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제 4 장] 2. 삼종사선(三種邪禪)

通達無我法者 2007. 4. 13. 07:41

 


 

우리는 지금 가장 큰 일을 위해서 모였습니다. 불교 말로 하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이 세상만사 중대한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공부가 가장 중요한 일대사(一大事), 즉 가장 큰일입니다.

우리는 보통 초상을 당한다던지 기타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으면 그런 일을 큰일이라고 합니다마는 그것은 세간적(世間的)인 큰일인 것이고 정작 큰일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사해탈의 문제입니다. 비단 지금 금생뿐이 아니라 영생불멸 하는 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윤회를 벗어나는 문제, 우리 인간이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을 지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고 그리하여 뱅뱅 도는 그런 지겨운 윤회를 떠나서 해탈의 길로 가는 이 일이야말로 어느 누구한테나 가장 중요한 대사(大事)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인 것은 그 대사를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그러면 대사를 어떻게 치러야 할 것인가? 일대사인연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간단명료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 열 개()자, 부처님 법문을 열어서 보인다는 말입니다. 불경이나 조사어록들은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에게 열어서 보이신 것입니다. 개시(開示)는 진리를 열어서 보이시는 것이고 그 다음에 오입(悟入)이라, 깨달을 오()자, 들 입()자입니다.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성이 무엇인가?’, ‘우리 자아 문제는 또 무엇인가?’ 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자아의 상실이라는 말들을 합니다마는 사실 보면 성자 이외에는 모두가 다 자아를 상실해 있습니다. 성자만이 우주의 도리인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의 일대사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들에게 생사해탈을 열어서 보이고 동시에 깨달아서 그 속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깨달아서 우리 스스로 증명을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이 철저합니다. 그냥 교리적인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이해도 알아야 되겠지만 그와 아울러서 꼭 증명해 들어가야 생사해탈이라는 불교의 구경(究竟) 목적을 달성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라들에게 지도 할 때도 역시 꼭 그 사람에게 부처님 법을 여실하게 진리에 어긋나지 않게 가르쳐야 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깨달아서 자기 스스로 증명하도록 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깨닫는 법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먼저 번 시간에 공개했던 참선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고 비중을 갖는 문제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참선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찾는 공부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수행법이 참선인데, 모르면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알았다면 꼭 참선을 해야 합니다.


‘참선’ 그러면 아주 고도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세간적인 사람은 엄두도 못내는 어려운 것이라 생각들을 합니다마는 참선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제일 쉬운 것입니다. 제가 결코 과장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참선이 왜 제일 쉬운 것인가, 참선은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몸에도 제일 편한 자세가 바로 가부좌한 자세입니다. 반듯하게 가부좌한 자세가 소화도 제일 잘되고 피도 가장 맑게 하는 것입니다.

용수 보살의 지도론에도 보면 ‘시가부좌좌 최안온불피극(是跏趺坐坐 最安穩不疲極)’이라, 가부좌 한 자세가 가장 편안하고 피로를 없앤다는 말입니다. 자세가 좋은 사람들은 건강도 좋습니다. 어디 앉더라도 삐뚤게 앉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소화도 잘 안되고 병도 오기 쉽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않고 단정하고 꼿꼿하게 앉는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상도 건전하고 건강도 그에 따라서 좋은 것입니다. 그리도 어떤 형태 구도 중에서도 정삼각형 같이 안정된 모습이 없지 않습니까.

피라미드를 보십시오.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것도 역시 심심미묘한 기하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삼각주의 중심에다가 무엇을 두면 썩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바로 가부좌한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습 가운데 가장 안정된 모습인 동시에 제2석가라고 불리는 용수보살, 그 분 말씀에 ‘마왕견지 기심수포(魔王見之 其心愁怖)’라, 마왕들이 이 모습만 봐도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사상이 확실하고 자세가 단정할 때는 그 어떤 삿된 기운도 우리를 침범하지 못합니다. 비스듬히 드러눕거나 엎드리거나 하는 자세 가운데 망상도 생기고 하는 것이지 우리가 바른 사색을 하고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자세를 취한다고 할 때는 나쁜 기운이 근접을 못하는 것입니다.

남하고 대화를 할 때도 똑바로 단정하게 앉아서 정식으로 하게 되면 그 사람은 권위가 섭니다. 절대로 남이 섣불리 못하게 됩니다. 부처님 제자는 부처님 뜻에 따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어떤 면에서나 가장 좋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고, 따라서 우선 가부좌한 모습 자체가 그와 같이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참선할 때는 가부좌하는 것이 원칙입니다마는 우리 마음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설사 모양은 태산같이 든든하게 앉아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고 욕심내고 해서는 참선이 못 됩니다.

참선은 꼭 가부좌만 틀고 앉아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주인공은 역시 마음인지라 육조단경에 보면은 ‘내 법은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 성자의 법이란 어느 때나 본체를 떠나지 않습니다. 본체란 것은 근본 성품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절대적인 근본본체를 떠나서 자기 배운 대로 느끼고 현상만 보고 상식적으로 따집니다.

우리 상식이란 것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배운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십인십색(十人十色)이라, 갑은 갑대로 느끼고 을은 을대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사상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겠지요. 배운 대로 느낀 대로 따지기 때문에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서로 뜻이 충돌하고 노동자나 사용자도 역시 자기 배운 대로 느낀 대로 주장하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본체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다 동일한 본체입니다.


불교의 위대한 점은 하나의 진리로 해서 귀결을 시키는데 있습니다. 마음의 근원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성자들의 가르침의 특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사 우리가 어디 공장에 가서 일을 한다하더라도 할 일이 생기면 마땅히 해야겠지요. 부처님 법은 절대로 인연을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인연 따라서 최선을 다하고 남보다 훨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상황에 임해야 합니다.

일본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풍요로운 기술문명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 사상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네들은 불교가 아주 체질화가 되어 있어요.

저번에 고베의 대지진 때, 신문을 보니까 그 고도(古都)의 사람들이 굉장히 침착하고 질서 있게, 남보다 앞서 구출되려고 서두르지 않는 모습을 보고 미국 사람들이 아주 찬탄을 하고 박수를 보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봤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은 불교가 몸에 배어 있어서 남이 보나 안 보나 매사에 성심을 다합니다. 그것은 부처님이라 하는 진리의 실체를 그들이 여의지 않고 산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를 잘 믿는 분들도 역시 하느님을 항시 여의지 않고 삽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주의 실체 아닙니까. 우리가 불교도라 해서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가질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어디에나 안 계시는 데가 없고 또는 능하지 않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진리인 동시에 우주의 실상입니다.

따라서 우선 그 개념으로 본다하더라도 부처님의 법신이라, 석가모니가 나오고 안나오고 관계없이 진리 자체인 부처님은 바로 우주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석가모니는 인간으로 해서 진리를 깨달았을 뿐인 것입니다. 예수도 사람으로서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주의 도리를 깨달으면 곧 우주와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그 때는 하나님이라 부르나 무엇이라고 부르나 상관이 없겠지요. 지금은 세계화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그리고 경제는 벌써 세계화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다국적 기업 같은 것은 우리가 싫으나 좋으나 세계화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사상적으로 교류하지 않을 수가 없고 인간적으로 교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다종교ㆍ다민족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지금은 사상의 혼란기입니다. 사상이 혼란스러우면 도덕도 혼란스럽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는 통일원리가 필요합니다. 그 지도원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21세기의 지도원리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그 원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고 이끌어간다고 할 때는 그것에 맞는 철학이 우리 불교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느끼면서 참선 문제도 생각해야 됩니다. 참선은 그러한 우주의 참다운 진리를 순간도 떠나지 않고서 공부하는 게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진리란 것이,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면 어려운 것이겠지만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기 때문에 그저 마음의 도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마치 기차가 레일을 바로 따라가야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전복되지 않듯이 우주의 도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성자의 진리란 것은 우주의 궤도(軌道)입니다. 우리가 성자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우주의 길에서 탈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이 우리도 역시 우주의 도리에 따라야 살기가 편한 것입니다. 인간도 하나의 자연이니까.


우주의 도리란 무엇인가? 바로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동일체입니다. 천지우주는 나와 더불어서 한 뿌리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우리들도 모두 하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도리에 따르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중생의 그릇 따라서 하신 방편법문도 있지만 참선만큼은 바로 직설(直說)로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즉심시불(卽心是佛) 일체종지(一切宗旨)의 근본성품(根本性品)이 부처다, 따라서 모든 여러 가지 가설을 다 배제하고서 그냥 바로 직통으로 우주의 핵심 진리로 들어간 것이 참선 공부입니다.

그래서 여러 방법으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사 외도인들이 하는 그것은 모양은 가부좌도 하고 그럴 듯하지만은 그들은 인과도 믿지 않고 또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합니다. 명상을 하고 참선을 하면 기분도 좋아지고 힘도 나고 건강에도 좋다하는 정도로, 즉 하나의 유위공덕, 자기 이익을 위해서 계산부터 하는 그런 선은 진정한 참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선 공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한테 복이 온다거나 재물이 온다는 따위는 생각조차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一念), 부처가 되면 그 어떤 복락도 그것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가볍게 생각할 때는 ‘지금은 현대화 시대니까 생활불교를 해야 할 것인데 생활은 어떻게 하고 참선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참선을 하는 것이 생활불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참선이라는 것은 근본도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근본도리에만 따라 살면 남하고도 틀릴 일이 없고 집안도 화목하게 되고 또는 국가나 민족 간에도 화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동일한 생명이라,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공부를 한다면 자기 몸이 어디에 있으나 무슨 일을 하던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간에 모두가 다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도가(證道歌)에 보면은 그냥 가부좌 틀고 앉는 것만 참선이 아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라, 앉으나 서나 모두 참선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그렇게 됩니다. 가사 우리가 밤에 잘 때도 삿된 생각이나 하고 텔레비전 같은 것에 정신을 팔고 잠이 들면 잠 잘 동안에 별별 꿈을 다 꾸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에 몇 시간을 자도 몸만 피곤하고 휴식은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는 순간에 마음을 정리하고 우리 생명의 고향이요 일체진리의 고향인 부처님을 생각하고 잠이 든다고 생각 할 때는 잠자는 그 순간에 우리 마음은 부처님 쪽으로 지향을 합니다. 마치 시골 들에서 논에 물꼬를 낼 때에 물꼬를 내는 대로 물이 흘러가듯이 그와 똑같이 우리가 자는 그 순간에도 마음의 코스를 부처님한테로 고정 시키고 잔다면 우리 의식은 잠들어도 잠재의식은 부처님 쪽으로 끊임없이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꿈도 꾸지 않고 몸도 개운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부처님 법은 모든면에서 다 편안한 것입니다. 이 참선 공부도 동양권의 대승불교에서(중국, 일본, 한국 등) 하는 참선법이 최상승법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이 말은 석가모니만이 천상 천하에 제일 높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부처님이고 하느님입니다. 다만 자기가 번뇌에 가리워서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그렇게 느끼고 공부를 해야 이른바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가장 높은 최고의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삼종사선(三種邪禪)이라, 삿될 사()자, 고요할 선()자입니다. 참선을 해 가는 데는 장애가 많이 있습니다. 그 장애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또 어떤 것이 나쁜 방법인가, 이런 것도 알아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참선은 선방에서 앉아서 하는 것만이 참선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우리 마음이 진리의 고향인 부처님한테 가 있을 때는 참선인 것입니다. 선방에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부질없는 망상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선이 못됩니다. 꼭 부처님만 부르고 ‘이뭣꼬?’ 화두만 든다고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하느님을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생명의 실상이요 우주만유의 본체인 진여불성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을 부르나 ‘이뭣꼬’를 하나 ‘옴마니 반메훔’을 외우나 다 참선인 것입니다.

참선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훌훌 털어 버리는 넓은 의미입니다. 참선은 부처에도 착()하지 않고 조사에도 착()하지 않습니다. 오직 진리에 따를 뿐입니다.


삼종사선(三種邪禪)이라, 세 가지 삿된 참선을 말하는 것인데 그 하나가 암증선(暗證禪)이요, 그리고 문자선(文字禪)이라. 오직 문자나 이론적인 개념으로만 따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야호선(野狐禪)이라, 들 야()자, 여우 호()자. 여우란 놈은 재주와 꾀가 있어서 자기가 필요할 때는 세 개의 구멍을 판다고 합니다. 구멍을 한 개 파놓으면 적들이 침범하면 바로 잡히니까 세 개를 파놓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피한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여우 모양으로 잔꾀를 부려 미처 못 통하고 통했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주가 좀 있고 위풍도 좀 갖추고 큰소리 치면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도인처럼 보이기도 하겠지요. 못 통했으면서 통했다고 하고 증명하지 못했으면서 증명했다고 거짓말 하는 것이 야호선, 즉 여우같이 삿되게 하는 참선입니다.

먼저 암증선은, 부처님 가르침이나 조사 스님들 가르침에는 참선하는 방법과 진여불성 자리를 증명해 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극명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게으른 사람들은 책도 보기 싫어하고 더구나 불경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지라 보기가 좀 어렵고 하니까 그저 화두만 들고 다른 것은 다 무시를 해 버립니다.

우리 선방에서도 전혀 경을 못 보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해서, 물론 정진 할 때 경을 보면 방해가 되는 수가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부처님 경전은 소중한 생명의 글입니다. 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금과옥조 같은 글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서나 훌륭한 선지식들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서 덮어놓고 하는 참선을 암증선이라 합니다.


그렇게 암증선을 하면 자기 공부가 얼마나 진전 되었는지 스스로 점검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 놓으면 섣부른 걸 가지고 다 되었다고 교만심을 부리기도 하겠지요. 선지식들의 말씀도 곧이 듣지 않고 남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할 때는 틀림없이 아만심(我慢心)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겸허하게 앞서간 선배들, 선지식들, 부처님 경전들을 충분히 참고로 해서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그 말씀들은 모든 중생들이 성불에까지 이르는 길을 명료하고 소상하게 밝혀 놓은 길잡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길을 게으름 부리고 업장이 많으면 더디게 갈 것이고 부지런하고 업장이 가벼우면 훌쩍 뛰어 빨리 갈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그런 길을 무시하고 외면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따라서 암증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경전도 많이 보시고 특히 참선에 관한 여러 가지 책들도 보고 선배들에게 묻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암중모색하는, 모르면서 헤매는 암증선을 피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문자선(文字禪)이라, 참선이라 하는 것은 실제로 마음을 닦아야 하는 것인데 경만 많이 보고 이론적인 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실지로 참선을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아무리 바빠도 조석으로 한 삼십분 정도는 하셔야 합니다. 우리 죽어서 갈 때는 자기 몸뚱이마저 버리고 가지만 오직 생전에 닦은 법력만은 가지고 갑니다. 이것이 우리한테는 가장 큰 재산입니다. 따라서 평소에 조석으로 삼십분이면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정도면 그렁저렁 헛생각도 하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그런 시간입니다.


여기 젊은 스님들도 있지만 이 분들은 하루에 다섯 시간도 못 잡니다. 재가 불자들도 하루 다섯 시간 정도 자면 충분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스님들은 안 자고 몇 달이고 몇 년도 배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 우리 본성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정작 의지를 가지고 한다면 능히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구라(Vakkula)존자라, 바구라존자는 부처님 십대 제자 중의 한 분입니다. 그 분은 140세를 사신 분인데 장수 제일 바구라라, 그 분은 자기 평생에 한 번도 누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장좌불와(長坐不臥)라, 항시 앉아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요새 장좌불와 하는 사람들을 보면 벽에 기대기도 하고 합니다마는 그 분은 한 번도 벽에 기대지도 않고 오로지 앉아서만 지냈다고 합니다.

장수제일(長壽第一)의 바구라존자는 음식도 하루 한 끼만 먹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또 무병제일(無病第一)이라, 승려가 되어서 140세까지 살면서 한 번도 앓아 누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 할 때는 ‘그렇게 무리를 하면 몸이 어떻게 당해 낼 것인가, 신경통도 생기고 영양실조로 쇠약해져서 쓰러지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무병제일(無病第一), 장수제일(長壽第一)의 바구라 존자, 그 분은 그와 같이 평생을 앉아서 하루 한 끼만 먹도고 무병하게 장수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한테 들어있는 부처님 기운, 우주의 정기 에너지는 무한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원자력 같은 것은 광파(光波)의 속도로 초속이 30만km나 되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훨씬 더 고성능의 기운이 우리에게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불성에 들어있는 그 기운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대승신앙은 우리한테 들어있는 무한의 공덕을 믿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들어있는 그 무한의 공덕을 믿으면 바로 ‘즉시입필정(卽時入必定)’이라, 그 믿음으로 바로 선정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나한테 있는 무한력을 믿으면 즉시에 삼매에 들어간다는 것인 데도 못 믿으니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것은 성자의 말씀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문자도 많이 배우고 불경도 많이 봐야 되겠지만 참선을 해서 우리 마음을 자꾸 맑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하신 것처럼 반야심경 한 편을 보더라도 참선 한 철하고 볼 때와 두 철하고 볼 때와는 해석이 다릅니다. 똑같은 법문이지만 성자의 법문은 우주의 본질을 말한 법문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정화된 만큼 해석을 달리 합니다.

참선을 오랫동안 하고서 경을 보면은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고 평소에 풀리지 않던 까다로운 문제가, 자면서 꿈속에서도 문득 풀려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일구월심으로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란 것이 원래 뿌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풀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도 젊었을 한 번은 꿈을 꾸었는데, 도륜 스님이라는 도반하고 꿈에 어디를 가는데 아주 장엄한 궁전이 나왔어요. 그 궁전 앞에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 문지기가 문 앞을 가로 막고 서서 자기가 묻는 말에 답을 못하면 못 들어간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물어보라고 하니까 저한테 먼저 묻기를 “지옥이 어디 있는가?”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더라면 그때 당시는 삼십대도 채 안된 나이라 선명한 답을 못했겠지요. 그런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니 ‘혜안관시 지옥공(慧眼觀時 地獄空)’, 이렇게 대답이 나온단 말입니다. ‘혜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은 공()이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질문에 그 대답이 나오기가 어려웠을 텐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투철하게 혜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지옥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혜안관시 지옥공(慧眼觀時地獄空)’이라, 지옥이라는 것이 우리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 봐야 있는 것이지 정말로 맑고 투철한 마음으로 보면 지옥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무던하게 부처님 생각하고 정진하다보면 이런 때 신기하게 꿈에도 나올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를 안 믿는 분도 난해한 수학문제 같은 것을 골똘하게 생각하다 보면 꿈에 그 문제가 풀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정신이라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게 무한의 힘이 있는데도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못 쓰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 세포가 백억 개가 넘는다고 하지마는 결국은 십분의 일도 못 쓰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사상은 뇌 세포 문제가 아니라 무한의 능력을 내포해 있는 것이고 꼭 인간의 뇌에만 그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정기는 우주에 충만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성자들은 꼭 뇌 속에 들어있는 뇌세포만 가지고 이래저래 쓰는 것이 아니라 우주 에너지를 그대로 끌어다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허상(虛相)과 법상(法相)이 나옵니다. 허상, 이것은 부질없는 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않고 한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허상(虛相)과 법상(法相)을 구분 못합니다. 법상은 차근차근 챙기고 허상은 그냥 부정을 해 버리면 되는 것인데, 그 구분을 못하면 이래저래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이나 선지식들 말씀을 참고로 해서 암중모색하는 그런 선은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문자만 따지고 실수(實修)하지 않는 그런 문자선도 경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도 적어도 그 경을 보기 전에 다만 몇 분이라도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고 참선을 하고 봐야 경전의 뜻과 내용의 갈래가 잡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경장과 논장을 다 외운다 해도 그것이 갈래가 안 잡히고 통일이 안되면 자기 것이 못 됩니다. 이른바 문리(文理)를 알아야 할 것인데 문리를 모르면 가닥을 못 잡습니다. 참선과 더불어 해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하나 가닥이 잡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야호선(野狐禪)이라, 여우같이 교만한 짓은 정말로 우리가 피해야 됩니다. 기독교 사회나 불교 사회나 여우같은 무리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 놓으면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칩니다. 한 소경이 무수 소경을 인도하다가 수렁으로 몰아놓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불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일맹인중맹(一盲引衆盲)’이라, 한 소경이 많은 소경을 데려다가 같은 함정에 빠져 죽는다는 얘기지요. 잘못된 스승이 남을 지도하고 이끈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두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잘못 지도한 사람은 불교 말로 병도사(病導師)라 그럽니다. 우리 중생을 병들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여실하게 말하고 증명하지 않고서 꼭 자기 의견을 보태서 함부로 말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남을 지도할 때 병도사(病導師)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 법을 말할 때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꼭 그대로 옮겨주고 자기가 정리한 것만 남한테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