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제1장 수증의 제문제] 제2절 여래선과 조사선 - 3. 조사선(祖師禪)

通達無我法者 2007. 4. 20. 16:41

 

 

 

    


3. 조사선 (祖師禪)

 


祖師禪...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格外道理에 立脚한 祖祖本傳의 禪을 말한다. 楞伽經所說의 如來禪의 名에 對하여 此稱을 세웠다. 따라서 如來禪을 敎內未了의 禪이라 하고 祖師禪을 敎外別傳의 至極한 禪으로 한다.

                                          (祖師禪이 如來禪보다 우월하다는 主張)



   그러면 조사선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조사선은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 참다운 진리는 원래 문자를 세울 수가 없다. 다만 우리 중생들에게 표현하기 위해서 문자를 빌린 것이지, 참다운 진리 자체는 말도 떠나고 문자도 떠나고 생각을 떠나 있다. 따라서 참다운 도는 교() 밖에서 전한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그러니까 교를 하나도 안 배운다 하더라도 사람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니까 바로 마음 깨달으면 된다, 바로 본래 성품을 보고 성불하는 이른바 격외(格外) 도리에 입각한 조사와 조사가 본래 전하는 선()을 말한다"고 합니다. 능가경에서 말하는 여래선의 이름에 대하여 조사선이란 명칭을 세웠고 "여래선은 교() 안의 미처 덜 된 선이라고 하고, 조사선을 교 밖에 달리 전하는 지극한 선이라"고 하는 것이 조사선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우월하다는 주장 을 하는 분들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뜻이 여래선 가운데에 안 들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래선의 공덕 가운데는 일체상을 떠나고 문자를 떠나고 생각을 떠난도리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여래선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조사선이란 이름이 언제 시초로 나왔는가?

   전등록(傳燈錄) 앙산장(仰山章)에, 앙산혜적(仰山慧寂 815-891)이란 분은 위산영우(<+>山靈祐 771-853) 선사한테서 법을 받은 분입니다. 중국의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위앙종(<+>仰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의 5종 가운데 하나인 위앙종은 위산영우 대사와 그 제자인 앙산혜적 선사 두분 이름의 첫자를 따서 위앙종(위仰宗)이라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앙산은 위앙종을 건립한 한 분이지요.

 

   향엄격죽(香嚴擊竹)이라 하면 공부하는 분들은 다 알지 않습니까, 향엄(香嚴智閑 ?-914) 대사가 위산 선사 밑에 가서 공부할 때에 위산 대사가 향엄 대사를 점검했습니다. 향엄 대사가 책을 많이 보아서 말은 청산유수였습니다. 그래서 "점검을 좀 해야겠구나" 하고 향엄대사에게 "그대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삼장 십이부경(三藏十二部經)의 뜻을 의지하지 않고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한번 말해보게" 했습니다. 경을 많이 배웠기에 경으로야 이말 저말 다 하겠지요. 그러나 삼장 십이부경을 의지하지 않고서 낳기 전의 본래 면목을 말해보라고 하니까 딱 막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에서 배운대로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해도 그런 말이 맞을 턱이 없습니다. 도인 스님네의 명구(名句)를 적어놓은 책을 아무리 뒤적여 보아도 명답이 안 나옵니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은 문자를 통한 말로 할 수 있는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정말 깨달은 분상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겠지요. 말로 알아맞히는 것으로서는 선() 도리에서 맞는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가 없다 하더라도 깨달은 사람들은 벌써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위산대사가 볼 때에 향엄은 법기(法器)이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범부인데, 학문만 많이 해서 알음알이로 말만 잘 하니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렇게 점검을 했던 것입니다.

   향엄이 아무리 애쓰고 궁리해도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화엄경 뜻을 갖다 대보아도 아니라고 하고, 별스럽게 영리한 말을 해보아도 다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내가 공부를 한 것이 참다운 본래면목 자리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었구나, 이제는 정말로 내 마음닦는 공부를 해야겠구나" 하고서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던 제방 도인 스님네의 명구를 적은 책을 다 불태우고 남양 혜충(南陽慧忠 ?-775) 국사가 계시던 절에 갔습니다.

 

   혜충 국사는 40년 동안이나 산중에서 안 나온 분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본을 따르기 위해서 그곳에 가서 공부할 때에 하루는 풀도 뽑고 마당을 치우다가 던진 돌멩이가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문득 활연대오 했습니다. 이를 향엄대사 격죽(擊竹)의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향엄 대사가 경도 많이 보고 공부를 애쓰고 했으니까 문득 깨달은 것이지 아무것도 않고 컴컴하니 있다가 갑자기 깨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 祖師禪名의 始初... 傅燈錄十一仰山章, 師問曰  香嚴師弟  近日見處如何  嚴曰  某甲  卒說不得  乃有偈曰  去年貧未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貧無卓錐之地  今年貧錐也無  師曰  師弟只得如來禪  未得祖師禪


   앙산 대사께서 묻기를 "향엄 사제 근자에 그대가 깨달은 바가 어떠한가 " 그러니까 향엄 대사가 "모갑(某甲) 졸설부득(卒說不得)이니라 " 자기를 겸사할 때에 모갑이라 합니다. 제가 졸지에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게송으로서 "거년의 가난한 것은 아직 가난하다고 할 것이 없으나 금년에 가난한 것은 비로소 참으로 가난한 것이고, 거년의 가난한 것은 송곳을 세울 만한 땅이 없었으나 금년의 가난한 것은 송곳마저도 없습니다 "고 했습니다. 이제는 주관도 객관도 아무것도 다 없다는 뜻으로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향엄 스님의 이런 대답에 앙산 스님이 "사제는 다만 여래선만 얻고 아직 조사선은 얻지를 못했네 그려 " 하고 말씀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사선과 여래선을 비교하여 헤아린 최초의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사연은 다시 이어져서 위산 대사의 어록에 보면 앙산 스님의 평을 들은 향엄 스님은 "나에게도 대기(大機)가 있어 눈을 껌벅이고 그를 보았는데 알아차리지 못할까 하여 달리 사미를 부른 셈(我有-機  瞬目觀伊 若人不會  別喚沙彌)"이라 하니 이에 앙산 스님이 스승인 위산 스님에게 말씀드리기를 "이렇듯 향엄지한 사제도 조사선을 깨달았습니다(且喜閑師第 會祖師禪也) "하였습니다. 그러니 여래선과 조사선의 우열을 상량(商量)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부처님 당시부터서 조사선이란 말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마는 그렇지 않고 조사선의 명의(名義)는 이 때부터 있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우리 선가(禪家)에서도 어록을 보면 여래선보다 조사선을 위라고 하는 망발도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부처가 깨달은 여래선이 아래라고 하면 말씀이 될 수가 없겠지요. 여래선이란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만덕을 원만히 갖춘 무루(無漏) 청정선(淸淨禪)인 것입니다.

   경()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나 같은 것이지 그 자체가 바로 불성은 아닌 것이니, 참선 공부하는 분들은 너무 경론의 표현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여기 향엄 스님같은 분도 글 잘하는 분이라서 글은 잘 풀이하였겠지만, 자기가 참말로 깨달았으면 깨달은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주저없이 바로 내보여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서 "졸설부득이라, 졸지에 말할 수 없습니다" 하고서 게송으로 말하였으니 앙산 스님 생각에 "이 사람이 문자에 집착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었겠지요. 그래서 "그대는 아직은 여래선만 득했지 조사선은 미처 얻지 못했다 "고 했으나, 앙산 스님의 근본 뜻은 부처가 깨달은 여래선을 폄하한 뜻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다만 "그대같이 경의 연구에 너무나 집착해서 바로 심지(心地)를 닦는 실참실수(實參實修)를 소홀히 말라"는 경책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세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 여래선보다 조사선이 위라고 잘못 생각하는 분이 많았고 그런 폐단이 지금까지도 흘러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몇 백년, 몇 천년 뒤에 선사들의 어록을 볼 때는 굉장히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경(壇經) 가운데도 사실은 이상한 대문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당시 단경이 상당히 유포될 때, 6조 대사의 제자 가운데 한 분인 혜충 국사도 단경 가운데 범부의 소견이 들어 있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범부들이 조작해서 성자의 뜻을 함부로 왜곡시켰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어록이라고 하는 것은 도인들 본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받아쓰기도 했고, 그것도 몇 십년 몇 백년 지나는 동안 책을 다시 쓰고 개작하고 다시 펴낼 때마다 바꿔 쓰기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근래에 선지식들의 비문을 참고합니다마는, 비명(碑銘)을 금석학(金石學)에서는 권위 있는 증거로 존중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비문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꼭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옛날 분이야 우리가 그 분을 만나 보지 못했으니까 사실을 모르긴 하지만 근래에 우리가 아는 분 가운데 별로 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분도 그 비문에는 "대도를 성취하였고 공덕이 하늘에 닿는다"고 정도 이상으로 과찬을 많이 합니다. 이럴 때에, 과거에도 그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비문을 보고 권위 있는 증거로 삼기가 어렵습니다.

 

   조사 스님들의 어록도 마찬가지로 몇 백년 세월이 흐르게 되면 많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육조 단경에서도 5조 홍인(弘忍) 대사의 7백 제자 가운데 상수 제자인 신수(神秀) 대사와 혜능(慧能) 대사가 마치 법을 받기 위해 경쟁을 하는 것처럼 되어 있고 또 신수 대사는 돈오는 전혀 모르고 점수만 알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도인들이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역사적으로 밝혀졌습니다만 6조 스님의 제자인 하택신회(荷澤神會)가 6조의 법을 받아 자기가 정통 7조라고 내세우기 위해서 혜능 대사는 높이고 신수 대사를 굉장히 폄하시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과거에는 그대로 곧이 듣고서 신수 대사는 부족하고 6조 대사만 위대하다고 했는데 근래에 돈황 문서(敦煌文書)가 발견되면서 이른바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 등 여러 가지 문헌으로 신수 대사도 결국은 똑같이 위대한 분이요, 또 신수 대사에게도 분명히 돈오가 있고 돈수도 있다고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록이나 그런 문제에 대해서 그대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근본 자성(自性)에 비추어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