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7장 화엄종사상] 2. 법계삼관 - (4) 이사원융의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41

제7장 화엄종사상

   2. 법계삼관

    (4) 이사원융의


화엄의 법계관을 말한 것으로 이사원융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理)와 사(事)는 일체법의 본질과 현상을 나타내는 말인데 이(理)와 사(事)가 원융한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사구융문(理事俱融門)을 비롯하여 이법은현문(理法隱顯門), 사법존민문(事法存泯門), 사사상재문(事事相在門) 등의 열 가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설하는 이사구융문(理事俱融門)은 그 중의 맨 처음인데 이와 사가 원융한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찾아보면 이것 역시 쌍차하고 쌍조하는 중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뜻을 현수스님은 열 가지로 해명하고 있습니다.


첫째의 이(理)와 사(事)가 함께 원융한 문은 사(事)는 허(虛)하고 이(理)는 실(實)하여 서로 포섭하고 전부 거두어들여서 원융하게 열 가지 뜻을 이룬다. 첫째는 연기한 사법(事法)이 허공으로서 자성이 없으므로 전체가 모두 이(理)이다. 둘째는 참 성품의 이법(理法)이 진실하므로 전체가 모두 사임을 장애하지 않는다. 셋째는 앞의 두 뜻이 서로 떨어지지 않으므로 이와 사가 함께 존재한다. 넷째는 두 뜻이 서로 빼앗음에 말미암은 까닭으로 이와 사가 쌍으로 끊어진다. 다섯째는 사가 전체 이이면서 사가 무너지지 않는다. 여섯째는 이가 전체 사이면서 이가 없어지지 않는다. 일곱째는 둘이 함께 존재하면서도 함께 서지 못한다. 여덟째는 함께 없어지면서도 사라지지 않음을 갖춘다. 아홉째는 앞의 여덟 가지가 서로 수순하면서 함께 나타난다. 열째는 모두 각자가 서로 빼앗으면서도 없어지지 아니함이다.

第一理事俱融門은 事虛理實하여 相攝全收하여 融成十義라 一은 緣起事法이 以虛空無性故로 擧體全理也요 二는 眞性理法이 以眞實故로 不碍擧體全事也요 三은 由前二義가 不相離故로 理事俱存이요 四는 由二義相奪故로 理事雙絶也요 五는 事全理而事不壞요 六은 理全事而理不失也요 七은 二俱存而俱不立이요 八은 俱亡而具不泯이요 九는 前八이 相順而俱現이오 十은 皆各相奪而不泯이라. [華嚴發菩提心章;大正藏 45, p. 654下]


이와 사가 원융무애하니 사는 허하고 이는 실하여 서로 포섭하고 거두어들이면서 열 가지 뜻을 이루게 됩니다.


첫째, 사법(事法)이 연기함에 공하여 자성이 없는 까닭에 사 이대로가 이이니, 즉 색(色) 이대로가 공으로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됩니다.

둘째, 참 성품의 이법(理法)이 진실하므로 이 이대로 사임을 장애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일체가 공하다고 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일체의 모든 것이 연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理) 즉 공 이대로가 사(事) 즉 색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앞의 두 가지 뜻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서 서로가 떠나 있지 않기 때문에 이즉사(理卽事) 사즉이(事卽理)로서 이와 사가 같이 있게 됩니다. 이것은 곧 쌍조면에서 하는 말입니다.

넷째, 앞의 두 가지 뜻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서 색이라고 말할 때는 공을 빼앗아 버리고 공이라고 말할 때는 색이 서지 못하는 까닭에 이와 사가 쌍절(雙絶)이 됩니다.

다섯째, 사 이대로가 전체 이이나 사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게 됩니다. 색 이대로가 공인데 색즉시공이면서 공즉시색이므로 공이면서 색은 그대로 남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섯째, 이 이대로가 전체 사이면서 이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으니 이는 공즉시색이면서 색즉시공이므로 공이 그대로 있게 됩니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서로 원융무애하게 되면 이는 이대로 사는 사대로 엄연히 그대로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이와 사든지 색과 공이든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되면 분명히 쌍존(雙存)이 되면서도 또한 함께 서지 못합니다. 두 가지가 완전히 쌍존이 되면 쌍존이 곧 쌍차로서 쌍차는 저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여덟째, 이와 사 즉 공과 색이 다 없어지는 동시에 다 같이 그대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쌍차 이대로가 쌍조라는 것을 말합니다. 일곱째에서 말한 내용을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앞의 네 가지 뜻에서도 일체가 색즉시공 공즉시색하고 색공이 구존하고 색공이 쌍절했다라고 한 것을 여기서 다시 한 번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색이 공이 되었다고 해도 색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공이 색이 되었다고 해도 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같이 있으면서도 같이 없고 같이 없으면서도 같이 있는 이것이 불교의 묘한 이치며 부사의한 경계인 것입니다.

아홉째, 앞에서 설명한 여덟 가지 설명이 서로 한꺼번에 통하여 성립된다는 뜻입니다.

열째, 모두 다 서로 부수어 쌍차를 하면서도 엄연한 이치가 있어 쌍존이 된다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색과 공이 쌍차쌍조하여 원융무애해서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며 이렇게 안 해도 되고 저렇게 안 해도 되며, 건립한다고 파괴되는 것이 아니며 파괴한다고 건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정해도 긍정이 그대로 있으며 아무리 긍정해도 부정이 그대로 있어 긍정이 부정이고 부정이 긍정으로 쌍조가 쌍차이고 쌍차가 쌍조입니다. 원융무애한 원리에 입각해 사사무애 법계연기라든가 삼제원융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이 쌍차쌍조하는 중도의 원리에 두고 있는만큼 불교에서 가장 발달되었다는 화엄십현이라든가 화엄무진연기도 중도를 떠나서는 조금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화엄연기라는 것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중도 연기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법상에 오르면 중도 중도 하면서 중도 법문만 한다고 불평이 있을지 모르나 불교 교리상 가장 발달되었다는 천태나 화엄의 교리도 근본적으로 쌍차쌍조하는 중도의 교리를 제외하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불교교리를 올바로 알려면 중도교리를 알아야 되고 근본적으로 깨치려면 중도를 깨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중도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만 탈선하여 불교가 아니고 외도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증거를 제시하여 자꾸 중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