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5장 삼계 해탈] 제5절 삼계해탈 - 2. 사선정(四禪定)

通達無我法者 2007. 4. 20. 21:59

 

 

제5장 삼계해탈(三界解脫)

 

제5절 삼계 해탈(三界解脫)


 

 

2. 사선정(四禪定)



前의 四善根이란 곧 地ㆍ水ㆍ火ㆍ風 四大의 顯界인 色蘊을 打成一하는 境界요

四禪定이란 密界의 그 實色을 證見하는 同時에 受ㆍ想ㆍ行ㆍ識 四蘊의 四禪으로써 常ㆍ樂ㆍ我ㆍ淨 四德의 四定에 轉入하는 境界니 곧 四無色의 境界一相을 觀察함은 四禪이오 그의 思惟로써 一行함은 四定이라


空無邊處를 觀하고 念하야 色界의 金塵相을 見하고 欲界의 虛妄相을 一掃한 涅槃界의 淨德을 證함은 初禪定이오

識無邊唜를 觀하고 念하야 微塵의 阿耨色을 見하는 同時에 水性的 受陰을 걷고 淨心의 我德을 證함은 二禪定이오 無所有處를 觀하고 念하야 色究竟의 極微相을 見하는 同時에 火性的 想陰을 轉하야 一道光明의 常德을 證함은 三禪定이오

非想非非想處를 觀하고 念하야 微微의 隣虛相을 見하는 同時에 風性的 行陰을 轉하야 樂德을 證함은 四禪定일새 四禪定이란 곧 姿姿卽 寂光土임을 見하고 娑婆世界 그대로 極樂世界임을 證함이니라


그리하야 欲界의 惑網을 超脫하고 色界에 生할새 諸功德을 生하는 依地根本이 되는지라 四禪定을 本禪이라고도 稱하니 身에 動ㆍ痒ㆍ輕ㆍ重ㆍ冷ㆍ煖ㆍ澁ㆍ滑의 八觸이 生하고 心에 空ㆍ明ㆍ定ㆍ智ㆍ善心ㆍ柔軟ㆍ喜ㆍ樂ㆍ解脫ㆍ境界相應의 十功德이 生함은 初禪定에 入한 證相이며 初禪부터 鼻ㆍ舌 二識이 無하고 二禪부턴 五識을 모두 離하고 다만 意識만 有하니 或은 眼ㆍ耳ㆍ身 三識의 喜受가 有하야 意識과 相應하고 意識의 樂受가 有하야 三識과 相應하는 바 意識의 喜悅이 鹿大할새 喜受요 樂受가 않이로되 三禪엔 亦是 意識만이 有하야 樂ㆍ捨 二受가 相應하되 怡悅의 相이 至極淨妙할새 樂受며 四禪엔 亦是 意識뿐이오 오직 捨受와 相應할 뿐이니라

그리고 相에 있어 四禪에 각각 三級씩 有하고 性에 있어 四級 乃至 八級을 言하는 바 天이란 密界의 地相으로서 色界 十二天에 無色界의 淨梵地를 加하야 色界라 總稱함도 有하니 곧 禪定의 次序니라


그런데 四大의 實色인 줄 是認할 뿐이오 四大의 虛相을 離한 實相임을 感得못함은 凡夫의 所見일새요 四陰을 四德으로 轉換못함은 外道의 淺見일새 다만 根機에 있을 따름이오 三界에 있지 않음을 了知하는 同時에 四禪定을 外道禪이라 貶하고 近來의 死禪 곧 無誰定이나 妄想定인 邪定의 修行을 能事로 自認하는 啞羊僧을 警戒하노라. 四禪定이란 三乘聖者의 共修하는 根本禪임을 再吟味하기 바라며 滅盡定을 거쳐 究竟成統할지니라.



이 사선정(四禪定)은 앞에서 대강 살펴보았습니다만 바로 근본선(根本禪)으로서 모든 선정의 근본이 되며 증오(證悟)를 위한 필수(必須)적인 선법(禪法)입니다. 금강심론에 한결 구체적으로 되어 있으므로 정확한 인식을 하도록 합시다.


앞의 사선근(四善根)이란 곧 지ㆍ수ㆍ화ㆍ풍 4대(四大)의 현계(顯界) 곧 나타나 있는, 우리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상대 유한적인 세계라는 말입니다. 현계의 반대가 밀계(密界)입니다. 색온(色蘊)을 타성일편(打成一片)하는 경계요 곧, 모두를 하나의 공상(空相)으로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4선근에서 이것이나 저것이나 물질이요 내 몸뚱이요, 이런 것들을 처부셔 공상(空相)으로 통찰하지 못하면은 4선근은 못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공부는 한 말로 말하면 4대 색온이 다 비었다고 달관(達觀)하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까지 포함하여 천지 우주의 모든, 있는 것이 다 비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고, 본래로 비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진해 나가면 차근차근 비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 비어지면 참선이 잘못 되는 것이지요. 원래가 빈 것인데 안 비어질 까닭이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욕심이나 분노심이 점차로 줄어가고 상()이 가셔가겠죠, 상이라는 것은 내나 무엇이 실제로 있다는 것이요, 있다고 집착해서 상이 생기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슨 공부인가? 수ㆍ상ㆍ행ㆍ식(受想行識)인 우리 마음에 오염되어 있는 습기(習氣)를 없애는 것입니다. 불교 수행의 근본은 그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상대 유한적인 것이 모두 다 비어 있다는 것과 내 마음에 스며 있는 오염(汚染)을 차근차근 없애는 작업입니다. 이렇게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불경(佛經)의 근본 요지는 다 그런 뜻입니다. 근본불교에는, ‘네 몸뚱이가 비었다’고 가르치면 소중히 아끼는 자기 몸뚱이 인데 상식 밖의 깊은 뜻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중생이 못 알아들으니까 12년 동안이나 중생 근기에 따라 가르쳐가다가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그대가 바로 비었느니라, 그대 몸뚱이는 지ㆍ수ㆍ화ㆍ풍 4대로 구성되었고 그대 마음은 수ㆍ상ㆍ행ㆍ식으로 잠시 구성되어 있으니 본래로 다 비었느니라’ 하고 일체가 다 비었다는 제법공(諸法空) 도리를 또한 22년 동안이나 말씀했던 것입니다. 공()을 깨닫기가 얼마나 어렵기에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제법공 도리, 반야(般若)의 지혜가 없으면 참선도 못되고 불교도 아닙니다. 염불(念佛)도 제법공 자리에 입각해야지 그렇게 못하면 하나의 방판에 불과합니다. 극락세계가 십만억 국토 저 밖에 가 있다 하면 친지 우주가 다 비었는데 어디 밖이 있고 안이 있습니까? 천지 우주는 이대로 극락세계요, 이대로 광명세계입니다. 극락세계의 별명이 광명세계요, 화장(華藏) 세계입니다. 화장세계는 일체 공덕을 다 갖춘 찬란 무변한 세계라는 말입니다. 행복과 자비와 지혜와 모든 공덕을 다 갖춘 영생불멸의 세계가 연화장(蓮華藏)세계이고 극락이라는 말입니다. 이것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실존(實存)적 세계인데 우리 중생의 업장으로 물질이라는 환상에 얽매여서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물질이 있다고 하는 병 때문에 우리 마음이 오염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염된 마음을 떼어버리면 본래 극락세계인지라 극락세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에 사바세계가 곧 적광토(寂光土)라, 사바세계를 떠나서 저 밖에 극락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발도 떠나지 않고 바로 내 몸 이대로 부처요, 이 세계 그대로 극락세계인데 다만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못 보는 것입니다. 어두워서 못 보는 데에 허물이 있는 것이지, 극락세계와 사바세계, 예토(穢土)와 정토(淨土)가 따로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현대는 이렇게 분명히 깨달아야 할 절박한 시대입니다. 현대 물리학도 여기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앞으로 종교는 과학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다 한결같이 실상(實相)을 근거로 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타성일편(打成一片)이란 말을 거듭 역설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일체 만법을 하나의 원리로 통일한 인생관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본래로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시켜 버려야지, 그러지 못하고 이래저래 막히고 거리끼면 자기 마음도 항시 의단이 풀리지 않고 마음의 흐림을 제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불성(佛性)이요, 불성이 아닌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물질이란 환상이 없어져 버리면 결국은 진여불성(眞如佛性)만 남지 않겠습니까?


사선정(四禪定)이란 밀계(密界)의 그 실색(實色)을 증명해서 보는 동시에 수ㆍ상ㆍ행ㆍ식 4온()의 4선()으로써 상ㆍ락ㆍ아ㆍ정 4덕(四德)의 4정()에 전입(轉入)하는 경계이니 곧 4무색(無色)의 경계일상(境界一相)을 관찰함은 4선()이요, 그의 사유(思惟)로써 일행(一行)함은 4정()입니다.

공무변처(空無邊處)를 관()하고 념()하여 색계의 금진상(金塵相)을 견()하고, 금진상을 견해야 금강지입니다.


관법(觀法)을 관법 외도(外道)라고 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마는 부처님의 모든 수행법도 관법이요 6조 스님까지 한결같이 관법인데 관법이 외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지금 한국 불교의 미숙한 풍토입니다. 참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법집(法執), 불경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주관적으로 아무렇게나 국집하는 그런 법집을 떠나야 합니다. 아함경이나 금강경이나 화엄경이나 다 관법이 아닌 것이 있습니까? 관조(觀照)하는 수행법 속에 모든 수행법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욕계의 허망상을 없애고 열반계의 정덕(淨德)을 증험하는 것이 초선정(初禪定)입니다.


식무변처(識無邊處)를 관하고 념하여 미진(微塵)의 아누색(阿縟色)을 견()하는 동시에 수성(水性)적 수음(受陰) 곧 감수(感受)해서 얻은 번뇌를 걷고 청청한 마음의 아덕(我德)을 증()함은 2선정(二禪定)이요

무소유처(無所有處)를 관하고 념하여 색구경(色究竟)의 극미상(極微相)을 견()하는 동시에 화성(火性)적 상음(想陰)을 전()하여 일도광명(一道光明)의 상덕(常德)을 증()함은 3선정(三禪定)입니다. 사바세계가 오로지 광명뿐인 광명정토, 광명세계로서 그런 광명은 어디에 있고 어디에 없는 것이 아니라 항상 충만해 있으니까 상덕입니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관하고 념하여 미미의 인허상(隣虛相)을 견()하는 동시에 풍성(風性)적 행음(行陰)을 전하여 락()덕을 증함은 4선정(四禪定)일새 4선정이란 곧 사바세계 즉 적광토(寂光土)임을 견()하고 사바세계 그대로 극락세계임을 증험하는 선정입니다.

그리하여 욕계의 혹망(惑網) 곧 욕계의 번뇌의 그물을 초탈하고 색계에 생할새 모든 공덕을 생하는 의지(依地) 근본이 되는지라, 욕계의 욕심 뿌리가 뽑혀 버려야 공덕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통을 하고 싶고 뭣인가 남을 위하여 애쓰고, 알려고 하지만 욕계를 못 떠나면 안됩니다.


사선정(四禪定)을 본선(本禪)이라고도 칭하니 몸에는, 욕계를 떠나갈 때에는 동ㆍ양ㆍ경ㆍ중ㆍ냉ㆍ난ㆍ삽ㆍ활(動痒輕重冷煖澁滑)이라, 몸이 움직이고, 또는 가렵고, 더러는 몸이 가볍거나, 무겁고, 더러는 몸이 차고, 따습고, 더러는 깔깔하고, 또는 윤택이 있고 부드럽고 이러한 팔촉(八觸)이 생기고,

자기 마음에는 텅 다 비어서 공()이라, 맑아서 명()이요 또는 마음이 일심지(一心支)가 되어서 하나로 통일되니까 정()이요, 지혜가 밝아지니까 지()요, 또는 선심(善心)이라, 굉장히 마음이 선량해져서 나와 남이 둘이 아닌데 어떻게 자기 때문에 남을 성가시게 한다거나 듣기 싫은 말을 한다거나 자기만 잘 산다든가 할 수 없는 이른바 동체대비(同體大悲)가 저절로 우러나는 경지입니다. 그리고 유연(柔軟)이라,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강강한 마음이 가시어 누구와도 다투고 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일체가 같은 마음이요 같은 몸이거니 누구와 싸우고 필요 없는 시비를 하겠습니까? 희()라, 기쁘고 락()이라, 즐거움이고 또는 해탈(解脫)이고, 경계상응(境界相應)이라, 경계에 따라 이해가 되고 알맞게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십공덕(十功德)이 생함은 초선정에 들어간 증상이며,


초선부터 비ㆍ설(鼻舌) 2식(二識)이 없어서 냄새를 못 맡고 맛을 모르는 것입니다. 차근차근 오관(五官)을 떠나게 됩니다.

2선부터는 5식(五識)을 모두 떠나서 몸으로 촉감도 못 느끼고 눈으로 보아도 안 보이고 귀로 들어도 안 들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도인이나 4선에 들어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듣고 보고 할 것인가? 이런 때는 차기(借起)라, 하고 싶으면 짐짓 욕계의 이근(耳根)이나 또는 안근(眼根)을 빌려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의식(意識)만 있는 것이니 혹은 안ㆍ이ㆍ신 3식, 눈과 귀와 또는 촉감과 3식의 희수(喜受)가 있어서 의식과 상응하고 혹은 의식의 락수(樂受)가 있어서 3식과 상응하는 바 의식의 기쁨이 거치르니 희수(喜受)요, 락수(樂受)가 아닙니다.

3선에는 역시 의식만 있어서 락수(樂受)와 사수(捨受) 즉, 즐겁게 느끼고 괴롭게 느끼는 등 고락을 못 느끼는 2수()가 상응하되 기쁨이 지극히 맑고 미묘하니 락수(樂受)며, 4선에서는 역시 의식 뿐이요, 오직 사수(捨受)와 상응할 뿐입니다.

그리고 상()에 있어 4선에 각각 3급씩, 초선정에 3, 또 2선에 3, 또는 3선에 3, 4선에 3급이 있습니다. 성()에 있어서 4급 내지 8급을 말하는 바, 천()이란 밀계(密界)의 지상(地相)으로서 이른바 광명세계의 지상으로서 색계 12천에 무색계의 정범지(淨梵地)를 보태서 색계라 총칭하기도 하니 곧 선정(禪定)의 차서(次序)입니다.


우리가 4선천(四禪天)과 4선정(四禪定)도 구분해야겠습니다. 4선천을 선정과 덕을 닦은 과보로써 그 하늘에 태어나 안락한 경계를 수용하는 것이고 4선정은 범부 중생이 선정을 닦아서 번뇌를 녹임에 따라 발현되는 공덕상입니다.

그런데, 사대(四大)의 실색(實色)인 줄 시인할 뿐이요. 4대의 허상을 떠난 실상(實相)임을 감득 못함은 범부 소견이요, 중생은 4대의 실색을 못 보니까 무슨 색이라 하면 중생의 차원에서 이것도 번뇌에 때묻은 색이 아닌가 하지만 묘색(妙色)은 제법이 공()한 자리에 나타나는 우주에 충만한 청정적광(淸淨寂光), 정광(淨光)으로서 한계나 국한이 없습니다.


또는 사음(四陰) 곧 수ㆍ상ㆍ행ㆍ식인 우리 심리에 묻어 있는 오염된 번뇌인 4음을 사덕(四德)인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전환 못함은 외도의 천견(淺見)일새, 외도는 습기를 소멸하지 못하여 나라는 아()를 못 끊는 것입니다. 외도와 정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정도는 아()를 끊는 것이고 외도는 아를 못 끊는 것입니다.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해야 수와 상과 행과 식에 있는 마지막 아()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므로 정도(正道)라 합니다.

다만 근기(根機)에 있을 따름이요 삼계에 있지 않음을 요지(了知)하는 동시에, 삼계란 깨달은 안목에서는 오직 청청무비한 영원한 극락세계입니다. 다만 중생이 잘못 보아서 또는 업장 따라서 오염되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4선정을 외도선(外道禪)이라 폄()하는 분도 있는데 그것은 근본선(根本禪)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래에 흔히 볼 수 있는 사선(死禪) 곧 죽은 선인, 바른 지혜없이 멍청히 닦는 무기정(無記定)이나, 근본 성품을 여의고 분별하고 헤아리며 닦는 망상정(妄想定)인 삿된 사정(邪定)을 닦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두 들고, 염불하고, 주문 외우고, 하더라도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 아님이 없고 천지 우주는 진여불성의 청정미묘한 무량적광으로 충만해 있다고 이렇게 분명히 느끼고 그 자리를 안 여의고 닦아야지 그렇지 않고 분별하고 헤아리면 결국은 망상인 것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는 무슨 상대유한적인 문제를 의심하고 누가 어떻게 말하고, 이런 것은 모두가 망상 아닙니까? 일체가 부처라는 생각 외에 한 생각이라도 달리 일어나면 벌써 다 망()이라는 말입니다. 천지 우주가 청정미묘하고 일미평등한 불성뿐이다 는 생각 외에는 사실은 다 망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조사 어록에 일념불생(一念不生)이라, 한 생각도 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정(邪定)의 수행을 능사로 자인하는 아양승(啞羊僧) 곧 참다운 진리를 모르고서 법을 잘못 설하는 승()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선정이란 삼승성자(三乘聖者)가 공수(共修)하는, 누구나 함께 닦아야 하는 근본선(根本禪)입니다. 4선정을 이른바 근본선이라고 합니다. 근본불교의 요체는 근본선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태국이나 버어마나 스리랑카에서는 출가승의 자세는 좋은데 정작 수행법에 있어서는 근본선을 제대로 닦지 않는 것입니다. 참다운 비파사나(Vipasyana)는 근본선을 닦아야만 합니다. 따라서 비파사나 선을 공부하는 분도 꼭 근본선을 닦아야 부처님 당시의 아함경, 근본불교의 요체를 공부하는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근본선은 소승권이나 대승권이나 누구나 다 닦아야 합니다. 우리가 번뇌로 오염되어 있으니까 빨리 가고 더디 가는 차이뿐인 것이지 꼭 근본선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타 스님도 근본선을 역설하여 재음미하기 바라며 멸진정(滅盡定)을 거쳐 구경성취(究竟成就)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4선정이 구경지(究竟地)는 아닙니다. 외도와 정도가 공수(共修)하기 때문에 외도도 4선정을 닦으나 다만 아()를 못 떼고 머물러 버리고, 정도는 아()를 소멸한다는 견고부동한 대원력(大願力)으로 멸진정(滅盡定)에 진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