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제3장 수증과 공덕] 제3절 삼매 - 4. 삼매수증의 인원과만

通達無我法者 2007. 4. 20. 17:38

 

 

 

 

4. 삼매수증(三昧修證)의 인원과만(因圓黑滿)



   우리가 공부하는 인행공덕(因行功德) 곧 성불(成佛)을 위한 수행하는 공덕이 원만하게 되어야 결과도 원만히 되겠지요. 보통 우리가 의욕만 있어서 실제로 인행공덕을 닦지 않으면서 결과만 얻으려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행공덕은 여법(如法)히 수순(隨順)해서 닦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공덕의 과보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운문(雲門) 선사가 말씀한 삼종병(三種病) 가운데 미도조작(未到造作)이라, 우리가 아직 이루지 않은 분상에서 애쓰고 높은 경계로 올라가려고 성급한 마음으로 구하기만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더욱 초조하고 공부도 잘 안되는 것입니다. 인행공덕만 착실히 닦아나간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점차로 마음이 열려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의젓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범부지의 인행공덕을 충분히 닦아야 하겠습니다.

 

 


因圓果滿

 


如斯間斷없이 傳心全力하야 觀而念之하면 習忍(修習安忍)이 하면서 相似覺成就하는 동시에 明得定明增定性忍位性地를 거쳐 印順定에서 비로소 道種忍하고 純一無雜一心支無間定하매 明鏡止水할지라. 오직 加行功德으로써 假觀的 一相三昧에서 見性的 實植三昧에, 念修的 一行三昧에서 證道的 普賢三昧如此觀念에서 實證에로 思惟修得하나니 於是乎 身證心悟로써 正覺 初步信忍成就하고 順忍으로써 金剛喩定하야 修者願力에 따라 隨分覺으로써 無生忍을 거쳐 寂滅忍究竟覺하는 것이 本覺境地涅槃岸에 到하는 據徑이니 勤策衆如是觀으로써 如是果할진져.

                                                                                - 金剛心論 -

 

 


   이와 같이, 일승법문(一乘法門)을 일상삼매나 또는 일행삼매 즉 진여삼매, 진여법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를 간단없이, 끊어지거나 쉬는 사이도 없이 전심전력하여 관이념지(觀而念之)하면, 관찰하고 생각하면 이란 말입니다. 관념(觀念)이라는 것이 우리 공부인에 있어서는 깊은 뜻입니다. 관()은 지혜()고 념()은 정()에 해당합니다. 바꾸어서 말하면은 관은 일상삼매고 념은 일행삼매입니다.

   관은 상대적인 관이 아니라 바로 진리를 관조(觀照) 관찰하는 것이니까 바로 정수(正受)고 정심행처(正心行處)입니다. 진여를 관하는 것이 참다운 관이 됩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관하니까 바로 지혜가 되지요. 념하는 것은 간격이 없이 염념, 생각 생각에 상속적(柏續的)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반야 지혜의 경계, 진여법성 경계를 조금도 빈틈이 없이 바로 생각해 나간다고 하면 습인(習忍) 곧 수습안인(修習安忍)이 생깁니다. 곧 닦아 익혀서 편안히 머문다는 말입니다. 참선공부에 있어서 이 습인이 생기게 되면 한 시간 두 시간 앉아 정진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고 습인이 안되면 부스럭거리며 굉장히 괴로움을 느낍니다. 따라서 관이념지(觀而念之)해서 화두나 또는 기타 염불이나 어떤 진리를 지혜와 선정과 쌍수해서 닦아 나간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수습안인(修習安忍)인 습인(習忍)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상사각(相似覺)을 성취합니다. 상사각은 참다운 정각(正覺), 견성이 아니고 어렴풋이 닮은 깨달음이란 말입니다. 자의식이 과잉하고 또는 아만이 있는 사람들은 자칫하면 상사각 정도 가지고서 공부를 다 마쳤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별지혜 곧 간혜지(乾慧智)로는 별로 막힘이 없는 경계인 것입니다.


   동시에 명득정(明得定)과 4선근에서 말씀했습니다만 마음이 껌껌하다가 확 열려 오는 것입니다. 몸이 짜르르해서 전류에 감전된 모양으로 몸이 개운해지고 또는 머리도 시원하고 가슴도 쾌적하고 아주 가뿐한 상태입니다. 명득정과 또는 공부 정도가 더욱더 깊어져서 명증정(明增定)의 성인위(性忍位)인 성지(性地)에 이르면 한결 마음이 안정되어 가는 것입니다.

   인순정(印順定)에서, 인순정은 보다 마음이 맑아옴을 확실히 확인하는 경계입니다. 전에는 공부에 대한 신념이 모호했지만 공부가 익어지면 자기 몸에 대해서도 별로 애착도 생기지가 않고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가 완전히는 못된다 하더라도 어렴풋이나마 인증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도종인(道種忍)이 생기고, '정말로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겠구나, 다른 것은 안해야겠구나' 하는 마음 그런, 서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른바 도의 종자가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순일무잡(純一無雜)한 일심지(一心支)인, 다른 헛것이 섞이지가 않고 순수한 마음 곧,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순수한 마음 하나뿐인 무간정(無間定)에 들어가니, 이것은 번뇌 때문에 마음이 괴롭지 않고 즉 번뇌가 사이에 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순일무잡의 순수한 일심지가 되니 어떻게 번뇌가 그 사이에 낄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지라. 맑은 거울에 때가 없이 모든 것이 바로 다 비춰오고 파동치지 않는 고요한 물위에 모든 형상들이 비춰오듯이 그와 같다는 말입니다. 공부할 때에 자기 마음을 점검해 보면 짐작되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이 명경지수 같은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도 공부가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가행공덕(加行功德)으로써, 더욱더 정진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간정에 들고 또는 마음이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같이 되었다 하더라도 함부로 망동하면 그만 뚝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입선(入禪) 중에 무간정을 체험했다 하더라도 방선(放禪)한 뒤에 잔소리나 하고 함부로 해버리면 간곳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안상(安祥)과 보임(保任)이라, 그 명경지수같은 마음을 하마 흩어질세라, 소중히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질없는 말도 않고 밥 먹을 때나 걸어갈 때나 항시 마음을 불성경계(佛性境界)에다 딱 머문, 그 자리를 조금도 여의지 않고서 공부해야 더 나아가지는 것입니다. 무간정까지 갔다가도 견성까지 가려면 앞서 말씀드린 바 한껏 가행공덕을 거듭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관(假觀)적 일상삼매란, 아직은 참다운 무루(無漏) 정관(正觀)에는 못 드는 것입니다. 가사 '무량무변한 진여불성 광명이 충만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실제로 보이는 것이 아니요, 부처님께서 말씀했으니까 '있거니'하고서 믿고 나가는 것이지 실제로 있지 않으니까 가관(假觀)인 것입니다. 가관적 일상삼매에서 항시 '그렇거니'하고서 상을 안 내는 일상삼매가 오랫동안 익혀지면 실지로 진여불성이 있는 줄 확신이 되어 견성적(見性的) 실상삼매(實相三昧)에, 익어져서 점차로 나가다가 번뇌가 끊어지면 본래 부처인지라 응당 필연적으로 견성이 되어야 이른바 실상삼매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염수적(念修的) 곧 염념상속해서 끊어지지 않게 공부해 나가는 일행삼매에서 증도적(證道的), 도를 증하는 보현삼매에 들게 됩니다.


   이와 같이 관념(觀念)에서 실증(實證)에로 사유수득(思惟修得)하나니, 맨 처음에는 관념입니다. 우리는 관념을 처음부터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견성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처음에는 부처님 말씀, 조사 스님들 말씀에 의지해서 우선은 관념으로 착실히 공부하다 보면 안주(安住)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부처다'고 하다보면 결국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닦아서 얻는 것입니다.


   어시호(於是乎), 이에 있어서 신증심오(身證心悟)로써, 몸으로 증하고 마음으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몸으로 증해야 하기 때문에 꼭 철저한 계행이 필요합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한 계행이 앞서야 합니다.


   정각초보(正覺初步)의 신인(信忍)을 성취하고 순인(順忍)으로써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주()하여, 정말 정각초보인 진여불성을 초견성을 해야 참다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성을 못 보았을 때는 항시 의심이 남는 것입니다. 확실히 믿음이 생긴다면 부처님 말씀에 온전히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증명을 해버렸으니 어떻게 안 따라 가겠습니까. 순인으로써 금강유정이라, 곧 견성오도를 하는 것입니다.


   견성오도에 주()하여 수자(修者)의 원력에 따라 수분각(隨分覺)으로써, 보살십지로 한다면 초지에 견성하고 그로부터 점차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자기 원 따라서 용맹정진을 안 쉬고 한다면 비약적으로 차서(次序)를 뛰어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고 게으름 부린다면 차근차근 더디 올라가고 또 더구나 중생제도 핑계하고 사회 사업이나 한다고 할 때는더 못 가고 멈추고 말겠지요.


   무생인(無生忍)을 거쳐 적멸인(寂滅忍)인 구경각에 달하는 것이 본각경지(本覺境地)인 열반안(涅槃岸)에 도()하는 첩경이니 근책중(勤策衆)은, 부지런히 닦아나가는 수행자는 이와같이 진여실상의 관법 곧 실상관(實相觀)으로써 부처님의 불와를 증득(證得)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