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7장 화엄종사상] 6. 화엄십종판 -(1) 십종교판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48

 

제7장 화엄종사상

 6. 화엄십종판


화엄원교(華嚴圓敎), 즉 화엄일승(華嚴一乘)은 그 교리 내용이 현수스님이나 청량스님의 설을 보더라도 쌍차쌍조라는 중도(中道)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화엄종에서는 다른 종(宗)의 교리를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화엄종에서 다른 종의 교리를 비판하는 데 있어 그 비판의 근본 기준을 어디에 두었느냐 하면 바로 중도입니다. 말하자면 중도에 가깝고 멀고에 근거하여 다른 종의 교리의 심천(深淺)을 비판했습니다. 그리하여 현수스님은 이것을 열 가지로 나누어 십종판(十宗判)을 수립하였습니다. 이 십종판은 그 뒤로도 계승되었는데, 청량스님의 설은 현수스님의 설과 일부 명칭 등이 다소 상이하지만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그리고 화엄종이 이제(二諦) 등을 근거로 한 원융중도종임을 해명하는 데 청량스님의 설이 더 적합하므로 여기서는 청량스님의 십종판을 채용하였습니다.


 (1) 십종교판


이제 일대시교를 모두 거두어 열 가지 종으로 한다.

今總收一代時敎하여 以爲十宗하노라. [經疏;大正藏 35, p. 521上]


부처님이 49년 간 설법한 팔만대장경의 설법을 다 모아서 그 내용을 열 가지 종으로 나눈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자아[我]와 법(法)이 다 있다는 종이요.

第一은 我法俱有宗이요.


첫째는 자아[我]와 법(法)이 다 있다는 것으로 이것은 순수한 유견(有見)입니다. 이런 종취를 주장한 사람은 소승의 독자부(讀子部)입니다.


둘째는 법은 있고 자아는 없다는 종이요.

二는 法有我無宗이요.


앞에서는 자아와 법이 전부 있다는 유론(有論)인데, 여기에 와서는 그와는 조금 달리 자아는 실재하지 않으나 법은 실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살바다부(薩婆多部)에서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셋째는 법은 과거와 미래에는 없다는 종이요.

三은 法無去來宗이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 제법은 실유하지만 과거와 미래의 법은 실체가 없다는 것으로, 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과는 얼마간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의 견해입니다. 이 주장은 대중부(大衆部)에 속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모든 법은) 현재에만 존재하고, (현재에서도) 실유와 가유가 있다는 종이다.

四는 現通仮實宗이요.


모든 법은 현재에만 존재한다고 보는데, 그 중에서도 5온(五蘊)에 소속되는 법은 실(實)로 삼고 12처(十二處)와 18계(十八界)에 소속되는 법은 가(仮)로 삼아, 한쪽은 실이지만 한쪽은 가(仮)라는 주장입니다. 앞의 아법구유종과 비슷한 견해로, 과거와 미래의 법은 실유하지 않지만 현재의 제법은 가, 실의 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가부(說仮部)의 주장이라고 합니다.


다섯째는 세속법은 허망한 것이고, 출세간법은 진실하다는 종이다.

五는 俗妄眞實宗이요.


세속은 전부 다 허망한 것이며 출세간(出世間)만이 참으로 진실하다는 견해이니, 이것은 설출세부(說出世部)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모든 법은 단지 이름뿐이라는 종이다.

六은 諸法但名宗이니라.


일체만법을 볼 때, 실체가 없고 다만 이름뿐이라고 주장하는 종이니, 일설부(一說部)의 주장입니다.

지금까지의 주장에서 넷째까지는 순수한 소승이고, 다섯째, 여섯째는 대승과 조금 통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아직 변견(遍見)으로서 대승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곱째는 삼성이 공하거나 유(有)라는 종이니, 말하자면 변계소집성은 공하고,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유이기 때문이다.

七은 三性空有宗이니 謂遍計는 是空이요 依圓은 有故라.


삼성(三性)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인데, 이 종에서는 변계소집성은 공이고,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유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호법(護法)논사의 사상을 계승하는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주장에 따르면, 변계소집성은 제6, 7식에 의한 허망한 분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것은 다만 공한 것이지만, 의타기성은 여환가(如幻仮)로서 환(幻)이면서 아주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 현상 모든 것이 인연으로 일어나지만 환(幻) 그것은 그대로 있으므로 아주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仮)라 합니다. 원성실성은 이공(二空), 즉 아(我)와 법(法)이 완전히 공한 데서 현현하는 진여실성(眞如實性)을 말하는 것이므로 원성실성이라는 것을 진여와 같이 취급합니다.


이와 같이 변계소집성은 망계로서 실성(實性)이 없으므로 공(空)하며, 의타기성은 여환이지만, 실제로 아주 없는 것이 아니므로 가유(仮有)이고 원성실성은 아와 법이 완전히 공하여 진여실성이 현현한 순전한 진여로서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의타기성과 원성실성 두 가지는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중도라고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원융무애한 중도가 못 되어 화엄종의 현수스님 같은 이가 대단히 비판했습니다. 유식종은 그 후, 현수스님의 비판을 받아 그 이론이 조금 위축되고 조절되기는 했지만, 완전한 중도 즉 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전하는 종파로는 취급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덟째는 참으로 공하여 모습을 끊었다는 종이니, 말하자면 마음과 경계의 양쪽이 사라짐에 바로 실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八은 眞空絶相宗이니 謂心境兩亡에 直顯體故라.


아와 법이 전부 공하면 곧 진여가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돈교(頓敎)로 취급받습니다. ‘마음과 경계 양쪽이 사라졌다’ 함은 넓게 보면 쌍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홉째는 공과 유가 장애가 없다는 종이니, 말하자면 서로 원융하여 쌍으로 단절되었으면서 양쪽이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아 진여가 인연을 따라서 항하의 모래 같은 덕을 구비하기 때문이다.

九는 空有無碍宗이니 謂互融雙絶而不碍兩存하여 眞如隨緣하여 具恒沙德故라.


공과 유가 서로 무애하여 공이라 할 수도 없고 유라 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공과 유가 분명히 융통한 것을 말합니다. 앞의 진공절상종(眞空絶相宗)에서는 쌍차만 주장하여 일체가 모두 공인데, 여기서는 공과 유가 함께 끊어졌으면서 양쪽이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으니 그것이 쌍조가 됩니다. 그리하여 진여가 인연을 따르면서도 항하, 즉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덕을 다 구비하는 것입니다. 화엄종에서는 이것을 종교(終敎)라고 취급합니다.


열 번째는 원융하여 덕을 구비한 종이니, 말하자면 사사무애하고 주체와 객체를 구족하여 한없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十은 圓融俱德宗이니 謂事事無碍하고 主伴具足하여 無盡自在故라.


‘원융’이라는 것은 쌍차쌍조하여 원융무애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쌍차하고 쌍조해서 원융무애하여 상즉상입(相卽相入)하면 모든 것이 다 원만히 구비되는데, 이것을 ‘원융하여 덕을 구비하였다’라고 합니다. 또 이것을 사사무애라 하는데, 여기에는 주체[主]와 객체[伴]가 구족되어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참으로 자재무애하게 되는데 이것을 화엄원교(華嚴圓敎)라 합니다. 지금까지 해설한 바에 따르면 화엄종에서 다른 종파를 비판할 때에는 쌍차쌍조인 중도에 입각하여 이 종은 어떻고 저 종은 어떻다고 비판하여 분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쌍차가 즉 쌍조이고 쌍조가 즉 쌍차로 결국 진공절상 이외에 이사무애 없고 이사무애 이외에 진공절상이 없으며, 진공이 무애이고 무애가 진공이라 하면서 여기에 와서는 어째서 진공절상종[雙遮]을 돈교(頓敎)라 하고, 이사무애[雙照]는 종교(終敎)라 했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상 쌍차쌍조하고 원융무애한 중도를 표현하는 데 있어 편의상 분류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진공절상종에서는 쌍차를 많이 주장했지만, 현수, 청량도 진공절상 이대로가 중도라 한 만큼 그 내용에서는 별 차이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쌍차와는 달리 쌍조를 많이 주장한 것을 공유무애종(空有無碍宗)이라 하는데, 이것은 화엄의 쌍차쌍조하고 원융일관하여 사사무애한 도리를 더 높이 평가하기 위한 방편으로 설한 것입니다.


화엄종이라 하는 것은 진공절상의 돈교와 공유무애의 종교를 완전히 융합하여 이 바탕 위에서 원융구덕이 성립된 것이므로 쌍차나 쌍조를 제외하고는 화엄종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분류해 놓은 것은 화엄종에서의 사사무애를 독특하게 표현하기 위한 방편일 뿐으로 진공절상 밖에 공유무애 없고, 공유무애 밖에 원융구덕이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진공절상종에서 자꾸 쌍차를 주장하는 것은, 변견(邊見)으로서 완전한 것이 못 되고, 쌍차쌍조하고 쌍조쌍차하여 원융무진한 이것이 참다운 중도라는 주장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교판(敎判)을 세운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불교에서는 어떠한 교판을 하든지 간에 중도라는 것을 근본 전제조건으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지 중도를 떠나서는 교판을 할 수 없고 교리 조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열 가지 종은 뒤의 것이 앞의 것보다 깊으니, 앞의 네 가지는 소승이요, 다섯째와 여섯째는 소승과 대승에 통하고, 뒤의 네 가지는 오로지 대승이다. 일곱째는 법상종이고, 여덟째는 무상종이며, 뒤의 둘은 법성종이다. 또 일곱째는 시교이고, 여덟째는 돈교이며, 아홉째는 종교이고, 열째는 원교니라.

然이나 此十宗은 後後가 深於前前하니 前四는 有小요 五六은 通小大요 後四는 唯大乘이라 七卽法相宗이요 八卽無相宗이요 後二는 卽法性宗이라. 又七卽始敎요 八卽頓敎요 九卽終敎요 十卽圓敎니라.


앞에서 설명한 열 가지의 각각은 대승과 소승의 어디에 해당하며, 또 여러 대승종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를 구별한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말하면 현수스님이 일체교를 총판(總判)할 때에는 소승교, 대승시교, 돈교, 종교, 원교의 오교(五敎)로서 교판했는데, 현수스님의 오교 교판은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십종을 내용으로 한 것입니다.


또 일곱째는 또한 이제를 갖춘 종이라 이름하니, 말하자면 승의(勝義)가 진실하기 때문에 무(無)가 아니요, 세속의 인과를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유(有)이다.

又第七은 亦名二諦俱有宗이니 謂勝義眞實故로 不無요 世俗因果不失故로 是有라.


일곱째의 법상종은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를 다 갖추고 있어 이제구유종(二諦俱有宗)이라고도 합니다. 또 법상종은 진속(眞俗) 이제에서 법상(法相)을 많이 강조하므로 상종(相宗)이라고도 합니다.


여덟째는 또한 이제가 쌍으로 끊어진 종이라 이름하니, 말하자면 승의는 모습을 여의기 때문에 유(有)가 아니요, 세속은 연기에 의해 생하여 환(幻)과 같기 때문에 무(無)이다.

第八은 亦名二諦雙絶宗이니 謂勝義離相故로 非有요 世俗緣生如幻故로 是無라.


앞의 법상종에서 진제(眞諦)는 진실해서 없지 않은 것이고, 속제(俗諦)는 인과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있다고 하여 진속 이제가 다 있다고 했으나, 여기에서는 그 반대로 승의제인 진제는 모든 상을 여의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속제는 연기에 의하여 생기는데 환(幻)과 같기 때문에 없다고 하여 이제가 다 떨어져 진공절상(眞空絶相)으로서 법상종과 반대의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아홉째는 이제가 장애가 없는 종이니, 유마경과 법화경 등과 같다.

九는 二諦無碍宗이니 如維摩法華等이라.


법상종(法相宗)이든지 무상종(無相宗)이든지 결국 이들의 주장은 편견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이제의 무애는,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이 서로 무애하여 유즉시무(有卽是無)요, 무즉시유(無卽是有)로 유마경과 법화경에서 주장하는 종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열 번째인 원교의 화엄종은, 위의 화엄경소(華嚴經疏)에서 더 이상 따로 설명하지 않았으나, 법상종이나 무상종, 이제무애종 등 여러 대승종의 최후에 성립된 것이므로 가장 수승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의 무애 등을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유(有)나 무(無) 등 어느 한 면에 편중되지 않은 중도적인 종이라는 것은 확실히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