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2. 사종연기 - 2)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通達無我法者 2007. 4. 11. 17:13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이와 같은 연기법의 원인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입니다.

아뢰야(阿賴耶)란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장식(藏識)이라. 우리 마음이나 우주 만유는 중생들 눈에는 안보인다 하더라도 모두를 거기에 다 담는 하나의 식()이 있단 말입니다. 알 식()자 이것은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마음이란 뜻이나 식이란 뜻이나 똑같습니다.


우리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 모든 존재가 다 식이 있는 것인데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는 물질은 물질이고 마음은 마음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항시 어느 물질이나 근본은 다 마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가 성립됩니다.


마음, 식 이것은 하나의 순수 에너지입니다. 이른바 우주의 정기(精氣),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본질인 동시에 알 식()자 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개념의 차이가 있어 놓으면 혼돈하기 쉬우므로 개념을 정확히 알아 둬야 어려운 공부를 할 때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이 마음이라 하는 것이 우리 사람도 역시 근본은 마음이고, 또 다른 존재도 근본은 마음입니다. 산도 근본은 마음이고, 해나 달이나 모두가 다 근본은 마음이라는 하나의 식입니다.


앞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현대 물리학자들도 그것을 긍정을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저 끄트머리에 가면 동물과 식물도 한계가 없어져 버립니다.


가사 화분에 좋은 꽃을 가꿀 때도 화분(花盆) 그것은 단순히 아름답게 꽃을 피우기만 하는 식물인 것이지 무슨 뜻이 있으랴? 하지만 똑같은 화분을 놓고서 거름이나 관리도 똑같이 하면서 한 쪽 화분에 마음을 더 주고 다른 한 쪽 화분에는 마음을 덜 두면 이상하게 마음을 더 두고 관심을 느끼고 있는 화분이 훨씬 더 성장이 빠르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증명해서 밝힌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의 순수 에너지이기 때문에 관심을 두면 그만큼 화분의 꽃에 대해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지독히 미워하면 그 마음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미워하는 만큼 그 사람 인생에 대해서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영국이나 미국이나 자기 아들, 딸이 있다고 생각할 때 어머니나 아버지가 기도를 모셨다고 합시다. 저 멀리 있는 아들, 딸한테 아무 도움이 없다면 무슨 필요로 기도를 모시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오랜 경험으로 어디가 있던지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정성(精誠)을 드리면 틀림없이 그만큼 정성이 닿으므로 기도를 모시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인간의 오랜 경험으로 해서 알려져 내려왔단 말입니다. 그런 것만 봐도 다 알 수 있듯이 우리 마음은 무한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만이 마음이 아니라 개나 소나 돼지 그런 축생(畜生)들도 마음이 다 있습니다. 단지 인간같이 의식(意識)이 발달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으로 되었다. 만법유식(萬法有識)이라. 불법에서 만법(萬法)이라고 말할 때는 일체 존재를 다 가리킵니다. 오직 유()자, 알 식()자 오직 식뿐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요, 모두가 다 마음이라 하는 순수생명(純粹生命)으로 만들어지고 또는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식이다.


식이라는 말이나 마음이라는 말이나 같은 뜻입니다. 다만 식 이것은 분별시비(分別是非)를 가질 때 식이라는 말을 쓰지만 그래도 겉으로만 그러는 것이고 본질에 가서는 똑같아 버립니다.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불법 공부를 하셔야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아뢰야식 이것은 장식이라. 감출 장()자입니다. 모두를 다 그 속에다 담아 두는 식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좋다 하면 좋다 하는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흔적이 없어 보이겠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에는 좋다는 흔적을 남깁니다. 남을 밉다 하면 미워하는 그것은 끝나 버리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은 밉다는 흔적을 둡니다. 자꾸만 남을 미워하면 그때는 더욱더 미워진단 말입니다. 남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그때는 그것이 더욱더 사랑해지고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생각이나 행동이,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도, 남을 한 번 딱 때리면 그 행동은 그쳐 버리지만 때렸다는 그 에너지는 역시 식에 갈무리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도 함부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말이 그대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식에 역시 머물러 둔단 말입니다. 이른바 우리 식에 종자(種子)를 심어둡니다. 나쁜 생각은 나쁜 종자를 심어 두고 좋은 생각은 좋은 종자를 심어 둡니다.


좋은 사람은 마음속에 과거 전생이나 금생에 좋은 종자를 많이 심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들은 나쁜 말 많이 하고 남도 미워도 많이 하고 해꼬지 많이 하고 이런 사람들은 결국 나쁜 종자가 마음에 심어져 있기 때문에 나쁜 일 하기가 더 쉬운 것입니다.


장식으로서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 우리가 가사 저 사람이 밉다. 그럴 때는 그냥 우연히 미운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벌써 밉다는 종자가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서 종자에서 현행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좋다는 것이나, 궂다는 것이나 그런 것이 그냥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연인 것 같지만 잠재의식(潛在意識), 우리가 미처 못 느끼는 마음의 그런 바탕에는 종자가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자가 현행 행위를 나투고, 가사 때리기도 하고 안 때리기도 하고 밥도 먹고 걸음걸이도 하고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런 행동이 다시 훈종자(熏種子)라. 다시 종자를 심는다는 것입니다.


본래에서 보면 선악이 없지만 우리 과거 전생의 업식(業識), 마음에 들어 있는 선악의 종자가 인연 따라서 현실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것이 종자생 현행인 것이고, 그리고 현실로 행동하면 또 그것이 거기에 걸맞는 종자를 다시 심는 것입니다.


종자를 심는 걸 보고 불교 술어로 훈종자(熏種子)라. 훈 이것은 더웁게 할 훈()자입니다. 우리 마음에다 따습게 종자 훈기를 심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삼법전전 인과동시(三法展轉 因果同時)라.


이 삼법(三法)은 혹업고(惑業苦)라. 맨 처음에 우리 마음에 갈무리된 종자가 있으면 그 종자에 따라서 행동이 나오고, 행동을 하면 다시 업을 짓고, 그 업보로 해서 고를 받고, 다시 종자를 심고, 이렇게 해서 이것이 인과동시(因果同時)라. 인()과 과()가 서로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즉시 종자를 심는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종자를 심어 놓으면 그때는 또 인연이 있으면 그냥 바로 현실로 행동이 나오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우리 인간의 행동이 규정(規定)되는 것입니다.


종자생 현행이라. 우리 마음에 있는 선악(善惡)의 종자가 현실 행동을 낳는 것이고, 행동을 하면 그 행동 때문에 종자를 다시 심고, 그 종자에서 또 현실적인 행동이 나오고, 다시 또 종자를 심는 이 삼법이 이와 같이 영원히 되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가 다 식(), 마음이라 하는 거기다 종자를 애초에 심어 놨으므로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주가 다 파괴되어 버려서 텅텅 비어가지고 있을 때는 종자가 어디서 나올 것인가? 우주가 다 파괴되어 버려도 물질적인 세계, 시간 공간적인 세계만 파괴되는 것이지 마음의 세계는 절대로 파괴가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 천상계 어딘가에 그대로 생존하고 있으므로 그 종자 그대로 남아 가지고서 다시 우주가 구성되면 종자에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나고 나무로 태어나곤 합니다.


이렇게 그 마음이라는데다 종자(種子)를 심어가지고 거기서 현실로 행동(行動)이 나오고 다시 또 그 현행(現行)이 인()이 되어 종자를 심고 삼법(三法)이 전전(展轉)하는 이것이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입니다. 그러므로 아뢰야연기법 이것은 앞서 언급한 업감연기 즉, 십이인연법보다 정도가 높은 것입니다. 어느정도 마음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식()이란 대체로 무엇인가?

불교는 꼬치꼬치 밝혀서 끄트머리까지 다 알아버리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믿으라는 것은 불교에는 없습니다. 불교는 모두를 다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덮어놓고 믿어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중생의 합리적인 사고(思考)를 그대로 이끌어 갑니다.


우주의 도리(道理)라는 것은 조금도 차질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약 500년 분 아닙니까. 그는 우주는 정확한 수리(數理)로 구성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주는 정확한 수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역(周易)같은 그런 어려운 것도 역시 다 하나의 괘()라는 수리로 풀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악(音樂)을 본다 하더라도 한 옥타브(Octave)는 팔진법에 따라서 화음(和音)이 되어 갑니다. 진동수에 따라서 전파, 광파가 있는 것이고, 음파도 가청 주파수대의 음파가 있고 초음파가 있지 않습니까. 그와같이 몇 사이클인가? 얼마만큼 진동하는가?


그런 정확한 수리로 해서 우주의 현상적인 문제가 규정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하고 물리학을 공부한다 하더라도 수학(數學)을 잘 모르면 못하는 것입니다. 우주 물리는 정확한 수리로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불교라는 것은 이와 같이 정확히 우주의 근원을 따지고 캐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 식은 도대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