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 물은 물 (2)
山是山 水是水
산시산 수시수
老僧三十年前 未參禪時
노승삼십년전 미참선시
見山是山 見水是水
견산시산 견수시수
乃至後來親見知識 有入處
내지후래친견지식 유입처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견산불시산 견수불시수
而今得箇休歇處
이금득개휴헐처
依前見山祇是山 見水祇是水
의전견산지시산 견수지시수
大衆這三般見解是同是別
대중저삼반견해시동시별
有人緇素得出 許與親見老僧
유인치소득출 허여친견노승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卷23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지도(智度) 또는 도피안(到彼岸)의 지혜, 곧 실상(實相)을 깨달은 지혜로써 생사의 차안(此岸)을 건너 해탈(열반)의 피안에 이르는 배나 뗏목 같으므로 도피안이라 합니다.
그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말은 벌써 중국 송나라 때 불교 내에서도 그와 유사한 것이 있었으나, 정식으로 쓰인 것은 송나라 때 청원 유신(靑原惟信) 선사 때부터입니다.
이분도 위대한 분입니다. 이 분도 몇 십 년 동안 공부를 해가지고 비로소 이런 견해를 터득한 분입니다. 헌데 범부 소견인 우리 마음이 정화되지 않을 때는 그야 산은 산이고 물은 그냥 물 아니겠습니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그 말씀을 내놓고 그것에 관해 해설을 안 해 놓으니까 사람들은 그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 이렇게만 생각해 버린단 말입니다.
애초에 나온 것은 그런 뜻이 아닌데, 그래서 청원선사가, 내가 공부를 않고 범부일 때는 산을 보면 그냥 산이고 물을 보면 그냥 물이고 쇠는 쇠고 다이아몬드는 좋으니까 패물로도 쓰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자기가 선지식을 만나서 공부를 상당히 하고 보니까 산도 산같이 안 보이고 다이아몬드 같은 것도 별것이 아니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승공견(二乘空見)’이라, 이승이란 공부를 한 성문승(聲聞乘)이나 연각승(緣覺乘)이 이승입니다.
성문승이나 연각승들은 성자는 성자인데 공도리(空道理)에만 치우친 분들입니다. 진여불성이 무엇인가 하는 데까지는 미처 모르는 분들입니다. ‘그냥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그림자 같고 꿈 같아서 조금도 의지할 게 없다’ 그런 생각에 치우친 성자가 바로 성문승이나 연각승 같은 분들이지요. 공부를 좀 하다 보면 그때는 텅 비어 온단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공부를 해 보면 아시겠지만, 자기 몸도 조금씩 조금씩 가벼워 오다가 나중에는 이 몸뚱이가 공중에 붕 떠서 어디에 있는가 분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꼬집어 봐도 아프지 않고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은 그런 이상한 경계가 옵니다. 따라서 그런 때는 산을 봐도 평소 상식적으로 볼 때와 견해가 같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달리 보입니다.
사실 우리가 꽃송이 하나를 보더라도 기분 따라서 달리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보통사람들이 그런 것이고 공부를 약간 해 가지고 모두가 다 비었다는 소식을 알 때에는 정말로 방 안에 있어도 저 벽 밖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이와 같이 무시무시한 힘이 있습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공부를 좀 해 가지고 보니 그때는 ‘견산불시산(見山不是山)’이라, 산을 봐도 그냥 산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은 산을 보면 다만 산이요 물을 보면 그냥 물인데, 공부를 하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견해가 납득이 되니까 산을 봐도 산이 아니게 보이는 것입니다. ‘견수불시수(見水不是水)’라, 물을 봐도 물이 아니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공부가 더 깊어져서 불교말로 ‘휴흘처(休迄處)’라, 마음이 다 쉬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마음을 못 쉬고 있습니다. 좋다는 생각, 무슨 생각 등…. 우리 마음은 지금 잔뜩 짐을 지고 있습니다. 성자가 되어야 온전히 마음을 쉽니다. 성자는 집착이 없으니까 돈을 못 벌어도 무방하고 남이 나를 배신하거나 내 집이 불타버려도 무방합니다. 성자들은 본래 그런 것들은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목숨도 별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자만이 오로지 마음을 쉽니다.
이것을 불교말로 ‘휴흘처(休迄處)’라, 쉴 휴(休)자, 쉴 흘(迄)자. 휴흘처라 그럽니다. 그래서 번뇌가 다 녹아져 마음이 개운하면 그런 단계가 우주의 본바탕을 훤히 보신 단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가 다 부처님뿐이다,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보는 거란 말입니다. 번뇌가 있을 때는 그렇게 안 보이지만 번뇌가 온전히 녹아버려서 나쁜 습기들이 다 녹아진 다음에는, 훤히 비어서 그때는 좋은 사람을 보나 궂은 사람을 보나 다 부처같이 보이고 삼천대천세계가 다 부처님 광명으로 충만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단계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른바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모든 것을 가장 바르게 보는 견해가 중도실상입니다. 조금도 치우침 없이 참답게 본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참답게 보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도 바른 견해가 못 됩니다. 참말로 아들을 바르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들은 아들인데 진여연기로 해서 진여불성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렇게 봐야 아들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항상 근본에서 비춰본다는 말입니다.
스피노자를 그야말로 신에 도취한 성자라고들 하는데, 그분은 기독교나 불교를 굉장히 많이 공부한 철인(哲人)입니다. 그런 스피노자가 한 말 가운데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게 무엇인고 하면 여러 번 인용을 했습니다만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은 현실 하나 하나가 영원에 참여한다.’ 라고 한 말입니다.
자기 아내를 봐도 영원한 진리에서 잠시간 몸을 나툰 아내가 아닌가, 남편도 영원의 차원에서 인연 따라 잠시간 나에게 나툰 남편이 아닌가, 누구를 보나 그렇게 생각해야 비로소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의 동요가 안됩니다. 또 그렇게 보는 것이 연기법으로 보는 것입니다.
연기법의 좋은 것이 무엇인고 하면 그와 같이 모두를 다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을 합해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하는 그것은 상대성 원리밖에 안 됩니다.
그걸로 해서는 인간문제 해결이 못됩니다. 우리가 진실로 깨달아서 우리 마음의 번뇌가 다 쉬어서 중도실상의 성자의 지혜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산을 보면 바로 참다운 산이란 말입니다. 중생의 기분이 사나울 때 보면 기분대로 산이 보이는 것이고, 기분 좋을 때 보면 별스럽지 않은 산도 이상하게 좋게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무엇을 보나 바로, 제대로 못 봅니다.
누구를 보나 다 자기 번뇌를 섞어서 봅니다. 번뇌의 여과 없이 번뇌에 때묻지 않고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인데, 그래서 성자가 되어야 바로 봅니다. 어느 것이나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성자가 보는 산이라야 비로소 참다운 산이란 말입니다.
참다운 산이란 무엇인고 하면 그야말로 진여불성으로 이루어진 산이란 말입니다. 물을 보더라도 성자가 볼 때는 물 역시 진여불성으로 이루어진 물입니다. 이른바 진여연기의 물이란 말입니다.
불교는 공식만 알면 참 쉬운 것입니다. 중생 차원에서 볼 때는 모두가 다 때묻어 보이는 것이고 성자의 바른 견해로 볼 때는 모두가 다 바른 것입니다. 지금 종교인들의 할 일이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가 단박에 성자가 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닦아서 번뇌가 녹아야 될 것이지, 그러나 성자의 가르침 따라서 성자의 견해를 우리 견해로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가사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 또는 ‘무소유’라 원래 내 소유는 없다라든가 이런 것을 말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행할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자가 바라보면 분명히 내가 없고 내 소유도 없으니까 그것이 옳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 옳은 견해를 우리가 긍정해야 합니다. 긍정하고서 그에 가까워지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종교인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당장에 성자가 되기는 어려우니까, 이론적인 체계만은 바르게 세우는 것이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저번에 말한 선오후수란, 먼저 이치를 알고 닦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더라도 길목을 알고 가야지 모르면서 덮어놓고 가면 되겠습니까. 믿는 것도 덮어놓고 믿으면 우리의 소중한 힘을 낭비합니다. 분명히 성자의 길을 따라서 알고 믿어야 생명의 낭비 없이 보다 빨리 성자가 지시한 극락세계, 영원불변한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그 말로만 해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새기고 곱새기고 해서 좀 차원이 높아져서 성문이나 연각이나 그런 이승(二乘)에서 볼 때는 또 모두가 다 텅텅 비어 보인단 말입니다. 산을 봐도 산이 아니고 물을 봐도 물이 아니고 모두가 다 텅 비어 보인단 말입니다. 이른바 허무주의적인 경계가 되겠지요. 이승(성문ㆍ연각)이란 것은 결국 허무주의와 비슷합니다.
성자가 되어야 허무를 극복한 것이고, 일반 범부들은 허무인 줄도 모릅니다. 허망한 것을 허망한 줄 모르는 게 우리 일반 중생들이고 성문ㆍ연각 이승들은 일반 중생보다는 좀 앞서 있지만 또 허무에만 치우쳐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다 필요 없다고 하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 같은 사람이 되기 쉽겠지요. 별도로 해설을 하자면 한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해설을 않고 원문만 소개를 했습니다. 원문을 보시면 모두가 다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한문세대가 아닌 분들은 더 어령실 것입니다. 그러나 두고두고 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가르치심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자부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논쟁거리가 되어 있고, 또 풀어야 할 근본적인 문제를 뽑아놓았기 때문에 두고두고 참고로 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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