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28)
28)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1. 능시일신위다신(陵示一身爲多身) 2. 시일진신만대천계(示一塵身滿大千界) 3. 대신경거원도(大身輕擧遠到) 4. 현무량류상거일토(現無量類常居一土) 5. 제근호용(諸根互用) 6. 득일체무득상(得一切無得想) 7. 설일게의경무량겁(設一偈義經無量劫) 8. 신편제처유여허공(信遍諸處猶如虛空)
이것을 경에 보면은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 나중에 보십시오. 정(淨) 이것은 청정무비해서 조금도 때묻지 않은 맑고 풍요한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생들이 자꾸만 거꾸로 봅니다. 거꾸로 보기 때문에 팔전도(八轉倒)29)라. 반야심경에 보면 전도몽상이 있지요. 전도몽상은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구를 전(轉)자, 자빠질 도(倒)자. 거꾸로 본다 말입니다, 바로 못보고.
29) 팔도(八到):범부(凡夫)와 이승(二乘)이 미집(迷執)하는 팔종(八種)의 전도(轉倒)이다. 생멸무상(生滅無常)한 법(法)을 상락아정(常樂我淨)하고 집착하는 범부(凡夫)의 사도(四倒)와 실상(實相)열반(涅槃)의 법(法)을 무상(無常)ㆍ무락(無樂)ㆍ무아(無我)ㆍ부정(不淨)이라고 고집하는 이승(二乘)의 사도(四倒)를 말함.
그런데 여기 있는 것은 본래가 상락아정이라는 소중한 보배가 갖춰져 있는 것인데.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못하니까 거꾸로 보이는 것입니다. 거꾸로 보는 것이 수도 없이 많지만은 그냥 이것도 간추려서 여덟 가지 유별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범부의 사전도(四轉倒)라. 범부의 네 가지 유별로 거꾸로 보는 것과 그 다음에는 이승(二乘)이라. 앞서 말씀드린 성문 연각들처럼 도는 좀 알았지마는 확실히는 모르는 사람들, 공(空)만 깨닫고 공의 참다운 중도를 깨닫지 못한 성문ㆍ연각, 즉 이승이 보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범부가 거꾸로 보는 네 가지가 무엇인가 하면은 범부 세간의 무상하고 항상이 없는, 유상(有相)한 것은 모두 무상한 것이고, 자기 몸도 무상하지만 재물도 감투도 다 무상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무상한 것이란 말입니다. 대통령을 지낸 이들도 그 자리에 있을 때는 좋았지만 청문회다 교도소다 모두 얼마나 곤욕들을 치뤘습니까.
우리 범부중생들이 사는 세간은 이처럼 무상하고 또는 무안락이라. 안락이 본래 없다 말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은 따지고 보면 다 고통뿐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뱃속에다 두어도 고생, 뱃속에서 나올 때 고생, 또는 병들어서 고생, 헤어져서 고생, 돈버느라 고생, 실패해서 고생….
인생개고(人生皆苦)라. 부처님 말씀 보면 결국 고생뿐이란 말입니다. 고생이 아닌 것은 결국은 순간뿐입니다. 헤어지고 만나고, 좋은 사람과는 헤어져서 괴롭고, 살아서 헤어져도 괴롭고, 죽어서 이별하면 더욱 슬프고, 따지고 보면 다 고생뿐이고 안락한 것은 어느 한 순간뿐입니다. 그것도 역시 잠시간 안락하게 보일 뿐이지 참다운 안락은 없습니다. 중생 세계에서는 이와 같이 항시 무상하고 또 안락도 본래 없단 말입니다.
무상 무아라,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 몸뚱이가 있는 것인데, 이 몸뚱이도 시시각각으로 신진대사를 해서 변화해마지 않는단 말입니다. 늙어서 주름살이 생기고 기미가 생기고 젊어서는 누구나 다 피부가 고운 법인데 나이 먹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고 할 것도 없고 청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며칠만 목욕을 안 해보십시오. 그냥 냄새가 풍긴단 말입니다. 우리 몸도 무상하고 즐거움도 없고, 나라는 것도 없고, 또는 깨달을 것도 없고. 우리 중생 생활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제법(諸法)을 우리가 거꾸로 잘 못 봐서 항상 변치 않고 안락스럽고 또는 영생하고, 참다운 내가 있고, 또는 청정하다고 우리가 고집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범부가 네 가지로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거꾸로 보지를 말으십시오. 우리는 지금 대체로 거꾸로 보고 삽니다. 바로 보면 결국은 인생개고(人生皆苦)라 그런 것인데, 일반 중생들은 인생개고를 바로 못 봐서 항시 오욕락이라. 잘 먹으려 하고, 잠도 많이 자면 좋은 줄 알고, 또는 감투가 높으면 좋고, 재물도 많으면 좋고, 좋은 이성 만나려 하고, 이러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런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허망한 것이지. 일반 중생은 이런 것을 보고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 분들은 그 자리에서 무상을 느껴야 됩니다. 물론 지금 사는 생활을 다 뿌리쳐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은 모두가 다 ‘무상하구나’, ‘허망하구나’ 이렇게 느껴야 오류를 범하지 않고 지나치게 집착을 않습니다.
음식도 너무 미식만 취하고 많이 먹으면 좋을 것이 없겠지요. 신문에 보면 외국사람들은 5분의 1은 비만증에 걸렸다고 합니다. 대개 보면은 앞뒤로 퉁퉁해 가지고 절도 못합니다. 그렇게 자기 조절을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참 의지가 약합니다. 모두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 먹었겠지요.
인간이란 참 불쌍하게들 삽니다. 바르게 살기가 참 편한 것인데, 적게 먹고, 개운하게 먹으면 몸도 편하고, 배설도 적게 하고, 성인병도 안 걸리고 참 좋을 것인데 인간들이 스스로 화를 자초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들은 결국 재미도 없고 항상함도 없고 또 덧없는 이런 것들을 좋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것을 중생이 네 가지로 거꾸로 보는 범부사도(凡夫四倒)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승사도(二乘四倒)라. 공(空)을 조금 깨달아서 허망한 것은 좀 알고, 무상을 알았지만 참다운 중도를 모른단 말입니다. 무상하고 허망하니까 어느 것에나 집착할 것이 없고, 그런 것들은 다 쓸데없다는 것을 알았지마는 또 역시 그 사람들은 실상열반(實相涅槃)에 대해서는 미처 못 깨달았습니다.
열반은 원래 만덕을 갖춘 것인데, 성문이나 연각들은 공(空)만 좀 알았지 만덕을 갖춘 열반은 모릅니다. 열반에는 공덕이 한도 끝도 없는 그야말로 영생불멸하고 영원히 행복하고 또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완벽한 자기가 되는 것이고, 또 청정해서 조금도 오염이 없는 것이 본래의 자기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열반 공덕도 역시 무상하고, 또는 즐거움도 없고 참다운 대아(大我)도 없고, 또는 깨끗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허무주의자들은 불쌍합니다. 정말로 참다운 자기가 있고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이른바 이데올로기 때문에 딱 묶여가지고 그것만 지키다가 죽어버린단 말입니다. 스탈린이나 모태동이나 모두 생각하면 참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만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또 자기 사상에다 묶어 놓고서 말입니다. 그네들의 그 옹색한 이데올로기가 하마 파기 될까봐 ‘종교는 아편이다’ 라고 매도합니다.
종교를 믿어버리면 그 이데올로기 같은 것은 어디에다 발붙일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북한 같은 체제는 다 종교를 싫어합니다. 지금은 하다하다 안되니까 조금씩 터놓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막아 놔도 오래 못갑니다. 우주의 법도에 안 따르는 것은 결국은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것이, 영생불멸하는 성자를 믿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가 여러분들께서는 충분히 아실 것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 가운데 행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때라도 혼연스럽게 순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찮은 몸뚱이 하나 바쳐서 진리가 빛난다고 생각할 때는 조금도 회한 없이 그냥 바치는 것입니다. 바치는 그 순간에 우리 생명은 한없이 성숙되는 것입니다.
요법(樂法) 비구는 진리를 참구해 마지않는 훌륭한 비구였습니다. 즐거울 락(樂)을 즐거울 ‘요’라고도 풀이합니다. 법을 간절히 구하는 비구가 과거에 있었습니다. 몇 십 년을 헤매며 진리를 구했지만 그때는 부처님이 안 나오신 때라 스승이 없어서 공부를 못 배우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 때 욕계천에서 제석천이 보니까 요법 비구가 위대한 사람인데 어디 가서 법문을 들을 곳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사람 모습을 취해 가지고 나타나서 요법 비구에게 하는 말이 “그대가 진정으로 진리를 구하는가?” 이렇게 물으니까. ‘신명을 아끼지 않고 법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은 그대에게 내가 지금 진리를 말할텐데 그 진리를 그대의 피부를 벗겨서 종이로 하고, 그대 피를 짜내서 먹물로 하고, 뼈를 분질러서 붓으로 삼아 진리를 적을 수가 있겠는가?” 라고 물어보니, 그 말이 떨어지기 전에 칼로 자기 피부를 벗긴단 말입니다.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칼로 자기 피부를 벗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석천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저런 사람에게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치 마음자세가 진리를 배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칼로 자기 피부를 벗기니까 그 순간 공중에서 영생불멸하는 부처님의 음성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사람한테서 안 배우더라도 정말로 위대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영원히 존재하는 진리로부터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어느 부처님에게 법문을 듣고 배웠겠습니까. 혼자서 깨달았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주 자체는 우주 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우리 생명을 어느 때라도 바친다 하는, 진리를 위해서는 주저 없이 바친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는 우리 마음은 진리를 지향해서 굉장히 성숙하는 것입니다.
제사불 당시 과거 전생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미륵불하고 제사불 회상에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가끔 이 설화를 비유합니다마는, 우리가 부처님에 대해서 진리를 흠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제사불께서 두 분을 보시니 미륵불 될 분이 훨씬 더 재주가 있고 총명해 보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불도 빨리 할 수가 있었겠지요. 둘을 제도를 해야겠는데 미륵불 될 분이 훨씬 더 재주가 있고 성불을 빨리 하게 보였지만, 미륵불이 장차 제도할 일반 중생들을 관찰해 보니까 굉장히 미련하다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미륵불이 영리하더라도 제도할 중생들의 복이 저렇게 부족하니 제도하기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부처님의 지혜란 것은 과거ㆍ현재ㆍ미래를 훤히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전생의 석가모니를 가만히 보니까, 그이는 미륵불만은 못해도 그 부처님이 장차 제도할 중생들은 아주 영리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미륵불보다 석가모니를 먼저 부처를 만들어서 빨리 보내야 되겠구나. 그래야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석가모니 될 분을 빨리 제도하기 위해 방편을 써서 내가 지금 산에 올라 갈테니까 그대는 나를 따라서 산을 올라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사불은 신통력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삼매에 들어 계셨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될 분은 아직 신통력이 없던지라 가시밭길을 찔리기도 하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높은 산까지 올라갔던 것입니다.
올라가서 부처님 계시는 곳을 우러러 보니까, 부처님께서 화광삼매라, 광명을 나투는 삼매에 들어 계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광명을 나투는 삼매에 들어 계시는데, 그 광명이 천지 우주를 훤히 비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 광명이 어떻게 황홀하였던지 자기를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그 찬란한 광명을 보고 환희심이 넘쳐서 한발을 든 채로 이레 낮, 이레 밤을 그대로 부처님을 찬탄했습니다.
여러분들, 부처님을 찬탄한 게송시를 아십니까?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부처님은 세상에서 다시 비할 데가 없다 말입니다. 시방세계 좋은 것, 궂은 것들을 다 비춰봐도 부처님 같이 훌륭한 분은 없습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께 대한 최상의 찬탄을 올리면서 한발을 미처 내려놓지도 못하고 든 채로 이레 낫, 이레 밤동안 합장하고 부처님을 찬탄했었던 것입니다.
그 경에 보면은 첨양불타라, 부처님을 우러러 보면서 목불잠타라, 눈을 잠깐도 깜박을 못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환희심을 내었는지 부처님을 우러러 보면서 눈도 깜빡 못하고서 칠 주야 동안 찬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부처님을 흠모하고 찬탄한 갈앙심(渴仰心)으로, 구 겁이라는 무량 세월을 앞당겨 성불했던 것입니다.
자기 몸을 잊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공덕이 그렇게 큽니다. 오 주여! 하는 그런 공덕 말입니다. 그런 공덕이 자기는 몰라도 우리의 성불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마음과 부처님 마음, 하나님 마음이 한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으로 사무치면 그만큼 성불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굉장히 비약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 전생에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칠 주야 동안 한 발을 들고서 부처님을 찬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무한공덕을 갖춘 부처님 자리를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야 됩니다. 불법은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며 바로 우주의 것입니다. 그것은 또 내 생명이고 그대 생명이기도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불법을 지키는데 너무 소홀한 것 같아요. 우리가 온 힘을 기울여 지켜야 됩니다. 그러면 빨리 불국토가 되겠지요.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세상을 구할 것은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부처님 가르침 외에 다른 걸로는 구제가 안됩니다. 부처님 따로 나 따로, 하나님 따로 있다는 생각으로 해서는 모두 각각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과 나와 둘이니 그때는 사람과 사람끼리도 응당 둘이 되고 셋도 되고 각각이 되겠지요.
나나 너나 모두가 한 생명의 부처님이기 때문에 본래가 하나란 말입니다. 이렇게 돼야 참답게 도덕이 섭니다. 제아무리 삼강오륜을 말하고 별 짓을 다 한다 하더라도, 나 따로 있고 너 따로 있고 이럴 때는 항시 자기를 먼저 앞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참다운 도덕을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다운 도덕은 자기 희생정신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것이고, 이런 철학이 앞서야 참다운 도덕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그런 철학은 부처님 가르침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육도 역시 교육철학이 앞서야 하는데 교육철학 역시 부처님 철학이 그 바탕으로 돼야 합니다.
부처를 만드는 교육을 시켜야지 그냥 기능인, 직업인을 만드는 교육은 참다운 인간을 못 만듭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스승을 배반하고 그러겠지요. 우리 생명은 정말로 허망합니다. 교통사고로 오늘 죽을지, 병으로 내일 죽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생명이 붙어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우리는 부처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같이 닦고 같이 동참하고 말입니다. 이 열반사덕(涅槃四德)을 꼭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 열반이란 것은 바로 우리 본심입니다. 또 진여불성이요,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무한 공덕입니다. 무한공덕을 한 번 생각하면 생각한 만치 정화가 되어갑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번 외면 외운만치 신장들이 우리를 굽어본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정말로 한량없는 자유와 행복을 누리시고, 이 세상도 그와 같이 진리의 광명으로 빛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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