禪定) 여기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들어가야 이제 견성오도를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봅됩니다만 아무튼 초선정이라. 이때는 우리의 거치러운 분별은 다 끊어져버립니다. 거치러운 분별은 다 끊어지고 이제 세밀한 분별만 남습니다. 그렇게 되었다가 이선정(二禪定)이라, 여기에 올라가면 그야말로 세밀한 분별까지 다 끊어집니다. 거치러운 것도 미세한 것도 다 끊어지고 오직 하나의 마음 자리만 지킵니다.


우리 중생은 몸도 다르고, 몸 따라서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의견이 다르지만 사실은 이렇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차근차근 같아집니다.


이때 더욱 올라가면 우리 중생같은 이런 몸이 아니라 광명신(光明身)입니다. 몸이 광명이기 때문에 그때는 몸뚱이 때문에 피차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음식도 먹고 싶으면 생각만 하는 걸로 배가 부르니까 많이 먹을려고 음식 때문에 다툴 필요도 없지요. 아무튼 이렇게 올라가면 광명의 몸이기 때문에 하등의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광명신(光明身)이지만 광도(光度)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게 돼 가다가 삼선정(三禪定)이라, 여기 올라가면 오로지 한 마음만이 있습니다. 그때는 마음도 광명도 하나입니다. 삼선정 지위에 올라가면 차이가 없습니다. 순수광명인 동시에 그때는 마음도 같습니다. 다만 같으나 아직은 부처의 지위는 못되어 있습니다.


사선정(四禪定)이라. 이때에 가면 마음이 조금도 동요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동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 가다 그때는 우주가 텅 비어서, 광명도 하나의 질료가 있는 광명이 아니라 그야말로 참 텅비어 있는 하나의 순수 광명인 것이고, 즉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입니다. 이제 식()이라! 하나의 마음이 우주에 충만해 보이는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인 것입니다. 식이 충만해 있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무소유처(無所有處)입니다.


그때는 이것이고 저것이고 구분도 없고, 구분할 수도 없습니다. 원융무애(圓融無碍)인지라 혼연일체(渾然一體)인지라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야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입니다.


그때는 생각이 있을 것도 없고 또 없을 것도 없단 말입니다. 아주 미세해서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우리 중생이 느끼는 번뇌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고 아주 맑은 생각만 조금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어가다가 이제 멸진정(滅盡定)이라. 멸할 멸()자, 다할 진()자. 이때는 그야말로 번뇌의 찌꺼기를 다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상비비상처 여기까지는 아직 번뇌의 찌꺼기가 조금 남아 있습니다만 올라 갈수록 차근차근 번뇌가 녹아져서 저 위에 가서는 번뇌가 다 녹아서 완전히 그때는 우리 범부라 하는, 즉 말하자면 이생위(離生位)라, 너와 나의 차이 또 사물과 나와의 차이 일체 존재가 모두가 다 이제 하나의 불성으로 해서 그때는 완전히 통일이 딱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여기 있는 참다운 정각(正覺) 성불(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불성 자체가 회통적이므로 수행론도 회통적이어야 한다.


앞으로도 여러분들께서 여러 가지 불경을 많이 보실것입니다만 경() 따라서 이렇게 참선하는 방법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보조국사 어록에도 보면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라, 돈오는 문득 깨닫는 것이고, 문득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이것은 앞서도 얘기 했습니다만 우리 중생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 갈래, 만 갈래 구분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하나의 진리로 딱 통일이 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천지우주가 그 하나의 진리로 타성일편(打成一片) 되어버리는 것을 가리켜서 돈오(頓悟)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오를 지금 말씀드리려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보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리고 그 논쟁도 심합니다만, 우선 역사적으로 보면 보조국사(普照國師)가 말한 것은 체()와 용(), 성()과 상()이 둘이 아니요, 색즉공(色卽空) 공즉색(空卽色)이라. 천지우주의 모두를 하나의 진리(眞理)로, 하나의 체계(體系)로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돈오(頓悟)입니다. 점수(漸修)는 그와 같이 하나의 진리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이론적(理論的)으로 된 것이지 사실은 아직 체험(體驗)을 못했으므로, 체험하기 위해서 점차로 올라가는 이것이 점수(漸修)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할 것인가? 마음 자리를 고요히 묵조(默照)하는 방법과 관조(觀照)를 주로하는 관법도 있습니다.


지금 한국이나 일본도 참선(參禪)하는 방법이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화두(話頭)로 해서 어느 문제, 화두라는 것은 하나의 문제의식 아닙니까. 어느 문제를 딱 주어서 그 문제를 애쓰고 푼단 말입니다. 의심하고 풀어감으로 해서 산란한 마음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진아가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화두를 잘 못 의심하면 그 하나의 불성 마음자리를 놓쳐버리고 상대적인 문제만 의심을 하면 공부가 안되지요. 자칫 잘못하면 기()만 올라옵니다. 그래서 반드시 화두를 들 때는 하나의 진리 본래 본분사 그 자리를 우리가 안 놓쳐야만이 참다운 공부가 됩니다. 그 하나의 진리본분사 그 자리에다 마음을 딱 집중 시켜서 의심을 하다 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녹아갑니다. 그렇게 관찰 참구하는 선법도 있고, 그런 선법은 우리 조계종 혹은 임제종에서 주로 합니다. 조계종은 내내야 임제종의 이런 방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또 원불교(圓佛敎)나 일본 조동종(曺洞宗)은 묵조선(默照禪)이라. 그때는 모두가 본래 부처인데 새삼스럽게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천지우주가 부처인줄을 알았으면 그 자리를 우리가 지키고서 묵조하면 되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가만히 있으면 탁마(琢磨)가 되서 즉, 탁수를 가만두면 앙금이 가라앉고서 맑아져 바닥이 보이듯이 묵조하면 부처가 될 것인데 의심을 하면 괜시리 마음만 헛트려뜨려 더욱 귀찮지 않겠는가. 더욱 마음을 산란시키지 않겠는가. 그래서 잠자코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비추어 보는 것이 묵조선입니다. 본래 부처거니 가만히 있으면 부처가 되어 가겠지요. 이것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중국의 송나라 때 문제를 들고 의심하는 화두 선법도 있었고 그와 대립적으로 묵조하는 선법도 같이 있었습니다.


보통 자기 문중에서 하는 선법이 더 좋아 보이고, 다른 분들이 하는 것은 배격을 합니다. 행법이라는 것이 다 성불의 법인지라 자기가 어떤 행법을 취하면 거기에서 재미를 봅니다. 가사 화두도 하다보면 마음이 모아지고 마음이 개운해지고 공부가 되어가면 재미가 붙겠지요. 재미가 붙으면 자기 하는 공부만 재미가 붙고 다른 방법은 별것도 아니다. 이렇게 폄하기가 쉽습니다. 사실은 부처님께서나 도인들이 말씀하신 법문들은 모두 성불하는 법이기 때문에 애쓰고 하면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주문(呪文)을 하나 염불(念佛)을 하나 다 되는 것인데 자기가 하나만 해놓으면 그것만 옳다고 고집하면 이제 한 종파가 생기지요.


일본 조동종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묵조라, 잠자코 무념무상 하는 종파입니다. 조동종은 묵조만 하는데 굉장히 큽니다. 한 종파이지만 불교대학이 몇 개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종파는 기왕이면 화두를 하되 그렇게 우리 생활과 비근한 문제가 아닌 엉뚱한 것을 가지고서 또 옛날에 그때그때 쏘아버린 말로해서 화두를 할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화두로 해야 되겠구나. 이렇게 해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부처님 명호를 화두로 하는 종파가 있습니다.


한국도 서산(西山), 사명(四溟), 진묵(震默), 태고(太古), 나옹(懶翁), 연기(緣起)대사 등 그런 분들도 염불을 화두보다 더 많이 말씀을 했습니다.


아무튼 정평 있는 도인들은 절대로 한 법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정평 있는 위대한 도인들은 절대로 한 법에 치우치지 않았단 말입니다. 치우치지 않아야 할 것이고, 천지우주가 다 불성이거니 부처님 법이 모두가 다 성불이 법이거니 어떻게 하나만 옳고 다른 것은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천지 우주에는 하나의 법도 따지고 보면 그야말로 법일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진리를 갖추고 있는 그런 본체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우리 마음이 안 여의면 그때는 다 선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자 화두를 들든, 이뭣고 화두를 들든 본래면목 자리를 떠나버리면 그건 선이 아닙니다. 그때는 선이 될 수가 없지요. 육조스님의 단경을 보시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고로 정통 도인들은 절대로 한 법에 치우침이 없었습니다. 한편만 보는 그런 독선적인 안목 때문에 꼭 자기 방식이 옳다고 그럽니다. 전부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치우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선 서산대사도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 참선에 대한 귀감도 내놓고, 또 도가귀감(道家龜鑑)이라, 도교에 대한 것, 유가귀감(儒家龜鑑)이라, 유교(儒敎)에 대한 귀감도 내 놓았습니다. 어떠한 도인들이나 그 시대의 종교나 철학을 다 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종교사를 한 번 보십시오. 모두 그 당시의 철학이고 종교고 다 합해서 하나의 체계로 묶을려고 맘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폭이 좁은 사람들은 꼭 자기가 하는 것만을 고집합니다. 지금 현대란 사회는 모두를 하나로 통합할 때입니다. 지금 좌익도 완전히 소멸은 못시킵니다. 공산주의도 우리가 완전히 파멸은 못시키는 것입니다. 또 저네들이 아무리 강해도 자유민주주의를 절대로 파멸을 못시키는 것입니다.


보다 고차원에서 우리가 필요한 때는 통제도 하는 것이고, 원칙은 자유민주주의를 해놓고서 필요한 때는 그때그때 우리가 통제를 해야 하겠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좋은 점은 키우고, 우리가 같이 공존해 가야지 절대로 양편을 한편으로 완전히 패배는 못시키는 것입니다. 결국은 승자, 패자가 없는 것입니다. 승자, 패자가 없이 보다 고차원에서 양쪽을 다 합해야 할 것인데 기독교와 같은 그런 이분법으로 해서는 절대로 합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사상은 어떤 누구나 무슨 주의나 모두가 근본 체에서 보면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일률 동일철학을 가져야만이 우리가 하나로 묶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때에 따라서 자유경쟁을 하는 것이고 또 통제도 하는 것입니다. 자유경쟁만 권장해 보십시오. 그때는 방만이 되서 부자만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항시 가난합니다. 응당 그때는 필요에 따라서 분명히 통제를 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모두가 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니고, 재산도 사실은 내 것이 아닌 것이고, 다만 관리인에 불과하다. 이러한 관념을 갖는다고 하면 그때는 슬기롭게 우리가 통제를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균등분배를 못하는 것입니다. 균등분배를 못하면 그것이 큰소리가 나옵니다.


괜히 엉뚱하게 말이 빗나가 버렸습니다만 우리 공부도 하나에 치우쳐 놓으면 결국 이루지 못하고 소리만 요란한 것입니다.


저번에 서울에서 어떤 분들이 오셨습니다. 나무호랭게교의 여자 포교사들 같았습니다. 일연 스님이 교주 아닙니까. 일연스님을 그분들은 석가모니 부처님보다도 더 앞서 있는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 뒤에 나오신 도인들은 다 아무것도 아니고 일연대사만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일본 창가학회 내내야 일연종에서 공명당이라는 일본의 제3당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그것이 강합니다. 하지만 일연대사라고 하는 그 사람 주장에 얽매여 있습니다. 우리 불교라는 것은 훨씬 더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8.15 해방 후에 우리 조계종도 보다 문호를 넓게 개방해 버렸으면 이렇게 한국에 근 20종파가 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꼭 그 화두 아니면 선이 아니다. 꼭 자기 문중 그렇게 옹색을 부리다 보니까 결국 그 범주에 못 들어가면 삐져서 다른 종파를 세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이라 하더라도 자기들과 안맞으면 그때는 배격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사회는 그럴 때가 아닙니다. 따라서 불법도 다 열어버려서 불교만이 화합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기독교 인구가 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십억 인구 아닙니까. 이슬람교도 거의 십억 인구입니다. 십억의 인구가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길이 아니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비방할 때는 바이블도 한 번 연구를 해보고 해야합니다. 저는 지난 겨울에도 바이블을 다시한번 전부 보았습니다. 물론 전에도 여러번 읽었습니다만,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나 누가복음서나 다 중요한 대목을 보면 불교와 차이가 없습니다. 상징적인 비유나 그런 것들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남을 이해할 때는 말과 상징과 비유를 떠나서 알맹이가 무엇인가 그 뜻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완전무결한 체계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건 그럴 수밖에는 없겠지요. 예수님은 겨우 2년 반밖에는 교화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나이도 삼십대가 아니었습니까. 우리 석가모니께서는 그야말로 공부하실 대로 다 하시고 또 왕자 출신이고 사십구년 설법을 하셨습니다. 원숙할대로 원숙했고 체계가 완전히 다 섰습니다.


따라서 그런 체계로 보면 비교가 안되나, 근본 정신, 인류를 사해동포로 보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정신 또는 중생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희생한 그런 정신은 모두가 다 같습니다.


어떤 누구나 남한테 돌을 절대로 던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풍속으로 간통을 하면 돌로 쳐서 죽이는 체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통한 음부를 데리고 와서 하반신을 땅에 묻어 놓고 돌로 칠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 때 예수님한테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 말씀이 그대들 가운데 마음으로조차 간음해 보지 않은 사람은 돌을 들어서 쳐라! 우리 범부라는 것은 마음으로 간음을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통한 여인을 아무도 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 둘씩 다 헤어져 버렸습니다. 나중에는 예수 한 분만 남았단 말입니다. 나도 그대를 심판하지 않겠노라!


우리가 바로 본다면 성자 아닌 한에는 어떤 누구나 심판을 못하는 것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도 모두를 밝혀내야 하네 하지만 우리 중생 차원에서는 온전히는 절대로 바로 밝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생의 때묻은 눈으로 봐가지고서 어느 정도만 꼬집어 내는 것이지 절대로 바르게 밝히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또 죄()란 무엇인가? 죄는 중생이 다같이 지은 것입니다. 모두가 우리 중생들의 공업(共業)이란 말입니다. 강도만이 죄인이 아니라 강도 아닌 사람도 같이 공업(共業)을 짓는 것입니다. 저 미국 쪽에 가서 꽃 한송이가 피어도 이곳 한국에 있는 모두가 거기에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의 인과(因果)입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돌멩이 하나의 움직임도, 우리가 어깨를 한 번 드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천지우주가 다 관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것이 서로 남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로 이렇게 얽혀 있습니다. 중중무진입니다. 미운 사람이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잘 못 보니까 미운 것이지, 우리가 괜시리 지어서 밉다, 곱다, 잘 못 생각하고 잘 못 말하고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말과 행동이 성자가 하는 것과 똑같이 딱 들어맞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말 하나, 표정 하나, 행동 하나가 모두 진리에 안 들어맞기 때문에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사회를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오염 때문에 데모도 있고 사회 죄악도 있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 데모는 왜 하는가? 그 원인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선동도 하고, 또 잘못 가르치고, 부모한테도 책임이 있고, 스승한테도 책임이 있고, 정치인한테도 책임이 있고 모두가 다 얽히고 설키고 우리가 다 같이 업을 지었습니다. 공업인데 딱 누구만 집어서 벌을 해야한다 몇 사람은 목을 베어야 한다 합니다.


사실은 근본에서 보면 다 부처이므로 풀려면 순식간에 풀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순식간에 다 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차원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불교인 것이지 일반 상식 차원에서 일반 중생 차원에서 본다면 결국은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또 하나 죽이면 그 자식이 있고, 또다시 그때는 보복이 옵니다. 죄라는 것은 한편에서 용서를 해버려야 이제 거기서 끝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고 못 풀어버리면 그 원한이라는 것이, 가사 원한을 품고 죽어 보십시오. 그 얼이 응어리 진 영혼은 두고 두고 우주를 헤맵니다. 우리 부처님 진리라는 것은 그와 같이 고차원에서 보는 것입니다. 우선 내가 남한테서 따귀하나 맞고, 내 아들이 어디 가서 죽고, 그런 문제들이 근본 부처님 차원에서는 죽지도 않았고 사실은 맞지도 않은 것입니다.


내 몸뚱이가 바로 보면 원래 없거니 누가 때리면 그것이 어디 가서 남습니까. 그런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한 그런 자리에서 보고 용서하고 축원해야 인간이 비로소 화합을 하는 것입니다. 이북도 6.25사변 때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생각할 때는 화합할 수가 없지요. 남한 인구만 백만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업중생으로 거쳐온 역사이고, 이제 어떻게 우리가 화합할 것인가? 결국 내면을 보면 하나의 부처이기 때문에 서로 용서하고 축원해서, 죽음도 없고 죄도 없는 근본 부처님자리에서 화합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오공(五共)이고, 육공(六共)이고 화합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 남북도 화합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고 그 중생차원에서 죄를 밝힌다고 하면 절대로 그때는 화합이 안되는 것입니다. 악순환만 거듭할 뿐입니다. 괜히 말이 빗나갔습니다.



성불의 길은 지상명령이다.



우리 생명의 길은, 우리가 가야할 길은, 마음의 고향길은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무수한 성자들이 다 증명(證明)한 길입니다. 이렇게 이 길을 지향해서 일로매진(一路邁進) 하시기를 바랍니다. 재가 불자님이라 하시더라도 밥을 자실 때나 무슨 일을 하시든지간에, 사업을 하실 적에도 종업원이나 점원을 부처님같이 대해 보십시오. 얼마나 따르고 일을 잘하는가 말입니다.


6.25사변 때 사람들이 마구 죽이고 또 죽고 할 때도 그 무시무시한 때 저는 애쓰고 부처같이 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상스럽게 위험한 고비를 잘 넘겼습니다. 난리를 넘는 가장 슬기로운 지혜가 무엇인가 하면 모든 사람을 다 부처같이 보는 것입니다. 자비(慈悲)와 덕망(德望)이 난리를 이기는 가장 큰 보배입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좋은 스승, 좋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라도 부처님 도리, 우주와 인생의 도리를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의 생명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꼭 마음을 주인공으로 해서, 지금 병자(病者)를 어디 가서 문병이나 간호를 한다 하더라도 그를 부처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정성스럽게 봐지는 것이고, 또 우리 식의 파장이 부처같이 볼 때 가장 우수한 가장 강력한 파장이 되는 것입니다.


오! 부처님! 하는 그 때 우리 몸과 마음은 굉장히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를 부처같이 간절히 보는 그 마음이 우리 분위기를 정화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상대편의 마음도 정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모두가 부처님을 지향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지상명령(至上命令)입니다. 우리가 성불(成佛)하는 것은 지상명령입니다. 지상명령인 성불을 향해서 일로매진(一路邁進)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