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결어 (結語) 祖師禪은 如來禪의 敎禪-致說에 反對하여 如來言句에 執着함을 警策하는 意味에서 如來禪과 簡別하여 視師禪을 唱導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如來禪이나 祖師禪이나 對機에 따른 隨時의 所說로서 如來禪外에 祖師禪이 없고 또한 視師禪外에 如來禪이 따로 있지 않으며 그 內容에 있어서는 一毫의 相違도 없고, 淺深 優劣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제 끝맺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조사선이란 여래선의 교선일치설(敎禪一致說)에 반대하여 제언(提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래선 도리는 교나 선이나 원래 둘이 아니라는 도리를 역설하여 말합니다. 불법(佛法)에 있어서 무엇이 둘이 되겠습니까, 우리 중생이 공연히 갈라서 둘인 것이지, 어느 것도 불법 속에 안 드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본래에서는 절대로 둘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나 선이 특징은 다 있으나 원래가 둘이 아닙니다.
또 조사선은 여래의 언구(言句)에 집착함을 경책하는 의미에서 여래선과 간별(簡別)하여 조사선을 창도(唱導)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밖에는 달리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래선이나 조사선이나 근기에 따른 수시(隨時)의 말로서 여래선 외에 조사선이 없고 또한 조사선 외에 여래선이 따로 있지 않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일호(一毫)의 상위(相違)도 없고 천심(淺深) 우열(優劣)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가 깊고 어디가 더 옅고 또는 어디가 더 수승하고 또는 용렬한 차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이런 도리를 깊이 생각하셔서 앞으로 부질없는 갈등을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진지한 수행자는 꼭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달마 때부터 6조까지는 이런 이름도 없이 오로지 마음 공부만 했습니다. 부처님 법을 범부소견으로 무엇이 옳네 그르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부처님은 비록 수하성도(樹下成道)했다 하더라도 미처 공부가 덜되어서 또다시 숲속에 들어가 스승을 구하고서야 비로소 완전한 법을 얻었다는 말이 있다고 할 때 세존을 얼마나 비방하는 말이 되겠습니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서는 일호의 관심도 갖지 말고 다만 근기에 따라서 공부할 길을 한번 선택했으면 생명을 걸고 최선의 정진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문제가 되어 있는 돈오돈수, 돈오점수 문제와 또 비슷하게 문제가 되어 있는 조사선, 여래선에 대해서도 말씀을 대강 드렸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공부하는 데는 장애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수행자가 부질없이 무익한 한갈등(閒葛藤)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 닦는 것에 도움되는 말 외에는 말도 함부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야말로 찰나무상 아닙니까? 숨 한번 들이쉬지 못하면 우리 생명은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 인생에 있어서 부질없는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불(成佛)하는 직통 길만 가는 데도 우리 인생이 너무나 짧습니다.
또한 우리 번뇌는 얼마나 깊습니까, 닦으려고 생각하지 않고 그렁저렁 지내는 사람들, 속물이 되어 세속에 휩싸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정작 그런 속물이 되지 않아야겠고, 한사코 해탈의 길에 나가야겠다"고 할 때는 가지가지의 마장(魔障)이 굉장히 많습니다. 욕계에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총동원해서 우리한테 대항하는 것입니다. 좋은 맛이나 좋은 경치나 아름다운 것이나 또는 이성이나 모든 것이 다 우리의 해탈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해가 많은 원수의 밀림 가운데서 이른바 번뇌조림(煩惱稠林)이라, 번뇌나 마군(魔軍)이 빽빽한 가운데서 헤쳐나가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팔만장경을 금생에 다 볼 수가 없습니다마는 어느 경을 보아도 다 소중합니다. 또한 논장도 다 볼 수 없습니다마는 지금 우리에게 이미 알려져서 강원에서 배우는 것은 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대교(大敎)까지 안 배운다 하더라도 정말로 숙세에 선근이 깊다면 초심에서도 깨닫는 것입니다. 불 보고 깨닫고, 물 보고 깨닫고, 달 보고 깨닫고, 별보고 깨닫고, 우리가 깨닫는 인연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자성의 문제입니다. 오로지 자기 문제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돈오돈수나 돈오점수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다 옳은 말입니다. 다만 시초에 말씀한 분들은 너무나 점차를 따지고, 고하, 시비, 차서를 따질 때 이른바 무염오(無染汚)수행이라,오염하지 말라는 뜻으로서 돈수를 말씀한 것이지 견성 견도한 다음에 닦을 것이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화엄경이나 어느 경이나 어록을 보아도 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처음부터 권위 있는 어록에 의거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래선 조사선도 그와 똑같은 의미로서 고하가 있는 것도 아니요.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화두(話頭)는 근기가 수승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주문(呪文)이나 염불(念佛)은 근기가 하열한 사람들이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 경전에 그런 말씀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는가? 그 자세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적인 자세만 여의지 않고 본체를 여의지 않을 때는 다 그대로 수승한 대승법이요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설사, 묵조(默照)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묵묵하니 바보같이 앉아 있기만 할 때는 선이 못됩니다. 분명히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도리를 관조(觀照)해야 참다운 묵조선인 것입니다. 또는 화두를 참구한다 하더라도, "이뭣고"나, "간시궐(乾屎<木+厥>)"이나 또는 "판치생모(板齒生毛)"나 무슨 화두를 들 때는 원래는 본분사,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 본래면목 자리를 들었습니다. 어록을 보신 분은 다 아는 바와 같이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이런 데서 화두가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무슨 화두를 들든지간에 제일의제(第一義諦) 자리를 분명히 들어야 참다운 화두가 되는 것이지, 본체 자리를 여의고 그냥 의심한다고 해서 참다운 공부가 되고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훤히 틔어버린 본래면목 자리를 안 놓치고 화두를 들어야 상기(上氣)도 안됩니다. 그냥 애쓰고 의심만 할 때는 상기되기 마련입니다. 마땅히 마음을 열고 닦아야 참다운 공부가 됩니다. 마음을 연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일체존재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일체존재 모두가 진여불성 뿐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닦아나가는 데는 꼭 철저하게 계행(戒行)을 지켜야 합니다. 철저히 계행을 지키지 않으면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시라불청정(尸羅不淸淨)이면 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이라 "시라(Sila)는 계율입니다. 계율이 청정하지 않으면 삼매가 못 나온다는 말입니다. 삼매에 들지 못하면 참다운 견성이 못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진리 그대로 하신 말씀인 것이고, 진실 그대로의 말씀인 것이고, 다른 말씀은 하시지 않고 또는 속이지 않는 말씀입니다. 저도 지금 산길에 허위적거리고 올라가는, 허위단심 올라가는 향상수자(向上修者)에 불과합니다. 같이 부지런히 공부를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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