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2. 사종연기 - 1) 업감연기(業感緣起)

通達無我法者 2007. 4. 11. 17:12



업감연기(業感緣起) 




먼저 업감연기(業感緣起)라. 업감연기는 우리가 업()을 짓고서, 업은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업이 되지 않겠습니까.


가사 우리가 무엇을 좋다 그러면 그냥 좋다는 것이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다 흔적(痕迹)을 둡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도 그런 것이 그만치 흔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아무튼 우리가 말 한마디를 한다던가 생각을 한 번 한다던가 행동으로 옮긴다던가, 이른바 신구의(身口意)라. 우리 몸으로 행동을 하고, 입으로 말하고, 뜻으로 생각을 하고,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업인데, 업을 지어 놓으면 그대로 없어지는게 아니라 꼭 흔적이 남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우리가 업을 짓고 또 업을 지어 놓으면 그 하나의 업보(業報)로 해서 고()를 받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번뇌(煩惱)를 일으키고, 또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을 지어 놓으면 결과적으로 인생고(人生苦)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 전생에 지은바 그런 하나의 업보에 따라서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와 같이 과거 전생에 업을 지어서 그 업의 과보에 따라서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났고, 금생에 또 업을 지어서 거기에 상응(相應)되게끔 내생 가서 태어나고, 이것이 이른바 삼세인과법칙(三世因果法則)이라. 이것은 불교의 기초적인 법문입니다.


우리 부처님 공부를 하실 분들은 역시 삼보사제(三寶四諦)라! 부처님과 부처님 법과 부처님 법 따라서 수행하는 승() 이것이 삼보 아니겠습니까. 삼보 이것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배가 삼보입니다. 천지 우주의 근본 도리, 대 자연의 도리가 부처인 것이고, 그 부처님 법을 깨달으면 또 부처인 것이고, 그래서 천지 우주의 도리 이것이 하나의 부처인 동시에 바로 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우주의 근본적인 법에 따라서 행동하면 좋은데 우리가 그렇지 못하니까 업을 짓고서 거기에 상응된 고를 받는 것입니다.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그 업을 받는가? 번뇌(煩惱)를 일으켜서 업을 받는가? 과거 전생에도 무명(無明)이라 하는, 무명 이것은 없을 무()자 밝을 명()자, 진리를 모르는 무지(無知)가 무명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과거 전생에 무지, 무명 때문에 부모 연()을 만난단 말입니다.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이 따르고, 무지하기 때문에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무지한 행 따라서 식()이 생기고, 그 업식이 중음계(中陰界)를 헤매다가 부모 연 만나서 태 가운데 잉태하고, 또 자라나 열 달이 차면 태어난단 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보고, 듣고, 느끼고 해서 또 업을 짓는 것입니다. 업을 지어 놓으면 금생에 그것이 씨앗이 되어서 죽은 뒤에는 내생 가서 그대로 또 다시 과보(果報)를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가 항시 수레바퀴 모양으로 돌고 도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그래서 혹업고(惑業苦)라. 혹() 이것은 미혹할 혹()자, 번뇌를 가리킵니다.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 따라서 받는 결과가 고()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외워 두시면 편리합니다. 내가 가사 누구를 미워한다. 그러면 그것은 혹이란 말입니다. 무엇에 탐착(貪着)을 한다. 이것도 혹입니다. 혹이 있으면 그런 번뇌에 따라서 행동이 있게 되겠지요. 그래서 업을 짓고 고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항시 이와 같이 혹업고가 되풀이 됩니다.


무지한 번뇌 때문에 행동을 하고, 그 행동 따라서 인생고(人生苦)를 받고, 혹업고의 삼도(三道)가 전전(展轉)하여 인과상속(因果相續)이라.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 항상 이것이 상속이 되어간단 말입니다.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상속되어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삽니다. 뱅뱅 도는 인생고, 그것을 뚝 끊어 버리는 것이 성자의 가르침이요, 성자의 길입니다. 우리 중생은 항시 이와 같이 죽고 나고 살고 죽고 끝도 갓도 없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돌고 도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회의 바퀴를 번뇌에 다라서 업을 짓고 고통을 받는 인생고의 바퀴를 다 끊어 버려서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업감연기(業感緣起)라 하는 낮은 차원의 연기법으로 해서는 영생해탈이라는 그런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 행동 따라서 인생고를 받고, 이런 것만이 업감연기라 하는 차원 낮은 연기법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다. 불교에서 연기를 보는 사람은 부처님 진리법을 확실히 알고 부처님 법을 보는 사람은 부처님을 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연기법을 모르면 그때는 불법을 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연기법은 불교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연기를 안다고 할 때는 불법을 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연기를 모르면 불법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인연 따라서 일어난단 말입니다.


이 세상 만물 어느 것이나 인연 따라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 연기법으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현대말로 하면 인과율(因果律)이라. 인과율을 떠나서 과학도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이라는 것은 인과율을 공리(公理)로 합니다. 인과율이 없으면 과학은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과율보다 훨씬 더 심오한 가르침이 부처님 연기법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과학적 인과율은 단순히 원인과 결과만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상인 연기법은 그 인()과 연()과 과(),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조건과 이것이 합해서 결과가 나온다는 보다 심오한 범위가 넓은 것입니다. 그런데 업감 연기법 정도는 우리 눈앞에서도 다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범부에 속한 연기법 이것이 업감 연기법입니다. 그러면 이 연기법의 근원은 무엇인가? 연기법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원인을 캐서 물을 때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가르침이나 과학적인 가르침은 모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천재도 상대성(相對性)이 어디서 왔는가? 그 원인을 어떻게 풀지를 못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을 세우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참다운 본질(本質)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을 초월(超越)한 세계, 상대(相對)를 초월한 세계가 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