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제 3 장] 1. 산은 산, 물은 물 (山是山 水是水) (1)

通達無我法者 2007. 4. 13. 07:28

 

 


산은 산, 물은 물 (1)




지금까지 제가 너무 근본적인 문제만 말씀드렸기 때문에 사실 불자님들께서는 별로 흥미롭지 못하고 또 알기도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불교가 눈에 보이는 세계, 이른바 형이하학적인 형식적인 세계만 가지고 말씀했으면 상식적으로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인 눈에 안 보이는 세계, 즉 영생불멸하는 정신세계까지를 아울러서 다 포함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어차피 근본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하면 눈에 안 보이는 세계, 이른바 신비 부사의한 세계까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아주 심오한 철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사실 일반 분들이 아시기가 좀 어렵습니다. 일반 엘리트들도 전문적으로 철학을 공부 안 했거나 종교를 공부 안 한 분들에게 그런 문제는 더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어려운 것은 어렵다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나의 본래생명은 무엇인가?’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주란 것은 장차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 ‘과거 전생은 어떠한 것이며, 과연 영혼세계는 있는 것인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세계는 어떤 곳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부인하면 그만이지요. 또 없다고 생각하면 이른바 유물론자처럼 모두가 다 물질인 것이고 우리 사고활동도 결국은 뇌의 반사작용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자기 고민도 해결이 안되고 항상 불안 속에서 헤맬 것이고, 또는 가정적으로 보나 사회적으로 보나 또는 국제적으로 보나 그러한 형식적인 문제만 가지고 생각할 때는 도저히 문제의 해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어렵기도 하지만 우리 인생을 가장 심오하고 성실하게 사신 분들, 예컨대 공자나 석가,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노자 그런 분들이 결국은 인생을 가장 성실하게 인생의 바닥까지를 훤히 알고 사신 분들인데 그분들의 말씀은 똑같습니다. 그때 시대상황에 따라서 또는 중생 근기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게 표현되었다 하더라도 그분들도 천지 우주의 근본자리를 항시 생각하고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안주시켰으며 동시에 본래가 그 하나의 자리, 그 차원에서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했습니다.


마태복음서 어느 구절에 보면은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가서 “주님, 주님께서 가장 중요시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생명의 근본자리인 하느님을 마음을 다해서 오로지 믿어야 할 것이고, 그 다음은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기독교 가르침의 전부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근본자리, 근본생명 그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항시 풀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붕붕 떠서 삽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상식적인 세계만 보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자는 그러한 형식적인 허망 무상한 세계를 다 간파하고 이 현상세계의 근본 본질을 깨달은 분이란 말입니다.

본질을 깨달아 보니 내 생명뿌리나, 그대 생명뿌리나, 미운 사람이나 또는 나쁜 사람이나 다른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두 다 근본뿌리가 동일한 생명체였던 것입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우주 생명체입니다. 그리고 생명이라는 것은 크고 작고 대립적으로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면 그때는 크다 작다 많다 적다, 여러 가지로 분별시비가 되겠지만 생명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늘귀 만한 데에 들어 있는 생명이나 태산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이나 똑같습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생명은 우주에 충만해 있고 우주는 생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공기라는 것도 역시 대류권 내에서는 산소와 수소가 있고 질소가 있지만 성층권에 올라가면 그것이 파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 위에 자기권이고, 더 올라가면 거기에는 전자도 없습니다. 수소만 있단 말입니다. 더 올라가면 아무것도 없는 순 진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나 부처님은 진공이 됐든 어디가 됐든 충만해 있습니다. 충만해 있다는 것은 가득 차 있다는 뜻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우주란 것은 모두가 하느님이나 부처님 생명뿐이란 말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연기법(緣起法), 따라서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됐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됐든지 간에 부처님 도리이고 우주의 본성이기 때문에 진여불성(眞如佛性) 그러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바로 진리니까 진여라 하는 것이고, 생명이니까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아니면 부처님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소박하게 생각하여 소승적 견지에서 부처님은 석가모니만 부처님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따질 때는 그렇게도 됩니다. 그것은 일반 중생들의 소승적 견해이지 참다운 부처님은 석가모니가 나오고 안 나오고에 상관없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항시 존재하는 생명 자체인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법신(法身) 부처님입니다.


제가 허두에 안심법문을 말씀드린 것도 내 생명, 이 몸뚱이야 죽든지 말든지, 석가모니가 나왔든지 안 나왔든지 상관없이 영생불멸한 진리는 항시 그대로 있단 말입니다.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둬야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그 자리는 변동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제아무리 믿고 의지한다 하더라도 인연이 다하면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지는 것이고 부모도 가는 것이며 자식도 아프다가 죽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서로 믿어야 되겠지만 인간이라는 것은 성자가 아닌 한에는 어느 때 가서는 배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본질에다가 안주시켜 놓고 살지 않으면 자기 지탱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동반 자살도 하고 엉뚱한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오늘은 여러분들이 들어서 잘 아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씀을 두고 잘 모르는 사람들은 성철(性徹) 큰스님이 지어서 만들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무엇이나 우리가 근거를 알아야 엉뚱한 소리를 않습니다. 이 말은 성철스님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성철스님이 만들고 돈오점수(頓悟漸修)는 보조스님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피상적으로 수박 겉핥기식의 싸움이 몇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깊은 뜻도 있겠지만 쉽게 소박하게 말하면, 돈오돈수란 것은 성철스님이 맨 처음 말한 것이 아니고 육조단경에 벌써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명문으로 나와 있는 말입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도 보조 국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불교 전반적인 흐름이 다 돈오점수입니다.


그러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다른 것인가?

다른 것이 아니라 돈오돈수라는 것은 우리 중생이 너무 높낮이를 따지고, 계급을 따지고, 이것저것 따지니까 단박 따지지 말고, 앞뒤ㆍ고하를 가리지 않고, 마음에 부처님자리만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이 돈오돈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돈오점수는 우리 중생이 본래 부처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즉 먹는 것이나 무엇이나 이것저것을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너무 본질만 따지고서 형식을 무시하고 차서(次序)를 무시하는 사람한테는 돈오점수를 얘기해서 점차 닦아 올라가는 것을 말해야 하겠지요. 도인들은 그야말로 선()ㆍ교() 방편이라 기가 막히게 그 사람의 정도에 맞게 말한 것을 우리 후대인들은 그걸 모르고 돈오돈수는 옳고, 돈오점수는 그르다, 또는 그 반대로 말을 합니다.


성자의 말을 가지고 범부들이 싸우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법문이나 예수님 말씀이나 성자의 말이란 것은 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 또는 시대에 따라서, 거기에 걸맞게 중생 제도의 자비심에서 우러나온 말씀입니다. 이것이 삼단견해(三斷見解), 즉 세 가지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