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 (1) 견성성불 ~(2) 무념무심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58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1) 견성성불


불교에서는 ‘마음을 깨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깨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는 선종에서는 이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합니다. 곧 자성을 보아[見性] 부처를 이룬다[成佛]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견성이라는 것은 중생의 자성, 즉 불성(佛性)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견성을 한 후 성불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선종에서 말하는 견성성불이 아닙니다. 그리고 열반경에서는 중도(中道)를 불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견성한다는 것은 중도를 바로 본다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나는 중도(中道)를 정등각했다’는 그 말씀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성불하려고 하면 자성을 바로 보아야 되는데 자성이란 곧 중도이므로 중도를 바로 깨쳐야 견성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서 자성을 보아 스스로 부처님 도를 이룬다.

識心見性하야 自成佛道이니라. [六祖壇經]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면 견성을 종취로 하여 법을 설했습니다. 그 중심사상은 마음을 알아서 성품을 본다[識心見性]는 것인데 마음을 안다는 것이 견성한다는 것이고 견성한다는 것은 마음을 안다는 것이니 마음 다르게 성품이 없고 성품 다르게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진여심(眞如心)을 말하고 성품이란 불성(佛性)을 말합니다. 또 진여심이란 유, 무를 여읜 중도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안다든지 성품을 본다든지 하는 것은 바로 유, 무를 여읜 중도를 아는 것이며 중도를 본 사람이 부처님 도를 성취한 사람입니다.


즉시에 확철대오하여 돌이켜 본래 마음을 얻는다.

卽時豁然하야 還得本心이니라. [六祖壇經]


누구나 공부를 한다거나 법문을 듣는다든가 무슨 기연을 만나 어떤 기회에 즉시로 크게 깨친다는 것은 자기의 본래 마음을 본다는 것이지 딴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다 같이 가지고 있는 본래 마음, 즉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本有佛性]을 얻는 것이지 깨쳤다고 해서 딴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에게 있는 물건을 도로 찾았을 뿐입니다. 육조스님도 “내가 5조 홍인화상 밑에서 한번 듣고 말끝에 크게 깨쳐서 진여본성을 찰나간에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진여본성을 찰나간에 보았다고 하였는데 찰나간[頓]이란 시간 간격을 두지 않는 눈 깜짝할 사이를 말합니다.

그리고 견성하여 대지혜의 진여대용이 현전되는 것을 반야삼매에 든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요,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바로 반야삼매이고 무념이다. 무념법을 깨치면 만법을 두루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사람은 모든 부처님 경계를 보고, 무념법을 깨친 사람은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若識本心하면 卽本解脫이요 若得解脫하면 卽是般若三昧이고 卽是無念어니라 悟無念法하면 萬法을 盡通이요 悟無念法者는 見諸佛境界요 悟無念法者는 至佛地位니라. [六祖壇經]


여기서 말하는 무념(無念)은 제8 아뢰야의 망념까지도 다 떨어진 구경의 진여무념입니다. 따라서 견성이란 해탈이라고도 하고 반야삼매라고도 하고 무념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바로 성불(成佛)을 말하는 것입니다. 견성을 하면 부처님 경계를 볼 수 있는 것이고 부처님 지위에 이른 것이니 결국은 성불이 견성이고 견성이 성불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견성하면 이것이 바로 성불인 것입니다. 견성을 해서 그 다음에 성불을 한다는 그런 견해를 가지고 불교라고 주장한다든가 선종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불교를 팔아먹는 대도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한국 불교계에 이러한 견해가 많이 유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니 시정되어야 합니다.


성문은 부처님 마음을 알지 못하니 공정(空定)에 머물러 있다. 모든 보살은 공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서 불성을 보지 못한다. 상근기의 중생은 지위를 거치지 않고 찰나간에 본성을 깨친다.

聲聞은 不知聖心이니 住於空定이요 諸菩薩은 沈空滯寂하야 不見佛性이요 上根衆生은 不歷地位하고 頓悟本性이니라. [馬祖語錄]


견성이 성불임을 강조하는 마조스님의 말씀입니다. 성문, 연각이나 보살들이 공(空)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 있으니[沈空滯寂], 즉 제8 아라야 무기식(無記識)에 머물러 있으니 이것은 견성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직 상근(上根)중생이 삼현, 십지를 뛰어넘어 자기 본성을 보게 되니 이것이 성불입니다. 침공체적(沈空滯寂)이란 멸진정(滅盡定)인 제8 아뢰야의 지위를 말합니다. 흔히 성문승의 멸진정과 자재위보살 이상의 멸진정을 분리해서 보기도 하지만 능가경 같은 데에서는 8지보살 이상이 깨친 멸진정과 성문, 연각이 깨친 멸진정이 제8 아뢰야위라고 똑같이 보고 있습니다. 결국 양편이 다 침공체적이라는 큰 병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십지보살이 구름이 일고 비가 쏟아지듯 설법을 하여도 오히려 부처님에게 꾸중을 들으니 자성을 보는 것은 비단으로 가린 것과 같다.

十地聖人이 說法은 如雲如雨하야도 猶被佛呵호대 見性은 如隔羅縠이니라. [雲門, 無業, 傳燈錄 19]


아무리 얇은 비단이라도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보면 정확히 앞을 보지 못합니다. 얇은 비단으로 보면 어렴풋이 무엇이 비치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하는데 어름하게는 비칠지 모르지만 정확히 물건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십지보살이 견성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종문정전의 통칙입니다. 구경각, 즉 여래지만이 견성을 성취한 것입니다.


보살이 십지에 올랐다 하여도 불성을 밝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하물며 성문, 연각이리오. 있는 바 불성은 이렇게 깊고 깊어 알아보기 어려우나 오직 부처님만은 알 수 있느니라.

菩薩이 位階十地하야도 尙不明了知見佛性이어니 何況聲聞緣覺이리요 …… 所有佛性은 如是甚深 難得知見하야 唯佛能知니라. [涅槃經 8]


구경각을 성취해야 불성을 볼 수 있는 것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불성을 볼 수 없습니다. 십지보살도 견성이 아닙니다.


보살지가 다하고 방편이 원만구족하여 일념에 상응하여 망심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쳐 마음에 처음 모양이 없으면 미세망념을 멀리 벗어난 까닭에 마음의 성품을 보아서 마음이 상주하니 구경각이라 합니다.

如菩薩地盡하야 滿足方便하야 一念相應하야 覺心初起하야 心無初相하면 以遠離微細念故로 得見心性하야 心卽常住하나니 名究竟覺이니라. [大乘起信論]


십지보살이 수도(修道)의 방편을 원만구족하여 제8 아뢰야 미세망념까지 완전히 벗어난 구경각을 성취하면 이것이 견성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견성이란 구경각으로서 제8 아뢰야 미세망념까지도 떠나며 또 십지, 등각보살도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명업상의 동념(動念)이 망념 가운데에서 가장 미세하므로 미세념이라 한다. 이 미세망념이 모두 없어져서 영원히 남은 자취가 없으므로 멀리 떠난다고 한다. 이 미세망념을 영영 떠난 때에는 정확히 부처님 지위에 머무르게 된다.

業相動念이 念中最微細할새 名微細念이니 此相이 都盡하야 永無所餘故로 言遠離요 遠離之時엔 正在佛地니라. [元曉, 賢首, 起信論疏]


무명업상이 영원히 다하여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서 다시 일어나는 움직임이 없는 까닭으로 마음의 성품을 본다고 한다. 마음이 항상 머물러서 다시 나아갈 바가 없으므로 구경각이라 한다.

無明이 永盡하야 歸一心源하야 更無起動故로 言得見心性이니 心卽常住하야 更無所進일새 名究竟覺이니라. [元曉, 賢首, 起信論疏]


구경각을 성취하고 난 뒤에는 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십지, 등각은 아직도 구경각이 아니기 때문에 묘각을 성취해야 되지만 견성이란 구경각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견성이 구경각이고 구경각이 성불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선이나 교나 할 것 없이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그 예를 살펴보면 열반경에서는 십지보살은 견성을 하지 못했고 오직 부처님만이 견성하였다고 했고, 기신론에서도 구경각을 견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의 현수대사나 우리나라의 원효대사 같은 대논사들도 구경각이 견성이고 견성이 성불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선, 교를 망라한 불교의 정통사상은 견성이 곧 성불이고 성불이 곧 견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견성을 했다는 것은 진여본성을 깨쳤다는 말인데 진여본성이란 어떤 것인가? 진여본성이란 억지로 말하려고 하니까 진여(眞如)라 하는 것이지 말로써 세울 수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 증(證)해서 깨쳐야만 알지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진여, 법계, 심지(心地)라고 말하기는 하나 이는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지 이름이 있다고 무슨 물건이 있는 듯이 알면 큰 오해가 됩니다. 말로는 진여라고 하지만 뜻은 오직 깨쳐야 알지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형용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그런 심오한 원리입니다. 마음의 성품인 근본자성은 항상 움직이지 아니하는 까닭에 불변(不變)이라 하고, 진여에 도달하지 못하면 마음이 상응하지 못합니다. 홀연히 생각이 일어남을 무명이라 하고 미세한 망념을 떠남을 들어간다고 하니 미세한 망념을 떠난 경계는 오직 깨달음으로써 상응한다고 합니다. 미세망념인 무명업상의 처음 일어나는 모양을 알았다고 말함은 곧 무념입니다. 그러나 망념의 구름이 덮여 있으면 진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열심히 수행하여 망념이 다 끊어지고 또 끊어졌다는 생각까지도 끊어져서 제8 아뢰야 미세망념까지 다 끊어지면 무명업상이 처음 일어나는 모양을 알게 되니 이것이 진여를 깨친 것이며 무념을 성취한 것입니다.


무념(無念)을 성취한 사람은 심상(心相)의 생, 주, 이, 멸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 주, 이, 멸이란 생멸(生滅)의 생, 주, 이, 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도(中道)의 생, 주, 이, 멸인 진여의 큰 작용[眞如大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 주, 이, 멸 이대로가 무념이어서 일체가 공한 가운데에서 항사(恒沙)의 묘용(妙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멸의 생, 주, 이, 멸을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불의 지위를 과지(果地) 또는 과상(果上)이라고 하는 데 대하여 부처님 도를 수행하는 지위를 인지(因地)라고 합니다. 십지, 등각까지도 인지(因地)라고 하며 부처님 지위만이 과지(果地)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마음을 깨치실 때에 제8 아뢰야가 생기기 전 최초의 동상(動相)이 본래 깨끗함을 아시니 이런 까닭으로 무념(無念)이라 말한다.

如來覺心之時에 知初動相이 卽本來淨故이니 是故로 說言卽謂無念也니라. [元曉, 賢首, 起信論疏]


결국 자성을 깨친다고 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제8 아뢰야 무기무념도 아닌 진여무념을 깨친 것이 견성이고 성불입니다. 진여무념을 깨치기 전에는 견성이라 할 수 없고 성불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생멸심, 기멸심, 망상이 그대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견성, 성불했다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불법에서 공인된 견성과 성불은 제8 아뢰야 무기무념까지도 뽑아 버린, 근본 미세념까지도 뽑아 버린 무념이라야 견성이고 성불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혜능스님이 말끝에 일체만법이 자성을 떠나지 아니함을 크게 깨치고 5조 홍인대사에게 아뢰었다.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한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한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는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일체만법을 능히 내는 줄 알겠습니까.”

홍인대사는 혜능스님이 본성을 깨친 것을 아시고 혜능스님에게 말씀하셨다. “본 마음을 알지 못하면 도를 배워도 이익이 없으며 본 마음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보면 이를 조어장부, 천인사, 부처라 한다.” 삼경에 법을 받으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하였다.

惠能이 言下에 大悟一切萬法이 不離自性하고 遂啓祖言호대 何期自性이 本自淸淨이며 何期自性이 本不生滅이며 何期自性이 本自具足이며 何期自性이 本無動搖며 何期自性이 能生萬法이리요 祖知悟本性하고 謂惠能曰不識本心하면 學道無益이요 若識本心見自本性하면 卽名丈夫天人師佛이라 하고 三更에 受法하니 人盡不知니라. [六祖壇經]


육조스님이 홍인대사의 말끝에 일체만법이 자성 속에서 건립(建立)되어 있어 일체만법 이대로가 자성이고 자성 이대로가 일체만법임을 확철히 깨치고 감탄하였던 것입니다. 자성을 깨치기 전에는 자성이 본래 청정(淸淨)한 것을 몰랐는데 자성을 깨치고 나니 자성이 청정하더라는 놀라움과 감탄을 표현한 것입니다. 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허공도 삼십방을 맞아야 하는 청정’이라는 것입니다. 허공이란 본래 깨끗해서 무슨 때가 있을까마는 이 깨끗한 허공도 삼십방을 맞아야 한다는 것은 청정한 허공이라고 할지라도 청정이라는 상이 붙어 있을 것 같으면 진정한 청정이 아니므로 허공도 삼십방을 맞는 구경청정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를 자성이라 하는 것이며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견성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객진번뇌 번뇌망상이 왔다 갔다 하는 이런 경지를 어떻게 자성청정이니 견성이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체 망념이 다 떨어지면 자성청정이 안 될 수 없으며 자성청정은 곧 무념인 것입니다. 청정한 자성을 깨치고 보면 자성이 본래 생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멸이 없다고 하니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것인가 하겠지만 텅 빈 것이 아니라 일체만법이 원만, 구족해 있다는 것입니다. 자성이 청정하고 생멸이 없다고 하니까 공한 것만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공한 가운데 무진묘용, 항사묘용이 원만히 구족했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업견(業見)으로 볼 때는 일체만법이 동요를 하고 있으나 자성을 깨친 정견(正見)으로 보면 진여대용이어서 일체만법이 구족해 있지만 추호의 동요도 없습니다. 참으로 자성이란 청정하고 생멸이 없고 일체가 구족하고 본래 동요가 없으며 일체만법이 건립되어 있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 진여자성을 바로 깨친 것이지 조금이라도 치우치게 되면 자성을 깨치지 못한 동시에 변견에 떨어진 외도입니다. 자성을 깨치면 이 사람이 곧 조어장부이며 천인사이며 부처이며 세존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견성이란 성불, 즉 구경각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지 십지, 등각, 삼현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종문하(祖宗門下)에서나 교가에서나 어느 대법사, 대논사들도 구경각의 성취를 견성이라고 했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구경각 아닌 것을 견성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외도입니다.


왜 내가 이렇게 강력하게 주장하느냐 하면 선종에 있어서든지 교가에 있어서든지 불교의 근본 목표는 성불에 있는데 그 성불은 어디에 성립하느냐 하면 견성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대개 견성이라는 내용을 잘 모르고 공부하다가 이 생각 저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 같으면 견성했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폐단은 지금 이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견성의 내용과 성불의 내용을 잘 모르는 데서 생기는 폐단입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든지 교학을 연구하든지 견성의 내용과 성불의 내용을 분명히 알고 정진해야 한다는 뜻에서 되풀이하여 강조한 것입니다.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2) 무념무심



견성을 또한 무념, 무심이라 하니 여기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나의 이 법문은 무념으로 으뜸을 삼는다.

만약 유념이 없으면 무념도 또한 서지 못합니다.

我此法門은 無念으로 爲宗하니라.

若無有念하면 無念도 亦不立이니라. [六祖壇經]


이 무념이란 제8 아뢰야 무기무념이 아니고 진여본성의 무념이니, 제8 아뢰야 무기무념으로써는 진여대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유념이 없다는 것은 일체 망념이 다 떨어져서 제8 아뢰야 무기무념까지도 끊어짐을 말합니다. 십지, 등각의 대보살이 견성을 하지 못한 것은 마조스님 말씀과 같이 침공체적해 있기 때문입니다. 침공체적이란 내용으로 봐서는 무념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제6 의식의 생멸무념이 완전히 떨어졌다 해도 제8 아뢰야 무기무념이 남아 있으며, 제8 아뢰야 무기무념이 완전히 떨어진 데서만 진여무념 근본무념이 성립됩니다.

진여무심은 무주심(無住心), 즉 머무를 수 없는 마음이어서, 여기는 부처도 머무를 수 없고 조사도 머무를 수 없고 진여무념이라고 이름할 수도 없으되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 보고 차고 더운 것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직 증(證)해야 알지 증(證)하기 전에는 모릅니다. 무념을 으뜸[宗]으로 삼는다 하니 말뚝같이 무엇을 세워 놓고 으뜸[宗]을 삼는다고 오해하기 쉬워서 그래서 무념도 세울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무(無)라 함은 무엇이 없음이며 념(念)이라 함은 무엇을 생각함인가? 무라 함은 상대의 두 가지 상[二相]이 없으며, 모든 진로(塵勞)의 망심이 없는 것이다. 념이라 함은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진여는 곧 무념의 본체요, 생각[念]은 진여의 작용이다.

無者는 無何事며 念者는 念何物고 無者는 無二相이며 無諸塵勞之心이요 念者는 念眞如本性이니 眞如는 卽是無念之體요 念은 卽是眞如之用이니라. [六祖壇經]


무(無)라는 것은 차(遮:가리는 것)를, 념(念)이라는 것은 조(照:비치는 것)를 말합니다. 두 가지 상[二相]이 없다는 것은 양변을 떠난 중도를 뜻합니다. 무란 쌍차를 말하며, 양변을 떠나며 모든 진로의 망심이 없는 것이 진여입니다. 념이란 그 진여의 작용을 말하니 쌍조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심(無心)을 ‘마음이 없다’, 또 무념(無念)을 ‘생각이 없다’고 해석하였는데 ‘없다’고만 하면 그것은 단견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없는[無] 마음이요, 없는[無] 생각입니다. 일체 진로가 없고 두 가지 상이 없는 생각[念]이니 이 념은 진여의 작용이 됩니다. 즉 무념이라는 것은 양변이 떨어진 진여의 념이니, 이것이 실지로 쌍차쌍조한 중도정각입니다. 그러니 무념이 즉 중도이고 중도가 즉 무념이며, 진여가 즉 무념이며 무념이 즉 진여입니다. 다시 강조하면 무란 생멸의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쌍차가 되고 념이란 쌍조가 되어 항사묘용인 진여대용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법을 깨친 자는 즉시 무념이니 기억도 없고 집착도 없다.

悟此法者는 卽是無念이니 無憶無著이니라. [六祖壇經]


선종에서 표방하는 것은 견성성불인데 그 견성성불의 근본이 어디 있느냐 하면 무념을 성취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이 무념을 으뜸[宗]으로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념이라고 하여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단멸공(斷滅空)이 아니고 모든 두 가지 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진여의 항사묘용이 거기서 일어나는 무념이라는 것입니다.


용시비구가 중한 계를 범하였으나 무생을 깨쳐서 벌써 성불하여 지금까지 있느니라.

勇施犯重하나 悟無生하야 早時成佛하야 于今在니라. [證道歌]


무생(無生)이 성불이고 성불이 무생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무생(無生)과 무념(無念)이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같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것입니다.


자기의 본성을 깨치면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서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 해가 나올 때에 어둠과 합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지혜의 해가 뜨면 번뇌의 어두움과는 같이하지 아니하므로 마음과 경계를 함께 요달하여 망상이 나지 아니한다. 망상이 나지 아니하니 곧 무생법인이다. 본래 있는 것이 지금 있으니 수도와 좌선을 빌리지 않으니 닦지도 않고 좌선하지도 않는 것이 즉시 여래의 청정선이다.

悟自家本性하면 一悟永悟하야 不復更迷하나니 如日出時에 不合於冥이라 智慧日出하면 不與煩惱暗으로 俱니 了心及境界하야 妄想이 不生이니라 妄想不生이 卽是無生法忍이니 本有今有하야 不仮修道坐禪이니 不修不坐가 卽是如來淸淨禪이니라. [馬祖語錄]


마조스님이 자성을 깨쳤다 함은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친 것이어서 다시 미혹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구경각을 성취한 것을 의미하며 참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는 것입니다. 무생법인을 성취하면 수도하고 좌선할 필요가 없이 언제든지 자유자재하게 활동할 뿐입니다.

무엇을 닦는다 하여, 닦을 것이 있는 사람이면 아직 병이 덜 나은 사람이니, 마조스님이 자성을 깨쳤다 하는 것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이 필요 없는 데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라 하며 부처님과 조사가 전해 내려온 조사선(祖師禪)이라 합니다. 그래서 육조스님뿐 아니라 그 이후 고불고조(古佛古祖)가 전해 내려온 선이라 하든지 도라 하든지 법이라 하든지, 완전히 구경을 성취해서 다시 닦을 것이 없는 데서 ‘자성을 깨쳤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 닦을 것이 있는 데서, 약을 아직 써야 하는 병이 있는 데서 ‘자성을 깨쳤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절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무생(無生)을 깨치는 것을 묘각이라고 한다. 한 생각에 단박 초월하는 것이니 어찌 번거로운 논의가 있으리오.

悟無生을 名爲妙覺이니 一念頓超어니 豈在繁論이리오. [馬祖語錄]


무생(無生)이라는 것은 구경각을 말합니다. 한 생각 잠깐 사이에 삼현, 십지를 초월해서 구경각을 성취한 것이니만큼 이런저런 이론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쓸 것이 없으면 성불한다.

無心可用하면 卽得成佛이니라. [馬祖語錄]


모든 집착과 머무름을 완전히 떠나 순수한 무심이 되어서 마음을 쓸 것이 없음을 성불이라 합니다.


무심이 부처이니라.

無心이 是佛이니라. [馬祖語錄]


마음이 즉 부처며, 무심이 즉 도이니, 마음이 일어나거나 생각에 움직임이 없어, 유무(有無), 장단(長短), 피아(彼我), 능소(能所) 등의 마음이 없으면 마음이 본래 부처요 부처가 본래 마음이니라.

卽心是佛이요 無心是道니 但無生心動念하야 有無長短彼我能所等心하면 心本是佛이요 佛本是心이니라. [宛陵錄]


유, 무, 능, 소 등 양변을 다 여의면 순전한 무심이 되며 이것을 중도니, 부처니, 견성이니 합니다.


다만 바로 여기에서 무심하면 [진여자성의] 본체가 스스로 나타나서 마치 큰 해가 허공에 떠오르는 것과 같아서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다시 장애가 없느니라.

但直下無心하면 本體自現하야 如大日輪이 昇於虛空하야 徧照十方하야 更無障碍니라. [傳心法要]


무심이라는 것은 일체 마음이 없는 것이다. 여여(如如)의 체(體)가 안으로는 목석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과 같아서 막힘이 없고 장애가 없으며, 능소도 없고 방소(方所)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얻고 잃음도 없느니라.

無心者는 無一切心也니 如如之體가 內如木石하야 不動不搖하며 外如虛空하야 不塞不碍하야 無能所無方所하며 無相貌無得失이니라. [傳心法要]


무심의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심을 얻으려면 어느 지위에서 어떻게 얻게 되는가.


어떤 사람은 법문을 듣고 한 생각 동안에 무심을 얻고 어떤 사람은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에 이르러 마침내 무심을 얻습니다. …… 한 생각 동안에 얻는 사람과 십지를 거쳐서 얻는 사람과는 공용(功用)이 같아서 다시 깊고 얕음이 없으니, 다만 겁(劫)을 지나도록 공연히 심신만 수고롭게 할 뿐이다.

有聞法하고 一念에 便得無心者하며 有至十信十住十行十廻向 乃得無心者하나니 …… 一念而得과 與十地而得者로 功用이 恰齊하야 更無深淺이요 祗是歷劫枉受辛勤耳니라. [傳心法要]


누구든지 무심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바로 가는 길이 있으니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고 헛고생을 하지 않고 바로 깨치는 길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황벽스님의 말씀입니다.


망념이 나지 아니함이 선(禪)이요 앉아서 본성을 보는 것이 정(定)이다. 본성이란 너의 무생심(無生心)이며 정이란 경계를 대함에 무심하여 팔풍(八風)에 움직이지 아니함이다. 만약 이렇게 정을 얻은 사람은 범부일지라도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

妄念不生이 爲禪이요 坐見本性이 爲定이니 本性者는 是汝無生心이라 定者는 對境無心하야 八風에 不能動하나니 …… 若得如是定者는 雖是凡夫나 卽入佛位니라. [頓悟入道要門]


일체처에 무심이 즉 무념이니 무념을 얻었을 때에 자연히 해탈하느니라.

一切處無心이 卽是無念也니 得無念時에 自然解脫이니라. [頓悟入道要門]


일체처에 무심하면 즉 열반에 들어 무생법인을 깨치니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라 하며 다툼 없음이라 하며, 또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한다. 어떤 까닭이냐? 필경 청정하여 나와 남이 없는 까닭에 애증이 일어나지 아니하니 이것이 두 성품이 공함이며 무소견(無所見)이니 즉 진여의 얻음이 없는 말씀이다.

一切處에 無心하면 卽入涅槃하야 證無生法忍하나니 亦名不二法門이며 亦名無諍이며 亦名一行三昧니라 何以故오 畢竟淸淨하야 無我人故로 不起愛憎하야 是二性空이며 是無所見이니 卽是眞如無得之辯이니라. [頓悟入道要門]


무념을 얻은 사람은 자연히 모든 부처님 지견(知見)에 들어가니, 이런 법을 얻은 사람은 즉 불장(佛藏)이며, 법장(法藏)이라 한다.

得無念者는 自然得入諸佛知見이니 得如是者는 卽名佛藏이며 亦名法藏이니라. [頓悟入道要門]


마음이 일어난다 해도 가히 지각할 만한 최초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최초의 모습을 안다 한 것은 무념을 말한다.

心起者는 無有初相可知 而言知初相者는 卽 謂無念이니라. [起信論]


부처님 지위가 무념이니라.

佛地가 無念이니라. [元曉疏, 賢首義記]


여래가 마음을 깨칠 때에 최초의 동상(動相)이 본래 깨끗함을 아니, 이런 까닭에 무념이라고 한다.

如來覺心之時에 知初動相이 本來淨이니 是故로 說言卽謂無念也니라. [元曉, 賢首疏]


제일의(第一義)를 세운다는 것은 오직 무여열반계(無餘涅槃界) 가운데를 말함이니 이것이 무심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이 계(界) 가운데에는 아뢰야식이 영원히 끊어졌기 때문이다.

第一義建立者는 謂唯無餘涅槃(佛地)界中이니 是無心地라 何以故오 於此界中에 阿賴耶識이 亦永滅故니라. [瑜伽論 一三]


제일의를 세운다는 것은 불교에 있어서 가장 구경도리(究竟道理)를 말합니다. 유식계통에 있어서는 무심을 무여열반이라 하고 정각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무생(無生)으로 생(生)을 삼고 머무르지 아니함을 머무름으로 삼는다.

佛은 無生으로 爲生하고 無住로 爲住니라. [攝論 十]


부처님의 무심은 구경각을 성취한 구경무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심이 도라고 말하지 말아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 관문이 사이해 있느니라.

莫道無心云是道하라 無心도 猶隔一重關이니라. [十玄詩]


이 무심이라는 것은 6식 경계와 7식 경계가 완전히 끊어진 칠지보살의 무상정(無相定)에서의 무심과 팔지보살 이상의 멸진정에서의 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멸진정의 무심도 제8 아뢰야 무기식을 의지한 것이지 진여본성을 본 구경무심은 아니니, 제8 아뢰야 무기식을 완전히 벗어나야 참다운 무심이지 그 이전의 무심은 거짓 무심입니다.