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제 4 장] 2. 삼종사선 - 2) 선정십종공덕

通達無我法者 2007. 4. 13. 07:43

 

 

 

선정십종공덕(禪定十種功德)39)



39) 선정십종공덕(禪定十種功德)1. 안주의식(安住儀式) 2. 행자경계(行慈境界) 3. 무번뇌(無煩惱) 4. 수호제근(守護諸根) 5. 무식희락(無食喜樂) 6. 원리애욕(遠離愛慾) 7. 수선불공(修禪不空) 8. 해탈마견(解脫魔見) 9. 안주불경(安住不境) 10. 해탈성숙(解脫成熟)



 

그 다음에는 선정십종공덕(禪定十種功德)이라, 경에 보면 참선을 하면 많은 공덕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무량공덕이 있으나 간추려서 열 가지로 정리합니다.

제1의 안주의식(安住儀式)이라, 이것은 우리가 참선을 하면 항시 점잖은 행동을 취한다는 말입니다. 거친 말과 행동이 가라앉고 남에게 나쁜 말도 하지 않게 되며, 오직 우주의 도리, 참다운 진여불성에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그것에 가까워지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몸도 마음도 안정이 취해지고 또는 부당한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생활을 위해서 장사를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남을 위해서 유익한 것인가, 설사 돈을 많이 번다하더라도 자기와 남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당한 행동을 취하게 되는 이것이 안주의식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행자경계(行慈境界)라, 이것은 자비심이 절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비심을 안 내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나와 남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본래 한 생명에서 나온 한 몸이요, 우주는 결국 동일률(同一律)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고 공부를 해 나간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비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자비스러우며 용서도 잘 하는 것입니다.

제3에는 무번뇌(無煩惱)라, 번뇌가 없다는 말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번뇌 아닙니까, 진리에 입각해서 항시 진리만 생각하고 진리에 따라서 정화가 되고 하는 사람들은 번뇌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선공덕을 무번뇌라 합니다.


제 사에는 수호제근(守護諸根)이라, 이것은 눈ㆍ코ㆍ입, 우리가 보는 시각ㆍ청각ㆍ후각 등에 몸에 문제가 생기면 온전치 못하게 됩니다. 물론 병적인 것도 있겠지마는 참선을 하면 이런 것이 다 풀리는 것입니다. 눈이 나쁜 사람들도 참선을 많이 하면 시력과 청각이 밝아집니다. 따라서 칠, 팔십이 되도록 끝끝내 참선한 사람들은 늙어도 노소를 별로 타지 않습니다.

수호제근(守護諸根), 이것은 시각ㆍ청각ㆍ후각ㆍ미각 등 이런 것들이 온전하게 보호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큰스님들은 중생제도 때문에 항시 무리를 많이 합니다. 힘든 데를 가시기도 하고 묵언하고 싶어도 말을 해야 하고, 할 수 없이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니까 무리를 해서 몸을 상하게도 되지요. 그렇지 않고 선방에서 공부만 하고 지낼 수 있다면 항시 병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제5에는 무식희락(武食喜樂)이라, 먹지 않아도 기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만반진수에 맛있는 음식으로 기쁨을 느끼겠지만,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선에서 느끼는 맛은 음식에서 느끼는 맛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몸과 마음도 개운하고 평소에 몰랐던 것도 다 알아지고 항시 컨디션이 가볍고 좋은데 무슨 음식에 마음이 가겠습니까. 많이 먹으면 먹은 만큼 부담스럽고 몸도 무거운 것입니다.

음식은 적게 먹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식으로 먹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세제불일종(一種)이라, 삼세제불은 다 하루 한 끼만 자시는 것입니다.

원래 선방도 백장청규에서 보면 아침에 죽 조금 먹고 낮에 한 끼 먹고 오후에는 불식(不食)을 다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변하고 너무나 환경도 오염 되고 해서 건강을 유지하기가 어려우니까 조금씩 먹는 것은 무방하겠습니다마는 가급적이면 적게 먹는 것이 우선 비만증을 방지하고 소식(小食)을 하면 소화도 잘되고 또 피도 맑아지며 머리도 훨씬 더 총명해 집니다.

저번에 신문을 보니까 텍사스 주립 대학에 있는 교수가 한국 사람인데 올해 64세가 된 사람입니다. 그이가 노화방지 위원장인데 그분은 일반 교수인데도 하루 한 끼만 먹는다고 했어요. 오후 두시에 한 끼만 먹는데도 몇 십 년을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장수의 비결은 결국 소식(小食)이라, 적게 먹는데서 장수의 비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정확한 실험과 데이터를 낸 것이니까 거짓말이 아니겠지요. 그런 것은 참고로 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이 많은 분들도 억지로 배고프게 할 필요는 없다하더라도 가급적이면 미식을 말으십시오. 고기나 기름기 많은 음식들은 문명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현대 병리학자들이 다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그 다음 제6에는 원리애욕(遠離愛欲)이라, 이성간의 욕심이 애욕 아닙니까. 공부하는 분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역시 이성간의 애욕입니다. 우리 스님이라 해서 애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일수록 애욕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간 주의하고 조심하며 공부를 해야 극복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고 어떤 상황을 함부로 취하고 조금만 방심하면 걸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보리수하에서 성불하실 적에 마지막 순간까지 삼천녀(三天女)라, 삼천녀가 나와서 방해를 합니다. 삼천녀는 결국 우리 마음의 애욕의 상징이 되겠지요. 그와 같이 욕계 중생은 몸을 받은 이상 그런 욕심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남ㆍ여 이성간의 욕심, 음식 욕심, 또는 잠 욕심, 이것이 욕계의 세 가지 큰 욕심이고 그 나머지의 부수적인 욕심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 이성욕(異性慾)ㆍ수면욕(睡眠慾)ㆍ식욕(食慾)입니다. 그러나 다른 천상에는 이런 욕심이 없습니다. 우리 욕계에만 있는 것입니다. 욕계를 떠나 버리면 그런 욕심은 없어집니다.

따라서 색계(色界)라, 눈에 보이는 세계만 따지는 분들은 색계나 무색계를 다 무시 합니다. ‘그런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디 실지로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마는 그러는 우리 인간도 제법 공 도리(諸法空道理)에서 보면 인간 세상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지금 가상(假相)으로 꿈같이 존재하는 것이지 실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공을 모실 때에 수월도장(水月道場)이라, 수월이란 물 수()자, 달 월()자, 물 속에 있는 달은 실재가 아니라 달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듯이 우리가 불공을 모시는 절이나 모든 도량이 물 속에 달 그림자처럼 사실로 있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도 달 속에 비친 그림자 같이 또는 허깨비같이 가상(假相)으로 존재(存在)하는 것을 우리는 잘 모르고서 곧이곧대로 참말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인간은 실존(實存)이 아닙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soren Aabye 1813-1855)같은 사람도 아주 훌륭한 실존주의 철학자이기 때문에 굉장히 좋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참다운 실존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 영원적인 차원에서 참다운 실존이 있는 것이지, 다른 모든 것들은 항시 무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달 속에 비친 그림자와 마찬가지고 또 색계나 무색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있기는 있습니다. 결코 허무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도 허망(虛妄)한 것이지만 이와 같이 있지 않습니까. 내일 죽을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한시도 멈춤 없이 변화무상하고 허망하지만 이렇게 인간이 존재하듯이 색계도 존재합니다. 색계에 올라가면 남녀 이성은 없습니다. 우리 사람 같은 존재만이 남녀가 결합을 합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성한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신부나 수녀, 비구ㆍ비구니처럼 독신을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오로지 본래의 자기, 신성한 본래의 생명을 찾는다고 할 때는 가정을 가지게 되면 분명히 장애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자기의 아들이나 딸도 참다운 종교를 만나고 친척이나 가까운 인연들도 참된 종교생활을 하고 또 열심히 일해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그렇게 하면 공덕이 되겠지요.

원리애욕(遠離愛慾)이라, 우리가 참선을 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애욕이 희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차츰 희박해지다가 우리가 불성광명(佛性光明)의 참다운 진리를 체험한 뒤에는 완전히 애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제7에 가서 수선불공(修禪不空)이라, 우리가 제법(諸法)이 공()이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다, 물질도 공이고 모두가 공이다, 이렇게 공 도리를 말로 너무 많이 들어 놓으면 마음이 허무해져서 허무주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참선을 해보면 마음은 비어 가지만 그냥 빈 공간이 아니라 그 속에는 무량공덕으로 환희심이 충만해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텅 비어오면 거기에 정비례해서 환희심이 더욱 더 증가가 되어옵니다.

따라서 수선불공(修禪佛空), 참선을 닦으면 허무주의적인 그런 공()은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환희심과 공덕이 충만하기 때문이지요. 이론적으로 공을 느끼면 허무주의로 빠지기 쉽지만 참선을 한 사람들은 공에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제8에 가서 해탈마견(解脫魔見)이라, 우리가 살다보면 남한테 원망 될 일을 하기도 합니다. 과거 전생에 남을 핍박한 일도 있었을 것이고, 금생에도 어쩌다 더러 섭섭하게 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모두가 다 우리 운명에 장애가 됩니다. 금생에 자기는 무던히 잘 하고 사는데도 어려움을 당하고 더러는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는 경우는 과거 전생에 우리가 지은 업장이 장애가 되어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런 것도 우리가 참선을 하면 그 원인들을 차근차근 풀어갈 수 있겠지요.

업장을 많이 지어놓으면 정업불멸(定業不滅)이라, 그 업을 참선으로 다 풀어 버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웬만한 것은 다 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참선하는 그 마음은 바로 생명의 실상인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은 자기를 정화시키고 우주를 정화시키고 다른 사람을 정화시키기 때문이지요. 가사 자기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는데 참회는커녕 더 욕심을 부리고 이기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더욱 더 미워하고 원망이 깊어지겠지요.


그러나 그 사람이 정말로 인간적으로 충실하고 도덕적으로 바른 행동을 취하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훈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그 사람에게 옮겨가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그 순간에 우리 몸의 산소는 더욱 더 치성(熾盛)해지고 욕심을 부리면 우리 몸에 있는 수소는 더욱 치열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 하나 하나가 다 물질로 화()하는 것입니다. 에너지라는 것이 결국은 물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지옥하게 미워하면 그 미워하는 것이 쌓이고 쌓여 암이 되고 병이 되고 한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동성애라든가, 너무 애욕적으로 나간다든가, 우주의 도리를 벗어나면 그것이 에이즈 균이 되고 천재지변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에이즈 균 같은 것은 정말 무서운 것 아닙니까. 물론 앞으로 백신을 발명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불확실한 것이고,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바로 사는 것입니다.

제9에 가서 안주불경(安住佛境)이라, 즉 부처님의 경계, 천지우주가 하나라는 영생불멸한 공덕 가운데서 항시 편안하게 머문다는 말입니다.

열 번째가 해탈성숙(解脫成熟)이라, 이렇게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 가니까 모든 걸림으로부터 차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는 성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를 부르짖는 민주주의도 역시 우리 정신적인 수양과 더불어서 해야지 도덕은 제쳐 두고서 우선 제도적인 자유 그것만 위해 싸운다면 그야말로 백년하청(百年河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열 가지 참선공덕을 항시 생각을 하십시오. 그러면 더욱 더 참선이 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우선 내 행동이 점잖고 품위가 있어지고 평소에 독한 사람도 악심이 없어지고 부드러워져서 유연선심이 되고, 또 번뇌가 줄어지고 귀도 눈도 밝아지고 이런 것만 되어도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무식희락(無食喜樂)이라, 우리가 고기 먹고 술 마시지 않아도 항상 기쁩니다. 술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우리 스님네가 고기를 먹으면 입이 다 부르틉니다.


우리 불자님들, 재가 불자님들도 되도록 고기를 드시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한테 별로 이익될 것이 없습니다. 항시 말씀드리지만 돼지나 소나 그런 축생들은 사람보다 훨씬 더 업장이 무거운 것인데, 업장이 무거운 세포가 사람한테 들어오면 그만큼 우리가 오염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비심을 손상시킵니다. 우리는 몰라도 귀신들은 다 봅니다. 선신들은 고기 많이 먹는 사람을 무서워서 피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데, 그것은 사람만 국한시킨 것이 아닙니다. 개와 나도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에 그네들의 고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것 안 먹어도 우리가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만 하더라도 그 전에 우리가 클 때는 일년 내내 가야 돼지나 소고기를 한번이나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농촌에서도 한 달에 몇 번씩 먹는다고 해요. 그렇게 외국에서 수입해서까지 외화를 낭비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더 건강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만 생명을 다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육식을 하게 되면 우리 자비심을 손상시키고 또 악신(惡神)은 그 냄새 맡고 가까이 붙고 훌륭한 선신들은 냄새 맡고 도망가고 또는 우리 마음 닦는 공부도 잘 안되고 죽어서는 악도에 떨어지기 쉽다고 불경에 그와 같이 명문으로 나와 있습니다.

금생에 깨끗이 한 세상 지내다가 가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내외간에 화목하고 하루세끼 먹을 것을 한 끼 먹는 이웃과 나누고 그러면 살기가 참 편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노사분쟁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겠지요. 이것이 도리에 따르는 것이고 참다운 자연법입니다.

그 다음에 삼명육통(三明六通)40)이라, 제가 삼명육통이란 말을 자주하는 편인데 더러는 ‘삼명육통은 외도꾼들이 하는 것인데 하며, 뒤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더러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신통을 하려고 일부러 애 쓸 필요는 없지만 부처님 말씀에, 공부가 되면 저절로 신통이 나온다고 했단 말입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무시할 것입니까.

실지로 무수한 성자가 다 중명을 했고 지금 종교인들이 불신 받는 세상에 삼명육통을 하는 도인이 있다고 생각을 해본다면 집단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40) 삼명육통(三明六通)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한 성자(聖者)에게 갖추어 있는 자재하고 미묘한 작용

1. 삼명(三明)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

2. 육통(六通)육신통(六神通)이라고도 함. ①천안통(天眼通) ②천이통(天耳通) ③타심통(他心通) ④숙명통(宿命通)  ⑤신여의통(身如意通), 신족통(神足通) ⑥누진통(漏盡通)

지금은 컴퓨터 문화가 기기묘묘한 재주를 다 냅니다마는 우리 불성은 그런 류가 아닌 것입니다. 컴퓨터는 인간이 입력을 시켜야 나오지만 그 보다도 훨씬 더 무한성능이 우리 불성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불성을 개발하면 그런 컴퓨터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 무한 능력 중의 하나가 삼명육통입니다.


삼명은 무엇인가? 과거에 통달무애라, 과거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고, 여러분들도 더러 점쟁이한테 점을 쳐 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어렸을 때 구경해 본 기억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귀신들도 과거를 조금은 봅니다. 더러는 미래를 예언하기도 하고, 사람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본래의 영명함이 많이 가려집니다.

살면서 세속적인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분별시비가 잔뜩 쌓여서 영명한 본래 생명이 흐려집니다. 그러나 어린 사람들을 보면 더러는 이상하리만치 영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놀라울 정도로 천재적인 꼬마들이 간혹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분별시비와 삼독심을 다 떠난 도인들은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요.

우리 마음을 가장 중독 시키는 것이 삼독심입니다. 탐욕심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이 삼독심 아닙니까. 그것이 제일 무서운 독입니다. 자기도 오염시키고 남도 독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모든 병이 과거 전생부터 묻어 온 업병도 있지만 금생에는 이 삼독심 때문에 우리 몸과 마음이 중독을 일으킨다고 봅니다. 삼독심만 떠나버리면 그때는 설사 독을 마신다 해도 그 독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달마대사를 죽이려고 광통 법사나 그런 사람들이 여섯 번이나 독을 드려도 그 독이 받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곱 번째 가서는 달마 대사께서 금생 인연이 다한 고로 스스로 가셨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청정한 사람들은 독도 침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독심으로 오염되어 우리 내장이 청정하지 못한 고로 온갖 병고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우리 생리가 그만치 오염돼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주의하고 육식과 과식을 피한다면 그만큼 침해를 덜 받습니다. 그것은 생리학자나 병리학자들이 다 증명을 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삼명(三明), 이것은 과거에 막힘이 없고 또는 미래에 막힘이 없고 또 우주를 모두 본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지혜를 가리킬 때 일체종지(一切種智)라, 부처님의 지혜는 일체종지입니다. 그 말은 작은 것 큰 것 할 것 없이 우주의 모두를 다 안다는 말입니다. 그냥 본질적인 것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세세한 것까지 다 안다는 말입니다.


가사 정감록의 비기(秘記)들을 보십시오. 물론 비기에도 틀리는 것이 있지만 더러는 아주 신통하게 맞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계발하면 할수록 그렇게 위대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과거를 다 내다보고 미래를 보고 우주를 본단 말입니다. 이런 지혜가 우리한테 본래로 있습니다.

정감록에만 있고 도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한테나 다 있는 것인데 우리가 계발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계발하는 작업이 바로 참선이고 그 참선법이 가장 훌륭하고 지름길로 가는 방법입니다.

참선이야말로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무한공덕을 길러내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참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까도 말씀 드린바와 같이 우리 행동을 주의해서 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우리 마음을 항시 본체인 부처님한테다가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남과 얘기를 하거나 책을 볼 때나 일을 할 때나 항시 그 곳에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차근차근, 걸음걸음 그것에 접근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과거에 통달하고 미래에 통달하고 동시에 자기 번뇌를 완전히 녹여 버립니다.

불교말로 하면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이라, 과거에 통달무애 하는 것이 숙명통이고 또는 미래에 통달무애하고 우주를 모두 내다보는 것이 천안통입니다.

그 다음 누진통은 샐 누()자, 번뇌를 다 떼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번뇌를 다 떼어 버리면 성인이 되겠지요. 과거에는 미개한 때라서 특수한 사람들만 성인이었지만 앞으로는 집단적으로 성인이 나올 때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굉장히 영리하니까, 사상적으로도 그 많은 전쟁과 반목을 통해 많은 경험을 다 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성자의 길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전쟁을 방지하고 사람으로 인한 인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성자의 길을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정보화 시대에서 정보가 교환되면 될수록 성자의 길은 더욱 더 빛날 것입니다. 그 길 밖에 다른 길은 없으니까요.

그 다음은 육통(六通, 六神通)이라, 이 육신통은 아까 말한 삼통에 다 같이 거두어져 있습니다. 천안통(天眼通)은 우주를 다 내다보는 것이고, 천이통 이것은 하늘 천()자, 귀 이()자, 우주의 음성을 다 듣는다는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재주가 없어서 영어도 잘 못하고 영어하는 사람들 말을 잘 못 알아 듣습니다마는 만약 천이통(天耳通)을 했다면 영어를 안 배워도 다 알아 듣는 것입니다. 천이통이란 그와 같이 개가 짖으면 축생의 말을 알아듣고 하는 것입니다.

타심통(他心通)이라,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타심통을 다는 못해도 사람을 척 보면 대강 그 사람을 짐작은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인격도 있으니 함부로 지적은 않지만….

그리고 숙명통은 과거를 다 아는 지혜고 다섯 번째는 신여의통(身如意通) 즉, 신족통(神足通)이라, 이것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기적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정통법을 받은 분이 마하가섭이고, 그 다음 분이 아난 존자인데, 아난 존자가 열반 드실 때에 그 열반상은 우리에게 굉장히 신심을 느끼게 합니다. 그 분은 신통을 여실하게 증명을 다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부처님의 금관을 역사들이 횃불로 불을 붙였지만 붙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름을 붓고 해도 불이 안 붙으니까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해서 화광삼매(火光三昧)라, 자기 몸에서 불을 내어 스스로 금관을 태우고 몸을 태워 사리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불성 가운데는 땅 기운, 물 기운, 불 기운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란 정말 기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즉 우리 불성을 가리켜 마니보주(摩尼寶珠)라, 여의주라, 온갖 것이 다 나오는 보물구슬이라고 합니다. 그런 위대한 마음을 두고서도 모르니까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금()을 가지고서 얻어먹는 거지라고 그럽니다. 그런 값진 보배를 가지고도 가진 줄을 모르고 하찮은 일에 생명을 낭비한단 말입니다. 금을 잔뜩 곳집에 넣어 놓고 거지 행세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무한공덕장인 우리 마음을 캐내는 작업을 하면서 사업도 하고 사회 일도 하면 훨씬 잘 될 것입니다. 우리 몸 가운데는 물과 불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불만 생각하면 불이 되고, 물을 생각하면 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삼명육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석가모니한테 꿀릴 필요도 없고 예수한테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고 하나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게을러서 그렇게 못할 뿐입니다.

아함경에서 하신 부처님 말씀 중에 ‘영생 불멸하는 영생의 길은 분명히 있는데 우리 중생이 가고 안가고 하느니라.’ 영생의 길은 분명히 있는데 중생이 게을러서 가고 안가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신여의통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고, 불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신 대목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지금 원자력이 무시무시한 힘을 내지만 그 보다도 훨씬 더 무한 성능이 불성인 것입니다.따라서 그렇게 짐작을 해 보면 압니다.


다음에 누진통(漏盡通), 이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번뇌를 모조리 다 떼어버리는 그런 신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해탈(解脫)이라, 우리는 한사코 해탈을 해야 됩니다. 해탈(解脫)을 해야 만이 우리 삶은 완성이 됩니다. 우리 삶의 보람은 우리 스스로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가짜입니다.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은 무상한 것이어서 어느 때 갈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병들어 죽을지 사고를 당할지 또는 천재지변으로 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급박한 것이 무엇인가? 가장 절박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찾는 일입니다. 참다운 자기는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부처가 되는 것이 우리들의 지상과업인 것입니다.


모든 번뇌의 구속을 다 끊어버리고 해탈의 길로 가야합니다. 우리는 지금 구속을 받고 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때문에 얼마나 구속을 많이 받았습니까. 또 김일성주의 때문에 우리 북녘 동포들이 얼마나 처절한 속박 속에서 고생을 합니까. 불교는 그런 구속을 다 푸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구속, 제도적인 구속을 다 풀어서 성불하기 좋은 제도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불하기 제일 좋은 제도가 바로 승가의 법인데, 진정한 승가의 법은 감투나 놓고 싸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해탈이라, 해탈에는 지혜해탈(智慧解脫)과 선정해탈(禪定解脫)이 있습니다. 지혜해탈은 먼저 이론적으로 막힘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이치로 해서 먼저 부처님의 경전 말씀과 선지식들이나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 따라서 기본적인 길을 알고 가야합니다. 불교 공부는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이번 법회도 성불하는 길목만은 바로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해탈이라, 먼저 이론적으로 막히는 것을 배우고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자들은 보통 이론적인 체계만 서면 공부를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세계에서 보면 그것은 지혜해탈에도 미처 못 간 것인데 참다운 해탈은 어림없는 것입니다.

참다운 해탈은 선정이라, 참선을 해서 우리 생리와 심리가 아울러 맑아지고 이른바 환골탈태(換骨奪胎)라, 우리 몸뚱이도 역시 정화가 되어서 나쁜 짓을 할래야 할 수 없이 돼 버려야 합니다.

공자가 칠십이 되어서 말한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이런 정도가 되어야 선정해탈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도 우주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정도가 되려면 평소에 우리 행동을 도덕적으로 훈련을 시켜야 하고 그와 동시에 우리 마음이 우주의 근본진리인 부처님을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이라 하는 본질을 떠나지 않는 공부가 참선 공부입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주의 본바탕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 어디에 따로 있고 부처님은 극락세계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나 밖에나 어디에나 다 존재하는 하나님, 부처님, 이렇게 생각할 때만이 참다운 참선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