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7장 화엄종사상] 7. 설청전수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49

 

 

제7장 화엄종사상 

 7. 설청전수



현수스님은 대, 소승의 모든 교법(敎法)의 차별이 모두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 하여 심식(心識)에서 비롯하여 나타난 것이라 하면서 본영상대(本影相對)와 함께 설청전수(說聽全收)를 설한 것입니다. 본영상대는 대승교와 소승교의 도리를 본질[本]과 그림자[影]의 관계에서 논의한 것이고, 설청전수는 부처와 중생의 관계에서 논의한 것입니다. 현수스님은 설청전수를 네 가지로 구별해서 해설하였는데, 나중에 징관스님은 이것을 동교(同敎)와 별교(別敎)에 따라서 각각 네 가지로 분류하여 보다 상세하게 해설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현수스님의 학설을 해설한 다음에 징관스님의 학설을 계속 인용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의 근원을 심식(心識)에 두고, 그 도리를 부처와 중생의 관계에서 논의하였지만 그 근본 사상도 또한 중도의 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설함과 들음이 전부 거두는 것에도 또한 네 구가 있다.

說聽全收者도 亦有四句니라. [探玄記, 大正藏 35, p. 118下]


‘설(說)’이라 하는 것은 설법을 한다는 말이고, ‘청(聽)’이라 하는 것은 설법을 듣는다는 말이므로 이것은 바로 설법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설은 능(能)이고 청은 소(所)이며, 능은 체(體)이고 소는 용(用)이므로 설은 바로 체이고, 청은 용입니다. 설과 청이 ‘전체를 거둔다[說聽全收]’ 함은 설과 청, 능과 소, 체와 용이 상즉상입하여 원융무애한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는 부처님의 마음을 떠난 밖에 교화할 중생이 없거니와 하물며 설하는 가르침에서리오. 그러므로 오로지 부처님 마음이 나타난 바이다.

一은 離佛心外에 無所化衆生이어니와 況所說敎리요 是故로 唯是佛心所現이라.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서 설법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설법하는 부처님 따로 있고 교화받는 중생이 따로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님 마음 그대로이지, 부처님의 마음을 떠나서 중생이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체즉용(體卽用)으로서 체(體) 가운데 용(用)이 전부 구비돼 있다는 말입니다. 불심을 체로 잡고, 교화할 중생을 용으로 삼으면 체즉용으로서 중생 다르고 부처님 마음 다르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생 이대로가 부처님 마음이고 부처님 마음 이대로가 중생인데, 하물며 설하신 가르침은 그것을 능과 소로 나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것이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으니, 중생의 마음을 여의고 따로 부처님의 덕(德)이 없기 때문이다.

二는 總在衆生心中하니 以離衆生心하고 無別佛德故니라.


앞에서는 부처님 마음 가운데 모든 것이 다 구비되어 있다는 뜻이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모든 것이 다 중생심 가운데 내재되어 있어 이 중생심을 여의고 부처님 마음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용즉체(用卽體)를 표현한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의 거룩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모두가 오로지 두 마음이니, 앞의 두 가지 설이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중생의 마음 안에 있는 부처님이 부처님 마음 중에 있는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니, 부처님의 마음 중에 있는 중생이 중생 마음 안에 있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이와 같이 전부 거두어서 설법하는 것과 듣는 것이 걸림이 없느니라.

三은 隨一聖敎全唯二心이니 以前二說이 不相離故니라 謂衆生心內佛이 爲佛心中衆生說法하니 佛心中衆生은 聽衆生心佛說法하여 如是全收하여 說聽이 無碍니라.


중생이 즉 부처이고 부처가 즉 중생으로서 부처를 떠나서 중생이 없고 중생을 떠나서 부처가 없습니다.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는 부처님이 부처님 마음 가운데 있는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하니, 부처님 마음 가운데의 중생이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는 것’은, 체(體)와 용(用)이 쌍존(雙存)으로서 중생이 부처고 부처가 중생으로서 전체가 원융무애하게 됩니다. 즉 부처와 중생이 서로 듣고 설법을 하지마는 둘이 아닌 것입니다. 중생이 설하고 부처가 듣는다든지, 부처가 설하고 중생이 듣는다고 하든지 간에 함께 존재하는 것에 장애가 없어 쌍존(雙存)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혹은 저 거룩한 가르침이 모두 두 마음이 아니니, 양쪽이 모두 형상을 빼앗아 같이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이며 쌍으로 (중생과 부처라는) 두 지위를 융화하여 없어지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처님 마음 중에 있는 중생이 설법을 듣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중생 마음 안에 있는 부처님이 설법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 양쪽이 모두 쌍으로 없어져서 두 모습이 다하기 때문이니라.

四는 或彼聖敎俱非二心이니 以兩俱形奪하여 不並現故며 雙融二位하여 無不泯故라 謂佛心衆生이 無聽者故며 衆生心佛이 無說者故니 兩俱雙泯하여 二相이 盡故니라.


앞에서는 부처와 중생을 모두 긍정하여 쌍존을 말했지만, 이번에는 양쪽을 다 부정하여 쌍차를 말하는 것입니다. ‘양쪽이 모두 형상을 빼앗는다는 것’은 중생이 즉 부처이고 부처가 중생이므로, 중생이 부처라고 할 때는 부처가 아니고, 부처가 중생이라 할 때는 또 중생이 아니므로 서로 부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성립하지 못하여 부처도 찾아올 수 없고 중생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마음 가운데의 중생이 부처님이 설하는 것을 들을 수 없고, 중생의 마음 가운데의 부처님이 설할 수 없어 체(體)와 용(用) 양쪽이 다 쌍민해 버려 두 모습이 모두 끊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긍정면에서 볼 때는 완전히 쌍존이 되고 부정면에서 볼 때는 쌍탈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앞에서 중생 즉 부처이고 부처 즉 중생으로 부처와 중생을 엄연히 볼 수 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쌍조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중생이 즉 부처이고 부처가 즉 중생이기 때문에 중생도 볼 수 없고 부처도 볼 수 없다는 것은 부정적으로 쌍차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가 하나의 거룩한 가르침에서 원융무애하여 바야흐로 구경이 되느니라.

是故로 此四가 於一聖敎에 圓融無碍하여 方爲究竟이니라.


전체가 쌍차쌍조하고 쌍조쌍차해서 차조(遮照)가 동시에 되어 원융무애하여야 실제로 일승원교(一乘圓敎)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승사구(大乘四句)나 지금 설명한 설청사구(說聽四句)는 그 표현방법은 달라도 내용은 모두 같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4구가 원융무애하여야 구경(究竟)이 되어 참다운 중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이제부터 인용하는 것은 징관스님의 화엄경소(華嚴經疏)에 있는 해석으로, 여기서는 앞에서 해설한 설청 사구를 더 세밀하게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엄종의 종취를 특별히 더 우대하여 일승교(一乘敎)를 일승동교(一乘同敎)와 일승별교(一乘別敎)로 나누고 화엄종의 종취인 중중무진연기는 일승별교로 취급합니다.


설청전수 가운데 두 가지의 4구가 성립하니 하나는 동교에 의하고 또 하나는 별교에 의하느니라.

說聽全收中에 成二四句하니 一約同敎요 …… 二約別敎니라. [經疏;大正藏 35, p. 519下]


동교와 별교를 달리 말하는 것은 상즉과 상입의 분리에 입각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상즉이 즉 상입이고 상입이 즉 상즉인데, 은밀히 보면 상즉보다도 상입 이것이 더 묘하다고 화엄종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분석을 엄격하고 미세하게 하여 그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동교에 대하여 네 구를 이루니, 첫째는 부처님의 진심 밖에 달리 중생이 없는 것이요, 둘째는 중생의 마음 밖에 다시 다른 부처님이 없는 것이요, 셋째는 부처님의 진심이 나타날 때에 중생의 진심이 나타나는 것을 장애하지 않으므로 설하는 자와 듣는 자가 쌍으로 존재하여 두 가르침이 가지런히 서는 것이요, 넷째는 부처님이 곧 중생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아니요, 중생이 곧 부처님이기 때문에 중생이 아니니 서로 빼앗아 쌍으로 없어져서 곧 설함과 듣는 것이 적적하니라.

約同敎하여 以成四句하니 謂一은 佛眞心外에 無別衆生이요 二는 衆生心外에 更無別佛이요 三은 佛眞心現時에 不碍衆生眞心現故로 說聽이 雙存하여 二敎齊立이요 四는 佛卽衆生故로 非佛이요 衆生卽佛故로 非衆生이니 互奪雙亡하여 則說聽이 斯寂하니라.


동교(同敎)에 대하여 네 구를 이루는데, 첫째는 부처님의 마음 밖에 달리 중생이 없어 부처 이대로가 중생이 되고, 둘째는 중생의 마음 밖에 달리 부처가 없어 중생이 곧 부처이고, 셋째는 부처의 진심이 나타날 때 중생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설함과 들음이 서로 쌍존해서 두 가르침이 같이 성립함으로써 중생이 즉 부처이고 부처가 즉 중생으로서 부처와 중생이 완전히 쌍존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므로 서로 빼앗아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어 설함과 들음을 찾아볼 수 없으니 이것은 쌍차를 말합니다. 위의 동교 네 구는 이사무애한 상즉면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별교에 대하여 네 구를 밝히니 말하자면 모습을 허물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중생과 부처님이 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중생이 전부 부처님 가운데 있음이요, 둘째는 부처님이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음이요, 셋째는 앞의 중생과 부처님이 서로 존재할 때에 각각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하여 즉 인과 과가 서로 통하여 하나의 거룩한 가르침을 좇아 전부 두 마음 가운데 있음이요, 넷째는 중생이 전부 부처님 가운데 있은즉 부처님과 같아 중생이 아니요, 부처님이 전부 중생 가운데 있은즉 중생과 같아 부처님이 아니므로 두 형상이 서로 빼앗고 두 지위가 가지런히 융통해서 하나의 거룩한 가르침을 따르니 모두 두 마음이 아니다.

約別敎하여 以明四句하니 謂由不壞相하여 生佛이 互在故니라.

一은 衆生이 全在佛中이요 …… 二는 佛在衆生心中이요 …… 三은 由前生佛이 互相在時에 各實非虛則因果交徹하여 隨一聖敎全在二心이요 …… 四는 由生이 全在佛則同佛非生이요 佛이 全在生則同生非佛이니 兩形이 相奪하고 二位齊融하여 卽隨一聖敎하여 俱非二心이니라.


별교(別敎)에 대하여 네 구를 이루는데, 첫째는 중생이 전부 부처 가운데 있어 중생이 사라지고, 둘째는 부처가 중생 가운데 있어 부처가 사라지며, 셋째는 중생과 부처가 모두 진실해서 각각 완연히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으니 이것은 쌍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부처 가운데 중생이 있어 중생이 부처와 같아 중생을 찾아볼 수 없고, 중생 가운데 부처가 있어 부처가 중생과 같아 부처를 찾을 수 없으니 이것은 곧 부처와 중생을 모두 가리는 쌍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별교 네 구는 사사무애한 상입면에서 논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가 하나의 거룩한 가르침에서 원융무애하여 바야흐로 구경이 된다.

是故로 此四가 於一聖敎에 圓融無碍하여 方爲究竟이니라.


한마디로 말하자면 위의 네 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에라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쌍조이든 쌍차이든 서로 동시가 되어 쌍조가 즉 쌍차이고 쌍차가 즉 쌍조가 되어 서로 원융무애하여야 구경법(究竟法)이지, 만약 쌍조를 주장하고 쌍차를 버리든가, 쌍차를 주장하고 쌍조를 버리면 이는 곧 편견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도 사실은 원융무애한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지 실제로 알고 보면 쌍차 속에 쌍조가 들어 있고, 쌍조 속에 쌍차가 들어 있어 원융무애한 도리에는 티끌만큼의 손색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