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제 4 장] 3. 염불(念佛) (1)

通達無我法者 2007. 4. 13. 07:45

 

 


이번 법회의 제목이 순선안심법회(純禪安心法會)라, 순선이라는 말이 처음 듣는 사람들은 좀 생소하실 것입니다. ‘참선에 무슨 순수한 참선이 따로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드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참선이 너무 흐트러져 있습니다. 종파적인 참선, 자기들 식만 옳다고 고집하는 그런 참선, 그렇게 되면 참선법도 법집(法執)이 되고 맙니다.

성자들의 분상에서 법집(法執)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법집이란 자기만 옳다는 주장입니다. 특히 아집(我執), 이른바 개인적인 이기심이라든가 자기가 속한 단체에 따른 집단적 이기심 이런 것들이 모두가 다 아집(我執)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불교 차체가 ‘바로 본다’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자기라는 것이 본래 없는 것입니다.

무아(無我)라는 개념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가? 그것은 인연법(因緣法)이라, 나라는 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거짓 모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무아(無我)에 대해서 우리 불교인들이 처음에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연법을 생각해보면 그냥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사람 같은 모양, 동물 같은 모양, 식물 같은 모양을 나툰 것이지 실존적인 고유한 나()는 있지가 않습니다.

사실은 무아(無我)를 알면 불교의 전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상()만 보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이지 본 성품, 본래 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는 존재가 물에 비친 달 그림자 같은 것이지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시초의 본 성품은 무엇인가?

소승에서는 본 성품 자리를 제대로 말을 못합니다. 그러나 대승에서는 분명하게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또는 ‘법성(法性)’이라,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이렇게 성품자리를 말씀했습니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생불멸하는 생명 자체, 이 자리에서 잠시간 인연 따라서 천지만물이 상()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많이 들으신 법문 중에 ‘상()을 떠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를 하더라도 상을 떠난 무주상 보시라, 좋은 일을 하더라도 상을 떠나지 않으면 위선의 찌꺼기만 남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중생들은 근본 성품을 못보고 겉에 나타난 상만 보기 때문이지요.

좋고, 싫고 하는 상을 떠나지 못하고 아상(我相), 또 내 생명이 얼마나 길 것인가 하는 수자상(壽者相), 나는 사람이고 개나 소는 짐승이다 라는 인상(人相)등, 중생들은 이런 수 많은 상 때문에 여기서 못 벗어납니다. 아무리 상을 빼고 보라고 해도 중생차원에서 그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성자의 입장은 다릅니다. 성자는 항시 근본 성품을 직관하기 때문에 성자가 보는 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명예나 감투나 부귀영화 같은 것들이 한낱 무상한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성자도 현상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다 꿈같이 봅니다. 꿈같이 보니까 집착을 안 하게 되겠지요.

따라서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 또 고려 초기의 대각국사, 나옹스님, 태고대사, 보조국사,  이조 때 와서 벽송지엄 스님, 서산대사, 사명대사, 이런 위대한 분들의 책을 보면 조금도 옹색한 데가 없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분들은 상을 떠나있으니까 이른바 법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꼭 내가 하는 식만 옳다라고 하는 고집이 그분들에겐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들은 모두 원통불교(圓通佛敎)입니다.

특별히 통불교(通佛敎)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법 자체가 원융무이(圓融無二)한 원통불교(圓通佛敎)인 것입니다. 종파에 치우치거나 교에 치우치거나 또는 참선에만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해에 해남 대흥사에서 4, 5년 동안 지낸 경험이 있습니다마는 그곳에서 다행히 『초의선사 문집』을 봤습니다. 그 전에는 본 일이 없었는데 그때 처음 읽었습니다. 대흥사는 우리 스님네들은 다 잘 알으십니다마는 신라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해서 빛난 것이고, 고려불교는 송광사로 꽃 피었고, 이조불교는 대흥사로 해서 빛났습니다.

대흥사에서 13대 종사, 강사가 나왔는데 그 가운데서 초의선사는 12대 종사입니다. 그 분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다도(茶道)의 할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의스님이 계셨던 일지암에서 일년에 한 번씩 모여서 다신제(茶神祭)라 해서 잔치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차 마시는 한 가지 예식만 치르지 초의 스님의 핵심인, 즉 말하자면 『초의선사 문집』 가운데에서 『사변만어(四辨漫語)41)』라, 『사변만어』는 굉장히 중요한 책입니다.

41) 『사변만어(四辨漫語)』1권, 초의 의순(草衣 意恂)이 저술한 것으로 백파(白坡)의 『선문수경(禪文手鏡)』을 반박한 글.

그래서 제가 그 때 번역을 하려고 주지스님께 사정을 해서 원고를 가져다가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데 그런 저런 사정으로 번역을 못해서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제가 생각할 때는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다음으로는 이조 불교사에서 그렇게 좋은 책은 처음 보았습니다.

『사변만어』가 그렇게 좋은 책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기회가 있으시면 구해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걸 보면은 조금도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그 문집은, 이조 말엽에 한국 불교를 대변하다시피 한 백파 스님을 비판해서 낸 글입니다.


초의스님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추사 선생과 절친한 도반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선생과도 절친했습니다. 문장도 당대 버금가게 유려하고 그 내용이 아주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용이 좋다는 것은 아집과 법집이 없다는 말입니다.

초의스님이 봤을 때 백파스님이 분명히 오류를 범했는데, 오류를 범했다 함은 과거 선지식들의 말씀에서 빗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 실력이 부족하니까 섣불리 반박 할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지암에서 사십 년 동안 공부를 해서 나중에 『사변만어』라는 책을 내어 백파 스님을 비판했습니다.

 나중에 추사 선생을 비판한 글도 있습니다마는 제가 굳이 이런 말씀을 하는 까닭은 적어도 정통 조사라고 하는 분들이나 도인들은 남을 함부로 비판하지 못하고 또 자기만 옳다고 내세우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결국 나와 남도 없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생각할 때 개념 같은 것도 다 허망한 것인데 이른바 법집이나 아집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를 오직 하나의 진리, 통달무이한 하나의 진리로 보는 분상에서 어떻게 핏대를 세워 옳다 그르다 시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일본에서도 화두만 하는 임제종과 묵조만 하는 조동종, 또는 염불을 화두로 하는 황벽종이 있습니다. 또 대만에는 주로 염불을 화두로 합니다. 따라서 황벽종에서는 자기들 방법만 옳다고 하고 임제파에서는 화두 없이 꾸벅꾸벅 졸아 버리는 묵조사선(黙照邪禪)이라, 삿된 참선이라 매도를 하는가 하면 또 묵조선에서는 화두 하는 임제파에게 본래가 부처인데 무슨 필요로 이것인가 저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이렇게들 서로 주장들을 합니다.

우리 한국도 가만히 보면 참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화두선만 참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다른 방법들은 다 부정해 버리겠지요.


원효스님의 위대함을 세계가 다 아는데도 화두로 참선한 분이 아니라고 그 분을 부정해 버립니다. 하물며 기독교 같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편협하기 짝이 없겠지요. 그것이 외도인 것 같으면 2천년 동안이나 순교자도 나오고 지금까지 발전해 왔겠습니까. 이렇게 개명 천지에서 17억 인구가 믿고 있는 것인데 그네들을 아무 필요 없는 외도라고 간주해 버리면 결국은 싸움밖에 일어날 게 없습니다.

정보화 시대란 것은 온갖 정보와 가치가 뒤섞이고 교류가 되기 때문에 자기 것, 자기들 문화권만 옳다고 주장할 때는 결국 싸움밖에 더 나올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교류를 자주 못하니까 내 것, 네 것을 성을 쌓고 살았지만 정보화 시대에는 세상 사람들과 매일매일 교류가 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도 구십육 종 외도라, 불교 아닌 가르침이 구십육 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원효 스님 계실 때도 여러 가지 종파로 화엄경 좋아하는 사람은 화엄경이 옳다 하고, 각기 다르게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종십문화쟁론(十種十門和諍論)이라, 모든 종파를 하나로 회통(會通)시킨 것입니다. 어떤 도인들이나 그 분들의 행적을 보면 당대 일어난 문화현상을 하나의 도리로 회통시킵니다.

보조국사도 역시 염불이나 참선, 교리 등을 하나로 회통시켰습니다. 태고 스님도 마찬가지고 위대한 도인들은 하나같이 다 회통불교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중국도 원나라 때 중봉 명본(中峰 明本) 스님(1263-1323), 그 분은 고봉 원묘(高峰 原妙)의 제자인데 아주 훌륭한 선사입니다. 당대 원나라 임제종에서 나왔는데도 교()와 선()과 염불(念佛)을 하나로 체계를 세웠습니다. 이조 때 서산 대사도 참선하는 사람들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 도교(道敎)에는 도가귀감(道家龜鑑), 유교에는 유가귀감(儒家龜鑑)이라, 이렇게 하나로 통일을 시키려고 무진 애를 다 썼습니다.

아까 제가 말한 초의 스님의 위대한 점은 그 분이 아무리 명석하게 불교진리를 말했더라도 집착을 가졌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겠지요. 설사 유교를 말하나 도교를 설하더라도 집착을 떠나면 그것은 다 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시원스럽게 툭 터져야 합니다.


그래서 순선(純禪)이라, 부처님께서 하셨고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 정통조사들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었습니다. 후대 그 자손들이 남종이니 북종이니, 돈오다 점수다 하면서 문제를 만든 것이지 정작 그 당시 육조 스님이나 신수 대사 같은 분들은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조 홍인(五祖 弘忍) 스님 회상에서 칠백 대중이 공부하는데 그 칠백 대중의 상수(上首) 제자가 신수 스님입니다. 그런데 오조 스님께 도를 받은 사람이 열 분이 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각기 성격상 개인적으로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그분들이 도가 아닌 엉뚱한 말을 했다고 볼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신수 대사도 나중에는 육조 스님의 제자들은 점수파라 틀렸다고 비판을 했습니다마는 칠백 대중의 우두머리 되는 스님이 도를 모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나중에 피차 정통 종파를 세우려고 그렇게 시비들을 했던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내세우면 될 일이지 도인들이 무슨 이유로 종파를 세우고 분파를 일으키겠습니까.

후대인들이 자기들 동아리에 권위를 세우려는 불순한 마음 때문에 종파를 내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달마스님 때부터 육조 스님 때까지의 선을 가리켜서 순선(純禪)이라고 합니다. 아무 종파도 없고 또는 어떤 행법만 옳다는 주장도 없는 그야말로 상을 떠나버린 그런 선()이기 때문에 순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안심(安心)은 무엇인가?


부처님 법문은 본래가 안락 법문입니다. 부처님 법을 들으면 항시 마음이 편안스러우니까 안심(安心)입니다. 누가 옳고 그르고 따지고 해야 마음만 불안스러운 것이지 부처님 법은 툭 틔어서 어디에도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전문술어로 아집과 법집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집과 법집을 떠나버리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또 참선 자체가 안심법문입니다. 참선이 아닌 다른 공부는 방편설도 많고 여러 가지 사설이 많아서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고 따지고 합니다마는 참선이라는 것은 간단명료합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바로 부처라. 본래 부처란 것은 내 마음만 본래 부처가 아니라 일체만물의 그 당체는 즉불(當體卽佛)이라, 처음에는 좀 어렵습니다. 가사 앞에 꽃병이 있다고 한다면 그 꽃병의 본질은 무엇인가? 꽃병도 그 당체는 곧 부처입니다.

어느 날 내가 아는 어느 대학교수 한 분이 와서 “저는 이제 반야심경을 통달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으로 공부를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통달을 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반야심경의 내용은 바로 색즉공(色卽空)인데, 색은 바로 물질을 말하는 것이고 공은 에너지를 말하는 것인데, 물질을 분석하면 결국은 에너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 물질ㆍ소리ㆍ향기ㆍ맛ㆍ감촉 등도 분석해 놓고 보면 결국은 다 공이 아닌가? 이렇게 알면 반야심경을 다 안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렇게 아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마는 색즉공(色卽空)은 그렇게 분석한 뒤에 공()이라는 것이 아니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이라,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 사람은 사람, 바로 공이고 금은 금, 즉공(卽空)이란 말입니다.”

물리학을 좀 배운 사람들은 물질은 결국 원소의 결합에 불과한 것이니까 그런 식으로는 다 짐작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공은 그런 공이 아닙니다. 따라서 공을 그런 식으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것이 못됩니다. 그것을 보고 분석할 석()자, 석공(析空)이라 합니다. 즉공(卽空)이라, 금쪽 같이 아끼는 내 몸 이대로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법문이 굉장히 어렵다고들 그럽니다마는 물론 일반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일반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렵다고 해서 아까 말했듯이 석공(析空)식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형이하학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다 통달한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생의 삼독심에 가려진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이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은 부사의 해탈법문(不思議 解脫法門)입니다. 소승에서는 부사의 할 것이 없으나 대승에서는 부사의 해탈법문입니다.

화엄경 초기경전에 보면은 아부타 달마(阿浮陀 達磨), 즉 미증류(未曾有)라, 십이부경(十二部經) 가운데 한 부분인 아부타 달마는 우리말로 풀이하면 아주 부사의한 경이란 뜻입니다. 우리 중생의 차원에서는 알 수 없는 그런 경이란 말입니다. 거기에 보면 그 당시에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하신 삼명육통이나 신통자재한 법문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은 종교라면 응당 어느 것에나 들어있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당체(當體)가 바로 공()이라, 제가 며칠 동안 그런 저런 말씀을 많이 했어도 당체가 바로 공()이라는 소식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못하시면 제가 헛말을 한 것이 됩니다. 어째서 당체가 바로 공인가? 모든 것이 인연법을 따르기에, 연기법(緣起法)은 우주의 대법(大法)입니다. 우리 중생은 연기법을 모르지만 성자는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모니께서도 ‘연기법을 보는 사람은 진리를 보고 따라서 나(如來)를 안다.’ 라고 하셨습니다. 연기법을 모르면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연기법도 단순하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그런 식으로만 알면 소승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요즘 불교신문이나 교양지 같은 데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연기법을 강설해 놓은 걸 봤습니다마는 그런 식은 아주 기초적인 차원이라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마땅히 그 다음에 진여불성이 연()따라서 잠시간 나툰 것이 일반 세상의 현상임을 잘 밝혀 놓아야 합니다. 진여불성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상()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은 바로 우주에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이사무애(理事無碍)라,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지만 본래 성품은 진여불성으로 똑같은 부처라, 여기서 어려운 것은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갖가지 모양으로 사람도 되고 축생도 되고 했으니 분명히 다른 것이 아닌가? 하지만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해야 연기법을 압니다.

부처님께서는 비유로 가사 물이 바다에 있다고 생각할 때 바람 따라서 천파만파 파도가 치고 거품이 일어나지만 파도나 거품도 결국은 똑같은 물이듯이 그와 같이 인연 따라서 진여불성이 산이 되고 물이 되고 사람 되, 바람 되고 하지만 결국 진여불성에서 파생된 파도와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하나의 같은 성품인 것입니다. 도둑이나 강도도 진여불성 차원에서 연기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부처님이고 잘나고 똑똑해도 결국은 다 똑같은 성품의 부처님입니다.


석가모니께서 보리수하에서 대각을 성취해서 깨달은 뒤에 보니까 나만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일체가 다 부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참다운 연기법이 되고 비로소 참다운 도덕률도 확립이 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고 자기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남에게 베풀고 하는 것은 위선이지 도덕이 못됩니다. 자기 자발적으로 심오한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상()이 없이 베풀고 기쁘게 행()을 해야 참다운 도덕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사를 잘하고 물건을 많이 만들고 하는 기능인을 만드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고, 또는 스스로 자기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자기를 깨닫고 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육의 참 가치입니다. 참사람을 만드는 것이 이른바 전인교육(全人敎育)이라, 기능면으로나 지혜나 어느 것에나 치우침이 없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야 할 것인데 지금의 교육은 기능적인 교육입니다.

무얼 많이만 외우고 기능적으로 컴퓨터나 무슨 조작 같은 것만 잘하면 우수한 사람인줄 압니다마는 그런 것은 아주 작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제 아무리 인류가 외적인 발달을 이루었더라도 바른 인간상을 구현하지 못한다면 참다운 평화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나 어떤 경우에나 연기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여러 불자님들 어느 누구를 보더라도 연기법을 적용해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이나 부부간에나 또 남에게도 연기법을 적용해서 보아야 오류를 안 범합니다. 연기법은 바로 우주의 대법이기 때문에 그 법에 따라서 우리 마음도 편안하고 동시에 부처님께 보다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안심법문은 부처님의 진여연기(眞如緣起), 법계연기(法界緣起), 우주의 대법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불경을 다 외우고 통달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바로 한 몸이요 하나라는 각성은, 상을 온전히 떠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요새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생명운동’이라는 걸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참 다르구나하고 생각을 했습니다마는 그네들이 하는 생명운동의 이론을 들어보니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니까 자연의 생명도 중요하다는 차원의 개념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 부처님같이 ‘모두가 다 일미 평등한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투철하게 알고 그 운동을 하면 훨씬 더 신념과 열성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 스님네들이 그 분들에게 기본적인 지도 원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사, 음악을 창조한다고 하더라도 영원적인 생명자체의 도리를 알고 할 때는 훨씬 더 위대한 음악이 나올 것입니다. 베토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는 말년에 음악가에게는 생명과 같은 청각을 잃고 치명적인 불구가 되었지만 그는 바로 그때 가장 위대한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것은 현상적인 육신의 귀로는 미처 못 듣는 영원적인 순수 멜로디를 들은 것입니다. 위대한 클래식 음악은 다 그런 것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들을 수 없는 신묘한 우주의 음을 듣는 것입니다.

아미타경이나 관무량수경에 보면 극락세계의 장엄한 모양이 나와 있습니다. 극락세계의 모양을 보면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 극락세계의 나무나 숲이나 새나 모두가 다 염불ㆍ염법ㆍ염승이라, 부처님의 무량법문을 항시 노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말로 해야 법문이 되지만 영원적인 실상세계, 참다운 성품세계에서는 새는 새 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흙은 흙대로 다 우주의 진리를 그대로 설법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모래, 한 송이 장미꽃 가운데서도 우주의 신비와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비단 불경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봅니다. 그렇게 해서 ‘순선안심’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제가 여러 가지 말씀을 드린다 하더라도 뜻은 오직 그것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보다 더 탁마(琢磨)해서 토론도 하고 질문도 하면서 부처님 법의 핵심인 아집과 법집을 떠난 참다운 불자가 되어서 금생에 사람 몸 받았을 때에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철저하게 탐구를 하시기 바랍니다.

톨스토이는 그렇게 대단한 작가이고 백작이었지만 팔십이 넘어 집과 재산과 가족을 다 버리고 승려가 만행 하듯이 괴나리봇짐 하나 지고 천하를 떠돌았습니다. 일대사인연, 생사해탈의 인연이라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청춘의 쾌락 같은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가 불자님들이 그렇게 하시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그런 셈치고 기업을 하던지 장사를 하던지 최선을 다 하면서 마음으로는 집착을 떠나야 합니다.

저는 많은 기업가를 만나기도 하고 또 그분들에게 시주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만은 대 기업가들을 보면 역시 보통사람들 하고는 좀 틀립니다. 남모르는 가운데 굉장히 공부도 많이 하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기업가의 말이 “스님, 이것은 모두 제 것이 아닙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다 털어버리고 승려가 되면 좋겠는데 제가 맡고 있는 사람들이 몇 만 명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관리로 있습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오 억이나 십 억을 시주하는 일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단돈 몇 백 만원 때문에 남의 목숨도 뺏고 부모를 죽이는 패륜을 우리는 봅니다. 자기 부모도 형제도 아닌 일개 스님한테 몇 억이나 되는 돈을 조건 없이 내준단 말입니다. 저의 집안은 복이 없어서 몇 쳔 만원 시주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몇 억이나 되는 거금을 부처님께 바치는 분들을 보면 정말 눈물겹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본래무아(本來無我)라, 자기가 없는 것이고, 자기 집도 재산도 본래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이 나서 타 버릴 수도 있고 누가 몽땅 털어서 가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죽을 때는 자리 몸뚱이도 못 가져가는데 금은 폐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우리 목숨은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이란 말입니다. 언제 꺼질지 모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이 아니면 우리는 한시도 안심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말씀드릴 이 법문도 역시 안심법문을 중점적으로 하면서 될수록 정통 도인들 말씀을 함께 인용하겠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회통적인 면에서의 불타관(佛陀觀), 즉 우리가 부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소승에서는 석가모니만 부처님으로 봅니다. 그러나 대승에서의 참다운 부처님은 바로 부처님이 하신 말씀대로 석가모니가 세상에 나오고 안나오고 상관없이 영원히 우주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법신 부처님(法身佛) 말입니다. 법신부처님을 깨닫게 되면 누구나 다 산 부처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달마 스님이나 원효 스님, 서산 스님 등 수 많은 선지식들은 다 산 부처님들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경전인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서에 보면 ‘그대들은 나를 따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따르라. 그러면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기독교가 소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당시에 유대민족들은 갈릴리 해안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던 베드로를 비롯해서 대중들의 지적 수준이 고등법문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요한복음이나 마태복음서의 중요한 대목을 보면은 부처님 말씀과 똑같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들은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리라.” 이렇게 대중에게 이르니 그 소리를 들은 바리세인들이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이와 같이 반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지만, 그대들은 그대 자신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을 모르지 않는가. 내가 하는 말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교식으로 해석하자면 위대한 사람들은 그냥 자기 마음대로 자기 개념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인 진여불성(眞如佛性), 생명의 실상에 어긋남 없이 그것에 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 자리를 체험하지 못했으니까 부처님 말씀대로 그 자리에서 빗나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고 성자는 바로 그 자리와 하나가 되었으니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해도 우주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타관(佛陀觀)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석가모니만 부처님이고 다른 부처님은 없는 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미국에 있으면 큰스님들의 법문이나 교리를 쉽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교란 것이 하도 방대해서 말로나 글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나 참선으로 꾸준히 오랜 시간 몸에 배어야 합니다.

반야심경 한 편을 보더라도 한 철 참선하고 보는 것과 두 철 참선하고 보는 것은 그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같이 공부하고 토론도 해서 제가 잘못 말하면 지적도 해주시고 그래서 탁마(琢磨옥석을 쪼고 가는 것같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하자는 뜻에서 이번 법회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불타관을 정립하는 동시에,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강령은 삼위일체입니다. 서기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에서 통과가 되었지요. 그 당시에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란이 많았는데 그런 논란들을 제치고 하나님 즉, 천지 우주의 본성인 성부와 그 기운인 성신과, 그리고 화신인 예수(聖者)가 바로 셋인, 즉 하나다, 삼위가 한 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신, 보신, 화신이 본래 하나다 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틀림없이 그때 문화가 교류되어서 불교의 법신ㆍ보신ㆍ화신(三神一佛)사상이 기독교로 흘러갔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 전에는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서기 325년에 가서야 그 당시 주교나 신부, 신학자들이 모여서 니케아 회의를 통해 삼위일체설()을 통과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를 모르면 기독교가 성립될 수 없겠지요.

우상숭배 같은 것도 본래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것도 787년 두 번째 로마 공의회 때 비로소 우상숭배를 배제한다는 것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근래에 와서 로마의 바티칸 궁에서 열린 1962년에 2차 공의회에서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 문제가 나왔습니다.

신앙의 자유란 것은 바꿔서 말하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완고한 카톨릭에서도 지금 벽을 무너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전에 중세기 때는 자기들 교리에 위배 되었다고 그 많은 사람들을 불태워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독교가 근래에 와서 그야말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라고 종교의 자유를 용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新ㆍ舊敎) 하나로 합해야 된다고 논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지금에 와서도 종파가 분열하고 같은 종파끼리도 서로 반목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지금 한국의 불교 종파가 약 50여 개가 난립하고 있고 지금도 자꾸만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법왕이라고 떠들고 다니기도 하고, 감투 쓰기 좋아하는 사람 중에 우리 한국 사람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총무원에 한 번 들어갔다 하면 몇 십 년이고 끝끝내 거기서 버티려고 한단 말입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데 그까짓 감투 남이 쓰면 어떻고 내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따라서 종교인만큼은 그런 허명(虛名) 문제에 선거 같은 것도 다 던져버리고 서로 추대해서 앙금이 없이 올려놔야 서로 존경도 받고 종교인답지 않겠습니까.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모두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