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7장 화엄종사상] 2. 법계삼관 - (2) 이사무애관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31

 

제7장 화엄종사상

  2. 법계삼관

   (2) 이사무애관



둘째는 이사무애관이다. 이사무애는 소관(所觀)이요, 이것을 마음에서 보는 것은 능관(能觀)이라 한다. 이 관(觀)을 따로 설하면 사(事)를 관하는 것은 속제의 관이요, 이(理)를 관하는 것은 진제의 관이며 이, 사가 무애한 것을 관하는 것은 중도관을 이루는 것이다. 또 사를 관하는 것은 자비를 겸하는 것이고 이를 관하는 것은 지혜이니, 이 둘이 무애하면 곧 자비와 지혜가 서로 인도하여 머무름이 없는 행을 이루며 또한 공과 가의 중도관이니라.

第二理事無碍觀이니 事理無碍는 方是所觀이요 觀之於心을 卽名能觀이라 此觀을 別說하면 觀事는 俗觀이요 觀理는 眞觀이요 觀事理無碍는 成中道觀이니라 又觀事兼悲요 觀理是智니 此二無碍하면 卽悲智相導하야 成無住行하며 亦卽空仮中道觀耳라.


‘이사무애(理事無碍)’는 객체인 소관(所觀)이요, ‘이것을 마음에서 보는 것’은 주체인 능관(能觀)이라 해서 능관과 소관이 달리 있는 것은 아니다. 방편으로 능과 소를 말하자면 이와 사에 장애 없는 것은 소관이 되고 자기 자심은 능관이 된다는 것인데, 이 말은 능, 소가 있는 데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사가 무애함을 관하는 것이 중도관을 이룬다’는 말은 이사무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도 그 자체를 이사무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가 서로 인도하여 머무름이 없는 행[無住行]을 이룬다’는 말에서 비(悲)는 행동면에서 자비를 말하는 것이고, 지(智)는 주체면에서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가 이와 같이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 둘이 아닙니다. ‘머무름이 없는 행’은 모든 상이 끊어진 데서 하는 말이지 자비라든지 지혜라든지 명상을 세울 수 있는 곳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사무애의 내용도 네 가지 뜻이 구비된 쌍차쌍조의 중도로서 진공묘유와 그 내용이 동일합니다. 이(理), 사(事)를 나누어서 체(體), 용(用)으로 보면, 체는 진공(眞空)이라 하고 용은 묘유(妙有)라고 하는데, 체가 즉 용이고 용이 즉 체이기 때문에 중도를 제외하고는 묘유도 성립되지 않고 진공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화엄의 사사무애는 진공절상관과 이사무애관 위에 서 있는만큼 중도를 떠나서는 화엄의 사사무애가 절대로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리적 내용면에서 보면 천태에서는 직접적으로 공, 가, 중으로서 중도를 논의하고 나오는데 화엄에서는 십현(十玄)이니 육상(六相)이니 하여 중도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고 보면 화엄에서 말하는 사사무애 등의 법계는 천태에서 말하는 삼제원융한 중도제일의제 위에 서 있지 중도제일의제를 제외하고 화엄법계관이 따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종교(終敎)와 돈교(頓敎) 면에서 보더라도 화엄의 진공관을 돈교라 하고 무애관을 종교라고 하는데, 이것은 교상(敎相)을 구별하기 위하여 억지로 나누어 놓은 것이지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진공도 중도고 묘유도 중도로 즉 이사무애가 중도인만큼 돈교니 종교니 구별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구별해 놓으면 중생들이 이해하기 쉬울까 싶어 억지로 분류한 것이지 실제의 내용면에서 돈이나 종을 찾는 것은 결코 근본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