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제 4 장] 3. 염불(念佛) (2)

通達無我法者 2007. 4. 13. 07:46

 

 

 


이제 염불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아래 염불43)에 대한 개요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염불에는 염불의 방법44)과 염불삼매45)가 있습니다.

43) 염불(念佛) :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염(念)함을 의미함.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부처요, 둘이 아닌 불이불(不二佛)이기 때문에 언제나 부처를 여의지 않는 불리불(不離佛)이다.

44) 염불(念佛)의 방법(方法)

   1. 칭명염불(稱名念佛) ; 부처를 생각하며 입으로 불명(佛名)을 칭(稱)함.

   2. 관상염불(觀想念佛) : 정좌(靜座)하고 불(佛)의 상호공덕(相好功德)을 관념

       (觀念)함.

   3. 실상염불(實相念佛) : 불(佛)의 법신(法身)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고 만공

       덕(萬功德)을 갖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리(理)를 관조(觀照)함.

45) 염불삼매(念佛三昧) : 인행삼매(因行三昧)와 과성삼매(果成三昧)의 이종(二

種)이 유(有)함.

   1. 인행삼매(因行三昧) : 일심(一心)으로 불명(佛名)을 칭(稱)하든지 또는 일심

       (一心)으로 불(佛)의 상호(相好)를 관(觀)하든지 또는 일심(一心)으로 법신

       (法身)의 실상(實相)을 관조(觀照)하는 수행법(修行法)을 인행(因行)의 염

       불삼매라 함.

   2. 과성삼매(果成三昧) : 인행(因行)의 염불삼매가 성숙(成熟)되면 마음이 선

       정(禪定)에 들어가고 혹은 시방불(十方佛)이 현전(現前)하며 혹은 법신(法

       身)의 실상(實相)에 계합(契合)되는데 이를 과성(果成)의 염불삼매라 함.


염불(念佛)이라는 대문(大門)이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 계시는 분들은 한문을 잘 모르시기 때문에 한글로 다 달았으니 읽기는 쉬울 것입니다. 염불이라는 것이 부처를 우리 마음 밖에다 두고 할 때는 방편염불에 그치고 맙니다.

‘부처님은 저 멀리 극락세계에 계신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방편이 되겠지요. 기독교도 역시 본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안 계시는 곳 없이 다 계시니까 내 마음속에나 공기 속에나 다 계신다고 봐야지요. 따라서 불교도 마찬가지로 이른바 ‘부처님은 우주의 생명으로 계신다, 우주에 두루 계신다’ 이렇게 생각해야 참다운 부처님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순선법문 맨 처음에도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부처란 결국 우주를 몸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 어디에나 안 들어 있는 곳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 그대로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4조 도신(道信) 스님도 “부처를 생각하면 우리가 바로 부처고, 분별시비하면 중생이다.” 라고 했습니다.

염불이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닦은 뒤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본래 부처인데 부처인줄을 모를 뿐입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 라는 말을 듣고서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완전히 믿지를 못하니까 우리에게서 아무런 힘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부처라는 사실을 완전히 믿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순식간에 우리한테서도 위대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하게 믿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신앙이란 의심 없이 온전히 믿는 것, 믿어야 부처님 공덕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우리 마음이 본래는 청정심입니다. 우리가 설사 나쁜 생각을 하고 남을 미워도 하지만 우리 본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 할 때는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나쁜 생각도 많이 하면 우리 마음이 오염되어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근본성품에서 볼 때는 오염이 된다거나 크고 작고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자체, 성품으로 볼 때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는 청정심인 것입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염()하는 것이 참다운 염불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을 저 밖에다 두고, 부르고 외우면 복을 주고 도움도 준다는 식으로 염불을 합니다. 이런 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오로지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요, 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해야 진정한 염불선(念佛禪)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 주여’를 외친다해도 ‘역시 하나님은 저 하늘 위에 계신다’ 이렇게 소박하게 믿어버리면 참선은커녕 참다운 신앙도 못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내 마음 속에나 우주 어디에나 두루 계신다’ 이렇게 믿으면 그 때는 오! 주여를 해도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본래의 본 바탕 본 성품을 여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참선이 되는 것이고 근본성품, 근본바탕을 떠나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부처와 다르지 않는 불이불(不二佛)이라. 우리 중생들이 잘못 생각해서 ‘부처는 부처고, 나는 나다’ 이렇게 불신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부처로 환원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사, 티벳에서 하는 ‘옴 마니 반메 훔’도 실제의 주문 뜻을 그대로 풀이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영생불멸하는 진리의 보배’라는 뜻입니다. 그네들은 다른 것 없이 ‘옴 마니 반메 훔’만 합니다. 그것도 ‘옴 마니 반메 훔’이란 ‘옴’ 자체가 영생불멸한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으로 하다보면 본래 성품인 부처님께로 가까워지겠지요.

염불의 방법에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라, 부처를 생각하며 입으로 명호를 외운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한 가지로만 통일되어 있으면 간단하고 좋을 텐데 불명(佛名)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 부처님 명호를 두고 저한테 와서 그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절대로 이름에 걸리지 말으십시오. 부처님 명호는 다 그 공덕 따라서 다를 뿐입니다. 항시 제가 그때그때 말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자꾸 그 이름에 걸리니까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만약에 내 부처님, 네 부처님이 따로 있고 이름 따라 다 뿔뿔이 열이고 백이고 따로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부처님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부처님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자비도, 지혜도 다 원만해서 하나의 개념으로는 다 표현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무량공덕을 갖춘 부처님을 자비로운 쪽에서 보면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봐서는 문수보살, 대세지보살, 또는 그 원력으로 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쪽으로는 보현보살, 우리 중생의 영혼을 극락세계나 천상이나 인도환생으로 인도하는 면에서는 지장보살입니다.

그 다음에 관상염불(觀想念佛)이라, 이것은 볼 관()자, 생각할 상()자,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부처님의 원만 덕상을 생각하거나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는 염불입니다. 그렇듯이 꼭 이름만 외우는 것이 염불은 아닌 것입니다. 염불 소리를 안내더라도 부처님의 모양만 바라보고서도 부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처님을 닮아가야 됩니다. 부처님 상호라는 것은 삼십이상(三十二相)이라, 만덕(萬德)을 갖추면 부처님 같은 상호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굴 잘난 사람들은 그냥 어디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전생에 그만치 공덕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금생에 타고난 얼굴이야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부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눈은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고 수용하고 포섭하는 그런 눈빛입니다. 그렇게 부처님을 닮아가는 그런 염불이 관상염불입니다.

실상염불(實相念佛)은 모든 상을 떠나서 부처님의 진리,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이른바 우주에 두루해 있는 부처님의 참다운 생명의 실상, 그 자리를 생각하고 하는 염불입니다. 따라서 실상염불이 되면 그 때는 바로 염불참선이 됩니다. 실상염불은 염불선과 둘이 아닙니다. 실상염불은 부처님의 법신(法身)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고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원리(原理)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염불삼매라, 삼매란 것은 어느 한 곳으로 몰두하는 것이 삼매 아니겠습니까. 인행삼매(因行三昧)와 과성삼매(果成三昧)가 있는데, 인행삼매(因行三昧) 이것은 처음에 일심(一心)으로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던지 또는 일심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관찰한다던지 또는 일심으로 법신불(法身佛)을 실상으로 관조하는 것을 말하고, 과성삼매(果成三昧)는 그렇게 일심으로 함으로 해서 마음이 선정에 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마음은 항시 산란스러워서 선정에 들기가 어렵습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우리의 근본번뇌를 없앨 수 있는 것인데, 따라서 삼매에 들려면 오로지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을 지속시켜야 마음이 한 곳으로 모아지고 그래야 선정에 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삼매에 들어가면 우리 업장이 녹아져서 부처님의 광명이 자기 앞을 훤히 비추고 동시에 부처님의 실상에 계합(契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과성삼매라, 인행삼매가 근본이 되어 그 결과로 열매가 맺어서 염불삼매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실 때 여러분들은 어느 것이나 좋습니다. 화두를 드나 또는 티벳의 불교처럼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우나 염불을 하나 어느 것이나 다 무방하고 도는 간경자혜안통도(看經者慧眼通途)라, 부처님 경만 읽어도 됩니다.

불경도 모두가 다 부처님의 근본성품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경만 읽어도 마음을 본체에서 안 여의면 성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좋지만, 본 성품을 관조하는 그 마음을 지속시켜야 됩니다. 염불도 계속하다 보면 나중에는 가만히 있어도 자기 몸 전체가 염불이 되는 경지가 옵니다. 바람 불면 바람소리가 염불로 들리고, 물소리도 부처님 음성으로 들리게 됩니다. 화두도 ‘무()라 무()라’ 하다 보면 바람소리도 무자 화두로 들린단 말입니다.


선방에서 대중이 다 자는데 가만히 들으면 화두 하는 사람은 잠자면서도 ‘무()라 무(無)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도록 까지 해야 됩니다. 그렇게 익어지면 놓아버려도 놓아지지가 않고 뗄 래야 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염불이나 화두를 오래 일심으로 한 사람들은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밥을 먹으나 길을 가나 항시 염불, 화두가 떨어지지 않고 그렇게 이어지면 기분이 굉장히 좋아집니다. 그렇게 되도록 까지 해야 삼매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온전히 증명을 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꼭 삼매에 들어가도록 까지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과거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천 팔십 개로 꿰인 염주를 들고 몇 시간이고 헤아리면서 염불을 합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뭘 저렇게 미련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할머니나 어머니들의 얼굴을 보면 자비심이 가득히 넘칩니다. 왜 그럴 것인가? 오직 일심으로 염불을 하니 삼매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여러분들에게 염주를 많이 드립니다. 처음 올 때 오백 개를 가지고 와서 다 드리고 나중에도 더 가지고 와서 대원사에다 풀어놓았습니다. 염주를 드리는 것은 그냥 팔목에 감고 다니라고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부처님 공부는 자기한테 가장 유익한 공부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성불을 해야 됩니다. 본래 부처거니 부처가 돼 버려야지, 부처가 될 바에는 다툼도 많고 전쟁도 많은 이 불안스러운 금생에 되어야 너도나도 인간계의 여러 재앙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을 하시라고 염주를 드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