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7장 화엄종사상] 3. 사문십의 - (2) 십의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43

 

제7장 화엄종사상

 3. 사문십의

  (2) 십의


첫째는 상(相)을 다 떠나므로 인과가 법계와 다르지 아니하니 곧 인과는 인과가 아니다.

一은 由離相故로 因果不異法界하니 卽因果非因果也요. [探玄記;大正藏 35, p. 120下, 經疏, 大正藏 35, p. 522下]


인과(因果)는 용(用)이고 법계(法界)는 체(體)이므로 인과가 법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은 용이대로가 체라는 뜻이 됩니다.


둘째는 자성(自性)을 떠나므로 법계가 인과와 다르지 아니하니 곧 법계는 법계가 아니다.

二는 由離性故로 法界不異因果하니 卽法界非法界也요.


앞에서 상(相)을 가지고 말했지만 지금은 성(性)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법계는 인과를 제외하고 따로 없으므로 법계라는 것을 법계라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앞의 두 가지는 인과와 법계를 쌍차하여 다 막는 견지에서 하는 말로, 인과가 법계이기 때문에 인과를 인과라 할 수 없고 법계가 인과이기 때문에 법계를 또한 법계라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성을 떠났지만 자성이 없어지지 않는 까닭에 법계가 곧 인과니 법계가 아닌 것으로써 법계로 삼는다.

三은 由離性不泯性故로 法界卽因果니 以非法界爲法界也요.


체 이대로가 용이고 용 이대로가 체이기 때문에 체와 용은 표현만 다르지 내용은 똑같습니다. 바로 앞에서는 법계가 아니라 하여 부정을 했지만 여기서는 법계 이대로가 법계라 하여 긍정을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상을 여의었지만 상을 무너뜨리지 않으므로 인과가 곧 법계이니 인과가 아닌 것으로써 인과로 삼는다.

四는 由離相不壞相故로 因果卽法界니 以非因果爲因果也요.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므로 아무리 상을 떠났지만 상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과가 곧 법계이므로 인과가 아닌 것으로써 인과를 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말한 앞의 첫째와 둘째는 차문(遮門)이고, 뒤의 셋째와 넷째는 조문(照門)이 됩니다.


다섯째는 상을 여의는 것이 성을 여의는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인과와 법계가 쌍으로 없어지면서 함께 원융하여 말과 생각을 멀리 초월함이다.

五는 由離相不異離性故로 因果法界가 雙泯俱融하여 逈越言慮也요.


성이 즉 상이고 상이 즉 성이기 때문에 성과 상이 여여(如如)하니 상을 여의었다는 말은 곧 성을 여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상과 성 즉 인과와 법계가 서로 다 없어져 체와 용이 사라지므로 원융하게 됩니다. 인과와 법계가 쌍민(雙泯)하고 구융(俱融)하는 이 자리는 모든 말과 생각이 다 끊어진 상태입니다.앞에서 차(遮)니 조(照)니 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차, 조를 말한 것이고, 여기서는 성, 상(性相)을 합하고 인과와 법계를 합해서 전체를 다 쌍차해 버린다는 뜻입니다.


여섯째는 무너지지 않음[不壞]이 없어지지 않음[不泯]과 다름이 없으므로 인과와 법계가 함께 존재하여 현전하니 분명해서 가히 볼 수 있다.

六은 由不壞不異不泯故로 因果法界가 俱存하여 現前爛然可見也요.


무너지지 않음[不壞]이 없어지지 않음[不泯]과 다름이 없으므로 불괴가 즉 불민이고 불민이 즉 불괴로서 인과와 법계가 함께 존재하여 현전하니 쌍조를 뜻합니다. 체와 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먼저는 체가 즉 용이고 용이 즉 체이기 때문에 체라 해도 안 되고 용이라 해도 안 되어서 쌍차해 버렸고, 이번에는 체가 즉 용이고 용이 즉 체로, 체와 용이 함께 분명히 나타나 있으므로 쌍조하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위의 있음[存]과 소멸[泯]이 다시 다름없는 까닭에 보고 듣는 법을 초월하여도 항상 보고 듣는 것을 통달하고 생각하는 뜻을 끊어도 말과 생각에 장애되지 않는다.

七은 由上存泯이 復不異故로 超視聽之法하여 恒通見聞하고 絶思議之義하여 不碍言念也요.


위라고 하는 것은 다섯째와 여섯째의 쌍차쌍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존(存)은 쌍조고 민(泯)은 쌍차로서 존과 민이 다르지 아니합니다. 이 보고 듣고 하는 언어 문자를 떠난 법이 항상 보고 듣는 것을 통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가사의해서 언어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지만 또한 아무리 생각을 하고 아무리 말을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전체를 부정하는 데 있어 언어 문자를 갖고 표현할 수 없다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쌍조가 즉 쌍차고 쌍차가 즉 쌍조이기 대문에 서로 원융무애해서 말할 수 없다는 이대로가 말할 수 있는 것이 되고, 말할 수 있는 이대로가 말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나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똑같이 서로 융통자재한 것입니다.


여덟째는 법계의 성품이 원융하여 가히 나눌 수 없으므로 곧 법계의 과(果)가 법계를 통섭해서 모두 다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인(因)이 의지하는 바를 따라 또한 과(果) 가운데 있으니 그러므로 부처님 가운데 보살이 있다.

八은 由法界性融하여 不可分故로 卽法界之果가 統攝法界하여 無不皆盡하며 因隨所依하여 亦在果中이니 是故로 佛中에 有菩薩也요.


법계의 성품이 원융하여 체와 용으로 나눌 수 없으니 법계의 인이니 과이니 할 것 없이 법계의 과(果)가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법계를 통섭합니다.

여기서는 과(果) 중에 인(因)이 있어 서로 상즉상입하게 되므로 부처 가운데 보살이 있고 부처 가운데 중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체의 정법(正法)과 사법(邪法)이 완전히 원융무애하여 상즉상입한 소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홉째는 곧 법계의 인이 뜻을 포섭함도 또한 그러하므로 보현(보살) 가운데 부처님이 있느니라.

九는 卽法界之因이 攝義亦爾故로 普賢中에 有佛也요.


여기서는 앞의 말을 뒤집어 법계의 과를 법계의 인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와 마찬가지로 인(因) 중에 과(果)가 있어 서로 상즉상입하기 때문에 보현보살 가운데 부처님이 있고 중생 가운데 부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열째 인, 과의 두 자리가 각각 차별을 따라서 하나하나 법과 하나하나 행과 하나하나 덕과 하나하나 자리가 모두 각각 총체적으로 무진 법문 바다를 포섭함은 실로 법계의 원융함을 갖추어 포섭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이 화엄의 무진종취이다.

十은 因果二位가 各隨差別하여 一一法一一行과 一一德一一位가 皆各總攝無盡諸法門海者는 良由無不該攝法界圓融故也라 是爲華嚴無盡宗趣니라.


여기 와서는 하나의 색과 하나의 향이 중도가 아님이 없다[一色一香 無非中道]라는 말과 같은 소리인데, 진진찰찰이 흙덩이, 금덩이, 부처, 마구니 할 것 없이 전체가 모두 중도로서 쌍차쌍조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쌍차쌍조해서 차와 조가 동시이면서도 차라 해도 안 되고 조라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사사무애인데, 그렇다고 이사무애(理事無碍)와 사사무애(事事無碍)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뜻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 표현하자니 사사무애이지 그 속 내용은 이사무애와 같은 것입니다.

앞에서 아홉 가지를 말했는데 끝까지 가면 이것이 전부 다 통하여 융통자재해서 하나하나가 전체에 다 통하고 전체가 또 하나로 통하여 진진찰찰 무진법계가 안 벌어질래야 안 벌어질 수 없습니다. 마치 인다라망의 구슬이 서로 비쳐서 서로 다함이 없듯이 제망중중의 무진법계연기가 열리는 이것을 화엄의 종취라 하는 것입니다.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앞의 네 부문의 내용도 쌍차쌍조고 다시 이것을 열 가지 뜻으로 분류해 놓은 것도 쌍차쌍조이지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제4문(第四門)으로서 앞의 것을 원융한 즉 네 문이 한 가지 법이다. 그러므로 조에 즉하여[卽照] 차(遮)하고 차에 즉하여 조하며, 쌍조하고 쌍차해서 원만하고 밝게 한 가지로 통하면 이 종취에 계합하느니라.

旣以第四로 融前則四門一揆니 故로 卽照而遮하고 卽遮而照하여 雙照雙遮하여 圓明一貫하면 契斯宗趣矣니라. [經疏, p. 523上]


제4문은 법계인과 함께 융화하고 함께 떠나는 것[雙融俱離]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제4문 속에 앞의 세 가지가 모두 다 포함되어 있으므로 십의라는 것이 네 문 전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네 문 속에 십의가 들어 있는데, 그 원리는 중도원리인 쌍차쌍조라는 것입니다.

결국 현수스님이 화엄종취를 사문십의(四門十義)로써 나누어서 말할 때에도 쌍차쌍조를 갖고 논했고, 청량스님이 그 뜻을 받아서 소(疏)를 낼 때도 역시 쌍차쌍조의 원융도리를 갖고 화엄종취라 했습니다. 그리고 쌍차쌍조라는 중심 내용은 지금까지 해설한 대로 중도(中道)입니다. 표현하는 것은 서로간에 다르다고 해도 화엄이나 천태나 근본이 중도에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천태의 삼제원융이나 화엄의 법계연기나 모두 쌍차쌍조하는 것인 만큼 화엄종과 천태종이 서로 우열을 나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보면 우스운 일입니다. 자기네들끼리는 서로 낫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하나도 서로 나은 것도 없고 또 못한 것도 없습니다. 양쪽의 교리를 설명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고 표현하는 것이 다 묘하지만 우열을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