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제3장 수증과 공덕] 제3절 삼매 - 5. 불성공덕

通達無我法者 2007. 4. 20. 17:44

 

 

 

5. 불성공덕 (佛性功德)

 


1) 오지여래 (五智如來)


우리가 '불성(佛性)이 어떻다, 불성은 무한공덕을 갖추고 있다. 우리 자성은 심심미묘하다' 이렇게 말을 보통은 합니다마는 정말로 체계적으로 어떤 공덕이 있는가? 그런 것은 잘 모르고 넘어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밀?密敎) 등 경전에 소상히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순수밀교에 있는 법문으로 법성공덕(法性功德) 진여불성공덕(眞如佛性功德)을 체계적으로 다섯 공덕으로 구분한 것이 5지여래(五智如來) 법문입니다.


지수화풍의 4대(四大)와 거기에 공()을 더하여 5대(五大)라고 합니다. 우리가 물리적인 상징으로서 표현할 땐는 지수화풍공 5대라고 하는 것이고, 물질이 그대로 물질인 것이 아니라 바로 불성이요, 성품으로서는 바로 생명이니까 5지여래(五智如來)라고 말합니다. 또 5지여래에 따른 각기 지혜가 있어서 5지(五智)라고 합니다. 그러나 5지()나 5대()가 각기 뿔뿔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융무애한 일미평등(一味平等)의 불성(佛性)인데 그 별덕(別德)을 5지5대여래(如來)라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리적 상징으로 본다면 땅기운 같은 이른바 물질적인 질료가 되는 것은 지()요, 수분은 수()요, 또 불기운 온도는 화()요, 동력은 풍()이요, 지수화풍 4대가 의지할 공간은 공()입니다. 이와 같이 질적으로 보아서는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오지여래(五智如來)라 하고 각기 여래마다 특징적인 지혜인 5지(五智)가 있는 것입니다.


五智如來


 毘盧遮那(비로자나)를 光明遍照(광명변조) 盧舍那(노사나)를 淨滿(정만) 그리고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을 能仁寂默覺(능인적묵각)이라 (역)하니 能仁(능인)의 良心(양심)을 가지고 寂靜(적정)에 (처)하야 身口意(신구의)를 三緘(삼함)한 후 淨滿(정만)의 性海(성해)를 見證(견증)하고 究竟覺(구경각)을 成就(성취)함일새 自身(자신)이 곧 大日(대일)이라 (심)이 虛空(허공)과 (등)하야 (기) 體性(체성)이 無障無碍(무장무애)함으로 第一智名(제일지명)을 法界體性智(법계체성지)라 (운)하고 (기) 無碍光明(무애광명)이 如日遍照(여일변조)함으로 佛號(불호)를 大日如來(대일여래) 곧 毘盧遮那佛(비로자나불)이라 (위)하는 바 器界日(기계일)은 一小世界(일소세계)를 照明(조명)하되 有障有碍(유장유애)하나 心界日(심계일)은 大千沙界(대천사계)를 遍照(변조)하되 無障無碍(무장무애)함으로 大日(대일)이라(칭)하며

 心(심)이 虛空(허공)과 (등)하되 但空(단공)이 않이오 風性的(풍성적) 一氣(일기)가 等量平滿(등량평만)함으로 第二智名(제이지명)을 平等性智(평등성지)라 (운)하고 佛號(불호)를 不空如來(불공여래)라 (위)하며

 一氣平滿(일기평만)한 等虛空(등허공)의 心界(심계)에 火性的(화성적) 智光慧焰(지광혜염)이 等量炯滿(등량형만)하야 明暗(명암)이 (무)하되 (능)히 起滅(기멸)을 (시)하는 沙界(사계)의 差別相(차별상)을(통)하야 眞如(진여)의 隨緣不變性(수연불변성)을 觀察(관찰)할새 第三智名(제삼지명)을 妙觀察智(묘관찰지)라 (운)하고 佛號(불호)를 彌陀如來(미타여래)라(위)하며

 無邊無量(무변무량)의 等虛空的(등허공적) 心界(심계)에 超日月(초일월)의 金色光明(금색광명)을 (대)한 水性的(수성적) 識水(식수)가 淨滿(정만)함으로 第四智名(제사지명)을 大圓鏡智(대원경지)라 (운)하고 佛號(불호)를 如來(아촉여래)라 (위)하며

 彼(피) 淨光(정광)의 地性的(지성적) 金色(금색)에 (주)로 四寶色(사보색)을 (대)하였으니 寂體(적체)엔 風性的(풍성적) 黑金色(흑금색)과 火性的(화성적) 赤金色(적금색)과 水性的(수성적) 白金色(백금색)과 地性的(지성적) 黃金色(황금색)이 純一混和(순일혼화)하야 紫磨金色(자마금색)의 一道光明(일도광명)이 常住不動(상주부동)하되 (기) 照用(조용)엔 四寶色光明(사보색광명)이 各其性能(각기성능)의 無量功德(무량공덕)을 發揮(발휘)하야 交徹炳煥(교철병환)할새 正午當陽(정오당양)의 摩尼寶珠(마니보주)가 輝煌燦爛(휘황찬란)하야 無數寶光(무수보광)이 無邊爀曜(무변혁요)함과 (여)함으로 第五智名(제오지명)을 成所作智(성소작지)라 (운)하고 佛號(불호)를 寶生如來(보생여래)라 (위)하나니

 第一智(제일지)는 法身(법신)의 總智(총지)요 其他(기타)는 別智(별지)라 第二(제이) 第三(제삼) 第四(제사)의 三智(삼지)는 報身(보신)의 能智(능지)요 第五智(제오지)는 化身(화신)의 所智(소지)인 바 別稱(별칭)하야 五智如來(오지여래)라 (운)하고 總稱(총칭)하야 阿彌陀佛(아미타불)이라 (위)하니 諸佛中(제불중) 首班(수반)이오 彌陀(미타)의 妙觀察智印(묘관찰지인) △(인)이 一切如來智印(일체여래지인)의 原形(원형)이니

 阿字(아자)는 (무)의 (의)로서 化身(화신), 彌字(미자)는 滿(만)의 (의)로서 報身(보신), 陀字(타자)는 (법)의 (의)로서 法身(법신)을 意味(의미)하야 本具三身(본구삼신)인 阿彌陀佛(아미타불)에 總該(총해)할새 法界體性(법계체성)인 一法身(일법신)에 平等性(평등성)으로 妙觀察(묘관찰)하는 大圓鏡的(대원경적) 能智報身(능지보신)과 成所作(성소작)의 所智化身(소지화신)을 (겸)하고 四智(사지)에 萬德(만덕)을 (구)하니라

                                                                              -金剛心論-


비로자나불의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는 인도말 범음(梵音)을 딴 것인데 뜻으로는 광명변조(光明邊照)라, 부처님의 청정미묘한 정광(淨光) 적광(寂光)이 우주 삼천대천 세계에 끝도 가도 없이 충만해 있다는 뜻입니다. 광명이 두루 비춘다는 말입니다. 비로자나불은 이른바 법신불입니다. 보신인 노사나불의 노사나(盧舍那)는 정만(淨滿) 즉 법성, 불성이 충만해 있다는 말입니다. 법신이 그냥 그대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법신의 체에 불성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능인적묵각(能仁寂默覺)이라는 뜻인데 모든 무주상(無住相)의 지혜와 자비를 신의 삼업(三業)으로 원만히 갖춤과 동시에 우리 마음의 산란을 여의고 깨달은 각(), 곧 깨달은 부처라는 말입니다.


환언하면 무주상의 자비와 지혜를 갖춘 능인(能仁)의 양심을 가지고 고요한 곳에 처하여, 마땅히 수행자가 공부할 때는 자기 혼자만의 성취를 위하는 식의 마음 갖고는 공부가 안되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를 언제나 모든 중생한테 바쳐야겠다는 능인의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공부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본래 공부 자체가 자타를 떠난 우주적인, 우주와 둘이 아닌 자리의 공부이기 때문에 차별심을 가지고 공부하면 공부가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주상의 자비와 지혜라 할 수 있는 능인의 양심을 가지고 고요한 곳에 처해서 신의를 삼함(三緘)이라, 봉한다, 닫아버린다는 뜻이지요 몸으로 허튼 행동 않고 입으로 허튼 말 않고 또는 뜻으로 부질없는 생각을 않을 뿐만 아니라 가급적이면 일체 활동을 삼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그렁저렁 공부하는 식으로 나가려면 모르겠지만 '꼭 내가 불성을 증명한다, 한사코 견성한다'고 할 때에는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대사일번 대활현전(大死一番 大活現前)이라, 한번 크게 죽어야 크게 산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에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우리는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의 상함이라, 몸으로 활동을 될수록 적게 합니다. 구참 수행자들은 산책이나 활동을 않더라도 공부 자체로 해서 몸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간다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만(淨滿)의 성해(性海) 즉 불성 자리를 깨닫고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경각을 성취함일새 자신이 곧 대일(大日)이라, 비로자나불이란 말입니다.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마음의 체성(體性)이 무장무애하므로 비로자나불에 상응되는 지혜가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입니다. 법계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또는 법계체성에 계합된 지혜라는 말입니다. 또 법계체성지의 거리낌없는 광명이 마치 해와 같이 두루 비추므로 부처 이름을 대일여래(大日如來) 곧 비로자나불이라 말하는 바 태양계의 태양은 태양계 한 세계를 비추고 밝게 하되 유장유애(有障有碍)라, 거리낌이 있고 장애가 있습니다. 그래서 깜깜한 암실이나 물질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 달〔心月〕은 삼천대천 세계를 다 두루 비추되 무장무애라,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쇳덩이 속에나 바위 속에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돌이나 쇠나 다 본래 공()하여 불성으로 되었기 때문에 무장무애 입니다. 무장무애하므로 이른바 보통 태양이 아니라 대일(大日)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허공과 같되 다만 공이 아니요, 풍성적(風性的)인 기운이 등량평만(等量平滿)하므로 평등성지(平等性智)라 하고 부처의 이름을 불공여래(不空如來)라고 말합니다. 5지여래 가운데 두번째가 되겠지요.


일기(一氣) 곧 우주 에너지, 에너지나 정기(精氣)라고 하면 우리가 알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우주의 정기가 평등하고 가득찬 허공같은 마음세계에 화성적(火性的) 지혜의 불꽃 곧 그런 지혜 광명은 조금도 흠이 없이 원만하게 빛나고 충만해서 본래 꺼짐이 없으되 능히 일어났다 멸했다하는 것을 보이는 사바세계의 차별상을 통하여 진여의 수연불변성(隨緣不變性) 곧 인연에 따르되 변치 않는 성품인데 진여불성이 인연에 따른다 하더라도 진여는 변치가 않는 것입니다. 진여가 나무가 되면 나무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假相)이 그렇게 보일 뿐인 것이지 진여의 성품은 변치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여의 수연불변성을 관찰함을 신묘하게 관찰하는 지혜인 묘관찰지(妙觀察智)라 말하고 불호(佛號)를 미타여래 (彌陀如來)라 합니다.


무변무량의 허공같은 마음세계에 일월을 초월한 금색광명, 곧 순수한 불성광명(佛性光明)을 말한 것입니다. 태양광선이나 그런 가시적(可視的)인 눈부신 광명은 물리적인 광명이지만 순수한 불성 광명은 그런 물리적인 광명이 아닌 것입니다. 금색광명을 띄고 있는 수성적(水性的)인 성품의 물 에너지가 청정하게 충만함으로 모든 것을 원만하게 비추는 지혜를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말합니다. 마치 큰 거울이 형상을 비추듯이 우주를 비추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불호는 아촉여래(阿闊如來)라 합니다.


청정한 광명인 지성적(地性的) 금색에, 금색도 역시 사바세계에 있는 물질적 금색이 아닌 청정광명 금색에 주로 사보색(四寶色)을 띄었으리 적체(寂體)인 법신의 몸에는 풍성적(風性的) 흑금색(黑金色)과 화성적 적금색과 수성적 백금색과 지성적 황금색이 순일 혼화(混和)하여,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융하니 혼화하여 그 색이 자마금색(紫騫金色)이라, 자마금색은 순수세계의 광명입니다. 도인들이 견성할 때도 자마금색의 원광(圓光)을 증득(證得)하고 열반에 들 때도 자마금색의 광명 구름이 떠오르는 가운데 열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마금색의 순수 광명이 상주부동하게 항시 머물러 있습니다. 법성경계 불성경계는 영원히 불생불멸한 자마금색의 광명이 항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광명이 인연 따라서 산이 되고 또는 지구가 되고 또는 태양이 되더라도 역시 그런 광명은 변치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의 눈에 태양으로 보이고 무엇으로 보이고 할 뿐인 것입니다. 상주부동하되 곧 항상 변함 없이 머물러 있으나 비추는 용()에는 그런 사보색 광명이 각기 성능의 무량공덕이 있습니다. 가사, 흑금색은 흑금색의 공덕이 있고 또는 황금색은 황금색의 무량공덕을 발휘하여 그런 공덕이나 빛이 서로 피차 어우러져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한없이 찬란한 보배인 마니보주는 밤에도 빛나는 것이지마는 더구나 대낮에 정오에 태양이 빛나고 있을 때는 얼마나 휘황찬란히 빛나겠습니까. 마니보주가 휘황찬란하여 헤아릴 수 없는 보배광명이 한량없이 빛남과 같음으로 성소작지(成所作智)라 말하고 부처이름을 보생여래(寶生如來)라 말합니다.


제1 지혜인 법계체성지는 법신 비로자나불의 총지(總智)요, 기타는 별지(別智)입니다. 제2, 제3, 제4의 삼지(三智)는 보신의 능지(能智)요. 제5지는 화신의 소지(所智)인 바 별칭하여 5지여래라 하고 총칭하여 아미타불이라고 말하니 제불중(諸佛中) 수반(首班)이요 미타의 묘관찰지인 삼각형(△)이 일체 여래지인(如來智印)의 원형입니다.


아미타의 아()자는 무()의 뜻으로서 화신, 미()자는 원만하다는 의미로 해서 보신, 타()자는 법의 뜻으로서 법신을 의미하여 본래 삼신(三身)을 다 갖추어 있는 아미타불에 모두 다 해당할새, 법계체성지인 한 법신에 평등성으로 묘관찰하는 대원경적 능지(能智)보신과, 또는 성소작의 소지(所智)화신을 겸하고 4지에 만덕을 갖추어 있는 5지여래가 바로 우리의 자성공덕(自性功德)입니다. 그리고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일불(三身一佛)인 아미타불이 바로 우리의 참 자아(眞我)요 본래면목입니다.



2) 열반사덕(涅槃四德)


불교와 같은 가장 위없는 종교가 아니더라도 어떠한 분야에서나 고결한 비젼(Vision)이나 이상(理想)이 없으면 우리 행동이 감격스럽게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목적 의식, 이상에 대한 가치관을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 근본문제에 있어서 불성공덕이 어떠한 것인가? 불성공덕에 대한 인식이나 믿고 해석하는 신해(信解)가 애매모호하면 생명을 내걸고 공부도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출가한 의의에 대해서도 항시 회의를 품습니다. 성불이란 것은 얼마만치 중요한 것이고 어떠한 가치와 공덕이 있는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정립이 꼭 선행적으로 우리 수행자한테는 필요합니다. 거기에 대응한 법문이 이미 밝힌 바 오지여래(五智如來)와 열반사덕(涅槃四德)입니다.


涅槃四德


涅槃滅度不生安樂極樂解脫


1. 常德 常恒不變하여 生滅이 없음.

2. 樂德 無爲安樂함.

3. 我德 神通妙用大自在함(八大自在我)

4. 淨德 一切垢染解脫하여 淸淨함.


열반(涅槃 nirvana)이란 멸도(滅度) 곧 번뇌가 다 완전히 다 멸해버렸다는 뜻입니다. 불생(不生)이라, 불생불멸한 불생은 바로 영생(永生)과 같은 뜻입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으니까 응당 영생이 되겠지요. 또는 안락(安樂)이라, 아무런 번뇌가 없으니 안락스러울 것이고 또 같은 안락도 변동과 소멸이 없고 사무친 위없는 안락이기 때문에 바로 극락(極樂)입니다. 또 어떤 구속이나 얽매임이 없이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해탈(解脫)이 되는 것입니다.


열반의 공덕은 물론 무량공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경전마다 부처님 공덕은 불가설(不可說) 불가설이라, 어떻게 말씀을 다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항하사 모래수와 같다는 비유로도 부처님 공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무량공덕을 네가지 속성으로 구분한 것이 열반사덕(涅槃四德)입니다.


다시 환언하면 처음에 상덕(常德)이라, 상덕은 상항불변(常恒不變)해서 우리들이 얻는 지혜나 자비나 무량공덕이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런 변동이 없어서 생멸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무리 변동이 없다 하더라도 행복감을 주지 않아서는 또 별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행복도 무한의 행복이 되어야 현상적인 오욕(五慾)경계에서 맛보는 시원찮은 행복에 관념이나 몸을 내던지지 않겠지요. 우리가 출가한 것도 세속적인 행복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생사해탈의 무한한 행복이 있기 때문에 출가를 했던 것입니다. 락덕(樂德)이란, 무위안락(無爲安樂)이라, 조금도 조작이 없는, 상대적인 행복이 아닌 절대적인 행복이 란 말입니다.


다음 아덕(我德)이라, 아덕을 잘못 생각하여 단순히 피상적으로 해석을 하는 분도 더러 있습니다. 아덕은 무한의 가능성 무제한의 지혜공덕 자리입니다. 이른바 중생들의 속된 아(俗我), 조그만한 소아(小我) 또는 망령된 망아(妾我) 이런 것이 중생들이 나라하고 고집하는 아()가 되지 않겠습니까마는 아덕은 그런 아가 아니라, 본래면목을 훤히 밝힌 깨달은 자리의 대아(大我)의 덕이란 말입니다. 이것도 나나 너나 하는 상만 떠났을 뿐이라고 간단히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일체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있고 다 할 수가 있는 무한의 능력을 이미 합니다. 신통묘용(神通妙用)을 대자재(大自在)라 하는데 대자재를 갖춘 공덕이 아덕(我德) 입니다.


열반 아덕을 팔덕(八德)이라, 여덟 가지로 덕을 말한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무량신통을 다 갖추어 있는 자리를 여덟 갈래로 풀이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천안통, 천이통 등 모든 신통이 다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몸을 바늘 구멍만한 데에도 자재롭게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삼천대천 세계로 자기 몸을 한없이 키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크고 작고 상대를 떠나버린 세계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런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잘못 생각한 사람들은 신통은 외도(外道)나 하는 것이라고 폄하(販下)를 합니다. 물론 누진통(漏盡通)을 빼놓고 다른 것은 외도도 합니다. 그러나 외도가 한다 하더라도 외도도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5신통을 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렁저렁 하면서 천안통 천이통 그런 신통을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도공부하는 법칙을 보면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하물며 그 보다도 훨씬 더 넘어선 누진통까지 하려면 그야말로 보다 한결 철저해야 되겠지요.


마땅히 아덕(我德) 자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한테 갖추어 있는 자성공덕, 본래면목 공덕이 무한함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프다는 것은 과거 숙세인연도 있고 금생에 섭생을 잘못해서 아픈 것도 있겠습니다만 협소한 자아(自我) 관념 때문에 아픈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 옹졸하면 그마만치 우리 세포 활동도 거기에 따르는 것입니다. 기분 좋을 때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고 기분 안 좋을때 억지로 먹으면 소화가 안되듯이 마음이 아덕(我德), 본래면목 쪽으로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우리 생리도 따라서 좋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없고 네가 없고 내 것도 없고 천지 우주 모두가 다 만공덕을 갖춘 진여불성 뿐이라고 확신을 해버리면 웬만큼 속이 답답한 우울증이나 조울증이나 그런 것은 싹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이나 위대한 선지식 말씀은 한마디 들으면 그냥 마음이 시원스럽게 툭 트이는 것입니다. 우리 자성공덕 자체가 조금도 막힘이 없는 것인데 그 자리에 무슨 생사가 있겠습니까 무슨 병이 있겠습니까. 병도 따지고 보면은 일체가 유심조(唯心造) 아니겠습니까. 금생이 되었든 과거가 되었든 마음 잘못 썼기에 병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병을 빨리 나으려고 생각할 때는 마음 자세가 본래의 자리, 병도 없고 생사도 없고, 남을 미워할 것도 없고 좋아할 것도 없는 자리에다 마음을 둔다면 웬만한 병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귀신같은 것은 절대로 못짚이는 것입니다.


다음에 정덕(淨德)이라, 맑은 덕이라는 말입니다. 일체 구염(垢染)을 해탈하여 청정함이라, 구염은 바로 번뇌입니다. 따라서 일체 번뇌가 없는 자리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영생불멸해서 모든 공덕이 조금도 변치 않고서 그대로 갖추어 있는 상덕(常德)이 있고 위없는 최고의 행복을 완전히 갖추어 있는 락덕(樂德)이 있고 또는 모두를 다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신통묘용을 갖추어 있는 아덕(我德)이 있고 또는 일체 번뇌를 다 떠나 오염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정덕(淨德)이 열반사덕(涅槃四德) 즉 우리 자성의 무량공덕입니다. 이 자리를 확신하여야 합니다. 이 자리를 확신하고 닦아야 용기도 나고 생사대사를 위하여 이 몸뚱이 몇 천 개 바친다 하더라도 아깝지 않다는 대 결단을 내릴수도 있습니다.


5지여래도 내나 열반4덕을 다른 각도로 풀이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5지여래와 열반4덕을 함께 정리하여 봅니다.

 

 

五智如來

五          智

混槃四德

五大

 

1

大日如來

法界體性智

總       德

2

不空如來

平 等 性 智

樂       德

3

彌陀如來

妙 觀 察 智

常       德

4

阿鬧如來

大 團 鏡 智

我       德

5

寶生如來

成 所 作 智

淨       德

 

우리 자성(自性)에 갖추어 있는 총덕(總德)은 대일여래(大日如來), 비로자나불 입니다. 자성의 자비 지혜 광명이 삼천대천 세계를 비추되 조금도 장애없이 무장무애합니다. 곧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자성 광명이기에 부처님은 바로 법계를 몸으로 하는 인격적인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대일여래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로자나불이나 아미타불한테 참배한다하더라도 결국 참 자기한테 귀의하는 것입니다.


다음 불공여래(不空如來)입니다. 대일여래가 끝도 가도 없이 우주를 두루 비춘다고 했지만 그러면 그 가운데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을 것인가? 비지 않고 무량공덕이 충만합니다. 불공여래는 평등성지요 락덕(樂德)입니다. 열반4덕의 락덕은 지나치지 않고서 원만하게 조화를 이룬 락덕입니다만 선정을 닦을 때 기쁨이 넘쳐서, 기쁨이 도리어 지나치면 마장(摩障)이되는 것입니다만 여기 락덕은 청정무구한 순수한 기쁨을 의미합니다. 불공여래는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불공성취 여래라고도 합니다.


그 다음에는 미타여래(彌陀如來)라, 아미타불을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고 생각할 때는 5덕을 다 갖춘 총덕(總德)을 의미합니다만 여기있는 미타여래는 묘관찰지 즉 일미평등한 진여불성 공덕이 무량의 세계를 나투는데, 은하계가 되고 태양계가 되고 또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된다 하더라도 오히려 조금도 진여불성과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중생은 하나의 현상적인 무엇이 되어버리면 그것에 집착해서 그것이 실지로 있다는 실제성으로 느낍니다마는 부처님의 무량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든지 진여불성이 그대로 조금도 변질이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영()이 곧 제로가 몇 천 개 곱하나 보태나 내나 영은 영 아닙니까. 또는 그림자를 몇 천 개 중복시키고 곱하나 보태나 나누나 결국은 그림자는 그림자라는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진여불성은 산이 되고 내()가 되고 나가 되고 네가 되고 무엇이 된다 하더라도 진여불성 자리는 조금도 변동이나 변질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지혜가 미타여래의 묘관찰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른바 동체대비(同體大悲)라, 강도를 보나 누구를 보나 그 죄를 미워하는 것이지 사람자체를 미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주부동(常住不動)한 상덕(常德)이고 또 지수화퐁 사대(四大)로 생각할 때는 화()요, 화는 지혜를 상징합니다.


다음에 아촉여래(阿?如來)의 지혜 공덕은 대원경지입니다. 일체존재의 모두를 다 원융무애하게 조금도 차별이 없이 비추어보는 지혜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묘관찰 지혜는 현상계가 되어도 조금도 변동이 없는 경계를 비추어 본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대원경지는 성상체용(性相體用)을 다 융통무애하게 한번에 비추어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나누어서 이것저것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공덕을 우리 중생들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구분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원래는 모두가 하나의 대일여래 공덕인 것입니다. 그래서 대일여래 공덕은 총덕(總德)인 것이고 나머지 불공여래, 미타여래, 아촉여래 또는 보생여래의 공덕은 별덕(別德)입니다.


그 다음 보생여래(寶生如來)의 지혜공덕은 성소작지라, 사바세계에서 문학이나 예술이나 과학이나 이런 재주를 부리는 문화현상, 문명현상 등 모든 작위(作爲) 행위가 성소작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자기가 아주 훌륭한 시를 지었다고 합시다. '내가 재주가 있고 학문을 많이 공부하고 또 예술성이 풍부하니까 이와 같이 지었다' 하는 것을 불교의 견해로는 사부견(士夫見)이라 하는 망견(妾見)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내가 공부를 많이 해서 내 능력으로 훌륭한 집을 지었고 내 능력이 많아서 에디슨같이 많은 발명을 많이 했다거나, 딴은 에디슨도 만일 우월심을 품고 스스로 자랑했다면 사부견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 치적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면 이것도 사부견입니다. 내나 잘 되고 못되고 이런 것이 따지고 보면 진여불성의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원래 없고 너라는 것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 가지고 내가 특별히 무엇을 만들고 하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본래면목자리를 잘 모르므로 자기가 무슨 책을 내고 글씨를 잘 쓰고 하면 꼭 자기 솜씨가 좋고 기능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사부견이라 합니다. 여기 말씀하는 성소작지는 정덕(淨德)이라, 조금도 오염됨이 없는 일체 무작위(無作爲) 공덕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지수화풍으로 말하면 지()에 해당합니다.


지수화풍 4대와 공()을 물리적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으나 하나의 성품이 형상화 될 수 있는 요소로 본다면 지요 수요 화요 또는 풍이요 공이라는 말입니다. 천지 우주가 이루어지는 것이 성겁(成劫)인데 성겁은 어디서 나을 것인가? 하면 이것은 공겁(空劫)에서 나옵니다. 공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하지만 공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볼수 있는 현상적인 즉 물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진여불성의 성품은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조금도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꽉 차 있는 것입니다. 모양()만 없는 것이지 본질적인 성품은 온전히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그 성품은 무엇인가? 하면은 여기 있는 지요 수요 화요 풍이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수화풍 4대도 능조사대(能造四大) 즉, 물질이 아닌 성품적인 4대는 능조사대라 하는 것이고 가사, 산소나 수소와 같이 원소화된 4대는 소조사대(所造四大)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능조사대는 공겁이 되어서 우주가 텅텅 비어지고 또는 괴겁이 되어서 전부가 파괴된다 하더라도 조금도 부증불감이라, 감되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깊이 느껴 삿된 견해를 갖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소조사대는 파괴가 되고 소멸되고 바꾸어지고 텅텅 비어지고 하는 것입니다. 공()은 지수화풍이 존재해야 할 이른바 장(), 순수한 공간성을 말합니다. 또 우리가 보는 공간은 산소, 질소, 수소 등 물질로 차 있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허공세계는 그런 것이 없는 순수 공간성을 의미합니다.


부처의 공덕, 우리 자성공덕을 열반사덕, 오지여래로 되어있는 법문 체계는 누가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온 것인데, 근래에는 이런 훌륭한 가르침을 별로 찾아내어 역설을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 깨달으면 이것저것 아는 것이므로 안내하는 정도로만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수화풍공 오대(五大)를 하나의 도식으로 만든 것이 이 오지여래 오지총관도(五智總觀圖)입니다. 밀교에서 잡부밀교(雜部密敎)가 아닌 순수밀교는 부처님의 정당한 가르침입니다. 대일경(大日經) 또는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의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또는 분별시비하는 마음으로 느낄 수도 없는 자리를 말씀하신 것이 주로 밀교입니다.


                            五 智 總 觀 圖

                 (又名金剛心印佛心印字輪金輪圖)


                   

 

따라서 밀교에서는 오지여래를 관찰하는 법이 있습니다. 관찰하는 법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만 우선 우리 몸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것이 실감이 나고 빠르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앉아 있다면 아래 부분인 배꼽 밑으로는 지()로 봅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이 생각해 보면 아주 합리적이고 또 심심미묘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수()는 둥그런 복부, 배꼽 위에서 심장까지를 말하고 화()는 심장에서 목까지이고 풍()은 얼굴 전체를 말하고 공()은 지나 수나 화나 풍이나 모두가 공간성이 있어야 존재성을 가질 수가 있으므로 모두를 합한 중심점에다 두는데 우리 머리의 정상으로 봅니다.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중심으로 해서 관찰하는 법은 밀교에서 오륜신관(五輪身觀) 또는 오자엄신관(五字嚴身觀) 이라 합니다. '내 아랫도리는 지()로서 성소작지를 갖추었고 내 복부는 대원경지이기 때문에 아주 원만스러운 지혜를 다 갖추었으며 내 심장은 묘관찰지이기 때문에 모든 관찰하는 지혜를 다 갖추었고 내 목 위에는 풍이기 때문에 평등성지를 다 갖추었으며 공()자리는 머리 꼭대기인 정상으로서 가운데 중심인 동시에 총덕을 온전히 갖추었다' 이렇게 관찰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복잡하니까 참선하는 분들은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서 자기 몸뚱이가 싫어질 때는 내 아랫도리는 정덕(淨德)이고 내 심장은 상덕(常德)이고,  이와 같이 몸을 불성공덕에 비추어 생각하면 그때그때 싫증을 제거할 수가 있는 방편도 되겠습니다. 별덕으로는 자기 몸을 떠나서 지()덕으로 성소작지를 생각하고 수()덕으로 대원경지를 생각하고 이렇게 각기 5지여래에 마음을 두고 생각하는 법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모두가 우리에게 어떻게 번뇌망상을 없앨 것인가? 또는 혼침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하는 선교방편(善巧方便)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일체 공덕이 갖추어 있고 우주에도 조그마한 티끌 가운데도 모두 갖추어 있다고 느껴버리면 사실은 복잡하고 어려운 방편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공덕을 다 모아서 표현한 것이 오지총관도(五智總觀圖)입니다. 네모진 것은 이 지()의 정덕(淨德)이요 둥그런 원은 아덕(我德)이 되고 또 삼각형은 상덕(常德)이며 묘관찰 지혜이고 또한 반원은 이른바 락덕 (樂德)입니다. 그리고 공은 정상의 한점이니까 가운데 점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5지총관도를 그려서 우리가 혼침이나 분별시비 번뇌망상이 많을 때 이를 없애기 위해서 오지총관도(五智總觀圖) 곧 금강심인(金剛心印) 불심인(佛心印) 금륜도(金輪圖)를 공부하는 앞에다 붙여놓고 부처님의 무량공덕이 한량없음을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법문은 어느 개인적인 독단은 조금도 없으며 또한 금타 스님께서 말씀한 법문은 모두가 불경에 있는 말씀을 인용했고 다만, 현대적인 과학 이론이나 현기(懸記) 곧 미래에 대한 통찰 등은 금타 스님의 독창적인 법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