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 물은 물 (3)
그전에 고형곤 박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자기 아들도 장관과 서울시장을 지낸 분 아닙니까. 그이도 참 훌륭한 학자입니다. 팔십이 넘은 분으로 저술을 많이 했는데『선의 세계』라는 그분의 책이 있어요. 그 책에 보니까 이 문제를 가지고 책 한 권을 다 다루었는데, 이런 문제는 심오하고 또 굉장히 난해합니다만, 그러나 풀이해 보면은 내내야 그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그야말로 상식적으로 보는 것이고 상식이란 것은 오류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가사 다이아몬드 하나를 놓고 본다고 하더라도 다이아몬드는 빛나고 좋게 보이겠지요. 그러나 물리학자가 보는 다이아몬드란 결국 탄소가 결합되어서 빙빙 움직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전자현미경으로 다이아몬드를 보면 그렇게 좋게 보이던 것이 별것도 아니고 그저 타노가 가운데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미인도 우리들의 흐린 눈으로 보니까 미인으로 보이는 것이지, 현미경으로 그 얼굴을 보면 구멍이 숭숭 뚫렸단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상식적으로 보면 그와 같이 별로 똑똑히 제대로 못 봅니다. 물리학자가 과학적으로 봐도 온전히는 못 봅니다. 현미경으로 보는 것도 물리적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성자가 봐야 영생불멸 하는 중도실상을 봅니다. 아까 스피노자가 말한 바와 같이 영생의 차원에서 봐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봐야 바로 봐집니다. 바로 봐야 예쁘고 밉고가 아니라 부처님 차원에서 다 부처님같이 훌륭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른바 대 긍정이 될 수 있겠지요. 이것을 제가 쓰려면 한참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여기에 다 나와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세간에 있는 분들은 이렇게 짚어가며 말씀을 해드려야 이해가 되시겠지요.
우리 스님네들 같으면 그냥 쭉 읽어버리면 됩니다마는 그러나 여러분들이 계시고 또 여러분들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 법을 빛내실 분들이기 때문에 이런 귀중한 시간에 제가 세밀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식적으로 보는 견해와 모두를 부정해 버리는 부정적 견해, 또는 성자처럼 대 긍정하는 견해가 세 가지 견해, 즉 ‘삼단견해’인데, 우리 중생은 긍정도 하고 부정도 하지만은 긍정한 것이나 부정한 그것은 사실은 바르지가 못합니다. 우리 기분이 그곳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분이란 것은 번뇌에 가려져 있으므로,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원죄가 들어 있단 말입니다. 원죄에 가려져서 바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좋다고 보는 것이 꼭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쁘다고 보는 것이 꼭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허무주의적으로 모두를 부정해서 보는 것은 좋은 것도 궂은 것도 모두 다 부정해 버린단 말입니다. ‘모든 것은 다 꿈이고 허깨비고, 뜬구름이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이 모두를 다 부정해 버리는 견해입니다. 따라서 허무주의적인 그런 것은 옳지 못하고 성자만이 가장 바르게 봅니다.
성자는 우주의 도리로 보기 때문에 오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번뇌에 가려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성자의 견해를 우리 견해로 하고 살아야 바로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단박에 비약적으로 성자가 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무수한 세월 동안 많은 성자들이 일구여출(一口如出)로 말한 가르침들, 성자들의 말은 다 우주의 도리에 맞고 원 줄거리는 똑같습니다. 성자의 말을 우리 견해로 보고 살아야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늘 하는 말입니다마는 이 우주란 것은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라, 만법이란 것은 우주만유 모두를 만법이라고 합니다. 제법(諸法)이나 만법이나 같은 말입니다. 모든 존재, 나까지 포함해서 이것이나 저것이나 눈에 보이는 것이나 안 보이는 것이나 모두를 다 포함해서 제법 또는 만법이다 그럽니다.
그런데 만법이 유식이라고 생각할 때는 물질은 물질이고 정신은 정신이 아닌가?라는 견해는 평범한 상식 아닙니까. 그러나 부처님 차원에서 성자가 볼 때는 물질이란 것은 우리 중생이 잘 몰라서 물질이라고 보는 것이고, 현대 물리학자들도 ‘물질은 에너지일 뿐이다’ 라고 본단 말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이 에너지가 진동해서 물질같이 보이는 것이지 참말로 있는 것은 결국 에너지뿐인 것입니다. 우주에너지가 그때그때 어떻게 진동하는가, 얼마만큼 움직이는가 하는 운동상황에 따라서 전파가 되고 음파가 되는 것이지 본래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전파나 음파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본래 에너지는 우주의 정기(精氣)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며 또 그런 것들이 모여서 우리 몸의 세포를 이룬다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물 자체, 칸트가 말한 물질의 근본은 무엇인가. 물 자체는 내내야 마음이고, 부처이고, 하느님이고, 또 태극이고, 도(道)란 말입니다.
우주의 근본정기인 순수에너지 그 자리가 진동 상황에 따라서 마이너스(-)가 되고 플러스(+)가 됩니다. 음ㆍ양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음은 마이너스고 양은 플러스 아닙니까. 우주의 정기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진동하는가에 따라서 마이너스가 되고 플러스가 되곤 합니다. 그것이 모이면 또 오행(五行)이 되지요.
그런데 이와 같이 움직이기 전에 참다운 실상, 우주의 에너지, 우주의 정기, 즉 말하자면 이것이 알 식(識)자 또는 마음 심(心)자, 식이고 심이란 말입니다. 몇 가지 공식을 외워 두면 불교를 이해하기가 참 쉽습니다. 공식을 모르면 자꾸 막힙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로 돌아가면 다 공(空)이 되어버리고 물질은 없습니다. 결국 우주의 정기, 에너지만 남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식이요, 심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헤아리고 사고하는 그런 쪽으로 생각할 때는 알 식(識)자란 말입니다. 식이나 마음이나 본래 같은 뜻인데, 우주의 본체인 마음을 부처님 또는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종교에서 그 마음을 헤아리고 사고하는 쪽으로 말할 때 식이라고 쓰고, 이것을 열 가지 차원으로 구분합니다.
맨 처음 안식(眼識)이라. 눈으로, 시각적으로 보는 그런 알음알이란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식(耳識)이라, 청각 귀로 듣는 알음알이이고, 그 다음이 비식(鼻識)이라. 코 비(鼻)자, 냄새 맡는 후각으로 아는 알음알이이고, 다음은 혀 설(舌)자, 맛으로 알음알이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신식(身識)이라, 촉각 즉 몸으로 받는 알음알이이며, 다음은 의식(意識)이라. 우리가 좋다 궂다, 나요 너요, 하는 생각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이 육식(六識)만 가지고 씁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또 몸으로 감촉하고 또는 뜻을 헤아립니다. 우리 범부중생은 상식으로 이 육식 차원만을 갖고 씁니다. 그런데 개나 소나 돼지는 육식 없이 앞의 오식과 오감만 씁니다.
개나 소나 돼지 등 동물은 육식이 완전히 잠재해 버려서 식이 안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모두가 다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의 꽃이나 나무나 흙이나 별이나 모두가 다 본래 불성이어서 식이 다 갖춰져 있단 말입니다. 다만 발로가 안 되어 있을 뿐이지 그런 것들이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즉 일반 동물들은 오감, 오식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좀 더 진화가 되어서 육식을 쓰는 것인데, 그러면 육식의 뿌리는 무엇인가? 제칠 말나식(末那識)이라. 이것이 육식의 뿌리입니다. 말나식은 모든 망령된 미망과 무명의 근본이 되는 식이란 말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결국은 원죄라는 죄의 씨앗을 말합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만심도 있고 욕심도 있는 근본 원죄, 불교말로 하면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는 말입니다.
무명이라는 말은 없을 무(無)자 밝을 명(明)자, 밝지 못하니 결국은 무지란 말입니다. 무지나 무명이나 같은 뜻입니다. 근본무명, 이것이 제 칠식입니다.
근본무명 때문에 의식으로 활동할 때에도 한없이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남한테 베풀 때도 ‘내가 저 사람한테 베풀면 저 사람이 좋아하겠구나’ ‘나중에 어느 때 나를 도와 주겠구나’ 이와 같이 항시 계산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일반 범부 중생은 순수하게 뭘 잘 못합니다. 그러니까 중생이라는 것은 항시 위선이 들어 있습니다. 성자가 되어야 비로소 위선을 떠납니다. 성자는 천연적으로 행동해도 위선이 없지만 우리 중생들은 상당히 마음을 먹고 해야 조금씩 나아지는 것입니다.
말나식이라. 말라식, 이것은 모든 어리석고 미망된 마음의 근본인데, 우리 마음이 이것 밖에 없다고 생각할 때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순자(筍子)의 성악설(性惡說)처럼 인간성을 본래 나쁜 것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지금 학자들을 보면 인간성은 본래 나쁜 것이기 때문에 교육을 해서 도야(陶冶)를 시켜야 된다고 하는데 이 말나식이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말나식의 뿌리가 제팔 아뢰야식(阿賴耶識)입니다.
아뢰야식, 이것은 선ㆍ악을 떠나서 모든 종자가 다 들어 있습니다. 나쁜 종자, 좋은 종자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마음은 사라져 버려도 그 종자가 여기에 다 남아 있게 됩니다. 남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종자가 들어 있다가 자꾸 사랑하면 더욱 그런 마음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더 미워지는 것이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죽이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우리가 생각을 한 번 내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에 항시 저장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자식이라, 선ㆍ악의 종자가 여기에 들어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연이 닿으면 종자가 다시 싹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은 전에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마음의 근원인가? 이것도 근원이 아니라, 다행히도 보다 더 큰 근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청정식(淸淨識)이라고도 합니다. 저 근본에서 볼 때는 좋은 것이나 궂은 것이나 모두가 다 청정하단 말입니다. 여기에 바닷물이 있다고 할 때 바닷물 표면에 비가 와서 흙탕물이 들어가면 표면은 오염이 되겠지요. 그러나 몇 십 미터 수면 밑은 오염이 안 됩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마음이란 것은 아뢰야식이 근본 바탕이 아닙니다. 보다 더 깊은 바탕이 암마라식인데, 이 암마라식은 나쁜 종자가 들어오든 좋은 종자가 들어오든 상관없이 항시 청정하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정식(白淨識)이라, 그야말로 순결하고 청정하단 말입니다. 암마라식은 백정식으로 풀이가 됩니다. ‘암마라’라는 말은 인도말로 불식(佛識)이라는 뜻인데 바로 부처님, 또는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못난 우리 마음도 근본은 부처구나, 짐작이 좀 되시겠지요. 우리가 좋다 궂다 하는 것은 말나식 차원에서 그러는 것이지, 근본 뿌리까지 파고들어 가면 내내야 다 부처가 나온단 말입니다. 개의 마음이나 소의 마음이나 끄트머리에 가서는 다 부처 마음입니다.
여러분들, 불경을 보십시오.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개가 전생의 자기 아버지가 환생한 그런 사연도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자기가 지은 바에 따라서 윤회합니다. 뱅뱅 돕니다. 자기가 죽어서 개도 되고, 소도 되그 그러는 것입니다. 시기심을 많이 내고 질투를 많이 하고,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죽으면 구렁이나 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의 허울을 쓰고 있습니다만 우리 몸뚱이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기 번뇌, 자기 업에 걸맞는 허울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천상에 올라가면 천상 허울을 쓰고 그러다가 부처가 되면 그때는 온전한 생명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본래 고향이 부처인데 이 자리가 바로 적멸(寂滅)이라. 번뇌가 다 없어져 버린 청정하고 번뇌의 동요가 조금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 다음이 불성(佛性)이라, 그 뜻은 나쁜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면, 지옥 갔다 어디 갔다 윤회를 하겠습니까? 예수나 석가나 공자 그런 분들은 다 번뇌에 묶여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 높은 극락이나 천상에 계시다가 우리 중생이 불쌍하니까 자비로, 사랑으로 해서, 중생의 구제를 위해서 짐짓 몸 받아 나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그분들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본래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부처님 아들이요, 하느님 아들인데 우리는 지금 업 따라서 뱅뱅 돌고 있습니다.
예수나 석가, 공자나 그런 분들은 바로 청정한 분들이기 때문에 복이 구족해서 저 천상이나 극락에 있다가 일반 중생을 불쌍히 여겨 중생 구제를 위해 일부러 오신 것입니다.
지금 제가 생각하기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그냥 업 따라 나오신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과거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높은 데 계시다가 금생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해서 나오셨다고 저는 꼭 믿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또 한국에 태어났어도 하필이면 불교를 믿고 여끼까지 서투른 법문을 들으시기 위해서 하와이에서 오시고, 한국에서 오시고, 또 뉴욕에서도 오셨습니다. 제 법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을 그렇게 흠모해 하는 그 마음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틀림없이 여러분들께서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거 전생에 높은 데 계시다가 중생을 제도하고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계를 구제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가 부처인데 이것이 본 마음입니다. 따라서 남을 미워하고 해코지하는 이런 마음은 우리 본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말할 때에 악마와 천사가 우리 마음에 같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악마와 천사 정도가 아니라 바로 악마와 하느님이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악마와 하느님, 악마와 부처님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님이고 하느님인데 우리가 잘못 살아서 나쁜 버릇 때문에 엉뚱한 짓을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나쁜 사람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를 하고서 그 사람을 진심으로 타이르면 그때는 순간에 위대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성인들은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합니다.
<마태복음>에도 베드로가 예수에게 “주님, 제 이웃이 저에게 잘못했을 때, 일곱 번쯤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예수께서 “일곱 번뿐 아니라 칠십 번의 일곱 번을 더 용서해라.” 그 말씀은 무조건 다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우리는 남을 용서 못합니다. 성자는 모두를 다 부처같이 하느님같이 보며 용서하는데, 성자도 용서하는데, 성자에 비하면 어림도 없는 우리가 용서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비판을 준엄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분상에서는 남을 용서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 의식만 가지고, 금 덩어리나 다이아몬드 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 부처 아닙니까. 그런데 영원히 죽지 않고 빛나는 하느님, 부처님이 우리 본심이란 말입니다. 가장 소중한 보배가 우리한테 있습니다. 그 소중한 보배를 캐내려고 하지는 않고,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 것인 데도 그것만 가지고 아귀다툼하고 싸우고 그것 때문에 죽이고 전쟁을 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자업자득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번뇌에 묶여서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의 본 마음자리를 캐기 위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본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
사람 마음도 부처지만 동물도 부처이고 또 공기나 물이나 그것도 역시 본래는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의 정기(精氣)입니다. 따라서 염불이나 오체투지 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그 자리에 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알아들으니까 부처님은 극락세계에 계신다, 하느님은 천상에 계신다고 하는 것이지 성자의 길에는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안 계시는 데가 없고, 어디든 다 계시는 것입니다.
내 눈 속에나 내 몸 속에나 머리카락 속에까지 다 부처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염불을 하고 화두를 참구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어디에나 계시는 부처님, 우주의 참다운 보배 같은 생명, 거기에다가 마음을 두고 하는 것이 참다운 공부입니다. 지금 안보이지만 거짓말은 절대로 안 하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증명을 했단 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좋은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로 항시 빛나고 있는 것을, 성자가 볼 때는 천지가 환하게 보이는 것을, 우리 중생은 어두워서 못 본단 말입니다. 그러나 꼭 보이듯이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공부가 훨씬 빠른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하다 보면은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을 보고도 활짝 깨치고 말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동산 양개(洞山良价) 선사는 자기 스승에게 법을 들을 때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업장에 가리워져 있으니까 어려운 법문을 못 알아들었겠지요. 그래도 여태까지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부처가 무엇인가?’ ‘도가 무엇인가?’ ‘진리가 무엇인가?’, 그러다 보니 그만큼 마음이 정화가 되었겠지요.
깨달을 때는 어느 순간 어떤 계기가 필요합니다. 자기 스승한테 가서 고도의 법문을 들었지만 도저히 못 알아듣겠고 해서 ‘나 같은 놈은 차라리 죽어서 몸을 바꿔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시냇가를 걸어오다가 맑은 시냇물을 보고 퍼뜩 깨달아 버렸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느님,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다 보면은 어느 때 고도한 법문을 못 알아들어도 어느 순간에 시절 인연이 와서 깨달을 시기가 되면은 그때는 퍼뜩 깨달아 버리는 것입니다. 밥을 먹다가도 깨닫고, 세수를 하다 깨닫고, 깨닫는 순간은 일정한 때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자나깨나, 밥을 먹으나, 일을 하나, 어느 때나 하느님 생각, 부처님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본심이고 우주의 본질인 것이며, 그러다 보면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한번 외우면 외운 만큼 우리 업장이 녹아집니다.
여러분들, 몽수경을 보셨죠. 제일 쉬운 것 아닙니까.
조념관세음 모념관세음(朝念觀世音 暮念觀世音)이라, 아침이나 저녁이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위에서 신(神)들이 못 떠납니다. 신들이란 우리보다 훨씬 더 영식(靈識)이 맑습니다. 영식이 맑으니까 우리보다 더 하느님ㆍ부처님을 숭배하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신장들이 환희심을 내기 때문에 어디로 갈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부처님 이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이란, 우주의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 이름은 우리 사람 이름같이 아무렇게나 지은 것이 아니라 바로 영원한 생명에 걸맞은 이름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면 영원적인 진리가 거기에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번 외우면 외운 만큼 우리 마음도 정화가 되고 우리 업도 녹아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신들이 있는데 신들이 그것을 듣고서 환희심 때문에 어디로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조념관세음 모념관세음, 항시 ‘나무아미타불’ 하면, 그때는 천라신, 지라신이라, 하늘에 있는 신이나 땅에 있는 신이나 우리를 못 떠난단 말입니다. 못 떠나니까 일체 재앙이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창조하기란 사실은 쉬운 것입니다. 쉬운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너무 자기 주관적으로 쥐꼬리만한 지식으로 따지니까 참다운 행복을 못 받는단 말입니다. 성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십시오. 성자의 말은 거짓이 없습니다. 금강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부처님 말씀은 모두가 다 알맹이 있는 실다운 말씀인데 우리 범부들이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른바 자기 무지를 알아야 됩니다. 철학의 아버지라는 소크라테스가 ‘자기 무지를 알아라.’ '그 말은 굉장히 소중합니다. 우리 범부라는 것은 내가 지금 금생에 나와서 박사가 되었다 할지라도, 영원적인 진리를 아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분별 지혜라, 일반 세간적인 것들은 중생 지혜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박사나 교수가 되었더라도 아직 영원의 차원에서는 무지하단 말입니다. 누구나가 다 참회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나와서 요단강에서 외친 소리가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 나라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데, 그대들 모두가 참회하라, 회개하라. 일반 중생들은 잘났으나 못났으나, 지위가 있으나 없으나 다 회개해야 합니다.
아직은 성자가 못되었으니까 본래가 부처이고 하나님인데, 본래의 부처나 하나님이 못된 사람들이 참회할 수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반 동물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도 하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알고, 몸으로 감촉도 하지만, 일반 동물들은 그것 밖에는 못씁니다. 이른바 오감밖에는 모릅니다.
다행히 우리 인간은 진화법칙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다윈의 진화법칙도 역시 어떤 이치는 있습니다. 인간 정신을 무시해서 그것이 큰 탈이지만, 우리 인간은 보다 더 진화가 되었다 말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육식까지밖에 못씁니다.
다행히도 철인이나 성자나 그런 분들은 본래 우리 마음의 근본은 부처구나 하는 것을 알아버렸지요. 금생에 태어나서 육식까지 밖에 모르고 죽어버린 사람도 있고 또는 순자처럼 인간의 마음을 본래 악하다고 보았던 사람이나, 제 칠 말나식까지 알고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는 과거 전생에 많이 닦아 가지고 왔기 때문에 금생에 부처라는 것을 알고 환희심을 낸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래 뿌리가 부처다, 이것을 안다는 것이 우리 공덕 가운데 가장 소중합니다. 이것을 알면 다른 것은 모두 시원찮은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하더라도 ‘역시 내 마음은 만능을 갖춘 부처다’ 이렇게 생각하고 시험공부를 하게 되면 그때는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 배우면 그것만 알고 수학공식 하나 풀면 그것만 머리에 담아지고 그런 것이 자기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그때는 조금만 넘어지면 노이로제에 걸립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무한한 가능성, 즉 우주를 다 알 수 있는 모든 지혜를 우리는 다 갖추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성자의 지혜는 일체종지입니다. 예수나 석가모니가 과학을 배웠겠습니까. 정감록을 쓴 이가 과학을 배웠겠습니까? 그런데 몇 백 년 뒤의 일까지 다 알아 맞췄단 말입니다. 성자의 지혜라는 것은 모두를 다 아는 것입니다.
‘내 머리에는, 내 마음에는, 원래 그런 지혜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시험공부를 하는 것과 ‘내가 지금 배우는 것만 머리에 들어가고, 안 배운 것은 안 들어간다’ 이렇게 생각하고 공부를 하는 것에는 천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은 천지에 두루해 있습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물질이 아닌 것은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두루하는 것입니다. 은하계도 태양계도 자기 마음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의 정기로 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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